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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5일 (목)

[한국사] 서경을 키워드로 본 고려 초기의 북계

감방친구 조회 : 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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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서 서경을 중심으로 하여 왕건부터 정종까지 살펴봤습니다

고려는 발해 멸망 후 서경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서경이라 후에 이름 붙인 평양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왕건이 황폐하게 버려진 평양을 서경이라 이름 붙이고 성을 짓고 사민을 하여 개척합니다
이 국가적 사업은 그 후대에까지 계속되는데요 정종 역시 서경에 크게 토목사업을 벌이다가 일찍 죽자 노동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기뻐 날뛰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고려 초기의 평양은 국가적 노력이 투입될 만큼 중요한 곳이었고 또 그만큼 처음에는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신라가 935 년에 자진 복속되고
후백제가 936 년에 멸망하는데
평양은 태조 원년인 918 년부터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고려가 발해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사실은 태조 8 년 925 년 기사에도 나오는 만큼 당연한 사실인데요
우리는 익히 대동강을 경계로 신라와 당이 고구려를 나누어 가진 만큼 후고구려, 즉 고려 역시 초기의 북계가 대동강 이남이었으리라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당나라의 도호부가 북쪽으로 옮겨간 사실이나
이후 당나라가 요동 이동, 이남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한 사실 등에서

과연 신라가 이러한 정황 속에서 대동강 이남만 먹고 말았을까 하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고 봅니다

또 발해가 멸망하기 전부터 고려의 북계에서는 흑수말갈이 활동을 하며 귀부해 오기도 하고 거란이 활동하며 조공품을 보내오기도(922년) 합니다

즉 발해가 멸망하기 전부터 고려 북계와 접한 요동, 남만주 일원에 대하여 발해의 통제력이 이미 상실돼 무정부 상태와 다름 없이 돼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상황에서 고려는 남쪽으로 후백제를 제압하는 것에 힘을 씀과 동시에 북진을 경주했다고 보여집니다

발해 유민의 고려 망명은 925 년을 시작으로 근 2 세기 동안 계속됩니다
이러한 발해 유민의 대거, 지속 망명은 고려의 정통성과 함께 북진 정책에 명분을 더해 주었으리라 보입니다

발해 말기와 멸망 직후에 흑수말갈을 중심한 여진족이 요동부터 남만주에 이르는 지역에서 횡으로 퍼져 활동하면서 거란과 고려의 직접 접촉의 완충역할을 하였고

이 상황에서 광종 때에 '생여진을 몰아내고 요나라 동경부터 안북에 이르는 수백리'를 개척'하는 북방 영토 획득이 가능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고려의 북방 영토는 금나라가 들어선 이후로 요동 남단으로 축소가 되며 이러한 상황은 서긍의 고려도경에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ㅡㅡㅡㅡㅡㅡㅡ

926 년 발해 멸망
935 년 신라 복속
936 년 후백제 멸망

고려사 기록 중 서경을 키워드로 한 초기 기록 요약 발췌

<918 년 9 월 (음) 태조 1 년>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지(諭旨)를 내렸다.
“평양(平壤)은 옛 도읍으로 황폐한 지 오래지만 터는 그대로 남아있다. 숲이 울창해 번인(蕃人 : 女眞族)들이 그 곳에서 사냥질하느라 옮겨다니면서 변경 고을을 침략해 큰 피해를 끼치고 있다. 백성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국경의 방어태세를 튼튼히 해 후대에 길이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드디어 평양을 대도호(大都護)로 삼고는 사촌 동생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열평(列評)을 보내 수비하게 했다.

<919 년 10월 (음) 태조 2 년>

평양(平壤)에 성을 쌓았다.

<921년 태조 4 년>

2 월ㆍ4 월 (음)
흑수 말갈 등의 귀순

10월 20일(음)
왕이 서경에 행차하다   

<922년 미상>

고관의 가족을 서경으로 이주시키고 내성을 쌓다   

이 해에 대승(大丞) 질영(質榮)과 행파(行波) 등의 가족[父兄子弟]과 여러 군현(郡縣)의 양가(良家) 자제를 이주시켜 서경(西京)을 충실하게 하였다.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새로 관부와 관리를 두었으며 비로소 재성(在城)을 쌓았다. 〈왕이〉 직접 아선성(牙善城) 백성이 거주지를 정하였다.


<925년 태조 8 년>

3월 (음)
왕이 서경(西京)으로 행차했다.


9월 (음)
발해(渤海)의 장군인 신덕(申德) 등 5백 명이 투항해왔다.
발해의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과 대균로(大均老), 사정(司政) 대원균(大元均), 공부경(工部卿) 대복모(大福暮), 좌우위(左右衛) 장군(將軍) 대심리(大審理) 등이 1백호를 거느리고 귀부해왔다.


12 월 (음)
발해의 좌수위(左首衛) 소장(小將)인 모두간(冒豆干)과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등이 백성 1천호를 거느리고 귀부해왔다.


<926년 12월 (음)>

왕이 서경에 가서 초제를 지내다   

<929년 4월 6일(음)>

왕이 서경의 주진을 순시하다

<930년 5월 29일(음)>

왕이 서경에 행차하다   

<930년 6월 8일(음)>

왕이 귀경하다   

<930년 12월 1일(음) 태조 13 년>

서경에 학교를 열다

겨울 12월 경인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학교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931년 11월 28일(음)>

왕이 서경 및 주진을 순시하다   

<932년 5월 3일(음)>

신하들을 경계하는 유지를 내리다

<934년 1월 (음) 태조 17 년>

왕이 서경에 가 북방 진들을 순시하다

<934년 미상>

서경에 재해가 발생하다   

<935년 9월 2일(음) 태조 18 년>

왕이 황주와 해주를 순시하다

<938년 7월 (음) 태조 21 년>

서경에 나성을 쌓다

<943년 4월 (음) 태조 26 년>

왕이 훈요10조를 내리다

다섯째, 내가 삼한(三韓) 산천의 음우(陰佑)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서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뿌리가 되고 대업을 만대(萬代)에 전할 땅이다. 마땅히 춘하추동 네 계절의 중간 달[四仲月]에 왕은 그 곳에 가서 100일이 넘도록 체류함으로써 〈나라의〉 안녕(安寧)에 이르도록 하라.


<947년 미상 정종 2 년>

서경에 왕성을 쌓다

<949년 3월 13일(음) 정종 4 년>

왕이 죽자 역부들이 기뻐하다

3월 병진 왕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동복아우 왕소(王昭)를 불러 왕위를 넘기고 제석원(帝釋院)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훙서하니, 왕위에 있은 지 4년이며 나이는 27세였다. 왕의 성품이 부처를 좋아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많아서, 처음에 도참설(圖讖說)을 따라 도읍(都邑)을 서경(西京)으로 옮기기로 결의하고 장정[丁夫]을 징발하여 시중(侍中) 권직(權直)에게 궁궐(宮闕)을 건축하게 하였다. 노역(勞役)이 그치지 않고 또 개경(開京)의 민호(民戶)를 뽑아서 〈서경을〉 채웠으므로, 많은 백성이 따르지 않고 원망과 비방이 들끓더니 왕이 훙서하였다는 말이 들리자 역부(役夫)들이 기뻐 날뛰었다.

감방친구 17-12-02 22:15
만약에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요동에 있었거나 옮겨갔다 다시 옮겨온 것이라면

ㅡ 요동의 어디로 비정될 수 있는가?
ㅡ 왕건 때부터 근 1 세기 동안 조성된 도시를 그렇게 쉽게 옮길 수 있는가?
감방친구 17-12-02 22:20
제 개인의 보잘 것 없는 경험으로 비추자면
이러한 쟁점들은
얼마나 악착 같이 달라붙느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투여한
ㅡ 시간
ㅡ 집중
ㅡ 양심

그래서 이곳을 관전하는 사람 가운데에 청소년 여러분이 계시면 역사연구를 진로로 선택하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 역사는 여러 현안과 쟁점이 산적하여
거의 금광에 가깝습니다
감방친구 17-12-02 23:05
晉義熙後, 其王高璉始居平瓖城.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至王建, 以平壤爲西京.

진(晉) 의희(義熙) 연간 후반에 그 왕 고련(高璉)이 처음으로 평양성(平壤城)에 머물렀다[居]. 당(唐)이 고려(高麗)를 정벌할 때 평양(平壤)을 공략하여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리 되는 데에 있었는데, 평양의 옛터가 아니었다. 왕건(王建)에 이르러 평양이 서경(西京)이 되었다.

ㅡㅡㅡㅡㅡ

일부 비주류 사학계에서는 위 문장의 해석을
ㅡ 왕건의 평양은 장수왕의 평양이 아니다
로 해석하는데
사실 이 해석은 아무리 비주류의 편을 들으려 해도 비합리적으로 생각됩니다. 즉 문장 자체의 해석은 위의 해석이 합리적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원사 지리지의 이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ㅡ 장수왕의 평양은 압록수 위쪽에 있었다(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는 것이죠
ㅡ 즉 지금의 평양은 장수왕의 평양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여기에서 추론적으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1) 왕건의 고려가 장수왕의 평양을 수복했는가?
2) 그게 아니면 장수왕의 평양이 아닌 곳을 단지 고려의 북계에 위치한, 고구려의 옛 성터라 하여 평양이라 이름하고 후에 서경으로 삼은 것인가?

3) 평양이 서울이라는 뜻의 말이라 한다면 평양이 여러 곳일 수 있지 않은가?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
저는 고려의 서경이 고구려의 남경이나 한성일 수도 있거나 고구려 부흥군의 중심지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하는 가정을 해보는 것이죠
감방친구 17-12-02 23:24
A. 원사 지리지의 해당 기록은

1) 왕건의 평양은 장수왕의 평양이 아니다(X)

2) 장수왕의 평양은 압록수 동남쪽 천여 리에 있지 않았다(0)

그렇다면 2)에 대해서 어떻게 추론 할 수 있는가?

B. 장수왕의 평양은 어디인가? 압록수 동남쪽 천여 리에 있지는 않으나 압록수 이남에 없었다는 말은 아니므로 지금의 평양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는 문장에서 서술하는 사건의 흐름을 봐야 한다

ㄱㅡ당이 고려 정벌
ㄴㅡ평양이 함락
ㄷㅡ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 감
ㄹㅡ압록수 동남쪽 천여 리 되는 곳에 (그 나라가) 있었는데
ㅁㅡ그곳은 평양이 있던 옛 지역이 아니다

원사 지리지 기자가 고려를 고구려의 연속성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면
ㄷ 부터 고려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장수왕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고 압록수 동남 천여 리가 지금의 개성을 가리키는 말이라 한다면
ㄴ의 서술과 맞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개성은 지금 평양의 동쪽에 위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성은 평양의 남쪽이다

또한 서술 태도에 있어서 지금의 평양에서 지금의 개성으로 옮겨갔다 한다면 구지 압록수를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갔다'와 '옛 평양이 있던 곳이 아니다' 사이에 삽입할 필요가 있을까?
감방친구 17-12-02 23:27


요동(장수왕의 평양) 함락 ㅡ 동쪽으로 옮겨감ㅡ 압록수 ㅡ 동남쪽 천 여리(개성)



장수왕 평양 ㅡㅡㅡㅡ 동쪽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압록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압록수 동남쪽 천여 리
코스모르 17-12-02 23:40
아니 서경이 요동이라면..... 고려시대 위화도 회군은 뭐고... 고려 초 양규장군이나. 귀주성전투나 이게 다 거짓이란 이야긴가요? 조선초 요동정벌도 그렇고
비좀와라 17-12-02 23:45
역사책을 뒤져봐야 겠지만...

발해는 5경 체제를 유지 했습니다. 경 즉 capital city가 하나가 아니란 말이죠.

고구려나 고려 그리고 여타 한국의 여러 왕조 역시 다경 체제를 유지 했을 것 입니다. 이러한 다경체제는 유목민의 행제체제로 결국은 한국인의 조상은 유목민 이라는 것이죠.

고려도 기록을 보면 1경 체제가 아니라서 여러 경을 돌아 가면서 통치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경우 여름궁전이나 겨울궁전 등을 만들어 운영 합니다.

고려는 특별하게 큰 궁전을 만들지는 않고 이동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고려도경의 기록에서 알
 수 있죠. 그리고 세금도 역시 유목민족 특유의 형식으로 징세 했음을 알 수 있기에 고려는 전형적인 유목국가 입니다.

세금의 10분의 2나 1을 걷는 형식은 유목민족 특유의 형식이고 10분의 4나 5를 걷는 형식은 농경민족의 형식입니다. 조선도 결국은 유목민족으로 몽골계라고 봐야 한단 말이죠.

조선도 세조 당시에 6경 체제를 확립 했습니다. 이것을 교과서에서는 언급도 않하고 학자들도 함구 하지만 조선의 수도도 한양 만이 아니란 말입니다.

조선의 수도는 상경 동경 서경 남경 북경 중경 모두다 조선의 영토란 말이죠. 이 6경 중 조선의 왕실은 서경 즉 왕경(한경)에 있었다고 봐야 한단 말이죠. 그리고 이 육경의 위치는 아무도 모르고함구하고 있는 것이죠. 그냥 생각해도 저 경들의 이름이 한반도에 있는 것들이 아니잖아요.

가끔가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채에 그려진 경들의 위치 같은 것이 나타나지만 현재의 우리로선 이해가 되질 않기에 함구하는 것이죠. 이래서 함부로 인식이나 이해로 역사를 재단하면 안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모른다고 해서 부정하면 역사는 왜곡되고 말거든요.
도배시러 17-12-03 01:43
금사에 고구려 평양은 없고 요양의 동경로가 있죠.
요사.원사에는 고구려 평양이 있고요.

금사에는 특이하게 백제하가 나오죠 百濟河
꼬마러브 17-12-03 02:25
골치 아픈 문제네요.

『제왕운기』를 보면, 고구려가 마한의 왕검성에서 개국했고, 그 위치는 고려의 서경이라 나오는군요.

『제왕운기』<고구려기>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五代史曰. 高句麗扶餘別種也.)
도배시러 17-12-03 02:37
고구려는 동서가 길고 남북이 협소한 국가입니다.
고구려가 남쪽으로 내려오면 북방 고구려 영토는 신화가 되어버리죠
꼬마러브 17-12-03 03:01
여기서 마한의 왕검성을 요양 일대로 본다면, 고려의 서경도 요양. 고구려는 요양 일대에서 건국된 것

북한 사학계의 통설대로 평양 일대로 본다면, 고려의 서경은 평양. 고구려는 평양 일대에서 건국된 것
감방친구 17-12-03 05:11
마수산, 마읍산 이런 게 왠지 마한과 관련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되네요

저 역시 마한이 본래 요동 남부(남만주)까지가 아니었을까 추정하는 사람이거든요
꼬마러브 17-12-03 02:56
글과는 관계 없을지도 모르지만, 평양에 관하여 생각할 부분이 또 있습니다.

<삼국유사> 실성왕 - 의희(義熙) 9년 계축(서기 413)에 평양주(平壤州)의 큰 다리가 완성되었다.

義熙九年癸丑 平壤州大橋成[恐南平壤也 今楊州]

<삼국사기> 실성이사금 - 새로 평양주(平壤州)에 큰 다리를 세웠다.

新成平壤州大橋

- 여기에 나오는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든, 아니면 한성으로 보든 ... 당시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말이 안되는 기록이죠.
 
그런데 문제는 교차검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감방친구 17-12-03 03:03
오ㅡ 이 건 처음 보네요
생각지도 못 했습니다
감방친구 17-12-03 03:04
어떻게 교차검증이 되나요?
꼬마러브 17-12-03 03:07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서로 일치한다는 의미입니다.
감방친구 17-12-03 03:12
아 그렇군요
저는 또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과 교차되는가 기대했습니다

박지원의 말 대로 패수니 평양이니 하는 명칭이 퍽 애용된 예에 해당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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