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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6일 (금)

[한국사] 낙랑 관련 삼국사기 기록 정리

감방친구 조회 : 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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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본기 ]

온조왕 2년(기원전 17)
2년(기원전 17) 봄 정월,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말갈(靺鞨)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맞닿아 있고, 용맹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무기를 수선하고 양식을 비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3월, 임금은 족부(族父) 을음(乙音)이 지혜와 담력이 있다하여 우보(右輔)의 직을 제수하고 병사의 일을 맡겼다.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穀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온조왕 4년(기원전 15)
4년(기원전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서 기근이 들었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어 우의를 다졌다.
四年 春夏 旱 饑 疫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온조왕 8년(기원전 11)
8년(기원전 11)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八年 春二月 靺鞨賊兵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渝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온조왕 11년(기원전 8)
11년(기원전 8)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甁山)의 목책을 습격하여 부순 뒤 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 독산(禿山)과 구천(狗川)에 두 개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의 통로를 막았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온조왕 13년(기원전 6)
13년(기원전 6) 봄 2월,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다.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61세로 돌아가셨다.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시하여 한강의 남쪽을 살펴보았는데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에 도읍을 옮겨 오랫동안 편안할 계획을 세울 것이다.”
가을 7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렸다. 드디어 경계를 그어 국경을 정하였으니, 북쪽으로는 패하,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 성과 궁궐을 쌓았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况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畵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온조왕 17년(기원전 2)
17년(기원전 2) 봄, 낙랑이 침범해서 위례성에 불을 질렀다.
여름 4월, 사당을 세우고 국모에게 제사를 지냈다.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온조왕 26년(서기 8)
26년(서기 8) 가을 7월, 임금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라가 오래 갈 수 없으리라. 혹시 다른 나라에게 병합되면 순망치한(脣亡齒寒)1)의 격이 될 것이니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겨울 10월,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21. 온조왕 27년(서기 9)
27년(서기 9)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해서 그 백성을 한산(漢山)의 북쪽으로 옮기었다. 이것으로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고이왕
13년(서기 246) 여름, 크게 가뭄이 들어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十三年 夏大旱 無麥 秋八月 魏幽州刺史毌丘儉 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책계왕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責稽王[或云 靑稽] 古尒王子 身長大 志氣雄傑 古尒薨 卽位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 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旦城蛇城 備之

2년(서기 287) 봄 정월,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13년(서기 298)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 爲敵兵所害 薨

분서왕
7년(서기 304)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七年 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 冬十月 王爲樂浪太守所遣刺客賊害 薨

진사왕
5년(서기 389) 가을 9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五年 秋九月 王遣兵 侵掠高句麗南鄙
8년(서기 392)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談德, 광개토왕)이 4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담덕이 병사를 부리는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않았기에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이 함락된 것이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구원(狗原)에 사냥을 나가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임금이 구원의 행궁에서 돌아가셨다.
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 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아신왕
2년(서기 393) 봄 정월, 임금이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고 또한 남쪽 제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진무(眞武)를 좌장으로 삼아 병마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감복하였다.
가을 8월, 임금이 진무에게 말하였다.
“관미성(關彌城)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옷깃처럼 중요한 곳이다. 지금 그 땅이 고구려의 소유가 되어 있으니,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기울여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
임금은 마침내 병사 1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에 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싸웠다. 석현(石峴) 등 5개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으나,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굳게 지켰다. 진무는 군량미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여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又祭天地於南壇 拜眞武爲左將 委以兵馬事 武 王之親舅 沈毅有大略 時人服之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嬰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 신라 본기  ]

박혁거세 거서간
30년(기원전 28) 여름 4월, 그믐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樂浪) 사람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려다가, 그곳 사람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지내며, 들에는 노적가리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법도가 있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몰래 군대로 습격한다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곧바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三十年 夏四月己亥晦 日有食之 樂浪人 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扃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 不相盜 可謂有道之國 吾儕潛師而襲之 無異於盜 得不愧乎 乃引還

남해 차차웅
원년(서기 4) 가을 7월, 낙랑(樂浪)의 병사가 와서 금성(金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조심스럽고 위태롭기가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측근들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적은 우리나라에 국상이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함부로 침범해왔으니, 하늘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전혀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얼마 후에 그들이 물러갔다.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圍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棄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隣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妄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

유리 이사금
13년(서기 36)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점령하였다.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14년(서기 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9년(서기 42) 가을 8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 獻之



[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 고구려 침입 교차 기록  ]

동천왕 20년 (서기 246)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에서 물러갔다.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고이왕
13년(서기 246) 여름, 크게 가뭄이 들어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十三年 夏大旱 無麥 秋八月 魏幽州刺史毌丘儉 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조분 이사금
16년(서기 245)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우로가 병사를 이끌고 나가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키고 있었다. 그날 밤은 매우 추웠는데, 우로가 병졸들을 위로하고 몸소 나무로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해주니 모두 마음속으로 감격하였다.
十六年 冬十月 高句麗侵北邊  于老將兵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其夜苦寒 于老勞士卒 躬燒柴煖之 群心感激


[ 최씨 낙랑국의 멸망 교차 기록  ]

대무신왕 20년(서기 37)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유리 이사금
14년(서기 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대무신왕 27년(서기 44)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 백제 1천여 호의 고구려 귀순 교차 기록 ]

대무신왕 2년(서기 19)
2년(서기 19)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二年 春正月 京都震 大赦 百濟民一千餘戶來投

온조왕 37년(서기 19)
37년(서기 19) 봄 3월,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져 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가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雞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감방친구 17-06-10 06:31
핸드폰으로 정리작업하느라 짜증나 죽는줄 알았습니다
자꾸 오류나고 삭제되고 엉뚱한 데 가서 붙고
감방친구 17-06-10 06:48
포인트는
백제의 경우
ㅡ 온조왕 이후 200 여 년이 넘게 백제기록에 나오지 않음
ㅡ 그 뒤에 나오는 게 관구검이 고구려 칠 때 백제가 그 틈을 타 낙랑군(낙랑태수 유무의)을 약탈
ㅡ 이 뒷 시기에 백제는 대방군과 혼인동맹
ㅡ 분서왕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숨짐(304)
ㅡ 낙랑군은 백제 동쪽에, 말갈은 백제 북쪽에
ㅡ 낙랑이 말갈을 시켜 백제를 수시로 공격
ㅡ 이게 이상함
ㅡ 백제의 동쪽에 낙랑군도 있고 신라도 있음

신라의 경우
ㅡ 신라 초기에만 등장
ㅡ 말갈, 왜와 함께 신라를 괴롭히는 3대장
ㅡ 낙랑이 사라지고 백제가 3대장 자리 차지
ㅡ 신라 초기 낙랑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 맞음

이에
백제의 위치가 정말 이상함
ㅡ 백제는 삼국사기 기록상 분명히 낙랑군의 서쪽에 있었음
ㅡ 따라서 백제가 2국 1체제, 혹은 1국 2체제였을 가능성이 있음
감방친구 17-06-10 06:49
꼬마러브님, 밥밥씨씨님을 비롯한 여러분, 도와주세요!
감방친구 17-06-10 08:01
위례성의 위치도 문제가 됩니다
삼국유사의 견해를 따르면 충청도까지 중국땅이 돼 버리고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보자 해도
말이 안 돼요
꼬마러브 17-06-10 09:45
<삼국사기> (온조왕 13년)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온조왕과 낙랑태수의 대화는 국가와 군현과의 대화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와의 대화로 보입니다. 만약 여기의 낙랑이 중국의 낙랑군이라면 당시 중국사서에 백제가 나와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중국사서에 적혀진 최초의 백제 기록은 372년 근초고왕때(진서)로 위 기록과 3,400년이나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에서의 '낙랑태수'는 '낙랑왕'을 잘못 적은 거라고 보아야 타당합니다.

특히 감방친구님께서 지적하셨듯이 낙랑은 온조왕 이후 200 여 년이 넘게 나오지 않다가 고이왕 시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합니다. 이는 온조왕 때의 낙랑과 고이왕 때의 낙랑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온조왕 시기의 낙랑은 한반도의 낙랑국이고 고이왕 시기의 낙랑은 중국의 낙랑군입니다. 이를 이용하여 추론해 나가면 고이왕~분서왕 시기에 백제가 대륙에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낙랑국이 온조왕 이후 나오지 않는 이유는 서기 37년에 고구려의 대무신왕에 의해 낙랑국이 정복당했기 때문입니다.
꼬마러브 17-06-10 09:54
감방친구님의 댓글 중

ㅡ 그 뒤에 나오는 게 관구검이 고구려 칠 때 백제가 그 틈을 타 낙랑군(낙랑태수 유무의)을 약탈
ㅡ 이 뒷 시기에 백제는 대방군과 혼인동맹
ㅡ 분서왕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숨짐(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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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 때 백제가 그 틈을 타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송서>의 기록과 교차검증된다는 것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대방국과 대방군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46934&sca=&sfl=wr_subject&stx=%EB%8C%80%EB%A5%99%EB%B0%B1%EC%A0%9C&sop=and

<송서> 백제국은 본디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었으며, 그 뒤에 고려는 요동을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던 곳을 일컬어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 백제는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한 틈을 타 요서로 낙랑군을 공격하여 진평군을 설치한 겁니다.  이는 분서왕까지 이어져 낙랑군의 서쪽을 공격하는 등, 백제는 대륙으로 영역을 넓혀갑니다. - 그러는 도중 낙랑군의 자객에 의해 숨진 것이죠.
꼬마러브 17-06-10 10:01
ㅡ 낙랑군은 백제 동쪽에, 말갈은 백제 북쪽에
ㅡ 낙랑이 말갈을 시켜 백제를 수시로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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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것에 관해서는 말갈이 한강의 토착민이라는 설이 흥미롭더군요. 본래 한강에는 말갈족이 살았는데 백제세력이 이주해와 말갈과 백제는 남북으로 대치하게 된 겁니다. ( 혹은 낙랑이 백제를 침략하기 위해 백제의 북쪽에 이주시켜 살게 했을 수도) 낙랑국은 이 말갈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한 것이고.. 지금의 강원도까지 진출했기 때문에 경기도에 위치해 있었던 백제의 입장에서는 말갈이 북쪽, 낙랑이 동쪽으로 비정됩니다.

<삼국사기> 온조왕 18년(서기전 1년)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 여기에서 나오는 우두산성이 지금의 강원도 춘천입니다. 즉 당시 춘천이 낙랑국의 영토였다는 것이지요!

덧붙여 <오환선비동이전> 예전을 보면 동예의 특산물 중에 낙랑단궁(樂浪檀弓)이 있습니다. 이는 동예가 위치한 지금의 강원도 지역이 한때 낙랑국의 영토였기 때문이라고 추측 됩니다.
감방친구 17-06-10 10:46
그렇다면 다음 기록의

14년(서기 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9년(서기 42) 가을 8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 獻之

ㅡ 화려와 불내가 신라를 침입한 것은 무엇입니까?
ㅡ 이 두 현은 소위 낙랑군의 25현에 속한 현이 아닙니까?

대무신왕 때 고구려가 멸망시킨 것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었고

또 뒤 이어 광무제가 정벌한 것은 이 낙랑국이 고구려에서 벗어나고자 한 외교적 노력의 일환이었다라고 꼬마러브님이 풀이해주셨는데요

저도 확실히 신라를 침범한 것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라 봐야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화려현과 불내현은 무엇이지요?

그리고 낙랑이 강원도에 진출하였으므로 낙랑이 백제의 동쪽이 되는(백제는 경기도겠군요) 것이라면

신라를 침범하는 화려, 불내를 막은 맥국의 위치는 어찌되는 건가요?

춘천(우두주)이 맥국의 거점 아닙니까?
꼬마러브 17-06-10 11:37
맞습니다. 강원도에 있었던 소국을 맥국이라고 하지요. 거점은 춘천이고요.
당시 맥국은 상대적으로 약국(弱國)이었기 때문에 평양의 낙랑국에 복속하기도 하며 불복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당시 낙랑국은 말갈을 이용하여 산맥이 없는 동해안을 경유하거나 점령한 강원도 지역을 경유해 신라를 공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욱 17-06-10 10:49
낭락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백제 동쪽이 될수없지요.
감방친구 17-06-10 10:51
그리고
낙랑국과 낙랑군ㅡ이렇게 두 개의 낙랑이 있었다라고 가정한다면
의문이 일부 해소됩니다만

또 여기에 대방군과 대방국ㅡ두 개의 대방이 있었다라고 추가 가정을 세워버리면 너무 억지스러운 거 아닙니까?
꼬마러브 17-06-10 11:32
그것에 대해서는 위의 댓글과도 동일한 답변으로..

저는 최씨낙랑국이 본래 요서에 있다가 한반도로 이동을 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최씨낙랑국이 있던 자리에 한사군의 낙랑군이 설치된 것이고요. 그리고 최씨낙랑국이 한반도로 이동을 하면서 대방을 포함한 [그곳에 있던 지명도 같이 옮겨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낙랑군도 낙랑국도, 대방군도 대방국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화려현과 불내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삼국사기>유리 이사금 17년(서기 40년) 가을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만약 만약 이 기록의 화려현과 불내현이 한사군 낙랑군의 속현이라면 낙랑군이 신라를 공격한 사실이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지요.
백제도 근초고왕 시기가 돼서야 중국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걸요.
감방친구 17-06-10 11:40
'낙랑'이라는 명칭의 연원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위만조선의 왕검성 자리, 즉 중심지에 설치한 게 낙랑군 아니었습니까?

게다가 대방이라는 말, 대방군이라는 말은 그 뒤 수백 년 뒤에 낙랑의 아랫지역을 쪼개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까?

물론 제 기억에 준왕 때, 위만이 찬탈할 때, 위만에 반기를 들어서, 위만이 한에 항전할 때, 위만조선이 망하고서 등 지도자급 인물들이 한국으로 갔다고 중국사서가 적고 있으니

옛 위만조선 지역인들이 다수, 수회 한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분명히 보입니다

뭐 낙랑은
평양과 같은 말이라 하는 이도 있고
부여와 같은 말이라 하는 이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꼬마러브 17-06-10 11:46
어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대방이라는 이름도.. 당시 중국이 새로 지은 이름일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원래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이었겠지요. 지금도 그렇고 대부분의 지역명칭이 이런 식으로 지어지니까요.
감방친구 17-06-10 11:51
그런데 대방과 신라가 교접한 기록은 없습니까?
없다면 이상한 거 아니겠습니까?
꼬마러브 17-06-10 12:28
대방국은 처음에는 낙랑국의 지배를 받다가 낙랑국이 망하면서 독립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낙랑국의 역사에 대해서 글 써봐야겠네요. ( 다짐만 하고 실제론 안할 가능성이 높음)
감방친구 17-06-10 11:44
아무튼 꼬마러브님 덕분에 그림의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아서 반갑고 고맙습니다
닥생 17-06-10 17:52
잘 읽었습니다.
아마도 사학 전공하신 분들의 글과 덧글들이겠죠?
논지에서 벗어난 얘기지만,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삼국 교차기록은 각각의 나라가 기록을 다 남긴 경우만 있는 게 아니고, 한 국가가 남긴 기록을 일인칭시점만 바꿔서 두 가지 이상의 본기에 각각 기록한 경우도 있겠죠?
보기를 들면, 고구려가 남긴 A사건기록[백제관련]만을 삼국사기 편찬자가 입수했고,
백제가 남긴 A사건기록이 유실되어서 12세기에 없었다면.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 "나"를 넣어서 문장을 만들어서
마치 A사건에 관한 두 나라의 기록이 둘 다 남아있었던 것처럼 사기를 편찬했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고구려 말기 기록이 남지 않아서 중국 기록을 삼국사기에 인칭만 바꿔서 실었던 것처럼요.
어쨌든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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