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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4일 (수)

[한국사]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와 고구려의 접촉

감방친구 조회 : 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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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2년(서기 19)
2년(서기 19)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고국원왕
39년(서기 369)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2만을 보내 남쪽으로 백제를 침입하도록 하였으나 치양(雉壤)에서 싸우다 패하였다.

41년(서기 371) 겨울 10월, 백제왕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방어하다가 화살에 맞았다.
이달 23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故國)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나라에 보낸 표문에 ‘쇠(釗)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다.]

소수림왕
5년(서기 375) 봄 2월, 비로소 성문사(省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로 하여금 머무르게 하였다. 또한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머무르게 하였으니, 이것이 해동 불법의 시초가 되었다.
가을 7월,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6년(서기 376) 겨울 11월,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六年 冬十一月 侵百濟北鄙
7년(서기 377) 겨울 10월, 눈이 내리지는 않았으나 우레가 쳤다. 민간에 전염병이 돌던 무렵에 백제가 병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1월,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임금이 사신을 부씨(苻氏)의 진(秦)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하략)

<백제 본기>

온조왕 37년(서기 19)
37년(서기 19) 봄 3월,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져 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가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고이왕
13년(서기 246) 여름, 크게 가뭄이 들어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책계왕
1년 (서기 286)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분서왕
7년(서기 304)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근초고왕
24년(서기 369)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斯由, 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며 병사를 풀어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태자에게 병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5천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26년(서기 371), 고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예성강)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니, 고구려 병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30년(서기 375)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겨울 11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하략)

Nightride 17-09-26 09:41
무슨 일기장 같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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