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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24 10:26
[한국사] 몽골인이 쓴 요사지리지가 쵝오? ㅋㅋㅋ
 글쓴이 : 칼리S
조회 : 3,701  

 솔직히 이런 논쟁하는 거 자체가 시간낭비이긴 한데, 여기 게시판에서 생쇼를 하는 인간들 보면 요사지리지가 무슨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착각하는거 같아서 어이가 없다.


 전혀 관련도 없는 몽골인 놈이 원나라 시대에 대충 자신들과 관련도 없는 나라들에 대해서 쓴걸 무슨 이게 정확한것인마냥 떠드는 거 보면 어이가 없다.


 정작 제대로 잘 편찬된 우리나라의 세종실록지리지나 당대 실학자 중에서 유명한 정약용 선생의 아방강역고는 아에 언급도 안한다. 아마 정약용 선생도, 이들에게는 식민사학자라고 매도될 거다 ㅋㅋㅋ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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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치맨 17-12-24 10:47
   
실제로 매도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요사지리지와 그걸 기반으로 한 유목민 사서 몇 개 빼고는

중국의 한서지리지부터 시작해서 단 한권의 사서도 낙랑 평양설을 의심한 바가 없으며,

이걸 체계적으로 정리한 분이 실학자인 정약용 선생님이지요.
     
꼬마러브 17-12-24 11:27
   
중국의 한서지리지부터 시작해서 단 한권의 사서도 낙랑 평양설을 의심한 바가 없으며,

- 그 사서 기록을 제시해 주세요.
          
타이치맨 17-12-24 11:33
   
난독증이네요. 요사지리지와 그걸 기반으로 한 몇 권 외는 다 낙랑 평양설이라고요... 생각 좀 하시길
               
꼬마러브 17-12-24 11:34
   
그 '다'를 제시하라고요. 정사 한 편이라도 읽으신 적 있어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세뇌를 당하여 사람을 매도합니까?
꼬마러브 17-12-24 11:16
   
이런식으로 내편 네편 갈라서, 한쪽은 신처럼 우상화하고 한쪽은 벌레처럼 매도하는 모습이 주류사학의 본질이죠. 토론게시판에 근거가 있는 토론을 할 생각은 하등 없으며, 오로지 상대방을 비하 - 선동하는데만 특화되어 있고요. 하긴 애초에 주장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 살 길은 그것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칼리S 17-12-24 11:28
   
반대 아닌가요?

오히려 저렇게 확실한 사서들을 읽고 제대로 된 역사를 인식하는 주류사학을 식민사학으로 매도하면서 토론을 한다고요?

주장에 근거가 빈약한 건 유사사학자들이지 주류사학이 아닙니다.
          
꼬마러브 17-12-24 11:30
   
그 사서 기록을 제시해 달라고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칼리S 17-12-24 11:36
   
세종실록지리지와 아방강역고 위에 써 있자나요.

난독증이세요?

설마 위 사서들이 요사지리지보다 못할까요 ㅋㅋㅋ.
                    
꼬마러브 17-12-24 11:38
   
세종실록지리지와 아방강역고는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낙랑군이 설치되고 나서 1500여년이 지난 기록들입니다. 역사학을 배우면 가장 처음에 사료에 대해서 배우지 않나요? 낙랑군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있어서 님이 언급하신 사서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요?

낙랑군 위치를 비정하는데에 가장 가치가 높은 사서는, 낙랑군이 존재했던 당시대의 1차사료입니다. 이건 제가 우긴다거나 사료를 편취하는 게 아니라, 사료를 대하는 역사 태도의 문제에요.
                         
칼리S 17-12-24 11:44
   
세종실록지리지와 아방강역고 등이 그냥 나온게 아닙니다.

그 전의 사서를 다 참고하고, 그 지역의 역사를 모아 만든것입니다.

요사지리지같이 몽골인이 뜬금없이 우리의 역사를 적은게 더 정확하다고요? ㅋㅋㅋ.

진짜 당신같은 분들은 일본서기를 삼국사기보다 더 신뢰하겠군요? 글쵸? ㅋㅋㅋ
                         
꼬마러브 17-12-24 11:53
   
그럼 다른 기록 반박해주세요. 다 반박하시면 다른 사서 기록 가져올게요. 밑에 광명좌사자님과 토론했는데, 그분이 모두 반박해주시지는 않아서요.

그리고 『요사』는 중국 25 정사 중 하나인데요.

https://ehean77.blog.me/220400767879

원나라 때에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를
" 뜬금없는 몽골인이 적은 역사"
라고 말하는 건 너무 무책임하지 않나요.
     
타이치맨 17-12-24 11:30
   
근거는 유적 말고도 <요사지리지> 외의 거의 모든 사서가 낙랑 평양설이라고 얘기했는데
독해력이 딸리시는 듯......
실학자 중 요동설 주장하신 분이 이익 말고 있나요? 거란족의 후손들이야 말로 근거도 없이
남을 욕하는게 장기 아닙니까? 누가 요동설 자체를 비난하나요? 북한의 요동설을 누가 비난합니까? 그거 잘못되었다고 비판할 뿐이지. 평양설 주장을 매국노처럼 욕하는게 너거들 거란족 후예
 쓰레기 집단이자나요....
          
꼬마러브 17-12-24 11:31
   
님이 말씀하시는 거의 모든 사서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데요.

요동설은 이익 선생도 그렇고 박지원 선생도 주장했습니다. 다만, 당시는 지금보다 사서를 접하기가 제한적이었으며, 영토가 한반도 안으로 국한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애초에 현재 주류사학계에서 주장하는 낙랑군 평양설은, 당시 실학자들이 주장하던 낙랑군 평양설과는 근거가 다르잖아요.
               
타이치맨 17-12-24 11:38
   
아... 박지원 선생도 계셨군요. 한서지리지부터 시작해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거의 모든 사서가 낙랑 평양설을 지지합니다. 요사 말고 그외에 요동설 지지하는 사서 가져와 보세요. 요사가 왜 문제인지는 명백한 것이고.
그리고 지금은 영토가 어디 만주까지 뻗었나요? 오히려 평양부터 만주까지 더 자유롭게 다니던게 조선시대입니다. 사기치지 마세요.
                    
꼬마러브 17-12-24 11:50
   
<사기> 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또 수경에 전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통전-고구려전>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한다. 지금 장성의 동쪽 끝은 요수를 넘어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진서지리지>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1)朝鮮縣 - 周封箕子地,...4)遂城縣- 秦築長成之所起

낙랑군, 한나라에서 설치하였다. 6개의 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3700이다.
1) 조선현,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 2,3 생략 4) 수성현 -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진나라의 만리장성 갈석산이 낙랑군에서 시작하는데요.

갈석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62363&cid=49239&categoryId=49239

-갈석산(碣石山)은 북경(北京) 근처의 하북성 창려현,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위치한 산이다.-
                    
꼬마러브 17-12-24 11:50
   
『후한서』 최인 열전

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

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낙랑군이 설치되어 있던 당시대의 기록인 『후한서』에서는 낙랑군이 요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Marauder 17-12-24 11:35
   
그때의 평양과 지금의 평양이 같다는 보장은 없고 요사지리지에서는 그 평양의 위치가 요동에 있다는것 빼고는 다 같죠. 그외에 평양이 한반도에있었다고 비정하는 사서는 없는걸로 알구요.(있다면 수백년 이상 지난 고려나 조선시대 사서들) 그런데 어떻게 그게 확실한 증거가 되는건가요? 근데 이 말만해도 수없이 많이들었을텐데 왜 같은말만 하시는건지...
               
칼리S 17-12-24 11:37
   
세종실록지리지나 아방강역고가 요사지리지보다 훨씬 정확한데 이건 사서가 아닌가보죠?
                    
Marauder 17-12-24 12:36
   
괄호안에 써놨는데요
               
타이치맨 17-12-24 11:40
   
그런 논리면 그 요동이 이 요동이 아니라는 생각은 안합니까?  삼국사기가 요사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걸로 기억하는데요. 한서지리지가 가장 앞선 기록일 것이고....
이 말도 수없이 하고 있는데 왜 요사말고 다른 자료 못내놓는지
                    
꼬마러브 17-12-24 11:45
   
http://dogmas.tistory.com/entry/%ED%95%9C%EC%84%9C-%EC%A7%80%EB%A6%AC%EC%A7%80-%EC%9C%A0%EC%A3%BC-%EB%82%99%EB%9E%91%EA%B5%B0

님이 말씀하시는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낙랑군은 유주에 속해있는데요.

유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473574&cid=51778&categoryId=51778

-한(漢) 시대에 지금의 허베이(하북) 성에 두었던 주.-

설마 하북성부터 한반도 북부까지 한 주였다고 이야기 하시지는 않겠죠.

그리고 한서지리지 어디에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나요.
                         
칼리S 17-12-24 11:51
   
세종실록 지리지나 좀 읽고 오세요.

한사군을 두고 유주에 귀속시켰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한나라 13주 중에 익주나 형주 양주 크기 보면 유주가 큰건 아닙니다 ㅋㅋㅋ 진짜 뭘 모르시는 분인데, 일일이 답할려니 답이 없군요? ㅋㅋㅋ
                         
꼬마러브 17-12-24 11:56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전의 기록입니다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안제 영초 5년 부여왕 시는 보병과 기병 7-8000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침입하여 백성들과 관리를 죽였다

- 부여는 어떻게 낙랑군을 공격했죠.
                    
꼬마러브 17-12-24 11:51
   
삼국사기 태조왕기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님이 말씀하시는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해서 대방과 낙랑군을 노략질했다고 나와있는데요.
                         
칼리S 17-12-24 12:03
   
삼국사기 신라 혁거세 기사 보면 낙랑과 신라가 다툼니다. 낙랑이 요동에서 날라왔나보죠? ㅋㅋㅋ
                         
꼬마러브 17-12-24 12:04
   
북한사학계에서는 그걸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라고 말하는데요.

『삼국사기』에서도 평양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낙랑은, 중국의 일개 군현이 아니라 - 낙랑국, 낙랑왕이라고 나오는데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리오?”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삼국사기』 기림이사금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樂浪帶方兩國歸服

애초에 평양에 위치한 낙랑이, 낙랑국이 아니라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이었다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뭐가 되는 거죠? 환빠가 만들어낸 역사 창작물인가요?

그리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나오는 낙랑vs백제 나 낙랑vs신라 이야기는
중국사서와 '교차검증'이 되지 않습니다.

중국사서에서 '백제'라는 이름을 가진 국가가 처음 등장하는 시기가 수백년 후의 근초고왕 때에요. 아마 『진서』일 거예요. 그 이전에는 없어요.

그러면 님이 말씀하시는 신라와 다퉜다는 낙랑은, 중국과 별개의 낙랑국으로 보아야 타당한 거죠.
                    
Marauder 17-12-24 12:24
   
요동이 지금보다 서쪽에 있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현 평양이 지금의 요동이거나 요나라가 지금의 평양까지 접수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적이 없군요. (물론 요동군에 속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습니다만)
요동이 지금보다 서쪽에있었다면 이쪽이야기에 유리하기만할뿐 불리할건 없죠.
          
올바름 17-12-29 02:25
   
거란족의 후예라니 첨 들어보는 별칭이네요 우리나라 사람은 그런표현 안하는데 님은 어느별에서 왔나요? 요새 오별국에서 한국을 지칭하는 트렌든가요?
당신들 칼리랑 타이치는 토론 기본자세가 글러먹었네요 감정을 자제하고 논리와 논거로 상대해야하는데 논거를 적어넣어야 할 자리에 상대방을 비꼬며 비하하는 표현을 채워넣는군요 상대방을 기분상하고 진리게 해서 나가떨어지게 만드는게 전략인가요? 본인 양심에도 이런 자신이 한심하지 않아요?
존경하는 꼬마러브님.. 이런 기본도 안된 놈들을 평정심을 유지하며 진지하게 상대해주느라 정말 애쓰십니다 러브님의 토론에 대한 진정성과 높은 평정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꼬마러브 17-12-24 12:54
   
"진짜 당신같은 분들은 일본서기를 삼국사기보다 더 신뢰하겠군요? 글쵸? ㅋㅋㅋ"

- 『삼국사기』초기기록을 불신하고, 『일본서기』기록에 따라 침미다례 같은 국가를 전라남도에 비정하는 쪽이, 이런 말을 하니 정말 웃깁니다.
도배시러 17-12-24 13:06
   
원문은 안보고 소설을 읽고서 소설역사를 말하네...
주류,재야 모두 원문은 안보여주고 소설 위주로 제시하는거 한두번 보나 ?
감방친구 17-12-24 13:10
   
고구려 도읍의 변천 고찰

A 동명성왕
ㅡ  졸본(卒本)/흘승골성(紇升骨城)/비류수(沸流水)

B 유리왕 22년 (서기 3)
ㅡ 국내성(國內城)/위나암성(尉那巖城)
ㅡ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이곳이 불이성이라 함

C 산상왕 13년(서기 209)
ㅡ 환도성(丸都城)

D 동천왕 21년(서기 247)
평양성(平壤城)

E 고국원왕 12년(서기 342)
ㅡ 환도성(丸都城)
ㅡ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이곳을 안시성이라 함

F 고국원왕 13년(서기 343)
평양 동쪽 황성(平壤東黃城)

G 장수왕 15년(서기 427)
평양성(平壤城)

H 평원왕 28년(서기 586)
ㅡ 장안성(長安城)

ㅡㅡㅡㅡㅡㅡㅡ 출전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A
학계 통설에서 지금의 중국 요령성(遼寧省) 환인(桓仁)지역에 비정하고 있다. 흘승골성은 오녀산성에 비정됐으나 고고연구 결과 서기 3세기 이전의 유물/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이 비정은 재고 되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견해(13 세기 고려)에서는 요나라 동경, 즉 현 요녕성 요양시 서쪽 지역에 비정한 바 있다.

B
학계 통설에서는 현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 통구성(通溝城)에 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견해(13 세기 고려)에서는 국내성(國內城)을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불이성(不而城)이라 한 데에서 낙랑군 불이현을 국내성지로 비정하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고구려가 현도군, 낙랑군 등 위만조선의 옛땅, 즉 한군현에서 개국했다고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보고 있다

B와 C
학계 통설에서는 국내성과 환도성이 가까운 거리 (집안과 환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삼국사기 편찬자들 역시 두 성이 가까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D
위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무너져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E와 F
평양성을 증축하다가 환도성으로 옮겼으나 모용선비의 침입으로 다시 평양의 동쪽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학계 통설과 삼국사기 편찬자 모두 '평양의 동쪽 황성'이 아니라 '평양의 동황성'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지금의 평양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양 서북한 고정론'은 역시 학계 통설인 '낙랑군 서북한설'과 부딪혀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진다

F
平壤東黃城은
평양의 동황성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게 아니라
평양의 동쪽 황성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 다음의 두 기사를 비교해 보면 이는 여실하다

고국원왕 13년(서기 343)
移居平壤東黃城
1)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도읍)를 옮겼다
2) 평양의 동쪽 황성으로 거처(도읍)를 옮겼다

안장왕 11년(서기 529)
王畋於黃城之東
ㅡ 왕이 황성의 동쪽에서 사냥하였다

G
학계 통설에서는 지금의 북한 평양에 비정하고 있으며 삼국사기 편찬자들(13세기 고려)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그 지역을 200여 년 통치한 요나라의 요사 지리지에서는
요나라 동경, 즉 현 중국 요녕성 요양시가 장수왕의 평양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ㅡ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G와 H

학계 통설과 삼국사기 편찬자들(13세기 고려), 그리고 요사 지리지는 두 곳을 같은 곳으로 보고 있다

요사 지리지에서는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라고 하였으며

학계 통설에서는
장수왕의 평양성은 현 북한 평양의 동북쪽에
있는 대성산 밑의 안학궁 (安鶴宮) 터로, 장안성은 현 평양시로 비정하고 있다.

그밖의 주서, 수서, 신당서, 삼국사기(보장왕/문무왕) 등의 여러 사서에서 장안성을 평양성의 이칭으로 보거나 당시 고구려 도읍을 평양/평양성으로 칭하고 있어서

평원왕~보장왕의 장안성이 평양/평양성으로 불리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평양이라는 지명은 여러곳에 등장하는 바 평평하고 넓은 땅(난벌)을 이르는 보통명사일 가능성이 충분하여 장수왕의 평양성이 평원왕의 장안성과 그 위치가 같음을 단정할 수 없다

평양은 이밖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 고구려 북한산군
ㅡ 한산
ㅡ 한성
ㅡ 한양군
ㅡ 남평양
이상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진흥왕 창녕비 등

2. 신라 평양
ㅡ 실성왕 , 의희(義熙) 9년 계축(서기 413)에 평양주(平壤州)의 큰 다리가 완성되었다 (삼국유사)
ㅡ 실성이사금 12 년 (413) 새로 평양주(平壤州)에 큰 다리를 세웠다 (삼국사기)

3. 발해 중경현덕부
ㅡ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라고도 한다.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4. 한나라 우북평군 평명현
ㅡ 우북평군(右北平郡) 평명현(平明縣)을 왕망은 평양(平陽)이라 했다. (한서 지리지)


1과 2의 경우 같은 지역인 것으로 보인다 2의 삼국유사 기록에 단 일연의 주석에는 恐南平壤也 今楊州, 즉 "아마도 남평양인데 지금의 양주이다"라고 돼 있으니

실성왕 시기에 지금의 한양/광주 지역에 신라가 진출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1의 기록은 2의 사실이 1의 일부 사실에 간섭해 1의 기록으로 하여금 '평양/남평양'이라는 지명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한산/한성을 평양이라 하는 것에서 두 이름의 뜻이 통함을 볼 수 있다

큰 강을 뜻하는 아리수가 한수를 거쳐 한강으로 정착된 예에서 보듯 한산/한강은 큰 땅, 넓은 땅을 뜻하며 이것이 평양의 뜻과 통함을 보인다

한편 3의 경우 학계 통설에서는 현 중국 길림성(吉林省)화룡현(和龍縣) 북고성촌(北古城村) 남동쪽으로 비정하고 있다.

한 나라의 도읍지는
ㅡ 교통이 사통팔달 하고
ㅡ 물산과 인구가 풍부하게 모여 번성한 지역의 중심에 있어서 그 이득을 세금으로 거두어 들이기 수월하고
ㅡ 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넓은 땅으로 삼았다

고구려의 도읍은 한군현을 몰아내고
중국계 왕조 및 선비족과 투쟁하며 저들을 제압한 고구려 성장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요수, 압록수, 살수, 패수 및 험준한 산악에 자리한 산성으로 겹겹이 보호된 곳이 바로 고구려 평양이었다

지금의 요동은 요나라 때까지 번성한 곳이며
철광, 금광 등이 산재해 요나라의 국부를 풍족케 해주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고구려의 역대 왕들은 졸본에 수시로 행차해 동명성왕 신사에 참배하였으므로

평양을 비롯한 여러  도읍의 위치는 졸본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고구려의 평양을 그 멸망 후에 신라가 차지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거니와

애초 당나라와의 협상에서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을 신라가 갖는 것으로 약속하였고

평양은 당나라 차지가 되었다가 나중에 발해 차지가 되었으며

신라가 복속한 한주, 삭주, 하슬라주에 북한산군은 있으나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에 대한 언급은, 또 지명은 그 비슷한 것도
없다는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왕건의 평양이 애초에 고구려 수도 평양이었으면 그렇게 버려진 것도 이상하거니와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 남쪽 영토인 3개의 주에서 이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는 것은 괴상할 정도이다

즉 이러한 사실 정황으로 볼 때에
왕건의 서경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이 아닌 것이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0396&sca=&sfl=mb_id%2C1&stx=cellmate&page=3
감방친구 17-12-24 13:18
   
서경을 키워드로 본 고려 초기의 북계

고려사에서 서경을 중심으로 하여 왕건부터 정종까지 살펴봤습니다

고려는 발해 멸망 후 서경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서경이라 후에 이름 붙인 평양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왕건이 황폐하게 버려진 평양을 서경이라 이름 붙이고 성을 짓고 사민을 하여 개척합니다
이 국가적 사업은 그 후대에까지 계속되는데요 정종 역시 서경에 크게 토목사업을 벌이다가 일찍 죽자 노동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기뻐 날뛰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고려 초기의 평양은 국가적 노력이 투입될 만큼 중요한 곳이었고 또 그만큼 처음에는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신라가 935 년에 자진 복속되고
후백제가 936 년에 멸망하는데
평양은 태조 원년인 918 년부터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고려가 발해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사실은 태조 8 년 925 년 기사에도 나오는 만큼 당연한 사실인데요
우리는 익히 대동강을 경계로 신라와 당이 고구려를 나누어 가진 만큼 후고구려, 즉 고려 역시 초기의 북계가 대동강 이남이었으리라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당나라의 도호부가 북쪽으로 옮겨간 사실이나
이후 당나라가 요동 이동, 이남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한 사실 등에서

과연 신라가 이러한 정황 속에서 대동강 이남만 먹고 말았을까 하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고 봅니다

또 발해가 멸망하기 전부터 고려의 북계에서는 흑수말갈이 활동을 하며 귀부해 오기도 하고 거란이 활동하며 조공품을 보내오기도(922년) 합니다

즉 발해가 멸망하기 전부터 고려 북계와 접한 요동, 남만주 일원에 대하여 발해의 통제력이 이미 상실돼 무정부 상태와 다름 없이 돼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상황에서 고려는 남쪽으로 후백제를 제압하는 것에 힘을 씀과 동시에 북진을 경주했다고 보여집니다

발해 유민의 고려 망명은 925 년을 시작으로 근 2 세기 동안 계속됩니다
이러한 발해 유민의 대거, 지속 망명은 고려의 정통성과 함께 북진 정책에 명분을 더해 주었으리라 보입니다

발해 말기와 멸망 직후에 흑수말갈을 중심한 여진족이 요동부터 남만주에 이르는 지역에서 횡으로 퍼져 활동하면서 거란과 고려의 직접 접촉의 완충역할을 하였고

이 상황에서 광종 때에 '생여진을 몰아내고 요나라 동경부터 안북에 이르는 수백리'를 개척'하는 북방 영토 획득이 가능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고려의 북방 영토는 금나라가 들어선 이후로 요동 남단으로 축소가 되며 이러한 상황은 서긍의 고려도경에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ㅡㅡㅡㅡㅡㅡㅡ

926 년 발해 멸망
935 년 신라 복속
936 년 후백제 멸망

고려사 기록 중 서경을 키워드로 한 초기 기록 요약 발췌

<918 년 9 월 (음) 태조 1 년>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지(諭旨)를 내렸다.
평양(平壤)은 옛 도읍으로 황폐한 지 오래지만 터는 그대로 남아있다. 숲이 울창해 번인(蕃人 : 女眞族)들이 그 곳에서 사냥질하느라 옮겨다니면서 변경 고을을 침략해 큰 피해를 끼치고 있다. 백성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국경의 방어태세를 튼튼히 해 후대에 길이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드디어 평양을 대도호(大都護)로 삼고는 사촌 동생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열평(列評)을 보내 수비하게 했다.

<919 년 10월 (음) 태조 2 년>

평양(平壤)에 성을 쌓았다.

<921년 태조 4 년>

2 월ㆍ4 월 (음)
흑수 말갈 등의 귀순

10월 20일(음)
왕이 서경에 행차하다   

<922년 미상>

고관의 가족을 서경으로 이주시키고 내성을 쌓다   

이 해에 대승(大丞) 질영(質榮)과 행파(行波) 등의 가족[父兄子弟]과 여러 군현(郡縣)의 양가(良家) 자제를 이주시켜 서경(西京)을 충실하게 하였다.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새로 관부와 관리를 두었으며 비로소 재성(在城)을 쌓았다. 〈왕이〉 직접 아선성(牙善城) 백성이 거주지를 정하였다.


<925년 태조 8 년>

3월 (음)
왕이 서경(西京)으로 행차했다.


9월 (음)
발해(渤海)의 장군인 신덕(申德) 등 5백 명이 투항해왔다.
발해의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과 대균로(大均老), 사정(司政) 대원균(大元均), 공부경(工部卿) 대복모(大福暮), 좌우위(左右衛) 장군(將軍) 대심리(大審理) 등이 1백호를 거느리고 귀부해왔다.


12 월 (음)
발해의 좌수위(左首衛) 소장(小將)인 모두간(冒豆干)과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등이 백성 1천호를 거느리고 귀부해왔다.


<926년 12월 (음)>

왕이 서경에 가서 초제를 지내다   

<929년 4월 6일(음)>

왕이 서경의 주진을 순시하다

<930년 5월 29일(음)>

왕이 서경에 행차하다   

<930년 6월 8일(음)>

왕이 귀경하다   

<930년 12월 1일(음) 태조 13 년>

서경에 학교를 열다

겨울 12월 경인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학교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931년 11월 28일(음)>

왕이 서경 및 주진을 순시하다   

<932년 5월 3일(음)>

신하들을 경계하는 유지를 내리다

<934년 1월 (음) 태조 17 년>

왕이 서경에 가 북방 진들을 순시하다

<934년 미상>

서경에 재해가 발생하다   

<935년 9월 2일(음) 태조 18 년>

왕이 황주와 해주를 순시하다

<938년 7월 (음) 태조 21 년>

서경에 나성을 쌓다

<943년 4월 (음) 태조 26 년>

왕이 훈요10조를 내리다

다섯째, 내가 삼한(三韓) 산천의 음우(陰佑)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서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뿌리가 되고 대업을 만대(萬代)에 전할 땅이다. 마땅히 춘하추동 네 계절의 중간 달[四仲月]에 왕은 그 곳에 가서 100일이 넘도록 체류함으로써 〈나라의〉 안녕(安寧)에 이르도록 하라.


<947년 미상 정종 2 년>

서경에 왕성을 쌓다

<949년 3월 13일(음) 정종 4 년>

왕이 죽자 역부들이 기뻐하다

3월 병진 왕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동복아우 왕소(王昭)를 불러 왕위를 넘기고 제석원(帝釋院)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훙서하니, 왕위에 있은 지 4년이며 나이는 27세였다. 왕의 성품이 부처를 좋아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많아서, 처음에 도참설(圖讖說)을 따라 도읍(都邑)을 서경(西京)으로 옮기기로 결의하고 장정[丁夫]을 징발하여 시중(侍中) 권직(權直)에게 궁궐(宮闕)을 건축하게 하였다. 노역(勞役)이 그치지 않고 또 개경(開京)의 민호(民戶)를 뽑아서 〈서경을〉 채웠으므로, 많은 백성이 따르지 않고 원망과 비방이 들끓더니 왕이 훙서하였다는 말이 들리자 역부(役夫)들이 기뻐 날뛰었다.

만약에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요동에 있었거나 옮겨갔다 다시 옮겨온 것이라면

ㅡ 요동의 어디로 비정될 수 있는가?
ㅡ 왕건 때부터 근 1 세기 동안 조성된 도시를 그렇게 쉽게 옮길 수 있는가?

晉義熙後, 其王高璉始居平瓖城.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至王建, 以平壤爲西京.

진(晉) 의희(義熙) 연간 후반에 그 왕 고련(高璉)이 처음으로 평양성(平壤城)에 머물렀다[居]. 당(唐)이 고려(高麗)를 정벌할 때 평양(平壤)을 공략하여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리 되는 데에 있었는데, 평양의 옛터가 아니었다. 왕건(王建)에 이르러 평양이 서경(西京)이 되었다.

ㅡㅡㅡㅡㅡ

일부 비주류 사학계에서는 위 문장의 해석을
ㅡ 왕건의 평양은 장수왕의 평양이 아니다
로 해석하는데
사실 이 해석은 아무리 비주류의 편을 들으려 해도 비합리적으로 생각됩니다. 즉 문장 자체의 해석은 위의 해석이 합리적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원사 지리지의 이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ㅡ 장수왕의 평양은 압록수 위쪽에 있었다(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는 것이죠
ㅡ 즉 지금의 평양은 장수왕의 평양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여기에서 추론적으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1) 왕건의 고려가 장수왕의 평양을 수복했는가?
2) 그게 아니면 장수왕의 평양이 아닌 곳을 단지 고려의 북계에 위치한, 고구려의 옛 성터라 하여 평양이라 이름하고 후에 서경으로 삼은 것인가?

3) 평양이 서울이라는 뜻의 말이라 한다면 평양이 여러 곳일 수 있지 않은가?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
저는 고려의 서경이 고구려의 남경이나 한성일 수도 있거나 고구려 부흥군의 중심지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하는 가정을 해보는 것이죠

A. 원사 지리지의 해당 기록은

1) 왕건의 평양은 장수왕의 평양이 아니다(X)

2) 장수왕의 평양은 압록수 동남쪽 천여 리에 있지 않았다(0)

그렇다면 2)에 대해서 어떻게 추론 할 수 있는가?

B. 장수왕의 평양은 어디인가? 압록수 동남쪽 천여 리에 있지는 않으나 압록수 이남에 없었다는 말은 아니므로 지금의 평양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는 문장에서 서술하는 사건의 흐름을 봐야 한다

ㄱㅡ당이 고려 정벌
ㄴㅡ평양이 함락
ㄷㅡ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 감
ㄹㅡ압록수 동남쪽 천여 리 되는 곳에 (그 나라가) 있었는데
ㅁㅡ그곳은 평양이 있던 옛 지역이 아니다

원사 지리지 기자가 고려를 고구려의 연속성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면
ㄷ 부터 고려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장수왕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고 압록수 동남 천여 리가 지금의 개성을 가리키는 말이라 한다면
ㄴ의 서술과 맞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개성은 지금 평양의 동쪽에 위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성은 평양의 남쪽이다

또한 서술 태도에 있어서 지금의 평양에서 지금의 개성으로 옮겨갔다 한다면 구지 압록수를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갔다'와 '옛 평양이 있던 곳이 아니다' 사이에 삽입할 필요가 있을까?



요동(장수왕의 평양) 함락 ㅡ 동쪽으로 옮겨감ㅡ 압록수 ㅡ 동남쪽 천 여리(개성)



장수왕 평양 ㅡㅡㅡㅡ 동쪽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압록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압록수 동남쪽 천여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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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2-24 13:21
   
삼국사기와 신당서 교차에 의한 고구려 평양 고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보장왕, 그리고 그 이후의 고구려 부흥운동 기록까지
그리고 신당서 지리지를 다시 면밀히 읽었습니다

이 기록들은 압록강의 위치를 고찰하며 11 월 초에 살펴봤던 것들인데 이번에 서경의 위치를 탐구하면서 활용할수 있겠다 싶어서 다시 읽어봤습니다

612 년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시에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실은 수백 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패수(浿水)로부터 들어오니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습니다
내호아는 고구려의 전략에 말려들어서 설레발 치다가 실컷 털리고 찌글어지죠.

그 사이 수나라 육군이 압록강 서쪽에 총 집결합니다.
우문술은 압록강을 건너서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를 다시 건넙니다. 그런 뒤에 평양성에서 30 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칩니다

학계 통설에서 패수는 대동강, 살수는 청천강에 비정돼 있습니다.

한번 지도를 펼쳐서 보세요

A
수나라 육군 ㅣ압록강 ㅣ살수 ㅣ 평양
(서) --------------------------> (동)

우문술은 결국 살수에서 그 유명한 살수대첩의 희생양이 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군사들이 그곳에서 압록강까지 450 리를 도주합니다

B
압록강-----------------살수
(서) -----450 리-----(동)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645 년 기사에는 당 태종이 군사들과 전략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고구려가 두려워하고 있는 틈을 타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빼앗고,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일에 달렸"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방위는 알 수 없으나

C
오골성 ㅣ 압록강 ㅣ 평양

으로 오골성이 평양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D
압록강 ㅣ 살수 ㅣ 평양성 ㅣ 패수

또 648 년 기록에는 "당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에게 우리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서 박작성(泊灼城)의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치"고 공격했다가 실패했다고 돼 있습니다

이 기록상으로도 박작성은 압록강의 북쪽에 있음을 알 우 있습니다

E
오골성과 박작성은 평양성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B에서 살수~압록강 거리가 450 리라 돼 있는 것만 빼면 압록강이 평양성과 멀지 않은 것처럼 묘사돼 있습니다

B의 기록에서는 우문술의 패잔병들이 하룻동안 뛰어서 450리를 도주했다고 돼 있습니다 참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신당서 지리지 가탐도리기의 기록을 볼 텐데요
이 기록은 사신, 상인 등의 실측 자료입니다

이 기록에서
안동도호부(요양)를 기준으로

F
평양은 동남쪽 800 리

G
박작성은 남쪽 700리

라 돼 있습니다

이 기록 대로라면
박작성과 평양성은 겨우 100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평양이 여러 곳이었다는 가정을 염두하더라도 당나라 시대의 평양은 박작성과 100리(당척 기준)밖에 안 되는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압록강은, 또 평양은 어디였던 걸까요?

고구려 박작성이 지금 비정된 곳이 아닐 것이라는 기사를 접한 일이 있어서 다시 찾아봤는데 찾을 수가 없네요

아마튼 삼국사기와 신당서 지리지를 검토했을 때에 당시의 고구려 평양은 지금의 압록강을 기준으로 했을 때 지금의 평양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압록강의 위치 역시 지금의 압록강이 아닐 수 있다는 심증을 강화시켜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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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2-24 13:25
   
삼국사기 지리지로 본 평양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 평양부에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보장왕 27년(668)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결국 이 지역은 신라로 편입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 지역은 신라로 편입되었다."라고 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편과 신라의 삭주, 한주, 하슬라주에는 평양을 신라로 편입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지리지 고구려 편에서 평양의 위치 비정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고구려 평양이 고려의 서경이라는 쪽으로 논리를 몰아가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고려사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상에서 신라가 편입한 고구려 영토에는 평양이 없고 고구려의 대부분의 땅이 북조(北朝), 즉 발해의 경내에 있었기에 알기 어렵다 진술하고 있으므로

왕건의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기에 그 경내에 고구려의 평양이 없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 평양부의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보장왕 27년(668)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결국 이 지역은 신라로 편입되었다."는 진술이 삼국사기 지리지와의 교차검증을 통하여 신빙성이 제거되므로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의 진술에 신빙성이 더해진다고 할 수 있다. 요나라 동경요양부는 발해와 고구려 대부분의 영토를 총괄하는 행정지로, 요나라는 고구려를 이은 발해의 행정정보를 그대로 맞계승하여 그 땅을 직접 근 200 년을 통치하였다.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는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안장왕이 건설하고 평원왕이 도읍한 장안성에 대한 직접 진술은 없으나 지리적, 시기적으로 해당 지역에 대한 요사 지리지의 정보는 그 어느 사서보다 직접적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편에서 13 세기 사서 편찬자들이 고구려 평양의 위치를 고찰한 것과 그것을 논리 비약을 통하여 고려의 서경으로 연결하려한 노력의 정황을 살펴 보고 그것이 고려사 지리지에서 어떻게 강화됐는지 살펴보자


1.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고구려

『통전(通典)』에는 “주몽(朱蒙)이 한(漢)나라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동남방으로 나와서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성씨를 ‘고(高)’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기(古記)에는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홀승골성과 졸본은 같은 지방인 듯하다.

『한서지(漢書志)』에는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과의 거리가 3천6백 리이며 이에 속한 현으로써 무려(無慮)현이 있었으니 바로 『주례(周禮)』에 이른바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요(大遼) 때는 그 아래쪽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현도군(玄菟郡)은 낙양과 동북으로 4천 리 떨어져 있었고 이에 속한 현은 셋이다. 고구려가 그 중의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즉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과 졸본이란 지방은 아마도 한나라 현도군의 경내이고 대요국 동경의 서쪽인 듯하며, 『한서지』에 이른바 현도군의 속현으로써의 고구려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옛날 대요가 멸망하기 이전에 요제가 연경(燕京)에 있었으므로 우리 사신들이 동경(東京)을 지나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 사이에 의주에 당도하여 연계(燕薊)로 향하였기 때문에 『한서지』의 기록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40년이 지나서 유류왕(孺留王) 22년(서기 3)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혹은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 하고 혹은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로 옮겼다.

『한서(漢書)』에는 “낙랑군(樂浪郡)에 속한 현으로 불이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총장(總章) 2년(서기 669)에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 칙명에 의하여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와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다. 그 목록에는 “압록(鴨淥)강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열 하나인데 그 중 하나가 국내성이며, 평양(平壤)으로부터 국내성까지는 17개의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성도 역시 북조(北朝) 경내에 있었으나 다만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없을 뿐이다.

고구려는 국내성에 도읍한 지 425년이 지난 장수왕(長壽王) 15년(서기 427)에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평양에서 156년이 지난 평원왕(平原王) 28년(서기 586)에 장안성(長安城)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장안성에서 83년이 지난 보장왕(寶臧王) 27년(서기 668)에 멸망하였다.[옛 사람들의 기록에는 시조 주몽으로부터 보장왕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가 이와 같이 분명하고 상세하다. 그러나 혹자는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서기 343)에 평양 동쪽 황성(黃城)으로 옮겼는데 그 성은 지금 서경의 동쪽 목멱산(木覓山) 가운데 있었다.”고 말하니 어느 말이 옳은지를 알 수 없다.]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西京)인 듯하고 패수(浿水)는 바로 대동강(大同江)이다. 어떻게 이를 알 수 있는가?

『당서(唐書)』에는 “평양성은 한나라의 낙랑군으로서 산굽이를 따라 성을 둘러쌓았고 남으로 패수가 놓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한지』에는 “등주(登州)에서 동북쪽 바닷길로 나서서 남쪽으로 해변을 끼고 패강 어귀에 있는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 지방에 도달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수 양제(煬帝)의 동방정벌조서에는 “창해 방면 군사는 선박이 천 리에 뻗쳤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달리고 커다란 전함들은 구름같이 날아서 패강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에 다다랐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렇게 보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인 것이 명백하며 서경이 평양이라는 것도 또한 알 수 있다.

『당서』에는 “평양성도 장안이라고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기(古記)에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으니 두 성이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점점 동방의 패수 옆으로 이동하였다. 발해(渤海) 사람 무예(武藝)는 “옛날 고구려의 전성시대에는 군사 30만으로 당과 대적하였다.”고 말하였으니 고구려의 지세가 유리하고 군사가 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에 이르러 임금과 신하가 우매하고 포악하여 각자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자, 당이 다시 군사를 출동시키고 신라가 이를 도와 그들을 쳐서 평정했던 것이다. 그 지역의 대부분이 발해와 말갈로 편입되고 신라에서도 그 남쪽 지방을 차지하여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의 3주와 군현을 두어 아홉 주를 설치하였다.


2.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 평양부 (西京留守官 平壤府)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옛 도읍이다. 당뇨(唐堯) 무진년(戊辰年, 기원전 2333)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해 평양에 도읍하니 단군(檀君)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殷))나라를 정벌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다. 그 41대손 기준(箕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천여 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기준의 땅을 빼앗고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으로도 적으며 평양을 말함】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 그 손자 우거가 중국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한나라 무제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획정하면서 왕험(王險)을 낙랑군(樂浪郡)으로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보장왕 27년(668)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결국 이 지역은 신라로 편입되었다.

태조 원년(918)에 평양이 황폐하다하여 염주·백주·황주·해주·봉주의 백성을 이주시켜 민호를 채우고 대도호부로 삼았다가 얼마 후 서경(西京)으로 하였다. 광종 11년(960)에 서도(西都)로 명칭을 고쳤다. 성종 14년(995)에 서경유수(西京留守)를 칭하였다. 목종 원년(998)에 또 호경(鎬京)이라고 고쳤다. 문종 16년(1062)에 다시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이라 칭하면서 경기(京畿) 4도(道)를 설치했다. 숙종 7년(1102)에 문반(文班)·무반(武班)과 오부(五部)를 두었다.

인종 13년(1135)에 서경의 승려 묘청(妙淸)과 유참(柳旵),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서 군사를 보내 절령(岊嶺)을 통과하는 도로를 끊었다. 이에 원수 김부식(金富軾) 등에게 명하여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여 평정하였다. 이 때 유수(留守)·감군(監軍)·분사어사(分司御史) 외에는 관반(官班)을 모두 없앴다가 얼마 후 경기 4도(道)를 삭제하고 6개 현(縣)을 두었다.

원종 10년(1269)에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 최탄(崔坦)과 삼화현(三和縣)의 교위(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반란을 일으켜 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여러 성들을 바치며 몽고에 귀부했다. 몽고는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삼고 관리를 두었으며, 자비령(慈悲嶺(岊嶺))을 경계로 획정하였다.

충렬왕 16년(1290)에 원나라가 서경과 여러 성들을 돌려주므로 마침내 다시 서경유수관으로 하였다. 공민왕 18년(1369)에 만호부를 설치했다가 뒤에 평양부(平壤府)로 고쳤다.

대동강(大同江)이 있다.【곧 패강(浿江)으로 왕성강(王城江)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강의 하류는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된다】 대성산(大城山)이 있다.【구룡산(九龍山), 혹은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부른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평양성(平壤城)의 동북쪽에 노양산이 있다.”고 기록했는데, 바로 이 산을 일컬은 것이다. 산정에는 연못이 세 개가있다】. 옛 성터가 2개 있다.【하나는 기자(箕子) 때 쌓은 것으로서 성안을 정전제(井田制)를 써서 구획한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성종 때 쌓은 것이다】. 기자묘(箕子墓)가 있다.【부성(府城)의 북쪽 토산(土山) 위에 있다】.

동명왕묘(東明王墓)가 있다.【부(府)의 동남쪽 중화(中和)지역인 용산(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 진주묘(珍珠墓)라고 부른다. 또 인리방(仁里坊)에 동명왕의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절후에 맞추어 어압(御押)을 내려주어 제사를 지나게 했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도 역시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지금까지도 고을 사람들이 소원을 빌 일이 있으면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사당이라고 한다】. 을밀대(乙密臺)가 있다.【금수산(錦繡山) 정상에 위치하며, 그 아래 층층절벽 곁에 있는 영명사(永明寺)는 옛날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다. 그 안에 기린굴(麒麟窟)이 있고, 굴의 남쪽 백은탄(白銀灘)에는 바위가 조수(潮水)에 따라 드러났다가 잠겼다가 하는데 조천석(朝天石)이라 부른다.】. 속현이 4개이다.

ㅡ 하략 ㅡ

발해의 5경과 고구려의 졸본/흘승골성, 국내성 등은 모두 근세에 학자들 사이에 제론이 쟁쟁하다가 20 세기에 들어서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주도해 비정된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서경과 평양을 고찰하며 잡히는 윤곽은
고려시대의 서경은 지금의 평양이 맞다는 것과
고려시대의 서경은 고구려의 평양(장수왕의 평양이든 평원왕의 장안성이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이라는 명칭이 여러 곳에서 나오는 사실로 비출 때에 고려 서경 지역이 고구려 수도인 평양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평양으로 불리웠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삼국사기 지리지 그 어디에서도 그 비슷한 지명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지극히 낮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한나라 우북평군(右北平郡) 평명현(平明縣)을 왕망은 평양(平陽)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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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2-24 13:29
   
가탐도리기를 중심한 고구려 평양 위치 추적


애초에 저는 '登州東北海行'을 오해했습니다
이 것을 "등주에서 동북 방향 바닷길"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는 서북을 동북으로 잘못 적은 게 아니냐1), 동북이면 위치며 거리며 다 엉망이 되는데 실제로는 등주에서 연안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도는 바닷길이었을 것2)이고 이렇게 봐야 위치며 거리가 이치에 맞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서 1)은 틀리고 2)는 맞다는 것을 날밤을 새면서 확인을 했습니다

'登州東北海行'는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을 설명하기 위한 글의 첫 도입부입니다

즉 登州東北海行는  "등주에서 동북 방향 바닷길"이 아니라 "등주에서 동북(지역)으로 가는 바닷길"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죠

가탐도리기에서 우리와 관계된 것은
ㅡ 영주에서 안동도호부로 가는 (육지) 길
ㅡ 등주에서 고구려ㆍ발해로 가는 바다 길
입니다

즉 등주에서 배를 타고 고구려ㆍ발해 지역으로 가는 경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북은 뱃길의 나아가는 방향이 아니라 등주에서 목적지로 삼은 고구려ㆍ발해의 위치인 것이죠

이 경로를
ㅡ 신당서 가탐도리기
ㅡ 성경통지
ㅡ 장황의 圖書編
ㅡ 독사방여기요
를 교차하여 고찰하였습니다


1. 신당서 가탐도리기

登州海行入髙麗渤海道

登州東北海行 過 大謝島 龜歆島 淤島 烏湖島 三百里, 北渡烏湖海 至馬石山東之都里鎮 二百里.

東傍海壖. 過 青泥浦 桃花浦 杏花浦 石人汪 橐駝灣 烏骨江 八百里, 乃南傍海壖.

2. 장황의 圖書編

沙門島爲解宋寨界 單山爲黃縣界 桑島爲馬停寨界 龜島爲昌邑縣界 歆末島爲壽光界 都里鎭爲蒲臺界 靑島爲利津界 黃島爲賓州界 直沽口爲寶低縣界 塔山爲盧龍衛寨界 南半洋山爲昌黎縣界 計一千二百里,抵遼東北半.

3. 성경통지

桃花島

新唐書地理志登州東北海行過大謝島龜歆島烏湖島三百里至都里鎮二百里東傍海壖過青泥浦桃花浦杏花浦

金史地理志興城縣有桃花島 按桃花島即桃花浦明初海運泊船于此今在寧逺州城南

1-S 가탐도리기의 경로

1) 300 리
등주(登州) ~대사도(大謝島) ~ 구흠도(龜歆島) ~ 어도(淤島) ~오호도(烏湖島)

2) 200 리
북쪽으로 오호해(烏湖海)를 건너서 마석산(馬石山)의 동쪽에 있는 도리진(都里鎮)

3) 800 리
도리진 ~ 청니포(青泥浦) ~ 도화포(桃花浦) ~ 행화포(杏花浦) ~ 석인왕(石人汪) ~ 탁타만(橐駝灣) ~ 오골강(烏骨江) ~ 오골강 인근 남쪽의 해연(海壖)

4) 총 1,300 리

등주 ~ 오골강 인근 남쪽 해연(해안)

2-S 도서편의 경로

沙門島(解宋寨) ~ 單山(黃縣) ~ 桑島(馬停寨) ~ 龜島(昌邑縣) ~ 歆末島(壽光) ~ 都里鎭(蒲臺) ~ 靑島(利津) ~ 黃島(賓州) ~ 直沽口(寶低縣) ~ 塔山(盧龍衛寨) ~ 南半洋山(昌黎縣) ~ 遼東北半.

計一千二百里

3-S 성경통지의 경로 (신당서 지리지를 인용하고 있으므로 가탐도리기와 같습니다)

登州 ~ 大謝島 ~ 龜歆島 ~ 烏湖島 ~ 都里鎮 ~ 青泥浦~ 桃花浦 ~ 杏花浦

먼저 가탐도리기와 도서편의 코스는 출발지가 등주, 목적지가 동북(도서편의 요동)인 점, 그리고 그 총 거리가 1,300 리로 같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경로를 나타냈다고 봐도 좋을 텐데요 경로상의 지명이 모두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도서편 경로에 가탐도리기와 일치하는 게 있습니다

가탐도리기의 龜歆島가 龜島와 歆末島도로 나타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중간 기착지는 都里鎭으로 같습니다

출발지와 목적지. 중간 기착지, 그리고 총 거리가 같다면 동일 경로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서편에 경로상에 위치한 섬들이 속한 것으로 표시된 지명을 독서방여기요에서 찾아봤습니다

1) 解宋寨, 黃縣, 馬停, 昌邑, 壽光, 蒲臺, 利津, 賓州, 寶低
ㅡ 모두 산동에 속한 지명이었습니다
ㅡ 蒲臺(포대)의 경우 독서방여기요에서 찾을 수 없었는데 1420년에 익도(益都)를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명나라의 당새아라는 인물이 산동 포대 사람인 것에서 포대가 산동에 속한 지명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즉 도리진은 산동에 있다는 말이죠)

2) 盧龍, 昌黎
ㅡ 너무 유명한 지명인데요 북직, 즉 지금의 하남ㆍ하북에 속한 지역입니다

즉 가탐도리기 경로와 출발지, 목적지, 중간기착지, 총 거리가 같은 도서편의 경로는 등주에서 출발하여 시계방향으로 산동ㆍ하북의 해안을 따라 요동으로 나아가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다음은 성경통지의 경로입니다. 성경통지의 경로는 신당서를 따르고 있으므로 가탐도리기와 동일한 경로입니다 그런데 포인트는 거기가 아니라 그 다음의 금사 지리지를 인용한 부분입니다

金史地理志興城縣有桃花島 按桃花島即桃花浦明初海運泊船于此今在寧逺州城南
금사 지리지에 의하면 흥성현에 있는 것이 도화도이며 도화도, 즉 도화포는 명나라 초기에 이곳까지 배가 오가며 정박하였다.
지금 영원주의 성 남쪽에 있다

영원주는
지금의 랴오닝 성 후루다오 시(葫蘆島市), 즉 호로도 시는 임둔 태수장 봉니가 발견된 곳으로 금주(진저우) 시 근방입니다

이 고찰 내용을 가탐도리기 <영주에서 출발하여 안동도호부로 가는 길>과 비교해 보십시오

"영주(營州) 서북쪽 100리는 송형령(松陘嶺)이라고 하고 그 서쪽은 해(奚)이며 그 동쪽은 거란(契丹)이 떨어져 있다. 영주(營州)에서 북쪽으로 400리를 가면 황수(湟水)에 이르고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180리를 가면 연군성(燕郡城)에 이른다. 또한 (연군성으로부터 동쪽으로) 여라수착(汝羅守捉)을 지나서 료수(遼水)를 건너면 옛날 한국(漢)의 양평성(襄平城)이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이르기까지 500리이다. (안동도호부에서) 동남쪽으로 평양성(平壤城)까지 800리이고, (안동도호부에서) 서남쪽으로 도리해구(都里海口)까지 600리이며, (안동도호부에서) 서쪽으로 옛 중곽현(中郭縣)이었던 건안성(建安城)까지 300리이며, (안동도호부에서) 남쪽으로 압록강(鴨淥江) 북쪽에 있는 옛 안평현(安平縣)이었던 박작성(泊汋城)까지 700리이다."

자, 다음은 오골강에서 압록강까지가 문제인데
도리진에서 오골강 800 리인데
1)오골강에서 압록강 1,000 리라는 말인지
2)도리진에서 압록강까지 1,000 리라는 말인지 헷갈리게 한다

그러나
이미 오골강이 거리와 위치 상 요하 입구의 여러 강 가운데에 하나로 보이고
거기에서 다시 1,000 리 바닷길을 간다고 하기에는 경유지로 거론 된 지역이 적으며
현 압록강으로 보고자 하여도 그 사이에 혼하, 태자하 등의 강들을 거론하지 않았으며

수ㆍ당의 고구려 침공기에서
오골성과 압록강, 평양성이 가까우며
박작성이 압록강, 평양성과 가까운 것에서
오골강과 압록강이 가까운 것이 나타나므로

2) 가 적합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즉 오골강과 압록강 당은포구의 거리는 200 리인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근거

1. 612 년 수나라 육군의 침공 및 패퇴로 본 위치

A
수나라 육군 ㅣ압록강 ㅣ살수 ㅣ 평양
(서) --------------------------> (동)

B
압록강-----------------살수
(서) -----450 리-----(동)
※ 기록에는 수나라 패잔병들이 하루밤낮을 뛰어서 도망쳤다고 돼 있다 근 200km를 하루에 이동하는 게 가능한가?

2. 645, 648 년 당 태종 침공으로 본 위치

C
오골성 ㅣ 압록강 ㅣ 평양

D
압록강 ㅣ 살수 ㅣ 평양성 ㅣ 패수

E
박작성 ㅣ 압록강 ㅣ 평양
(박작성은 압록강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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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2-24 13:33
   
압록강 및 평양 지근 거리 오골성/오골강의 위치로 본 평양의 위치 추적


지난 글에 이어서 가탐도리기의
영주에서 고구려 가는 길,
등주에서 고구려 가는 길을 계속 고찰하고 있습니다

가탐도리기는 가탐이 당시에 외국을 드나든 사신, 군인, 상인, 여행자 등의 정보를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건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최근착의 당시대의 지리정보를 담고 있어서 매우 가치가 있는 자료로서 신당서 지리지에 수록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의문은
1. 가탐 당시의 안동도호부가 있던 곳은 요서고성인데 여기가 어디냐
2. 가탐도리기에서의 안동도호부의 위치는 요서고성의 위치를 기준한 것이냐 요동고성의 위치를 기준한 것이냐
3. 박작성이 안동도호부 남쪽 700리, 평양성이 동남쪽 800 리이면 신당서, 삼국사기 기록 기준 박작성 ㅣ 압록강 ㅣ 평양성이며 현 학계 통설로 보자면 압록강 ~ 평양이 근 4~500 리인데 대체 가탐도리기의 평양성은 그 위치를 어디로 잡아야 하느냐
4. 박작성을 특정할 수 없다면 역시 평양성 근처에 있었던 오골성을 통해서 평양의 위치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등이었습니다

앞서서
가탐도리기, 도서편, 독사방여기요 등을 교차 고찰하여
가탐도리기의 등주에서 고구려/발해 가는 뱃길이 등주에서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도는 코스라는 것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골강이 지금의 호로도시(현 금주시 서남쪽)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간 곳에 위치한다는 것까지는 추정이 가능하게 됐으나 대체 오골강의 정확한 위치를 어디쯤으로 봐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 차후의 장애가 됐습니다

신당서와 삼국사기를 보면 오골성은 평양성 근처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골강 역시 평양성과 압록강 근처에 있어야 하는 것이고 오골강의 위치를 대략이라도 알 수 있으면 고대사 지리 비정의 윤곽이 더욱 뚜렷해지겠다 하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독서방여기요를 토대로 가용한 시간을 투자해 수색해 봤는데 놀라운 사실과 마주하게 됐습니다

가탐도리기에서

登州東北海行 過 大謝島 龜歆島 淤島 烏湖島 三百里, 北渡烏湖海 至馬石山東之都里鎮 二百里. 東傍海壖. 過 青泥浦 桃花浦 杏花浦 石人汪 橐駝灣 烏骨江 八百里, 乃南傍海壖. 過 烏牧島 貝江口 椒島 得 新羅西北之長口鎮. 又, 過 秦王石橋 麻田島 古寺島 得物島 千里 至 鴨淥江

桃花浦가 도화도에 있는 나루로 도화도는 임둔태수장 봉니가 출토된 현 호로도시(금주시 서남쪽)에 있었으며
산동 포대(도리진)에서 오골강까지 500리라는 것과 도화포가 호로도시에 있었다는 것에서 오골강이 호로도시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간 현 발해만 동안, 즉 현 요하 하구 근처라는 추정이 가능했는데

신당서와 신당서를 교차고증하여 수록한 삼국사기에서는 오골성이 평양성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이 있으니 오골강의 위치만 잡는다면 고구려 말기의 평양성의 위치를 찾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이죠

또 千里 至 鴨淥江을 오골강에서 다시 1,000리를 간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을 지난 번에 고찰한 바 있습니다
신당서와 삼국사기에서는 분명히 오골성이 평양성 근처여서 오골성을 취하면 평양성은 곧바로 취할 수 있다고 돼 있으니 오골강~압록강이 1,000리인 것은 이 사실 기록에 어긋나는 것이죠

따라서 가탐도리기의 해당기록은
오골강 근처에서 가는 두 가지 코스를 설명하고 있다고 봐야 합리적입니다
1) 過 烏牧島 貝江口 椒島 得 新羅西北之長口鎮.
2) 又, 過 秦王石橋 麻田島 古寺島 得物島 千里 至 鴨淥江

1)은 오골강에서 신라 서북 장구진까지 가는 코스
2)는 오골강에서 압록강 당은포구까지 가는 코스로
오골강~압록강이 200여 리인 것이죠

이러한 사실 추정을 근거로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1. 오골성은 어디인가?

烏骨城,在安市東南,近大海。《唐史》:自登州東北海行,至烏湖島。又行五百里,東傍海需,有道至烏骨江。唐貞觀中,太宗圍白巖城,烏骨城遣兵為聲援。又太宗圍安市不下,群臣皆言宜釋安市,並力拔烏骨城,度鴨淥水,直取平壤。是也。

1) 오골성은 안시 동남쪽에 있으며 바다와 가깝다
2) 오골성을 깨뜨리고 압록수를 건너면 곧바로 평양을 얻을 수 있다

2. 안시는 어디인가?

安市城(蓋州)衛東北七十里。漢安市縣,屬遼東郡。後漢及晉因之。高麗亦曰安市城。唐貞觀十九年,征高麗,攻安市城,不克,引還。咸亨三年,高麗餘眾復叛,遣將高侃擊之,敗之於安市城。後置安市州。渤海改置鐵州,領位城、河瑞、蒼山、龍珍四縣。遼仍為鐵州,亦曰建武軍,改置湯池縣。

1) 개주위 동북 70리
2) 한나라 안시현, 고구려 안시성

3. 개주위는 어디인가?

蓋州衛司西南二百四十里。南至復州衛百八十里,西北至廣寧衛三百六十里,東至鴨淥江五百五十里。

秦漢時遼東郡地。高麗為蓋牟城。唐置蓋州。勃海因之,又改為辰州《志》云:以路通辰韓也。遼初,為長平郡,尋為辰州奉國軍。金初,改軍曰遼海軍,尋又改州曰蓋州,軍仍曰奉國。元初,為蓋州路,尋復為州,以州治建安縣省入,屬遼陽路。明洪武九年,廢州置衛。今改為蓋平縣,屬奉天府。

蓋牟城即衛治。本漢平郭縣地,漢、晉以後屬於高麗。亦曰蓋葛牟城。唐貞觀十九年,伐高麗,取蓋牟城,因置蓋州。《遼志》云:州治建安縣,元省入州。明洪武五年,改築今城,周五里有奇。

西安平城亦在衛東南。漢縣,屬遼東郡。後漢及晉因之。咸康七年,石虎將王華帥舟師自海道襲燕安平,破之。即此城也。文城,在衛西。漢置文縣,屬遼東郡。後漢改曰汶縣。晉省。咸和八年,慕容遣將攻其弟仁於平郭,敗於汶城之北。胡氏曰:汶城在平郭之西。

1) 요양 서남쪽 240리
2) 치소는 한 평곽현, 고구려 개모성
3) 서안평은 개주위 동남쪽

4. 건안성은 어디인가?

建安城,在(蓋州)衛東南,漢平郭縣地,高麗置建安城於此。唐貞觀十九年,伐高麗,張儉進度遼水,趨建安城。又李世言:建安在南,安市在北,安市先下,然後向建安。二城蓋相近也。儀鳳初,徙熊津都督府於建安故城,其百濟戶口先徙徐、兗等州者,皆置建安。《舊唐志》:自遼東城西南行三百里,至建安城,故平郭縣也。遼置建安縣,蓋循故名耳,非即舊城也。

1) 개주위 동남쪽
2) 안시성 남쪽
3) 요동성 서남쪽 300리

5. 안시성과 마수산

首山司西南十五里。山連海州衛界,頂有平石,泉出其中,挹之不竭。曹魏景初二年,司馬懿伐公孫淵,潛濟遼水,進至首山,大破淵軍,遂圍襄平。是也。唐貞觀十八年,征高麗,車駕度遼水,軍於馬首山,即此山矣。或謂之駐蹕山。《唐史》:駐蹕山在安市城外。《志》云:首山一名手山,以山頂石上有文如指掌,故名。

駐蹕山在(蓋州)衛東。《唐史》:本名六山,在安市城外。貞觀十九年,征高麗,攻安市城,高麗將高延壽等來救。帝曰:彼若勒兵連安市而壁,據高山,取城中粟食之,縱靺鞨掠吾牛馬,攻之不可下,此上策也。及延壽至,距安市四十里而屯。帝曰:虜墮我策中矣。既延壽又進一舍,至城東南八里,依山為陣。上命李世將兵陳於西嶺,長孫無忌將奇兵自山北出狹谷,以沖其後,自將步騎挾鼓角,偃旗幟登北山。上命諸軍聞鼓角齊出奮擊。及戰,高麗兵敗,無忌斷其歸路,延壽乃降。因名其山曰駐蹕。或曰:衛東分水嶺諸山,即太宗駐蹕處也。又六山,今廣寧無閭山之別名。

1) 수산은 요양 서남쪽 15리
2) 수산은 마수산
3) 마수산은 주필산
4) 주필산은 육산
5) 안시성은 주필산에 있다
6) 육산은 의무려산
7) 마수산 근처 고구려성은 요동성, 안시성, 개모성, 건안성 등

6. 비사성은 어디인가?

沙卑城即(海州)衛城。亦曰卑沙城,高麗所築,疊石為城,幅員九里,或訛為卑奢城。自登、萊海道趣高麗之平壤,必先出此。隋大業十年,來護兒出海道,至卑奢城,敗高麗兵,將趣平壤,高麗懼而請降。唐貞觀十九年,伐高麗,張亮帥舟師自東萊渡海襲卑沙城,其城四面懸絕,唯西門可上,唐兵攻拔之。總章初,復得其地。後沒於勃海,置南京南海府,兼置沃州,領沃沮、鷲巖、龍山、濱海、升平、靈泉六縣。遼改置臨溟縣,為海州治。金為澄州治,元州縣俱廢。明洪武九年,改築衛城,周六里有奇。

1) 비사성은 해주위 치소
2) 비사성은 사비성
3) 수나라 내호아가 고구려 정벌시에 온 그 바로 비사성

7. 해주위는 어디인가?

海州衛司西南百二十里。南至蓋州衛百二十里,西至廣寧衛二百四十里,東南至鴨淥江五百八十里。

1) 요양 서남쪽 120리
2) 해주위 남쪽 120리에 개주위 (개주위는 요양 서남쪽 240 리)
3) 해주위 동남쪽 580 리에 압록강(현 압록강, 독사방여기요는 17세기 지리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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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2-24 13:36
   
고구려 서안평과 수당시대 압록강의 위치 고찰로 본 수당 시대, 즉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 추적


압록강과 평양의 위치와 거리를 설명한 가장 대표적인 기록인 통전의 기록을 보면 지금의 평양과 압록강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압록강이 평양 서북쪽 450리에 있다는 것을 거리 오차를 고려하더라도 지금의 북한 평양과 압록강의 위치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문에 고구려 멸망 당시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며 당나라가 건넌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이라는 논리를 뒷받침 하고 나아가 아래로는 ‘요ㆍ고려 경계 현 압록강’, 위로는 ‘위만조선과 낙랑군의 치소는 지금의 평양’이라는 주장을 역시 뒷받침 하여서

1)위만조선 왕검성 = 낙랑군 치소 = 고구려 평양 = 현 평양
2) 수당 시대 고구려 압록강 = 고려 압록강 = 현 압록강

이라는 이른 바 학계 통설의 큰 줄기가 성립합니다

그런데 통전의 기록부터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저는 가탐도리기를 과정적으로 검토하여 가탐(730~805, 공직에 나아간 해 751)이 도리기에서 가탐 당시의 안동도호부의 위치가 요동성 (한 양평성)이 아니었음에도, 아울러 당시 영주가 현 조양이 될 수 없었음에도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위치를 조작하였던 바를 고찰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례가 빈번하므로 통전의 기록을 타 사서 기록과 견주어 면밀히 되살필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독사방여기요는 명말청초인 17세기 초에 한족 학자가 완성한 명나라 지리총서로 해당 지리서의 산동8에서 남소성을 현 진저우만(대련 서북쪽) 근처로 증언하고서도 산동9에서 조선을 설명하며 남소성이 조선 함경도에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식으로 억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 사서 기록을 분석할 때에는 되도록이면 사서 기자의 견해를 배제하고 상기사서와 하기사서 간의 교차분석을 통해 해에 도달해야 합니다

또한 명사와 독사방여기요 등 명나라 이후의 특히 한족이 작성한 사서문헌에서는 요동과 만주의 지리를 한반도에 구겨 넣는 행태를 보이므로 더 엄밀함이 요구가 됩니다

독사방여기요의 경우 산동9는 일단 배제하고 면밀하게 다루어야 하며 요동지역의 지리정보를 담고 있는 산동8을 중심으로 지리를 풀어가야 합니다

鴨淥水闊三百步,在平壤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

<통전>

ㆍ압록강 ~ 평양 450리
ㆍ압록강 ~ 요수 480리

이 기록을 토대로 하면 요수에서 평양까지는 약 930리가 됩니다

현 위치에 대입하면 얼추 근사해 보입니다

그런데 다른 기록과 비교해 보며 어떨까요?

遼東舊都司城。東至鴨綠江五百六十里,南至旅順海口七百三十里,西至山海關一千一十五里,西北至大寧廢衛八百六十里,東北至故建州衛七百九十里。

遼陽城即司治。

襄平城司北七十里。

遼水司西百六十里,又西距廣寧衛二百里。

<독사방여기요 산동8>

1) 압록강(17세기 압록강, 즉 현 압록강) : 요양 동쪽 560리
2) 요수 : 요양 서쪽 160리

통전과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을 교차해 보겠습니다

1) 요수 ~ 압록강 480리 <통전>
2) 요수 ~ 압록강 720리 <독사 산8, 산9>

불일치합니다

이상하죠? 방위와 거리의 오차를 고려하더라도 너무 크게 차이가 납니다
독사방여기요의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입니다
같은 압록강이라 볼 수 있습니까?

즉 통전의 압록강과 현재의 압록강은 다른 강이라고 봐야 타당합니다

또 다른 기록을 보겠습니다

玄菟郡西蓋馬縣,有馬訾水,西南至遼東郡西安平縣入海,過郡二,行一千一百里。郡二:玄菟、遼東也。<한서 지리지>

1) 현도군 서쪽 개마현에 마자수가 있다
2) 서남쪽으로 요동군 서안평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3) 현도군과 요동군을 지나 1100리를 흐른다

馬訾水出靺鞨長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신당서>

4) 마자수는 말갈 장백산에서 발원한다
5) 물빛이 오리의 머리빛 같아서 압록수라 한다

학계 통설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서안평을 압록강 하구 북안으로 비정하였습니다

저는 앞서서 서안평이 그곳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고찰한 바 있습니다

서안평은 어디일까요?

海州衛司西南百二十里。
沙卑城即(海州)衛城。亦曰卑沙城。
遼河在(海州)衛西南五十五里。

蓋州衛司西南二百四十里南至復州衛百八十里,西北至廣寧衛三百六十里,東至鴨淥江五百五十里。
蓋牟城即衛治。
西安平城亦在衛東南。漢縣,屬遼東郡。

<독사방여기요 산동8>

1) 비사성은 요양 서남쪽 120리
2) 요하는 비사성 서남 55리
3) 개모성은 요양 서남쪽 240리
4) 무려성(광녕위)은 개모성 서북쪽 360리
5) 압록강(17세기, 즉 현 압록강)은 개모성 동쪽 550리
6) 서안평성이 개모성 동남쪽에 있는데(서안평은 개주위 소속) 한나라 요동군 소속 현이다

廣寧衛司西四百二十里。
無慮城今衛治。本漢之無慮縣,屬遼東郡。

閭州城在衛東北。遼置。《志》云:以近巫閭山而名。在遼州西百三十里,西北至上京臨潢府九百五十里,金廢。

豪州城,在衛東北二百二十里。《遼志》:漢遼東西安平地也,遼置州,西北至臨潢七百二十里,金廢。

<독사방여기요 산동8>

7) 무려성(광녕위 치소)은 요양 서쪽 420리
8) 무려성은 한나라 요동군 무려현
9) 여주성은 무려성 동북쪽
10) 여주성의 이름은 근처에 의무려산이 있어서 붙은 것
11) 여주성은 요주(한 양평성, 고구려 요동성이 있던 지역) 서쪽 130리
12) 호주성은 무려성 동북 220리
13) 호주성은 요사 지리지에 의하면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현이라 한다

서안평의 위치가 두 곳(요양 남쪽, 금주 동북쪽)으로 나타나는데 어찌 되었든 현 학계 통설인 현 압록강 하구 북안과는 거리가 한참 먼 것은 분명합니다

왜 이렇게 요하를 사이에 두고 서안평의 위치가 두 곳으로 나타나는 것일까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1) 태조대왕 94 년 (서기 146),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2) 동천왕 16년(서기 242),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3) 미천왕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즉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서안평은 고구려의 다물 활동으로 인하여 개주위(요하 동쪽) 지역에서 광녕위(요하 서쪽) 지역으로 교치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
기록 교차 분석을 정리하겠습니다

1) 압록강은 현도군에서 발원하여 현도, 요동 2개 군을 지나 요동군 서안평현에서 바다로 드러간다(신당서, 한서 지리지)
2) 현 압록강과 고구려 시대 압록강은 다른 강이다(독사방여기요, 통전)
3)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서안평은 요하 동쪽, 요양 서남쪽에 있었으며 후에 요하 서쪽으로 교치된 것으로 보인다(독사 산8, 요사 지리지, 한서 지리지, 신당서, 삼국사기)

저는 고대의 압록강이 고구려 수도 근처에서 천참(천혜의 해자) 역할을 하는 강을 이르는 명칭이었다고 보며

상기 고찰을 토대로 할 때에 당시의 압록강은 요동에서 찾아야 하며

고구려 수도의 변천에 따라서 움직였을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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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2-24 13:41
   
이상 신당서, 통전, 삼국사기, 요사, 명일통지, 독사방여기요 등의 교차 분석을 통하여 고찰한 바

수당 시대 고구려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다
수당 시대 고구려 평양이 장수왕의 평양이고 이곳이 낙랑군 치소이자 위만조선의 왕검성이었다 한다면 이 평양은 현재의 평양과 다른 곳이다

평양이 단일지로 현재의 평양이었다 한다면
이미 동천왕 때(서기 247년)에 평양을 수도로 한 바 있으므로 현 서북한에 낙랑군이 위치할 수 없다
도배시러 17-12-24 13:41
   
마수산 馬首山 의 위치 : 한서지리지 유성현 서남에 위치
栁城, 馬首山在西南. 參栁水北入海. 西部都尉治.
감방친구 17-12-24 13:45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나타난 고구려의 도읍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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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지리지로 본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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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평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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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위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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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본기와 신당서 지리지로 본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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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을 키워드로 본 고려 초기의 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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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 지리지로 본 평양과 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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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광종의 서북방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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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이후 고구려의 팽창과 그 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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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서경은 지금의 평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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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ㆍ요동ㆍ현도ㆍ낙랑군의 인구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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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교치설에 대한 반박(이덕일 박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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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유물 조작설에 대한 강단주류사학계의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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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보성리 고분 발굴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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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2-24 13:46
   
이곳은 토론 게시판입니다
주장을 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하며 그 근거가 타당하다는 검증이 먼저 제시가 돼야 하며 이를 통해 논리적 언술이 가해져야 주장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밤잠 안 자 가면서, 남들 쉴 때 쉬지 않고 몸을 혹사해 가면서 사료를 찾아 고찰한 과정과 그 게시글은 하나도 제대로 보지 않고

잡것들이라느니 과대망상 소굴이라느니 하는 동네 똥개가 지가 싼 똥을 핥아 먹다 사래 걸린 듯한 말똥을 싸 대면 댁 내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십니까

하나의 사서가 아니라 여러 사서를 교차 분석하여 고찰하는 것은 모른 체 하면서 본인이 입증도 못할 요사 지리지 위서설을 운운하며 동짓달 똥개가 언 똥 주서먹다가 혓바닥 깨무는 소리를 하면 방구석 찌질한 인생에 해가 뜬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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