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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29일 (금)

[한국사] 낙랑과 삼국의 초기 위치

감방친구 조회 : 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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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록 토대>

백제
ㅡ 고구려와 패하(또는 패수)를 경계로 동북면을 맞댐
ㅡ 북쪽에 말갈
ㅡ 동쪽에 낙랑
ㅡ 1 세기 후반 이후로는 동쪽에 신라
ㅡ 남쪽에 마한
ㅡ 서쪽에 바다
ㅡ 3세기 기록에는 고구려와의 사이에 낙랑ㆍ대방이 있음(낙랑대방이 북쪽에)
ㅡ 3 세기까지는 주로 낙랑ㆍ대방과 교류ㆍ경쟁, 또한 말갈에 시달리고 고구려를 경계
ㅡ 4 세기 후반부터 고구려와 격돌
ㅡ 고구려는 이 시기에 확실히 백제 북쪽에 있음

고구려
ㅡ 남쪽 국경이 살수
ㅡ 남쪽의 낙랑, 옥저, 동예 등을 제 집처럼
ㅡ 말갈을 마소 부리듯
ㅡ 서쪽에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ㅡ 4 세기 후반부터 백제와 격돌

신라
ㅡ 북쪽에 옥저, 화려ㆍ불내현
ㅡ 북쪽으로 낙랑ㆍ말갈에 시달림
ㅡ 낙랑이 사라진 후(대무신왕 낙랑 정벌 후) 주로 백제에게 시달림
ㅡ 낙랑 사라진 후 서북쪽에 맥국 등장
ㅡ 남쪽에 가야, 남서쪽에 왜
ㅡ 3 세기 중반에 고구려의 북쪽 공격 (이때 신라 본기에 고구려 최초 등장)

감방친구 17-09-26 01:23
대무신왕 20년(서기 37)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유리 이사금
14년(서기 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대무신왕 27년(서기 44)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모본왕 2년(서기 49)
2 년 봄,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태조대왕 3년(서기 55)
3년(서기 55) 봄 2월, 요서에 열 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병사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태조대왕 4년(서기 56)
4년(서기 56) 가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개척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태조대왕 62년(서기 114)
62년(서기 114)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임금이 남해를 두루 돌아보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남해로부터 돌아왔다.
六十二年 春三月 日有食之 秋八月 王巡守南海 冬十月 至自南海

태조대왕 66년(서기 118)
66년(서기 118) 봄 2월, 지진이 났다.
여름 6월, 임금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 현도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六十六年 春二月 地震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菟 攻華麗城


태조대왕 69년(서기 121)
69년(서기 121) 봄, 한나라 유주(幽州) 자사 풍환(馮煥), 현도 태수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風)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략해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임금이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병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했다. 수성이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는데 풍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마침내 수성이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도, 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菟大守姚光遼東太守蔡風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王乃遣弟遂成 領兵二千餘人 逆煥光等 遂成遣使詐降 煥等信之 遂成因據險以遮大軍 潛遣三千人 攻玄菟遼東二郡 焚其城郭 殺獲二千餘人
여름 4월, 임금은 선비(鮮卑) 8천 명과 함께 요대현(遼隧縣)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풍이 병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에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는 스스로의 몸으로 채풍을 호위하여 막았으나 채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겨울 10월, 임금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백성들을 위문하고, 차등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肅愼)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 가죽 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임금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보냈다.
11월, 임금이 부여로부터 돌아왔다.
임금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12월, 임금이 마한(馬韓)과 예맥의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쳐 막고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감방친구 17-09-26 01:30
태조대왕 70년(서기 122)
70년(서기 122), 임금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 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태조대왕 94년(서기146년)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감방친구 17-09-26 01:36
태조대왕 66년(서기 118)
66년(서기 118) 봄 2월, 지진이 났다.
여름 6월, 임금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 현도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六十六年 春二月 地震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菟 攻華麗城

ㅡㅡㅡㅡ 신라를 침공하려 하다 맥국이 막아 서서 실패한 화려ㆍ불내현의 화려현과 요동군의 화려성은 무슨 관계?
Marauder 17-09-26 01:43
정리가 잘되있네요. 굿
감방친구 17-09-26 01:46
북한 지역의 낙랑은
강단주류사학계에서는
ㅡ 평양지역의 낙랑군
ㅡ 함경도 영동7현 세력의 최씨낙랑국
으로 본다

그러나 사실을 검토해 본 바로
ㅡ 낙랑군은 요서에 있으며
ㅡ 어떤 이유에서인지 북한 지역은 낙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ㅡ 낙랑국이 존재
ㅡ 이후 낙랑국을 비롯한 북한 지역의 군소 정권은 대무신왕에 의해 정벌ㆍ소개됨
ㅡ 그러나 고구려에 의해 와해된 이후에도 독립을 꾀하고자
ㅡ 한나라에 줄을 섬
ㅡ 이게 광무제(서기 44 년)
ㅡ 이로써 북한지역은 일종의 중국계 정권의 조차지, 기미국 비슷한 성격(홍콩, 마카오, 대마도와 비슷한)을 띠며 나름대로 생존 유지

만약에 광무제가 북한 지역을 낙랑군에 복속시킨 44년 행동이삼국사기 기록대로 군사적 행동이었거나 고구려에 위협ㆍ위해가 되는 조치였다면

한사군과 격렬하게 투쟁하며 성장하는 고구려 입장에서는 가만히 당하고 있을 일이 아니었음

그러나 기록 상에는 이 북한지역에 대해 고구려가 다시 어떤 조치나 행동을 했다는 게 없음

오히려 이득이 되었으므로 방치하였을 가능성이 있음

또한 이번 3세기 초반의 보성리 벽화고분이 발굴된 것에서 보듯이, 동시기 황해도의 고구려 고분인 장무이묘에서 보듯이

이곳은 내용상 고구려의 세력판도였음

또한 위나라 관구검 군의 집결과 침입도 고구려 중심지 서북쪽의 현도군에서 이루어졌음
ㅡ 군사가 집결해 출발하는 곳은 당연히 적국과의 국경에서 가까운 곳임
ㅡ 수당의 집결ㆍ출발지가 북경이었다는 말은 그 인근까지 고구려 땅이었다는 말

ㅡ 고구려 턱밑인 북한지역이 낙랑군이었다면 현도군과 낙랑군에서 양동작전을 펼칠 수 있었음에도 현도군에서만 공격했고

ㅡ 심지어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로 퇴각하면서도 낙랑을 거쳐서 물러감
ㅡ 이 낙랑이 북한지역을 이르는 말이고 거기가 낙랑군이었다면 그냥 자기 영토를 포기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음
ㅡ 즉 이 말은 북한지역은 실질적으로 낙랑군이 아니었고
ㅡ 고구려와 중국계 군현에 양다리를 걸친, 대마도와 비슷한 곳이었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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