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고려시대 서경은 지금의 평양인가?
감방친구
조회 : 3,065
이게 아주 복잡합니다
여말선초에는 지금의 평양을 서경으로 인식을 하고 있었고
제 예전 글 '구월산은 아사달인가?'에서 기자신앙을 잠시 다루었는데 이 기자신사가 12 세기 초에 처음 세워지거든요?
이를 통해 보면 지금의 평양이다 서경이다 하는 것은 12세기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이전 고려 개국초 왕건 때까지 그 서경이 딱 하나거든요
그럼 뭐여? 그 서경이 그 서경이고 그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네? 따질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강동 6주와 고려시대 압록강이 지금의 서북한이 아님을 고찰하였지요?
강동 6주가 혼하 위에 있고 압록강이 요하~동요하면 이게 서경과 아귀가 맞질 않아요
그리고 분명하게 상이한, 상충하는 다음의 두 기록은 어쩔 것이냐 이 말입니다
요사 지리지의 동경요양부는 요나라 동경이 전ㆍ후조선, 위만 조선의 왕검성, 장수왕의 평양성이라고 밝히고 있어요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의 서경유수관 평양부도 역시 서경이 고조선의 왕검성이요 장수왕의 평양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는 말이죠
제가 무슨 역사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닌데 또 한번 꽂히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질머리라 진짜 골치 아프네요 할 일도 많고 시간도 없는데
하여 저는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을 미뤄두고자 합니다
1.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 평양부
西京留守官 平壤府
본래 삼조선(三朝鮮)1)의 옛 도읍이다. 당뇨(唐堯) 무진년(戊辰年, 기원전 2333)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해 평양에 도읍하니 단군(檀君)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殷))나라를 정벌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다. 그 41대손 기준(箕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천여 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기준의 땅을 빼앗고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으로도 적으며 평양을 말함】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 그 손자 우거가 중국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한나라 무제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획정하면서 왕험(王險)을 낙랑군(樂浪郡)2)으로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보장왕 27년(668)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결국 이 지역은 신라로 편입되었다.
태조 원년(918)에 평양이 황폐하다하여 염주·백주·황주·해주·봉주의 백성을 이주시켜 민호를 채우고 대도호부로 삼았다가 얼마 후 서경(西京)으로 하였다. 광종 11년(960)에 서도(西都)로 명칭을 고쳤다. 성종 14년(995)에 서경유수(西京留守)를 칭하였다. 목종 원년(998)에 또 호경(鎬京)이라고 고쳤다. 문종 16년(1062)에 다시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이라 칭하면서 경기(京畿) 4도(道)를 설치했다. 숙종 7년(1102)에 문반(文班)·무반(武班)과 오부(五部)를 두었다.
인종 13년(1135)에 서경의 승려 묘청(妙淸)과 유참(柳旵), 분사시랑(分司侍郞)3) 조광(趙匡)4) 등이 반란5)을 일으키고서 군사를 보내 절령(岊嶺)을 통과하는 도로를 끊었다. 이에 원수 김부식(金富軾)6) 등에게 명하여 삼군(三軍)7)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여 평정하였다. 이 때 유수(留守)·감군(監軍)8)·분사어사(分司御史)9) 외에는 관반(官班)을 모두 없앴다가 얼마 후 경기 4도(道)를 삭제하고 6개 현(縣)을 두었다.
원종 10년(1269)에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10) 최탄(崔坦)과 삼화현(三和縣)의 교위(校尉)11) 이연령(李延齡) 등이 반란12)을 일으켜 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여러 성들을 바치며 몽고에 귀부했다. 몽고는 서경을 동녕부(東寧府)13)로 삼고 관리를 두었으며, 자비령(慈悲嶺(岊嶺))을 경계로 획정하였다. 충렬왕 16년(1290)에 원나라가 서경과 여러 성들을 돌려주므로 마침내 다시 서경유수관으로 하였다. 공민왕 18년(1369)에 만호부를 설치했다가 뒤에 평양부(平壤府)로 고쳤다.
대동강(大同江)이 있다.【곧 패강(浿江)으로 왕성강(王城江)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강의 하류는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된다】 대성산(大城山)이 있다.【구룡산(九龍山), 혹은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부른다. 『문헌통고(文獻通考)』14)에 “평양성(平壤城)의 동북쪽에 노양산이 있다.”고 기록했는데, 바로 이 산을 일컬은 것이다. 산정에는 연못이 세 개가있다】. 옛 성터가 2개 있다.【하나는 기자(箕子) 때 쌓은 것으로서 성안을 정전제(井田制)15)를 써서 구획한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성종 때 쌓은 것이다】. 기자묘(箕子墓)가 있다.【부성(府城)의 북쪽 토산(土山) 위에 있다】.
동명왕묘(東明王墓)가 있다.【부(府)의 동남쪽 중화(中和)지역인 용산(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 진주묘(珍珠墓)라고 부른다. 또 인리방(仁里坊)에 동명왕의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절후에 맞추어 어압(御押)16)을 내려주어 제사를 지나게 했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도 역시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지금까지도 고을 사람들이 소원을 빌 일이 있으면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사당이라고 한다】. 을밀대(乙密臺)가 있다.【금수산(錦繡山) 정상에 위치하며, 그 아래 층층절벽 곁에 있는 영명사(永明寺)17)는 옛날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다. 그 안에 기린굴(麒麟窟)이 있고, 굴의 남쪽 백은탄(白銀灘)에는 바위가 조수(潮水)에 따라 드러났다가 잠겼다가 하는데 조천석(朝天石)이라 부른다.】. 속현이 4개이다.
ㅡ 하략 ㅡ
2.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동경요양부는 원래 조선 땅이다. 주국(周國)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조선으로 갔다. 그래서 그를 조선에 봉하였다.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었는데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밖의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40여 세를 전하여 연국(燕國)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장새(障塞)를 설치하였다. 진국(秦國) 때에는 요동의 외요(外徼)에 속하였다. 한국(漢國) 초기에 연국 사람 위만(滿)이 옛 진국(秦國)의 공터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등의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후한국(後漢) 때에 청주(靑州)와 유주(幽州)에 출입하였다. 요동군과 현도군은 연혁이 일정하지 않았다.
한나라 말기에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여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거쳐 손자 공손연(公孫淵)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소원(紹漢)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위(魏)나라가 멸망시켰다. 진(晉)나라가 고려(高麗 ; 고구려)를 함락시켰고, 나중에는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속하였다. 아들 보(寶)는 고구려 왕 안(安 ; 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대씨는 처음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후(武后 ; 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년간에 거란(契丹) 이진충(李盡忠)이 핍박을 받자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요수(遼水)를 건너 스스로 지키니 무후가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아들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 자칭하였다. 발해 북쪽을 영역을 병합하니 영토가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중종(中宗)이 도읍한 곳에 홀한주(忽汗州)라는 명칭을 내려주고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다. 12대 지나 대이진(大彝震) 때에 참람되게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본따서 짓고,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두었으니 요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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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에는 지금의 평양을 서경으로 인식을 하고 있었고
제 예전 글 '구월산은 아사달인가?'에서 기자신앙을 잠시 다루었는데 이 기자신사가 12 세기 초에 처음 세워지거든요?
이를 통해 보면 지금의 평양이다 서경이다 하는 것은 12세기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이전 고려 개국초 왕건 때까지 그 서경이 딱 하나거든요
그럼 뭐여? 그 서경이 그 서경이고 그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네? 따질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강동 6주와 고려시대 압록강이 지금의 서북한이 아님을 고찰하였지요?
강동 6주가 혼하 위에 있고 압록강이 요하~동요하면 이게 서경과 아귀가 맞질 않아요
그리고 분명하게 상이한, 상충하는 다음의 두 기록은 어쩔 것이냐 이 말입니다
요사 지리지의 동경요양부는 요나라 동경이 전ㆍ후조선, 위만 조선의 왕검성, 장수왕의 평양성이라고 밝히고 있어요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의 서경유수관 평양부도 역시 서경이 고조선의 왕검성이요 장수왕의 평양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는 말이죠
제가 무슨 역사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닌데 또 한번 꽂히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질머리라 진짜 골치 아프네요 할 일도 많고 시간도 없는데
하여 저는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을 미뤄두고자 합니다
1.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 평양부
西京留守官 平壤府
본래 삼조선(三朝鮮)1)의 옛 도읍이다. 당뇨(唐堯) 무진년(戊辰年, 기원전 2333)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해 평양에 도읍하니 단군(檀君)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殷))나라를 정벌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다. 그 41대손 기준(箕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천여 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기준의 땅을 빼앗고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으로도 적으며 평양을 말함】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 그 손자 우거가 중국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한나라 무제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획정하면서 왕험(王險)을 낙랑군(樂浪郡)2)으로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보장왕 27년(668)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결국 이 지역은 신라로 편입되었다.
태조 원년(918)에 평양이 황폐하다하여 염주·백주·황주·해주·봉주의 백성을 이주시켜 민호를 채우고 대도호부로 삼았다가 얼마 후 서경(西京)으로 하였다. 광종 11년(960)에 서도(西都)로 명칭을 고쳤다. 성종 14년(995)에 서경유수(西京留守)를 칭하였다. 목종 원년(998)에 또 호경(鎬京)이라고 고쳤다. 문종 16년(1062)에 다시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이라 칭하면서 경기(京畿) 4도(道)를 설치했다. 숙종 7년(1102)에 문반(文班)·무반(武班)과 오부(五部)를 두었다.
인종 13년(1135)에 서경의 승려 묘청(妙淸)과 유참(柳旵), 분사시랑(分司侍郞)3) 조광(趙匡)4) 등이 반란5)을 일으키고서 군사를 보내 절령(岊嶺)을 통과하는 도로를 끊었다. 이에 원수 김부식(金富軾)6) 등에게 명하여 삼군(三軍)7)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여 평정하였다. 이 때 유수(留守)·감군(監軍)8)·분사어사(分司御史)9) 외에는 관반(官班)을 모두 없앴다가 얼마 후 경기 4도(道)를 삭제하고 6개 현(縣)을 두었다.
원종 10년(1269)에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10) 최탄(崔坦)과 삼화현(三和縣)의 교위(校尉)11) 이연령(李延齡) 등이 반란12)을 일으켜 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여러 성들을 바치며 몽고에 귀부했다. 몽고는 서경을 동녕부(東寧府)13)로 삼고 관리를 두었으며, 자비령(慈悲嶺(岊嶺))을 경계로 획정하였다. 충렬왕 16년(1290)에 원나라가 서경과 여러 성들을 돌려주므로 마침내 다시 서경유수관으로 하였다. 공민왕 18년(1369)에 만호부를 설치했다가 뒤에 평양부(平壤府)로 고쳤다.
대동강(大同江)이 있다.【곧 패강(浿江)으로 왕성강(王城江)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강의 하류는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된다】 대성산(大城山)이 있다.【구룡산(九龍山), 혹은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부른다. 『문헌통고(文獻通考)』14)에 “평양성(平壤城)의 동북쪽에 노양산이 있다.”고 기록했는데, 바로 이 산을 일컬은 것이다. 산정에는 연못이 세 개가있다】. 옛 성터가 2개 있다.【하나는 기자(箕子) 때 쌓은 것으로서 성안을 정전제(井田制)15)를 써서 구획한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성종 때 쌓은 것이다】. 기자묘(箕子墓)가 있다.【부성(府城)의 북쪽 토산(土山) 위에 있다】.
동명왕묘(東明王墓)가 있다.【부(府)의 동남쪽 중화(中和)지역인 용산(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 진주묘(珍珠墓)라고 부른다. 또 인리방(仁里坊)에 동명왕의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절후에 맞추어 어압(御押)16)을 내려주어 제사를 지나게 했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도 역시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지금까지도 고을 사람들이 소원을 빌 일이 있으면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사당이라고 한다】. 을밀대(乙密臺)가 있다.【금수산(錦繡山) 정상에 위치하며, 그 아래 층층절벽 곁에 있는 영명사(永明寺)17)는 옛날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다. 그 안에 기린굴(麒麟窟)이 있고, 굴의 남쪽 백은탄(白銀灘)에는 바위가 조수(潮水)에 따라 드러났다가 잠겼다가 하는데 조천석(朝天石)이라 부른다.】. 속현이 4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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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동경요양부는 원래 조선 땅이다. 주국(周國)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조선으로 갔다. 그래서 그를 조선에 봉하였다.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었는데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밖의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40여 세를 전하여 연국(燕國)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장새(障塞)를 설치하였다. 진국(秦國) 때에는 요동의 외요(外徼)에 속하였다. 한국(漢國) 초기에 연국 사람 위만(滿)이 옛 진국(秦國)의 공터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등의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후한국(後漢) 때에 청주(靑州)와 유주(幽州)에 출입하였다. 요동군과 현도군은 연혁이 일정하지 않았다.
한나라 말기에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여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거쳐 손자 공손연(公孫淵)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소원(紹漢)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위(魏)나라가 멸망시켰다. 진(晉)나라가 고려(高麗 ; 고구려)를 함락시켰고, 나중에는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속하였다. 아들 보(寶)는 고구려 왕 안(安 ; 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대씨는 처음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후(武后 ; 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년간에 거란(契丹) 이진충(李盡忠)이 핍박을 받자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요수(遼水)를 건너 스스로 지키니 무후가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아들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 자칭하였다. 발해 북쪽을 영역을 병합하니 영토가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중종(中宗)이 도읍한 곳에 홀한주(忽汗州)라는 명칭을 내려주고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다. 12대 지나 대이진(大彝震) 때에 참람되게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본따서 짓고,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두었으니 요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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