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평양 보성리 고분 발굴의 의의
감방친구
조회 : 2,129
1. 기존 북한학계에서는 서기 전후의 평양 지역 지배자급 고분에 대하여
ㅡ 중국 한계 무덤의 수가 적고
ㅡ 그 무덤들조차도 토착계 무덤 양식이 혼용돼 있으며
ㅡ 중국계로 분류되는 무덤 양식적 특징이 한사군 설치 이전 시기부터 보이며
ㅡ 그 시대적 전개 양상 또한 토착 문화에 기반하기에
ㅡ 평양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됐다는 주장에 반대하며
ㅡ 개방적 성격을 지닌 토착 세력, 특히 낙랑국의 것으로
ㅡ 입장 정리를 완료한 상태
2. 보성리 고분과 대방태수 장무이묘를 병치해서 볼 때에 그려지는 역사적 근사치
ㅡ 황해도의 장무이묘는 일제 식민어용학자에 의해 대방태수 무덤으로 비정
ㅡ 이후 식민사학을 비판 없이 그대로 계승한 강단주류사학계에 의해 평양 낙랑유물과 함께 한반도 서북한 한사군설의 부정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근거로 내세워짐
ㅡ 그런데 이들 갱단사학계에서 고고학의 좌장 노릇을 하는 정인성 교수에 의해 황해도 장무이묘는 대방태수,혹은 중국 한계 군현의 지배자급 무덤이 아니라
ㅡ 고구려 무덤으로 밝혀짐
ㅡ 장무이묘는 무덤 출토 간지석에 의해 3 세기 후반 무덤임이 이미 알려진 상황
ㅡ 즉 평양의 고구려 무덤인 보성리 벽화 무덤은 3세기 초
ㅡ 황해도의 고구려 무덤인 장무이묘는 3세기 말
ㅡ 3 세기에 고구려가 서북한 지역을 지배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것임
ㅡ 다시 말해서 한사군 서북한설의 상여소리 정도가 아니라 무덤 다지는 소리라는 말
3. 그렇다면 낙랑군의 위치는 어디인가
ㅡ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 때에 현도군에 집결하여 진군
ㅡ 이 때에 낙랑태수도 현도군에 합류
ㅡ 무슨 얘기냐 하면 위에게 있어서 현도군은 고구려와의 최전선 지역이라는 말
ㅡ 낙랑군은 현도군보다 고구려와 가깝지 않다는 말
ㅡ 이 시기에 고구려 침공을 모의하며 군사회의를 할 때에 고구려 침공로에 두 개의 길이 있다고 말함
ㅡ 하나는 위로 돌아서, 하나는 아래로 돌아서
ㅡ 이 대목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있는데
ㅡ 딱 지금의 요하를 기준으로 한 침공로임을 알 수 있음
ㅡ 즉 이 시기(3세기)에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중싱지 역시 요동 내륙임을 알 수 있음
ㅡ 고구려가 요동군을 약탈하며 대방태수를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납치한 사건에서 보듯이
ㅡ 낙랑군과 대방군은 요동군의 서쪽, 또는 서남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음
4. 낙랑군과 대방군, 그리고 백제의 위치
ㅡ 백제가 대방태수와 혼인동맹을 맺고
ㅡ 낙랑군의 서쪽 지방을 약탈한 것으로 볼 때에
ㅡ 분명히 백제는 5 세기 이전까지 발해 서안에 거점을 가지고 있었음
ㅡ 중국 당나라조차 비록 영토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해서 지방세력, 지방군벌에게 작위를 주고 위임통치하였던 것과 인구와 중앙통제력이 근대에 미치지 않는 고대의 사정을 생각할 때에 충분히 상정 가능한 얘기임
ㅡ 요서 백제설의 아킬레스건이 바로 낙랑ㆍ대방군 서북한설이었음
ㅡ 3세기 보성리고분과 황해도 장무이묘가 고구려무덤임이 밝혀지므로써
ㅡ 5 세기 동성왕 때의, 삼국사기와 남제서가 전하는, 위나라 기병대와 백제의 전쟁의 윤곽이 더욱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5. 정리
ㅡ 삼국사기에서 낙랑군, 낙랑국, 낙랑태수, 낙랑왕의 호칭은 혼동이나 혼용이 아니라 각기 낙랑군과 낙랑국을 이름이며
ㅡ 대무신왕이 서기 37 년 낙랑국을 정복한 후에 신라를 괴롭히던 낙랑기사가 사라진 것(대신 백제가 등장)과 4세기까지 백제 관련하여 낙랑과 대방이 등장하는 것은
ㅡ 백제의 영토가 서남한 지역에 국한돼 있지 않았다는 것
ㅡ 즉 백제의 분조가 요서,혹은 발해 연안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임
6. 해결 과제
ㅡ 낙랑국의 위치는 살수 이남
ㅡ 살수의 위치가 어디인가?
ㅡ 살수는 여러곳인가?
ㅡ 살수는 고구려와 낙랑국의 경계
ㅡ 삼국사기 대무신왕조 기사들을 볼 것
ㅡ 삼국 초기 한수, 패수, 대수의 위치는 어디인가?
ㅡ 백제 초기 고구려는 백제의 동북면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ㅡ 국경과 백제의 한수 사이에 패수와 대수가 있었음
ㅡ 삼국사기 온조왕조 기사들을 볼 것
ㅡ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에서 나와서 나라를 세우던 고구려 유리왕 시대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요하 북쪽지역에서 남만주 일대를 점유하고 있었음
ㅡ 즉 초기 백제는 요동반도 중남부에서 낙랑국을 동쪽으로 두고, 또 그 북쪽에서 활동하는 말갈을 접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음
ㅡ 이 시기 백제는 요동반도 중남부에서 건국하여 요서와 한반도 서남한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ㅡ 이후 요동반도 거점을 상실하며 요서와 한반도 서남한으로 중심지를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됨
ㅡ 중국 한계 무덤의 수가 적고
ㅡ 그 무덤들조차도 토착계 무덤 양식이 혼용돼 있으며
ㅡ 중국계로 분류되는 무덤 양식적 특징이 한사군 설치 이전 시기부터 보이며
ㅡ 그 시대적 전개 양상 또한 토착 문화에 기반하기에
ㅡ 평양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됐다는 주장에 반대하며
ㅡ 개방적 성격을 지닌 토착 세력, 특히 낙랑국의 것으로
ㅡ 입장 정리를 완료한 상태
2. 보성리 고분과 대방태수 장무이묘를 병치해서 볼 때에 그려지는 역사적 근사치
ㅡ 황해도의 장무이묘는 일제 식민어용학자에 의해 대방태수 무덤으로 비정
ㅡ 이후 식민사학을 비판 없이 그대로 계승한 강단주류사학계에 의해 평양 낙랑유물과 함께 한반도 서북한 한사군설의 부정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근거로 내세워짐
ㅡ 그런데 이들 갱단사학계에서 고고학의 좌장 노릇을 하는 정인성 교수에 의해 황해도 장무이묘는 대방태수,혹은 중국 한계 군현의 지배자급 무덤이 아니라
ㅡ 고구려 무덤으로 밝혀짐
ㅡ 장무이묘는 무덤 출토 간지석에 의해 3 세기 후반 무덤임이 이미 알려진 상황
ㅡ 즉 평양의 고구려 무덤인 보성리 벽화 무덤은 3세기 초
ㅡ 황해도의 고구려 무덤인 장무이묘는 3세기 말
ㅡ 3 세기에 고구려가 서북한 지역을 지배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것임
ㅡ 다시 말해서 한사군 서북한설의 상여소리 정도가 아니라 무덤 다지는 소리라는 말
3. 그렇다면 낙랑군의 위치는 어디인가
ㅡ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 때에 현도군에 집결하여 진군
ㅡ 이 때에 낙랑태수도 현도군에 합류
ㅡ 무슨 얘기냐 하면 위에게 있어서 현도군은 고구려와의 최전선 지역이라는 말
ㅡ 낙랑군은 현도군보다 고구려와 가깝지 않다는 말
ㅡ 이 시기에 고구려 침공을 모의하며 군사회의를 할 때에 고구려 침공로에 두 개의 길이 있다고 말함
ㅡ 하나는 위로 돌아서, 하나는 아래로 돌아서
ㅡ 이 대목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있는데
ㅡ 딱 지금의 요하를 기준으로 한 침공로임을 알 수 있음
ㅡ 즉 이 시기(3세기)에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중싱지 역시 요동 내륙임을 알 수 있음
ㅡ 고구려가 요동군을 약탈하며 대방태수를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납치한 사건에서 보듯이
ㅡ 낙랑군과 대방군은 요동군의 서쪽, 또는 서남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음
4. 낙랑군과 대방군, 그리고 백제의 위치
ㅡ 백제가 대방태수와 혼인동맹을 맺고
ㅡ 낙랑군의 서쪽 지방을 약탈한 것으로 볼 때에
ㅡ 분명히 백제는 5 세기 이전까지 발해 서안에 거점을 가지고 있었음
ㅡ 중국 당나라조차 비록 영토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해서 지방세력, 지방군벌에게 작위를 주고 위임통치하였던 것과 인구와 중앙통제력이 근대에 미치지 않는 고대의 사정을 생각할 때에 충분히 상정 가능한 얘기임
ㅡ 요서 백제설의 아킬레스건이 바로 낙랑ㆍ대방군 서북한설이었음
ㅡ 3세기 보성리고분과 황해도 장무이묘가 고구려무덤임이 밝혀지므로써
ㅡ 5 세기 동성왕 때의, 삼국사기와 남제서가 전하는, 위나라 기병대와 백제의 전쟁의 윤곽이 더욱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5. 정리
ㅡ 삼국사기에서 낙랑군, 낙랑국, 낙랑태수, 낙랑왕의 호칭은 혼동이나 혼용이 아니라 각기 낙랑군과 낙랑국을 이름이며
ㅡ 대무신왕이 서기 37 년 낙랑국을 정복한 후에 신라를 괴롭히던 낙랑기사가 사라진 것(대신 백제가 등장)과 4세기까지 백제 관련하여 낙랑과 대방이 등장하는 것은
ㅡ 백제의 영토가 서남한 지역에 국한돼 있지 않았다는 것
ㅡ 즉 백제의 분조가 요서,혹은 발해 연안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임
6. 해결 과제
ㅡ 낙랑국의 위치는 살수 이남
ㅡ 살수의 위치가 어디인가?
ㅡ 살수는 여러곳인가?
ㅡ 살수는 고구려와 낙랑국의 경계
ㅡ 삼국사기 대무신왕조 기사들을 볼 것
ㅡ 삼국 초기 한수, 패수, 대수의 위치는 어디인가?
ㅡ 백제 초기 고구려는 백제의 동북면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ㅡ 국경과 백제의 한수 사이에 패수와 대수가 있었음
ㅡ 삼국사기 온조왕조 기사들을 볼 것
ㅡ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에서 나와서 나라를 세우던 고구려 유리왕 시대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요하 북쪽지역에서 남만주 일대를 점유하고 있었음
ㅡ 즉 초기 백제는 요동반도 중남부에서 낙랑국을 동쪽으로 두고, 또 그 북쪽에서 활동하는 말갈을 접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음
ㅡ 이 시기 백제는 요동반도 중남부에서 건국하여 요서와 한반도 서남한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ㅡ 이후 요동반도 거점을 상실하며 요서와 한반도 서남한으로 중심지를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