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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29일 (금)

[한국사] 한사군과 신라

감방친구 조회 :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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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둔군에 속해 있다가 후에 낙랑군에 속하게 된 소위 영동7 현 ㅡ동이·불이(不而)·잠대(蠶台)·화려(華麗)·야두미(邪頭味)·전막(前莫)·부조ㅡ를 강단주류사학계에서는 최씨 낙랑국의 전신으로 보고

임둔군을 애초 강원도, 함경도 등지로 비정했던 만큼 최씨 낙랑국(낙랑군이 아닌)의 위치를 함경남도 쯤으로 비정하는 모양입니다

낙랑군 재한반도설을 논박할 때에 제일 걸리는 문제가
바로 다음의 기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ㅡㅡㅡㅡㅡ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 이사금
13년(서기 36)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점령하였다.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14년(서기 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9년(서기 42) 가을 8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 獻之

ㅡㅡㅡㅡㅡㅡ

서기 40 년 화려와 불내 두 현이 신라의 북쪽 경계를 침입하는 기사가 버젓이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 두 현은 임둔군 소속이었다가 낙랑군에 다시 소속된 현이구요

그래서 강단주류사학계에서는
ㅡ 대무신왕의 낙랑정벌은 함경남도 지역의 최씨낙랑국을 정벌한 것이지 평양지역의 낙랑군이 아니다
ㅡ 이 정벌 이후에 와해된 낙랑국 세력이
ㅡ 화려ㆍ불내현의 신라 침입
ㅡ 맥국이라는 신흥세력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라고 설명합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9&aid=0003825882

그런데 이는 또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조의
ㅡ 백제 동쪽에 낙랑
ㅡ 백제 북쪽에 말갈
기사와 또 맞지를 않습니다

말갈을 부리는 주체가 낙랑으로 나오는데
ㅡ 함경남도에 낙랑이 있었다면
백제는 평안도/황해도에 위치했는가?

그게 아니라면 북한 지역은 모두 낙랑군이었나?

모든 게 꼬여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낙랑을 정복했으면 신라와 고구려의 접촉이 활발해야 하는데
고구려 본기와 신라 본기 모두
이 두 나라의 첫 접촉을 3 세기로 적고 있습니다

<고구려 본기>

동천왕
19년(서기 245) 봄 3월,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치니 임금이 그녀를 후궁으로 들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북쪽 변방을 침입하였다

감방친구 17-09-25 22:07
백제는 온조왕 시기 동북면으로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ㅡㅡㅡㅡ
온조왕 37년(서기 19)
37년(서기 19) 봄 3월,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져 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가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雞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감방친구 17-09-25 22:09
다음의 기사를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는 패하/패수로 보이네요

ㅡㅡㅡㅡㅡ

온조왕 13년(기원전 6)
13년(기원전 6) 봄 2월,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다.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61세로 돌아가셨다.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시하여 한강의 남쪽을 살펴보았는데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에 도읍을 옮겨 오랫동안 편안할 계획을 세울 것이다.”
가을 7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렸다. 드디어 경계를 그어 국경을 정하였으니, 북쪽으로는 패하,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 성과 궁궐을 쌓았다.
감방친구 17-09-25 22:19
온조왕 13 년(서기 6)의 기사를 보면
마한을 병합하기 전의 백제의 영토는
경기도와 충남 중부까지며 청주를 포함한 충북의 서부도 영토로 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 백제를 괴롭히던 낙랑은 함경남도에서 강원도 북부, 말갈은 황해도 쯤으로 비정해야 하겠네요
그런데 또 백제는 동북쪽으로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도 합니다
촐라롱콘 17-09-25 23:07
온조왕 시기라면 당시 마한의 맹주는 목지국이었을텐데

그 목지국의 중심지가 경기와 충남의 경계일대인 평택-안성-천안 일대로 비정되고 있는데

초기백제가 목지국의 영역을 넘어서는 청주일때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합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관점에 있는 이들의 주장으로는

충청지역까지 진출하게 되는 백제의 본격적인 확장시기를 온조왕시기보다 200여 년 이후인

3세기 고이왕 시기로 보는 것 같습니다.

온조-비류로 상징되는 고구려계 유이민들이 한강유역에 진출하는 시기 자체도

삼국사기기록에 언급된 시기보다 100~200년 이후로 보고 있는 것 같구요!

한강유역에서 발견되는 고구려계통의 묘제와 비슷한 적석총 및 그 전신이라할 수 있는

적석묘 양식까지 포함하더라도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가장 빠른 시기의 무덤이 2세기경의

것이라는 것이 하나의 근거이며.....

백제 위례성으로 비정되는 풍납토성이 예전의 1~2세기에 축성된 것이라는 학설에서....

고고학적-화학적 다방면의 측정 방식을 통해 오늘날에는 기존에 알려진 축성시기보다

훨씬 늦은 3~4세기에 축성되었다는 것으로 정리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감방친구 17-09-25 23:21
아, 기록을 혼동했습니다

마한과 협상을 통해 영토를 확정한 저 시기의 백제 동쪽은
주양이고 주양은 강원도 어드메로 비정되는군요

ㅡㅡㅡㅡㅡ

탈해 이사금
7년(서기 63) 겨울 10월, 백제왕이 영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이르러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가지 않았다.

ㅡㅡㅡㅡ

이 시기에 낭자곡성 근처까지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마한을 병합한 이후구요

그리고 마한의 잔존 세력은
전라도 지역으로 축소되고
그밖의 세력은 삼국사기 기록에서 엿 보이듯
신라와 고구려로 망명했구요
감방친구 17-09-25 22:24
이후 신라는 마한을 병합한 후 계속하여 영토를 넓혀가다가
지금의 청주/증평 즈음으로 비정되는 낭자곡성에서 신라와 만나게 되죠

이 때까지만 해도 낭자곡성은 신라의 영토였고요
충북지역은 이후에 고백신의 각축장이 되는데
신라 초기에 영토가 청주까지였다니

ㅡㅡㅡ

탈해 이사금
7년(서기 63) 겨울 10월, 백제왕이 영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이르러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했으나, 임금은 가지 않았다.

8년(서기 64) 가을 8월, 백제가 병사를 보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다시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자 임금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공격하여 물리쳤다.

10년(서기 66),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2백 명을 그곳에 남겨 지키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그곳을 다시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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