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젊은 주류사학계(기경량 위시)에 대한 비판
감방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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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가야, 기경량, 안정준 제씨의 한 인터뷰 기사에 네이버 아이디 manu****를 사용하는 한 과객의 울분을 토하는 장문의 댓글이 인상 깊어서 이곳에 옮깁니다
이 댓글러는 아마도 이곳 동아게에서도 활동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만약 그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실례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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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평양 정백동 고분에서 ‘초원 4년 호구부’ 목간이 나왔다 ㅋ그걸 제일 먼저 내세우는거냐? 그거 얼마나 연구나 해봤냐? 강단주류사학은 북한에서 "점제현 신사비는 조작된 것이다""평양지역은 낙랑군 지역이 아니다"라는 북한학계의 발표가 나올때마다 부인해오더니 북한에서 낙랑 목간을 발견했다고 하자 북한 역사학를 신봉하기로 결의한 듯이 열광하고 좋아한다. 그런데 정작 북한학자 손영종이 북한 학술지 논문에서 목간은 "낙랑군이 요동반도 천산산맥일대에 위치했다는증거"라고주장하는 것은 애써 무시하고 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냐
낙랑목간에 대해서 처음 논문을 쓴 사람은 북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손영종이다. 낙랑목간에 대한 남한의 여러 논문들은 모두 이 손영종의 논문을 가지고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그런데 손영종은 “초원 4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의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하였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손영종은 낙랑군 소속인 제해, 해명, 함자현의 3개현은 “료동반도 남단의 력사지리적 및 경제지리적 환경조건과 대비 고찰해 보면 잘 대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북한의 역사학자 손영종이 "력사과학" 198호(2006년)에 기고한 "낙랑군 남부지역의 위치"에 관한 글에서 손영종은 목간에 나오는 인구를 분석하고, 또 그 현 중에서 위치가 요녕 지역이 분명한 탄렬(分黎山列水所出西至?蟬入海行八百二十里), 패수(水西至增地入海), 함자(帶水西至帶方入海) 등이 들어 있으므로, 낙랑군 목간은 낙랑군이 천산산맥 서쪽에 있을 때인 기원전 45년에 요녕지역에서 낙랑군 인구조사를 한 것인데, 낙랑군의 아전이었던 피장자가 무슨 죄를 저질렀거나 다른 이유로 낙랑국으로 도망왔다가 자기 소지품과 함게 평양으로왔다 묻힘
고분에서 나온 이배(耳杯), 칠기(漆器) 등 유물은 무역이나 교류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므로, 설사 그것이 낙랑고분에서 나온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 한사군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상식 아니냐?
실학자 얘기하면서 왜 박지원은 빼놓나? ....애닯도다!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여 붙여대여 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浿水)까지 찾게 되어 혹은 압록강(鴨綠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 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글어들고 만 것이다. 이것은 무슨까닭일까? 평양을 한 군데 붙박이로 정해 두고 패수는 앞으로 물려내여...
기자기 사기치냐 저 청년들이 사기치냐? 장난하냐? → "주류 사학계는 <삼국지>나 <후한서> 같은 1차 사료를 종합하면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고 말한다. ..." 어디 삼국지, 후한서에 그런 근거가 있냐? 장난치냐? 지금은 조금만 연구하면 다아는 것을 어디 사기를 치고 있어?
후한서 어디에 한사군 한반도설이 있냐? 1) 후한서 광무제본기 初, 樂浪人王調據郡不服〔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 秋, 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後漢書 「光武帝本紀」 建武 6년〕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고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후한서 어디에 한사군한반도설 근거가 있더냐? 2) 후한서 「최인 열전」) 憲擅權驕恣,駰數諫之。及出擊匈奴,道路愈多不法,駰為主簿,前後奏記 數十,指切長短。憲不能容,稍疎之,因察駰高第,出為長岑長〔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 駰自以遠去,不得意, 遂不之官而歸, 永元四年,卒于家〔後漢書 「崔駰 列傳」〕 -최인(崔駰:?~92)은 후한 때 경학가이자 문학가이다. -낙랑군 장점현은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는 기록 -최인이 낙랑군 장잠현령으로 임명된 구체적인 기록을 가지고 위치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
후한서 어디가 한사군한반도설이냐 3) 『후한서』 「군국지(郡國志)」 ‘유주(幽州) 낙랑군’ 樂浪郡: 朝鮮…浿水…占蟬, 遂城…帶方…列口〔郭璞注山海經曰, ‘列,水名。列水在遼東’〕, 長岑…樂都〔『後漢書』 「郡國志」 ‘幽州 樂浪郡’ -낙랑군 열구현은 열수(列水)라는 강이 있어서 붙은 이름인데, 열수는 고대 요동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 중국 고대사서들은 한결같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후한서 어디에 한사군한반도설근거문헌이있냐? 4) 부여가 낙랑을 치려면 -> 안제 영초 5년, 부여왕 시(始)는1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후한서』동이열전 부여국전 낙랑이 평양에 있다면 고구려가 위에 있고 그위에 부여가 있다. 부여가 낙랑을 치려면 고구려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 낙랑평양설은 말이 안된다. 부여가 낙랑을 치려면 부여와 낙랑이 국경을 맞대고 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면 낙랑은 한반도안은 아닌것이다.
" 사서에 낙랑군이 하북성·요령성 지역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교군·교현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낙랑군은 처음부터 한반도에 설치되었고, 그 낙랑군이 미천왕의 공격으로 궤멸된 후 313년에 요서로 이동하면서 난하 방면에 비로소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하려는 의도 같은데 참으로 어이없는 발상이다. 왜 그러냐 낙랑군과 대방군을 요서로 이동시킨 사람은 모용외이다. 모용외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요서로 이동시킨 313-314년경은 모용외가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고 있던 시기라 모용외와 진나라가 적대관계에 있던 시기다.
그리고 이 무렵 난하 방면에는 모용선비와 적대관계에 있던 단선비가 있었다. 모용씨가 313-314년경에 낙랑군, 대방군을 난하 방면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난하 방면에 이때 비로소 낙랑군 수성현이 생겼다는 주장은 313-314년경 모용씨 영역이 어디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이고, 진개의 조선 침공 후 연나라의 동변 즉 연장성의 동단이 어디인지?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킬 때 한나라와 위만조선 경계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문헌좀 제대로 봐라 제발..
아래 위가야, 기경량, 안정준 제씨의 2016년 인터뷰 기사
http://m.news.naver.com/read.nhn?oid=032&aid=0002690541&sid1=103&backUrl=%2Fhome.nhn&light=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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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평양 정백동 고분에서 ‘초원 4년 호구부’ 목간이 나왔다 ㅋ그걸 제일 먼저 내세우는거냐? 그거 얼마나 연구나 해봤냐? 강단주류사학은 북한에서 "점제현 신사비는 조작된 것이다""평양지역은 낙랑군 지역이 아니다"라는 북한학계의 발표가 나올때마다 부인해오더니 북한에서 낙랑 목간을 발견했다고 하자 북한 역사학를 신봉하기로 결의한 듯이 열광하고 좋아한다. 그런데 정작 북한학자 손영종이 북한 학술지 논문에서 목간은 "낙랑군이 요동반도 천산산맥일대에 위치했다는증거"라고주장하는 것은 애써 무시하고 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냐
낙랑목간에 대해서 처음 논문을 쓴 사람은 북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손영종이다. 낙랑목간에 대한 남한의 여러 논문들은 모두 이 손영종의 논문을 가지고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그런데 손영종은 “초원 4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의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하였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손영종은 낙랑군 소속인 제해, 해명, 함자현의 3개현은 “료동반도 남단의 력사지리적 및 경제지리적 환경조건과 대비 고찰해 보면 잘 대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북한의 역사학자 손영종이 "력사과학" 198호(2006년)에 기고한 "낙랑군 남부지역의 위치"에 관한 글에서 손영종은 목간에 나오는 인구를 분석하고, 또 그 현 중에서 위치가 요녕 지역이 분명한 탄렬(分黎山列水所出西至?蟬入海行八百二十里), 패수(水西至增地入海), 함자(帶水西至帶方入海) 등이 들어 있으므로, 낙랑군 목간은 낙랑군이 천산산맥 서쪽에 있을 때인 기원전 45년에 요녕지역에서 낙랑군 인구조사를 한 것인데, 낙랑군의 아전이었던 피장자가 무슨 죄를 저질렀거나 다른 이유로 낙랑국으로 도망왔다가 자기 소지품과 함게 평양으로왔다 묻힘
고분에서 나온 이배(耳杯), 칠기(漆器) 등 유물은 무역이나 교류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므로, 설사 그것이 낙랑고분에서 나온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 한사군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상식 아니냐?
실학자 얘기하면서 왜 박지원은 빼놓나? ....애닯도다!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여 붙여대여 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浿水)까지 찾게 되어 혹은 압록강(鴨綠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 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글어들고 만 것이다. 이것은 무슨까닭일까? 평양을 한 군데 붙박이로 정해 두고 패수는 앞으로 물려내여...
기자기 사기치냐 저 청년들이 사기치냐? 장난하냐? → "주류 사학계는 <삼국지>나 <후한서> 같은 1차 사료를 종합하면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고 말한다. ..." 어디 삼국지, 후한서에 그런 근거가 있냐? 장난치냐? 지금은 조금만 연구하면 다아는 것을 어디 사기를 치고 있어?
후한서 어디에 한사군 한반도설이 있냐? 1) 후한서 광무제본기 初, 樂浪人王調據郡不服〔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 秋, 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後漢書 「光武帝本紀」 建武 6년〕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고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후한서 어디에 한사군한반도설 근거가 있더냐? 2) 후한서 「최인 열전」) 憲擅權驕恣,駰數諫之。及出擊匈奴,道路愈多不法,駰為主簿,前後奏記 數十,指切長短。憲不能容,稍疎之,因察駰高第,出為長岑長〔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 駰自以遠去,不得意, 遂不之官而歸, 永元四年,卒于家〔後漢書 「崔駰 列傳」〕 -최인(崔駰:?~92)은 후한 때 경학가이자 문학가이다. -낙랑군 장점현은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는 기록 -최인이 낙랑군 장잠현령으로 임명된 구체적인 기록을 가지고 위치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
후한서 어디가 한사군한반도설이냐 3) 『후한서』 「군국지(郡國志)」 ‘유주(幽州) 낙랑군’ 樂浪郡: 朝鮮…浿水…占蟬, 遂城…帶方…列口〔郭璞注山海經曰, ‘列,水名。列水在遼東’〕, 長岑…樂都〔『後漢書』 「郡國志」 ‘幽州 樂浪郡’ -낙랑군 열구현은 열수(列水)라는 강이 있어서 붙은 이름인데, 열수는 고대 요동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 중국 고대사서들은 한결같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후한서 어디에 한사군한반도설근거문헌이있냐? 4) 부여가 낙랑을 치려면 -> 안제 영초 5년, 부여왕 시(始)는1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후한서』동이열전 부여국전 낙랑이 평양에 있다면 고구려가 위에 있고 그위에 부여가 있다. 부여가 낙랑을 치려면 고구려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 낙랑평양설은 말이 안된다. 부여가 낙랑을 치려면 부여와 낙랑이 국경을 맞대고 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면 낙랑은 한반도안은 아닌것이다.
" 사서에 낙랑군이 하북성·요령성 지역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교군·교현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낙랑군은 처음부터 한반도에 설치되었고, 그 낙랑군이 미천왕의 공격으로 궤멸된 후 313년에 요서로 이동하면서 난하 방면에 비로소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하려는 의도 같은데 참으로 어이없는 발상이다. 왜 그러냐 낙랑군과 대방군을 요서로 이동시킨 사람은 모용외이다. 모용외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요서로 이동시킨 313-314년경은 모용외가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고 있던 시기라 모용외와 진나라가 적대관계에 있던 시기다.
그리고 이 무렵 난하 방면에는 모용선비와 적대관계에 있던 단선비가 있었다. 모용씨가 313-314년경에 낙랑군, 대방군을 난하 방면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난하 방면에 이때 비로소 낙랑군 수성현이 생겼다는 주장은 313-314년경 모용씨 영역이 어디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이고, 진개의 조선 침공 후 연나라의 동변 즉 연장성의 동단이 어디인지?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킬 때 한나라와 위만조선 경계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문헌좀 제대로 봐라 제발..
아래 위가야, 기경량, 안정준 제씨의 2016년 인터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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