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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7일 (토)

[한국사] 젊은 주류사학계(기경량 위시)에 대한 비판

감방친구 조회 : 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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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가야, 기경량, 안정준 제씨의 한 인터뷰 기사에 네이버 아이디 manu****를 사용하는 한 과객의 울분을 토하는 장문의 댓글이 인상 깊어서 이곳에 옮깁니다

이 댓글러는  아마도 이곳 동아게에서도 활동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만약 그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실례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청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1990년 평양 정백동 고분에서 ‘초원 4년 호구부’ 목간이 나왔다 ㅋ그걸 제일 먼저 내세우는거냐? 그거 얼마나 연구나 해봤냐? 강단주류사학은 북한에서 "점제현 신사비는 조작된 것이다""평양지역은 낙랑군 지역이 아니다"라는 북한학계의 발표가 나올때마다 부인해오더니 북한에서 낙랑 목간을 발견했다고 하자 북한 역사학를 신봉하기로 결의한 듯이 열광하고 좋아한다. 그런데 정작 북한학자 손영종이 북한 학술지 논문에서 목간은 "낙랑군이 요동반도 천산산맥일대에 위치했다는증거"라고주장하는 것은 애써 무시하고 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냐

낙랑목간에 대해서 처음 논문을 쓴 사람은 북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손영종이다. 낙랑목간에 대한 남한의 여러 논문들은 모두 이 손영종의 논문을 가지고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그런데 손영종은 “초원 4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의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하였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손영종은 낙랑군 소속인 제해, 해명, 함자현의 3개현은 “료동반도 남단의 력사지리적 및 경제지리적 환경조건과 대비 고찰해 보면 잘 대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북한의 역사학자 손영종이 "력사과학" 198호(2006년)에 기고한 "낙랑군 남부지역의 위치"에 관한 글에서 손영종은 목간에 나오는 인구를 분석하고, 또 그 현 중에서 위치가 요녕 지역이 분명한 탄렬(分黎山列水所出西至?蟬入海行八百二十里), 패수(水西至增地入海), 함자(帶水西至帶方入海) 등이 들어 있으므로, 낙랑군 목간은 낙랑군이 천산산맥 서쪽에 있을 때인 기원전 45년에 요녕지역에서 낙랑군 인구조사를 한 것인데, 낙랑군의 아전이었던 피장자가 무슨 죄를 저질렀거나 다른 이유로 낙랑국으로 도망왔다가 자기 소지품과 함게 평양으로왔다 묻힘

고분에서 나온 이배(耳杯), 칠기(漆器) 등 유물은 무역이나 교류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므로, 설사 그것이 낙랑고분에서 나온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 한사군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상식 아니냐?

실학자 얘기하면서 왜 박지원은 빼놓나? ....애닯도다!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여 붙여대여 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浿水)까지 찾게 되어 혹은 압록강(鴨綠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 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글어들고 만 것이다. 이것은 무슨까닭일까? 평양을 한 군데 붙박이로 정해 두고 패수는 앞으로 물려내여...

기자기 사기치냐 저 청년들이 사기치냐? 장난하냐? → "주류 사학계는 <삼국지>나 <후한서> 같은 1차 사료를 종합하면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고 말한다. ..." 어디 삼국지, 후한서에 그런 근거가 있냐? 장난치냐? 지금은 조금만 연구하면 다아는 것을 어디 사기를 치고 있어?

후한서 어디에 한사군 한반도설이 있냐? 1) 후한서 광무제본기 初, 樂浪人王調據郡不服〔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 秋, 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後漢書 「光武帝本紀」 建武 6년〕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고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후한서 어디에 한사군한반도설 근거가 있더냐? 2) 후한서 「최인 열전」) 憲擅權驕恣,駰數諫之。及出擊匈奴,道路愈多不法,駰為主簿,前後奏記 數十,指切長短。憲不能容,稍疎之,因察駰高第,出為長岑長〔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 駰自以遠去,不得意, 遂不之官而歸, 永元四年,卒于家〔後漢書 「崔駰 列傳」〕 -최인(崔駰:?~92)은 후한 때 경학가이자 문학가이다. -낙랑군 장점현은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는 기록 -최인이 낙랑군 장잠현령으로 임명된 구체적인 기록을 가지고 위치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

후한서 어디가 한사군한반도설이냐 3) 『후한서』 「군국지(郡國志)」 ‘유주(幽州) 낙랑군’ 樂浪郡: 朝鮮…浿水…占蟬, 遂城…帶方…列口〔郭璞注山海經曰, ‘列,水名。列水在遼東’〕,  長岑…樂都〔『後漢書』 「郡國志」 ‘幽州 樂浪郡’ -낙랑군 열구현은 열수(列水)라는 강이 있어서 붙은 이름인데, 열수는 고대 요동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 중국 고대사서들은 한결같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후한서 어디에 한사군한반도설근거문헌이있냐? 4) 부여가 낙랑을 치려면 -> 안제 영초 5년, 부여왕 시(始)는1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후한서』동이열전 부여국전 낙랑이 평양에 있다면 고구려가 위에 있고 그위에 부여가 있다. 부여가 낙랑을 치려면 고구려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 낙랑평양설은 말이 안된다. 부여가 낙랑을 치려면 부여와 낙랑이 국경을 맞대고 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면 낙랑은 한반도안은 아닌것이다.

" 사서에 낙랑군이 하북성·요령성 지역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교군·교현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낙랑군은 처음부터 한반도에 설치되었고, 그 낙랑군이 미천왕의 공격으로 궤멸된 후 313년에 요서로 이동하면서 난하 방면에 비로소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하려는 의도 같은데 참으로 어이없는 발상이다. 왜 그러냐 낙랑군과 대방군을 요서로 이동시킨 사람은 모용외이다. 모용외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요서로 이동시킨 313-314년경은 모용외가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고 있던 시기라 모용외와 진나라가 적대관계에 있던 시기다.

그리고 이 무렵 난하 방면에는 모용선비와 적대관계에 있던 단선비가 있었다. 모용씨가 313-314년경에 낙랑군, 대방군을 난하 방면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난하 방면에 이때 비로소 낙랑군 수성현이 생겼다는 주장은 313-314년경 모용씨 영역이 어디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이고, 진개의 조선 침공 후 연나라의 동변 즉 연장성의 동단이 어디인지?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킬 때 한나라와 위만조선 경계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문헌좀 제대로 봐라 제발..

아래 위가야, 기경량, 안정준 제씨의 2016년 인터뷰 기사
http://m.news.naver.com/read.nhn?oid=032&aid=0002690541&sid1=103&backUrl=%2Fhome.nhn&light=off

감방친구 17-06-09 10:49
저는 삼국사기를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읽는 게 취미인데 대략 다섯 번은 넘게 읽었습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교양적 수준에서 읽지만 이상한 게 많이 있습니다

그 이상한 것 가운데에 낙랑이 있습니다

어제 시간이 나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미천왕 대까지 읽었습니다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분명히 낙랑왕과 낙랑태수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왕은 왕이라 적고 태수는 태수라 적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접한 정치체 가운데 그 우두머리가 왕으로 불리는 낙랑, 태수라 불리는 낙랑 ㅡ 이렇게 두 개의 낙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대무신왕부터 태조대왕조까지의 기사를 보십시오.

대무신왕 2년(서기 19)
2년(서기 19)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二年 春正月 京都震 大赦 百濟民一千餘戶來投

대무신왕 11년(서기 28)
11년(서기 28) 가을 7월, 한의 요동(遼東) 태수(太守)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十一年 秋七月 漢遼東太守將兵來伐

대무신왕 15 년(서기 32년)
여름 4월,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리오?”
夏四月 王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대무신왕 20년(서기 37)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대무신왕 27년(서기 44)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屬漢

모본왕 2년(서기 49)
2 년 봄,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태조대왕 3년(서기 55)
3년(서기 55) 봄 2월, 요서에 열 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병사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태조대왕 4년(서기 56)
4년(서기 56) 가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개척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감방친구 17-06-09 10:59
위 삼국사기 기사문에서 든 의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ㅡ 백제의 위치가 어디이길래 백제에서 고구려로 무려 1천여 호(대략 5,000~10,000 여 명)가 귀순해 왔을까?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우리가 배운 바로는 낙랑이 있지 않은가?

ㅡ 낙랑왕 최리가 왕자 호동을 보고 북국신왕의 아들 아니오? 라 묻는 것을 보니 왕을 칭한 낙랑은 분명히 고구려 남쪽에 위치한다는 것인데 그 낙랑을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정벌하여 군현으로 삼았고 이에 살수 이남이 한나라 땅이 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낙랑군이 두 개가 된 것인가? 아니면 최리의 낙랑국이 애초에 낙랑군이었는가? 대체 살수는 어디인가?
감방친구 17-06-09 11:02
그리고 신라본기와 백제본기를 보면 이 두 국가의 북쪽에 분명히 낙랑이 존재합니다

백제의 경우는 대방태수와 동맹도 맺지 않습니까
감방친구 17-06-09 11:09
또 다음의 기사를 보세요

태조대왕 62년(서기 114)
62년(서기 114)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임금이 남해를 두루 돌아보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남해로부터 돌아왔다.
六十二年 春三月 日有食之 秋八月 王巡守南海 冬十月 至自南海

태조대왕 66년(서기 118)
66년(서기 118) 봄 2월, 지진이 났다.
여름 6월, 임금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 현도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六十六年 春二月 地震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菟 攻華麗城

태조대왕 저 시기의 강역은 남으로는 살수, 동쪽으로는 창해(동해)라 하는데 대체 남해를 두 달 동안 순시를 한다?

결국
ㅡ 최씨 낙랑은 고구려 이남, 즉 살수 이남에 위치했고
ㅡ 고구려는 지금ㅈ의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여 강역으로 삼고 있었고
ㅡ 수시로 요동군, 현도군을 공격하여 약탈을 하였고
ㅡ 광무제는 요동이나 현도에서 군사를 보내 낙랑을 정벌할 수 있었음에도 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최씨낙랑과 한의 요동군, 현도군 사이에 고구려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감방친구 17-06-09 11:19
또 다음의 기사를 보세요

태조대왕 69년(서기 121)
69년(서기 121) 봄, 한나라 유주(幽州) 자사 풍환(馮煥), 현도 태수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風)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략해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임금이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병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했다. 수성이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는데 풍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마침내 수성이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도, 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菟大守姚光遼東太守蔡風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王乃遣弟遂成 領兵二千餘人 逆煥光等 遂成遣使詐降 煥等信之 遂成因據險以遮大軍 潛遣三千人 攻玄菟遼東二郡 焚其城郭 殺獲二千餘人
여름 4월, 임금은 선비(鮮卑) 8천 명과 함께 요대현(遼隧縣)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풍이 병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에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는 스스로의 몸으로 채풍을 호위하여 막았으나 채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겨울 10월, 임금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백성들을 위문하고, 차등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肅愼)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 가죽 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임금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보냈다.
11월, 임금이 부여로부터 돌아왔다.
임금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12월, 임금이 마한(馬韓)과 예맥의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쳐 막고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夏四月 王與鮮卑八千人 往攻遼隧縣 遼東太守蔡風 將兵出於新昌 戰沒 功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 以身扞諷 俱歿於陣 死者百餘人 冬十月 王幸扶餘 祀太后廟 存問百姓窮困者 賜物有差 肅愼使來 獻紫狐裘及白鷹白馬 王宴勞以遣之 十一月 王至自扶餘 王以遂成統軍國事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태조대왕 70년(서기 122)
70년(서기 122), 임금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 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고구려는 한나라 요동군, 현도군을 수시로 약탈하면서 이들과 자주 싸웠는데 왜 낙랑군은 거론되지 않는 걸까요?

한나라에서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치는데 유주자사, 요동태수, 현도태수는 나오는데 왜 낙랑태수는 없을까요?

낙랑군이 지금의 요서에 있었다면 거론돼야 옳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낙랑군은 고구려의 서쪽에 없었다는 말인가?
감방친구 17-06-09 11:26
그런데 또 다음의 기사를 보세요

태조대왕 94년(서기146년)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한나라 요동의 동쪽도 남쪽도 아닌 서쪽을 습격하여 대방태수를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합니다
ㅡ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이 추출됩니다
ㅡ 대방태수가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에 있었다
ㅡ 낙랑태수의 처자식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에 있었다
감방친구 17-06-09 11:32
그렇다면 대체 태조대왕 94 년조 기사 100 여 년 전에 있었던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설치한 낙랑군은 뭘까요?

아니죠
낙랑군은 그전부터 있었는데
낙랑 땅을 바다를 건너 정벌해 군현으로 삼았다고 했으니
그 군현 이름이 또 낙랑이 된 건가요?

애초에 최리의 낙랑국이 낙랑군이었던 건가요?
그랬다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낙랑군이었으면 낙랑태수라 하지 왜 낙랑왕이라 합니까?

살수 이남에 있던 광무제가 낙랑땅에 설치한 군현은 대체 뭘까요?

좌우간 고구려 아래 살수 이남에 낙랑국이 있었고
그 낙랑국을 고구려가 먹었는데
그걸 한의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정벌해 군현으로 삼았다?
꼬마러브 17-06-09 12:45
이에 대해서는 후한서와 책부원구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책부원구> 한국(韓國)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으로 와서 공물을 바치니 황제께서 소마시를 염사읍의 군사로 삼아 낙랑군에 속하게 하였고 계절마다 조알하게 하였다.

 <후한서> 건무(建武) 20년(서기 44년), 한국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군에 배알하고 조공을 바쳤다. 광무제는 한염사읍군에 봉하고, 낙랑군에 복속시켜 사철마다 입조시켰다.

- 이 기록에 나오는 한국이 낙랑국일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낙랑국이 위치했던 평양지역이 원래 마한의 영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기록에 따르면 낙랑국(한국)은 낙랑군에 속하기를 바랬으며, 서기 44년(건무20년)에 한사군의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어서, 삼국사기를 보면 의문점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삼국사기> 대무신왕 27년(서기 44년)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 광무제가 살수 이남의 낙랑을 군현으로 삼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서기 44년입니다. 위의 <후한서>의 기록 역시 서기44년이고요. 다시 말해, 교차 검증이 된다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평양의 중국계 유물들이 후한시대의 것이 집중되서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딱딱 들어맞죠.

낙랑국은 고구려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중국에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삼국시대 후기의 신라처럼 말입니다.
꼬마러브 17-06-09 12:51
다만, 실제로 당시 한나라가 한반도의 낙랑국을 군현으로 다스렸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낙랑군이 두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나라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쟁취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한나라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던 것이고.
앞서 말했듯 평양 지역의 중국계 유물도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되는 겁니다.
꼬마러브 17-06-09 12:53
덧붙여, 앞의 <후한서>의 한국을 보았을 때

<삼국사기>태조대왕 70년(서기 122년),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깨뜨렸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에 멸망하였다. 지금 고구려 왕과 함께 군사를 보낸 것은 아마 멸망한 후 다시 흥한 것인가?>

- 이 기록에 나오는 마한도 낙랑국으로 볼 여지가 있는 겁니다. 물론 이 부분은 근거 없는 저의 추측에 불과합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당시
한반도 평양지역에는 독립국인 낙랑국이 존재했고
고구려의 서쪽, 즉 요서지역에는 한사군의 낙랑군이 존재했다는 것이지요.
감방친구 17-06-09 13:29
그리고 또 의문이 남습니다

44년 조에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해 군현으로 삼았다

고구려와 싸웠다는 말이 없어요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에서 싸워 우리가 패했다. 낙랑땅이 한의 군현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적어야 순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또 문제는 바로 '살수 이남' 이건데요
살수 이남이 낙랑(국이든 군이든) 땅이라면

살수가 한반도 북부로 비정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습니까?

현재 주류사학에서는 청천강을 살수로 보고 있으니 아귀가 맞아 떨어져 버리는 게 아닙니까

비주류사학에서는 살수를 요동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알고요
꼬마러브 17-06-09 14:11
1. 뭐 일단, 만약 살수 이남의 낙랑이 낙랑군이었다면 광무제는 자국의 군현을 공격한 미친 왕이 돼버리죠. 여기서 나오는 낙랑은 낙랑국으로 서기 37년에 대무신왕이 정복한 그 낙랑입니다.

2. 이는 단순히 제 추측인데요. 당시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낙랑국에 관한 것을 한나라에게 빼앗긴.. 부끄러운 역사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근거는 없어요.

3. 살수의 위치 비정에 대해 만주의 소자하(蘇子河)라는 주장과 청천강이라는 주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는 전자도 설득력있다고 보지만.. 기본적으로는 통설을 존중하고자 합니다.
물론 고구려의 초기 위치를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로 본다면 소자하라는 주장이 성립하겠지요.

저는 어느 쪽이 옳은지 확신할 수가 없네요. 일단은 통설을 따르고자 합니다.
감방친구 17-06-09 14:31
1. 저도 광무제의 낙랑(44년)을 최리의 낙랑으로 봅니다
ㅡ 님이 거론하신 한국 이야기로 더욱 생각이 근사해졌습니다

2. 그렇지는 않다고 봐요
ㅡ 고구려 본기를 보면 패했으면 패했다라고 한두 개도 아니고 아주 솔직히 적고 있어요

3. 저는 고구려 초기 도읍지를 당연히 요하 쪽으로 봅니다
ㅡ 패수가 여러 곳, 압록강이 여러 곳이듯 살수도 살수도 여러 곳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ㅡ 살수가 청천강이면 꼬이는 게 한둘이 아닌 걸로 알고 있어요
감방친구 17-06-09 12:57
와ㅡ 두 눈이 번쩍 뜨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백제 아닙니까?
백제를 공격한 낙랑은 누구이며
백제와 동맹한 대방태수는 어쩔 것이며

신라를 괴롭힌 낙랑을 낙랑국이라 해도
신라에 몰래 들어가 벌목인가 뭐시긴가 하다가 붙잡힌 한인은 또 어쩔 것인가 ㅡ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저는 대무신왕조의 백제 1천여 호 귀순이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주장하기도 한
백제는 요동인가 요서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처음에는 이쪽과 한반도 두 곳이었다 하는 주장에 관심이 가더이다
감방친구 17-06-09 11:34
미천왕 대에 낙랑군을 멸망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미천왕
3년(서기 302)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菟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14년(서기 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5년(서기 314) 봄 정월, 왕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孛于東北
감방친구 17-06-09 11:36
대방군이 고구려 남쪽에 있습니다
이건 또 뭔가요?

15년(서기 314) 봄 정월, 왕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감방친구 17-06-09 11:43
그런데 다음의 기사를 보세요

광무제가 낙랑 땅을 정벌해 군현으로 삼았다라고만 했습니다
원래부터 한나라 낙랑군이었던 것을 고구려에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거라면
ㅡ 다시 군현으로 삼았다
ㅡ 살수 이남이 다시 한나라에 속하였다
라고 적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무신왕 27년(서기 44)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屬漢

모본왕 2년(서기 49)
2 년 봄,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북명 17-06-09 12:32
고구려와 한의 위치를 일단 제로상태로 놓고 이 부분만 생각한다면...

서기 44년과 서기 49년의 전쟁은 남북 간의 전투라고 보는게 옳은게 아닌가요?
두 전투의 시기가 5년의 기간이고 서로 관련이 있다고 본다는 가정하에서는...
고구려는 베이징 북쪽... 한나라는 베이징이남... 즉 베이징 부근이 서로의 국경선 근처에
놓여있는거 같군요...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은 베이징 근처에 있고...
낙랑이라는 지명은 아마 양해강이라 적힌 곳 바로 위쪽에 놓인 것 같네요...

지도 http://maps.google.com/maps/ms?ie=UTF8&hl=ko&msa=0&msid=106252189949975289769.00046cab8f39a9a62bb0c&ll=39.732538,114.785156&spn=5.98905,8.481445&t=p&z=7

이 지도를 살펴 보니 상곡 바로 위에 동서로 흐르는 긴강이 있네요...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의 지명이 베이징 주위에 모여 있고...
가장 북쪽이 상곡인데 그 위로 양해강이라 적힌 강히 흐르는 군요...
아마도 여기서 살수는 이 강을 말하는 듯 보이네요...
여기서 양해강이라고 적힌 곳이 무슨 강이죠? 그냥 양해강인가? 처음 듣는 강이네요...

베이징은 고구려와 한의 경계선에서 서로 먹고 뺏기는 그런 지방이라 보는게 타당하겠네요... 또한 여기서 요동이라 함은 베이징 주위를 놓여 있겠네요...
감방친구 17-06-09 12:41
문제는 백제입니다
백제도 그렇고 신라도 그렇고

이런 이유 때문인지
윤여동이라는 분은 아예
고백신, 부여, 가야, 왜를 모조리
북경에서 요동 사이에 가져다 두더군요

그런데 그러면 고고유물과 유적은 뭐가 됩니까
엄연히 요서 이동은 다른 지역과 문화가 다른데
님이 열탐하시는 고인돌은 뭐가 되며

저는 낙랑은 두 개가 있었다고 봐요

요서의 낙랑,
그리고 진한교체기, 위만의 찬탈, 위만조선의 멸망 때 한반도 북부로 이주한 낙랑 출신이 세운 새로운 낙랑

이렇게 봐도 해결이 안 됩니다
꼬마러브 17-06-09 14:27
저 역시 한반도의 낙랑은 독립국인 낙랑국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한반도의 낙랑을 군이나 태수로 기록한 것은..사료의 오류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 봅니다.

삼국사기는 기본적으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삼국시대 이후 약400년 가량이 지난 후의 기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당시의 시대적 관념을 집어넣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한반도의 낙랑에 군이나 태수라고 붙여진 것은.. 이러한 사료의 오류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아야만 의문점이 단순하게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태수와 왕은 같이 쓰일 수 없기 때문에 사료에 오류가 있다고 추측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단재 신채호 선생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당시의 시대적 관념을 집어넣어 삼국의 역사를 축소하고 왜곡했다며 맹렬히 공격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료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입맛대로 사료를 조작하는 주류사학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군요.
감방친구 17-06-09 14:50
저는 그게 아니라 두 개의 백제를 상정해 보려구요
핫초코님 17-06-09 12:49
예(濊)는 북쪽으로는 고구려(高句驪)· 옥저(沃沮)와,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大海)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조선(朝鮮)의 지역이다.-후한서 동이열전,예

후한서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너무도 유명한 기사인데요..
진한을 경상도 지역으로 비정하게 되면, 예는 경상도의 북쪽 그러니까 강원도지역이고 그 위로 고구려와
옥저가 있고요 동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죠. 그 서쪽에 낙랑이 있습니다.
교차로 비정할 수 있는 기사는 삼국지 한전, 고구려전, 후한서에도 더 나옵니다.

제 짧은 지식으로는 북한학자들도 명확한 이 기사들 때문에 락랑국과 낙랑군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으로 압니다.
낙랑군은 한반도 밖에 있었고, 평양-대동강 주변에는 락랑국이 따로 존재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도 낙랑군이 궤멸되면서 유민이 요서로 집단 이주하였다는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역사, 특히나 고대사의 문제는 사이 공백이 너무 크고 당시의 지리학적인 한계로 인해 위치와 장소를
확정하는데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존재하고 때문에 비교해서 정하는 비정을 통히 추정할 수 밖에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때문에 새로운 고고적학 발견이나 사료적 연구를 통해서 이전에 비정되었던 통설은 뒤집히기도 하고
수정되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이덕일 부류의 문제는 그와 다릅니다. 박정희 시절 조선상고사 논쟁을 때조차도
지금과 같은 막가파식 매도는 없었습니다.
이덕일씨와 거의 비슷한 주장을 펼쳤던 지금 최순실 건으로 잡혀들어간 이인화가 남인들의 견해라며
금등지사 운운할 때만해도 이런 견해도 있다는 정도였죠..

이덕일씨의 주장이건..누구의 주장이건 자유롭게 제기되고 개진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합리성을 항상 다투어보며 새로운 모색을 해나갈 수 있죠.

그런데 이덕일 부류들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건.. 그들이 괴상한 논법을 통해 정치공세를 펼치고
열성적인 일부가 나서 선전선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초기에는 노론은 독재세력.. 남인과 소론 등은 민주세력인듯 포장을 하면서
기존의 멀쩡한 사학계를 반민주 노론세력으로 매도하고 규정했습니다.
영남지역 남인만세와 노론 박멸을 외치는 이인화와 이문열과 같은 박정희의 추종자들이 들으면
너무 신이나서 환호성을 지를만한 선동인데요..
이와같은 선동이 사도세자와 정조, 심환지 등의 편지가 발굴 공개되면서 한계에 직면하자..
초기에는 이 이면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가.. 노론=친일반민족세력으로 전선을 옮겨나갑니다.
급기야 기존 사학계가 반민주독재세력에 덧붙여 친일반민족세력으로 매도되었습니다.
하지만 노론=친일이라는 구도는 너무 무리한 덧씌우기였기 때문인지 오래가지 못하고
고대사 문제로 전선을 옮겨가버리죠..
그리고 지금 보는 고대사 문제에 대해서 자신과 다르면 식민사학자로 매도하며 선동 중입니다.

고구려 남쪽에 독립적인 락낭국이 있었고 한반도에는 낙랑군이 없었다거나..
애초에 낙랑군이 요동 또는 요서의 어느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보는 북한 학계의 연구 결과 등은
참고해볼만 하고 또 논의해볼만 합니다. 낙랑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을 직접하고 있는 곳은 북한이므로
무시해 버려서는 안되지요..

하지만 이러한 다른 이견이 있고 그 합리성을 찾아가는 과정과
자신의 상상과 다르다고 해서.. 역사학계 전체를 반민주 세력으로, 친일세력으로, 식민지세력, 비애국세력으로
매도하고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비전문가인 언론과 정치인을 선동해서 등에 업고 학계를 공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행위입니다.

도종환 후보자에 대해 잘 알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나.. 만약 그가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과 같은 사고 방식을 가지고 국가정책을 집행한다면 그건 큰 문제가 될 거라고 봅니다.
감방친구 17-06-09 13:04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님이 거론하신 예의 위치로 본 낙랑의 위치 건은
위에 꼬마러브님이 설명하신 기원후 44 년 한국  기사가 대적이 되겠습니다

동북아 역사지도는 이를테면
4 세기 초 지도에 요동을 거쳐 한반도 중북부까지 중국 땅으로 그려 놓은 거, 백제, 신라를 제대로 표기하지 않고 삼국사기보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 동이전을 더 신뢰한 뭐 이런 지도가 납득이 가십니까?

이런 지도는 주류사학계 내에서도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비좀와라 17-06-09 13:01
해海는 Sea에만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해는 티벳지방을 말하고 북해지방은 원래 외몽골지방을 말하였고 청해지방은 지금의 신강입니다.

저들 지역에 어디 바다 Sea가 있습니까? 해란 의미는 Sea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그 외 나오는 지명을 확인해야 하는 것 입니다.

예를 들면 살수란 지명에서 수는 강江에 해당하는 북방어 입니다. 다시 말해서 살수는 북쪽 지명이라는 것이죠. 동쪽이 아니라... 살은 육肉의 몽골어로 지금 우리가 말하는 고기살 이나 살색 등등에서 말하는 살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살색은 황黃색이죠.

그럼 현재의 지명으로 다시 재구성하면 살수는 황하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황하는 거의 바다와 같을 정도로 수량이 많았다고 하죠.
감방친구 17-06-09 13:06
해海는 Sea에만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만 듣겠습니다

저도 깜냥이 있어서 해가 바다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넓은 땅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 아래의 말씀은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캐쉰 17-06-09 16:30
우리가 배워왔거나 현재 주류사학계의 견해대로 우리 역사지리를 파악할려고 하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현재 고구려 평양 위치연구가 한창입니다. 거의 요양으로 굳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모든 것이 바뀌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사군,초기 백제,초기 신라,졸본,국내성,백제 한성....
모든 것을 제로상태에서 시작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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