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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5일 (목)

[한국사] 삼국사기와 신당서를 이용한 평양에의 접근

감방친구 조회 : 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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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보장왕, 그리고 그 이후의 고구려 부흥운동 기록까지
그리고 신당서 지리지를 다시 면밀히 읽었습니다

이 기록들은 압록강의 위치를 고찰하며 11 월 초에 살펴봤던 것들인데 이번에 서경의 위치를 탐구하면서 활용할수 있겠다 싶어서 다시 읽어봤습니다

612 년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시에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실은 수백 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패수(浿水)로부터 들어오니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습니다
내호아는 고구려의 전략에 말려들어서 설레발 치다가 실컷 털리고 찌글어지죠.

그 사이 수나라 육군이 압록강 서쪽에 총 집결합니다.
우문술은 압록강을 건너서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를 다시 건넙니다. 그런 뒤에 평양성에서 30 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칩니다

학계 통설에서 패수는 대동강, 살수는 청천강에 비정돼 있습니다.

한번 지도를 펼쳐서 보세요

A
수나라 육군 ㅣ압록강 ㅣ살수 ㅣ 평양성
(서) --------------------------> (동)

우문술은 결국 살수에서 그 유명한 살수대첩의 희생양이 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군사들이 그곳에서 압록강까지 450 리를 도주합니다

B
압록강-----------------살수
(서) -----450 리-----(동)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645 년 기사에는 당 태종이 군사들과 전략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고구려가 두려워하고 있는 틈을 타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빼앗고,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일에 달렸"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방위는 알 수 없으나

C
오골성 ㅣ 압록강 ㅣ 평양성

으로 오골성이 평양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D
압록강 ㅣ 살수 ㅣ 평양성 ㅣ 패수

또 648 년 기록에는 "당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에게 우리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서 박작성(泊灼城)의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치"고 공격했다가 실패했다고 돼 있습니다

이 기록상으로도 박작성은 압록강의 북쪽에 있음을 알 우 있습니다

E
오골성과 박작성은 평양성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B에서 살수~압록강 거리가 450 리라 돼 있는 것만 빼면 압록강이 평양성과 멀지 않은 것처럼 묘사돼 있습니다

B의 기록에서는 우문술의 패잔병들이 하룻동안 뛰어서 450리를 도주했다고 돼 있습니다 참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신당서 지리지 가탐도리기의 기록을 볼 텐데요
이 기록은 사신, 상인 등의 실측 자료입니다

이 기록에서
안동도호부(요양)를 기준으로

F
평양은 동남쪽 800 리

G
박작성은 남쪽 700리

라 돼 있습니다

이 기록 대로라면
박작성과 평양성은 겨우 100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평양이 여러 곳이었다는 가정을 염두하더라도 당나라 시대의 평양은 박작성과 100리(당척 기준)밖에 안 되는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압록강은, 또 평양은 어디였던 걸까요?

고구려 박작성이 지금 비정된 곳이 아닐 것이라는 기사를 접한 일이 있어서 다시 찾아봤는데 찾을 수가 없네요

아마튼 삼국사기와 신당서 지리지를 검토했을 때에 당시의 고구려 평양은 지금의 압록강을 기준으로 했을 때 지금의 평양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압록강의 위치 역시 지금의 압록강이 아닐 수 있다는 심증을 강화시켜줍니다

감방친구 17-12-03 05:15
지금 비정된 박작성이 박작성이 아닐 수 있다는 이유는
기록에 비해 그 규모가 작기 때문이거든요

제가 동아게에 관련 내용을 쓴 적이 있다고 기억이 나는데 찾아보니 없네요
감방친구 17-12-03 05:16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648 년

당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에게 우리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서 박작성(泊灼城)의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다. 박작성의 성주 소부손(所夫孫)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에게 보병과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하게 하자 우리의 병사가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진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을 이용한 험준한 요새이고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너뜨리지 못하였다.
꼬마러브 17-12-03 09:05
『삼국유사』「흥법」

살펴보건대 고구려의 수도는 그 당시 안시성(安市城)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안정홀(安丁忽)이었으며 요수(遼水) 북쪽에 있었다. 요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鴨淥)으로 지금의 안민강(安民江)이라고 한다.

按麗時都安市城 一名安丁忽 在遼水之北 遼水一名鴨淥 今云安民江

-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은 요수를 압록이라 불렀고, 일연이 살았던 당시의 고려 사람은 안민이라 불렀습니다.
관심병자 17-12-03 17:02
쓰신글보고 잘 배우고 있습니다.
현재 잡혀있는 주류사학의 위치비정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수있습니다.
여러사서에서 '거기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단순히 한반도안에 모든 역사사적들을 밀어넣어 놓고서 역사기록은 나몰라라 하는거죠.

현 주류사학의 해석의 편협함을 볼수있는 것으로
예를들면 흑수말갈과 고구려와의 관계로
이에 대해서 당서에 2번 언급이 되어있습니다.
하나는 흑수말갈은 고구려와 별개로 당과 외교관계를 맺으려 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때 흑수말갈이 고구려의 선봉으로 나섰다는 것입니다.
현 주류사학은 이중 첫번째구절만 인용해 흑수말갈은 고구려와 관련없는 부족이다라고 정의 지어 놓았죠.
관련없는 부족이 남의 나라싸움, 그것도 불리한 싸움에 선봉에 왜 섰을까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죠.
결국 주류사학이란것은 일제의 식민사학 한국사 축소의 잔재입니다.
감방친구 17-12-03 19:02
네, 맞습니다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정교하게 말할 수는 없어도
우리 학계의 역사서술 태도는
우리에게 불리한 사실만 택하고
의문점은 풀지 않고 얼렁뚱땅 넘기는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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