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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0일 (토)

[한국사] 고려시대 서경은 지금의 평양인가?

감방친구 조회 : 3,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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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주 복잡합니다
여말선초에는 지금의 평양을 서경으로 인식을 하고 있었고
제 예전 글  '구월산은 아사달인가?'에서 기자신앙을 잠시 다루었는데 이 기자신사가 12 세기 초에 처음 세워지거든요?
이를 통해 보면 지금의 평양이다 서경이다 하는 것은 12세기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이전 고려 개국초 왕건 때까지 그 서경이 딱 하나거든요

그럼 뭐여? 그 서경이 그 서경이고 그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네? 따질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강동 6주와 고려시대 압록강이 지금의 서북한이 아님을 고찰하였지요?
강동 6주가 혼하 위에 있고 압록강이 요하~동요하면 이게 서경과 아귀가 맞질 않아요

그리고 분명하게 상이한, 상충하는 다음의 두 기록은 어쩔 것이냐 이 말입니다

요사  지리지의 동경요양부는 요나라 동경이 전ㆍ후조선, 위만 조선의 왕검성, 장수왕의 평양성이라고 밝히고 있어요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의 서경유수관 평양부도 역시 서경이 고조선의 왕검성이요 장수왕의 평양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는 말이죠

제가 무슨 역사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닌데 또 한번 꽂히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질머리라 진짜 골치 아프네요 할 일도 많고 시간도 없는데

하여 저는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을 미뤄두고자 합니다


1.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 평양부
西京留守官 平壤府

본래 삼조선(三朝鮮)1)의 옛 도읍이다. 당뇨(唐堯) 무진년(戊辰年, 기원전 2333)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해 평양에 도읍하니 단군(檀君)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殷))나라를 정벌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다. 그 41대손 기준(箕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천여 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기준의 땅을 빼앗고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으로도 적으며 평양을 말함】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 그 손자 우거가 중국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한나라 무제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획정하면서 왕험(王險)을 낙랑군(樂浪郡)2)으로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보장왕 27년(668)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와 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결국 이 지역은 신라로 편입되었다.
태조 원년(918)에 평양이 황폐하다하여 염주·백주·황주·해주·봉주의 백성을 이주시켜 민호를 채우고 대도호부로 삼았다가 얼마 후 서경(西京)으로 하였다. 광종 11년(960)에 서도(西都)로 명칭을 고쳤다. 성종 14년(995)에 서경유수(西京留守)를 칭하였다. 목종 원년(998)에 또 호경(鎬京)이라고 고쳤다. 문종 16년(1062)에 다시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이라 칭하면서 경기(京畿) 4도(道)를 설치했다. 숙종 7년(1102)에 문반(文班)·무반(武班)과 오부(五部)를 두었다.
인종 13년(1135)에 서경의 승려 묘청(妙淸)과 유참(柳旵), 분사시랑(分司侍郞)3) 조광(趙匡)4) 등이 반란5)을 일으키고서 군사를 보내 절령(岊嶺)을 통과하는 도로를 끊었다. 이에 원수 김부식(金富軾)6) 등에게 명하여 삼군(三軍)7)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여 평정하였다. 이 때 유수(留守)·감군(監軍)8)·분사어사(分司御史)9) 외에는 관반(官班)을 모두 없앴다가 얼마 후 경기 4도(道)를 삭제하고 6개 현(縣)을 두었다.
원종 10년(1269)에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10) 최탄(崔坦)과 삼화현(三和縣)의 교위(校尉)11) 이연령(李延齡) 등이 반란12)을 일으켜 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여러 성들을 바치며 몽고에 귀부했다. 몽고는 서경을 동녕부(東寧府)13)로 삼고 관리를 두었으며, 자비령(慈悲嶺(岊嶺))을 경계로 획정하였다. 충렬왕 16년(1290)에 원나라가 서경과 여러 성들을 돌려주므로 마침내 다시 서경유수관으로 하였다. 공민왕 18년(1369)에 만호부를 설치했다가 뒤에 평양부(平壤府)로 고쳤다.
대동강(大同江)이 있다.【곧 패강(浿江)으로 왕성강(王城江)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강의 하류는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된다】 대성산(大城山)이 있다.【구룡산(九龍山), 혹은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부른다. 『문헌통고(文獻通考)』14)에 “평양성(平壤城)의 동북쪽에 노양산이 있다.”고 기록했는데, 바로 이 산을 일컬은 것이다. 산정에는 연못이 세 개가있다】. 옛 성터가 2개 있다.【하나는 기자(箕子) 때 쌓은 것으로서 성안을 정전제(井田制)15)를 써서 구획한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성종 때 쌓은 것이다】. 기자묘(箕子墓)가 있다.【부성(府城)의 북쪽 토산(土山) 위에 있다】.
동명왕묘(東明王墓)가 있다.【부(府)의 동남쪽 중화(中和)지역인 용산(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 진주묘(珍珠墓)라고 부른다. 또 인리방(仁里坊)에 동명왕의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절후에 맞추어 어압(御押)16)을 내려주어 제사를 지나게 했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도 역시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지금까지도 고을 사람들이 소원을 빌 일이 있으면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사당이라고 한다】. 을밀대(乙密臺)가 있다.【금수산(錦繡山) 정상에 위치하며, 그 아래 층층절벽 곁에 있는 영명사(永明寺)17)는 옛날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다. 그 안에 기린굴(麒麟窟)이 있고, 굴의 남쪽 백은탄(白銀灘)에는 바위가 조수(潮水)에 따라 드러났다가 잠겼다가 하는데 조천석(朝天石)이라 부른다.】. 속현이 4개이다.

ㅡ 하략 ㅡ


2.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동경요양부는 원래 조선 땅이다. 주국(周國)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조선으로 갔다. 그래서 그를 조선에 봉하였다.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었는데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밖의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40여 세를 전하여 연국(燕國)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장새(障塞)를 설치하였다. 진국(秦國) 때에는 요동의 외요(外徼)에 속하였다. 한국(漢國) 초기에 연국 사람 위만(滿)이 옛 진국(秦國)의 공터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등의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후한국(後漢) 때에 청주(靑州)와 유주(幽州)에 출입하였다. 요동군과 현도군은 연혁이 일정하지 않았다.

한나라 말기에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여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거쳐 손자 공손연(公孫淵)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소원(紹漢)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위(魏)나라가 멸망시켰다. 진(晉)나라가 고려(高麗 ; 고구려)를 함락시켰고, 나중에는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속하였다. 아들 보(寶)는 고구려 왕 안(安 ; 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대씨는 처음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후(武后 ; 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년간에 거란(契丹) 이진충(李盡忠)이 핍박을 받자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요수(遼水)를 건너 스스로 지키니 무후가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아들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 자칭하였다. 발해 북쪽을 영역을 병합하니 영토가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중종(中宗)이 도읍한 곳에 홀한주(忽汗州)라는 명칭을 내려주고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다. 12대 지나 대이진(大彝震) 때에 참람되게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본따서 짓고,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두었으니 요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라고도 한다.

ㅡ 하략 ㅡ

도배시러 17-12-01 21:24
이 문제는 원사지리지로 결론 납니다.
고려 왕건은 평양을 천리 동남으로 옮겨서 가짜 평양을 서경이라 했다고 하죠
東甯路 本高句驪 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菟郡,此樂浪地也。
晉義熙後,其王高璉(장수왕)始居平壤城。
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
감방친구 17-12-01 21:32
오호ㅡ!!!
바로 이 겁니다
아니 요새 뭐 하시느라 안 보이셔서
혼자 애 먹었습니다
감방친구 17-12-01 21:36
중국사서에서 고려의 서북계를 흐르는 압록은 푸를 록이 아니라 물수 변의 맑을 록을 씁니다
하니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
이 문장의 압록은
요와 고려의 경계로서의 압록이 아니고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 때의 그 압록이 아닙니다
지금의 압록강이죠
감방친구 17-12-01 21:58
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함락시키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갔다 (이건 발해를 말하는 건가?)

압록수 동남쪽 천여 리에 있는 평양은 옛날의 평양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다
Marauder 17-12-01 23:00
근데 이 경우 고려 경계에있어서는 문제가 발생하게되죠. 전에 촐라롱콘님이 서경과 압록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다는 글을 보여주신적이 있는데... 그 내용과도 상충되구요.
감방친구 17-12-01 23:07
네, 맞는 지적이십니다
사실 위 본문 내용에서도 제가 언급했구요
그러나 이런 기록 하나하나 모아서 종합적으로 검토해야겠기에 소중한 것이죠
Marauder 17-12-01 23:48
저도 동의합니다. 가끔은 고려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서경을 회복했을 가능성이 있지않을까... 그런 생각도 드는군요.
감방친구 17-12-01 23:12
이를테면 서경과 압록 사이에 있는 타수와 다하에서 강감찬에 의해서 거란군이 괴멸되거든요

타수는 학계 통설에 의해 청천강으로 다하는 압록강 지류로 비정됩니다

그런데 타수는 요사지리지에 혼하 근방 귀주 근처에 있다고 적혀 있구요

타수 문제는 나중에 더 종합적으로 다룰 예정인데 당서에도  요동에 타수가 있는 것으로 나와요

그래서 쉽지가 않습니다
의로운자 17-12-03 23:48
아하.. 이제야 의문이 풀리네요 감사합니다.
인류제국 17-12-01 22:44
괜히 아는척 하고 환빠라고 짓걸이는 애들은 좆문가죠

그렇게 역사를 잘아시면 학자나 하지

왜 키보드 워리어나 하는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방친구 17-12-01 22:56
ㅎㅎㅎ 그러게나 말입니다
시간이 남아돌고 인생이 흥에 겨워서 저지래 하며 남 헐뜯고 괴롭히며 이냥저냥 사는 거죠
감방친구 17-12-01 23:18
저는 사실 이 시점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목종 원년(998)에 또 호경(鎬京)이라고 고쳤다. 문종 16년(1062)에 다시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이라 칭하면서 경기(京畿) 4도(道)를 설치했다."
감방친구 17-12-01 23:22
서경의 격을 鎬를 붙여 높인 것으로 보이는데요
1062년에 다시 서경이라는 이름으로 고치는데
그 사이에도 서경 기록은 무수히 나옵니다
서경을 호경으로 고친 목종 시대에도 나와요

해서
서경을 두 곳으로 둔 것이 아닌가 가정해 보는 것이죠
도배시러 17-12-02 08:58
원사지리지 동녕로 정리
- 원의 동녕로는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장안성이다.
- 고려 왕건은 엉뚱한 곳을 평양이라 하더니 서경이라고 했다.
도배시러 17-12-02 10:32
송-요-금-원-명 의 기간에
고구려 평양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경우는 [금]
거란의 금나라 시대에 고려가 평양-장안성을 확보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도배시러 17-12-02 20:45
여진의 금 ㅋ
비좀와라 17-12-02 21:47
저 역시도 고려가 평양-장안성을 확보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호경은 주나라 수도를 말하는 것으로 요나라와 고려와의 시각차는 호경을 장안이라고 보는 요나라의 시각과 호경을 낙양이라고 보는 시각차이 입니다.

왜 이런 시각차이가 나는 가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의견이 없지만 한 가지 추정을 할 수 있죠.

후당을 세운 왕건은 당나라 왕실의 방계로 원래는 이씨 이어야 하는데 왕씨를 사용 하는 것 입니다. 이 후당이 망하고 왕건은 하남 절도사로 임명 되죠. 이 왕건이 고려 왕건 이라고 가정하면 윗 글이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왕건은 남부여 부여 태비의 직계 후손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요.

장안이나 낙양 모두 Capital city의 일반적인 명사로도 사용 되어서 서울과 같이 사용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서경과 서울은 같은 말이란 말이죠.

앞서도 말했지만 조선 왕실은 평안도 사투리를 사용한 서북사람으로 평양사람들 이었을 거란 말이죠.
감방친구 17-12-02 21:59
그 설은 진위를 떠나 퍽 신기하더군요
의로운자 17-12-03 23:47
기록만보면 평양의 위치는 1000리씩 순간이동하네요 평양이 두곳이였던게 맞나봅니다.
분명한건 고대기록의 평양은 반도가 아닌게 확실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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