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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19일 (금)

[한국사] 낙랑군 교치설에 대한 반박

감방친구 조회 :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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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위치 문제에서 강단주류사학계의 비장의 카드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서북한의 유물, 유적
ㅡ 그런데 일제가 낙랑대방으로 확정할 적의 근거 유물유적은 모두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ㅡ 심지어 강단주류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정인성 교수는 대방태수 장무이의 무덤이 고구려 무덤임을 입증하였다
ㅡ 그리고 해방 후 북한에서 쏟아진 방대한 유물, 유적을 토대로 북학 역사학계는 그 지역이 한사군이 아니라 토착세력의 영역이며 유물유적에 보이는 한나라계 특성은 문화교류의 흔적으로 볼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다음으로는 낙랑 교치설이 있다
요동 사람인 장통이라는 자가 낙랑과 대방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미천왕과 다투다가 낙랑사람 왕준의 설득으로 선비 모용씨에게 귀부했으며, 역사전개에 따라 교치가
여러차례 발생하여 이 시대 이후의 사가들이 교치 사실을 혼동하여 사서에 잘못 기록했다는 식의 주장이다

이에 대한 다음의 반박을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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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특히 낙랑군이 식민사학계의 주장처럼 평양 일대가 아니라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사료가 수십 개 이상 공개되었으므로 이 사료들이 말하는 사실에 대해 무언가 설명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교군설(僑郡說)’이다. 교군설이란 간단하게 말해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요동으로 이사했다는 것이다. 강단사학계는 한사군의 중심이라는 낙랑군 조선현의 자리를 평양 남쪽의 대동면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중국 사료들은 낙랑군 조선현이 있던 자리를 지금의 하북성 노룡(蘆龍)현이라고 말한다. 교군설은 개인으로 말하면 평양 대동면에 살던 ‘조선’이 하북성 노룡현으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조선’의 주민등록등본에 지금은 하북성 노룡현에 살고 있지만 과거에는 평양 대동면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북성 노룡현에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다는 중국 사료는 많지만 그 전에 평양 대동면에 살았다는 사료는 없다는 사실이다. 교군설 자체가 사료로는 입증할 수 없는 공상이란 뜻이다. 그러나 식민사학계는 사료에 낙랑군이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 진위를 살펴보자. 송나라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 권88, 진기(晋紀) 10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건흥 원년(313) 4월 요동 사람 장통(張統)은 낙랑(樂浪)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해를 이어 서로 공격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낙랑인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해서 그 백성 1000여 가구를 통솔해 모용외(慕容廆)에게 귀부하니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해서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요 동사람 장통이 낙랑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 미천왕과 싸웠는데,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낙랑 사람 왕준의 설득을 들은 장통은 1000가구의 백성을 데리고 선비족 모용씨에게 귀부했다는 것이다. 선비족 모용외는 창려(昌黎) 극성(棘城) 사람으로 전연(前燕)의 건국자 모용황의 부친이다.
그러나 이 사료는 첫째, 고구려 미천왕 때 장통이 점거했다는 낙랑군과 대방군은 평안남도나 황해도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미천왕 때라면 고구려가 이미 요동반도는 물론 그 서쪽 상당 부분까지 차지한 상태였다. 낙랑군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면 장통이 1000가구를 거느리고 자국 영토를 지나 지금의 베이징 부근인 고대 요동에서 활동하던 선비족 모용씨에게 가는 것을 눈 뜨고 구경하고 있었겠는가?
둘째, 1000가구의 낙랑인이 이주한 것을 가지고 낙랑군 전체가 이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낙랑군의 인구에 대해 ‘한서지리지’ 낙랑군 조는 “6만2812호에 40만6748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략 한 가구의 구성원이 7명 정도라는 이야기다. 즉, 장통이 거느리고 간 1000가구는 7000명 정도라는 뜻이다. 40만7000여 명의 낙랑인 중에 7000명이 이주한 것을 낙랑군 전체가 이주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나머지 40만 명은 어디로 갔나?


[출처] 이투데이:
http://m.etoday.co.kr/view.php?idxno=1363869&ref=https%3A%2F%2Fm.search.naver.com%2Fsearch.naver%3Fquery%3D%25EB%2582%2599%25EB%259E%2591%2B%25EC%259E%25A5%25ED%2586%25B5%2B%25EC%2599%2595%25EC%25A4%2580%26where%3Dm%26sm%3Dmob_hty.idx%26acq%3D%26acr%3D%26qdt%3D1#cb#csidx0d3ee83f7a7c95d9987dfffbc353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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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교치설에 대한 위의 반박에 재반박을 하거나 그렇게 한 자료가 있으면 누구나 제시해주세요

아비요 17-06-13 10:33
말할게 있나요? 낙랑군이란 행정구역을 옮겼다는 결론밖에 낼수가 없는데.. 1000가구인지 1000명인지는 골수패거리라고 봐야죠.
꼬마러브 17-06-13 10:40
낙랑군이라는 행정구역이 옳겨졌다고 말하는 사서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요서에 있었던 것이지요.
징기스 17-06-13 10:43
낙랑군은 그대로 두고 지들 패거리만 내뺀 것뿐인데 저거 갖고 낙랑교치 떠들면 떠드는 놈들만 엉터리 셀프인증하는 셈이라고 봅니다. 낙랑군을 통째로 뜯어간 것도 아니고 ㅇㅇ
꼬마러브 17-06-13 10:49
애초에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낙랑과 대방의 위치는 평안,황해도 지방일 수가 없습니다.
또한 만약 평양, 황해도에 낙랑과 대방이 있었다면.. 뭐하러 저 멀리 선비족에게 투항을 하겠습니까? 산동반도를 통해서 같은 한족인 중국에 가는 것이 정상적이지요. 낙랑과 대방이 요동의 선비족에게 투항했다는 것은 낙랑과 대방이 선비족과 가까이 위치해있었음을 말합니다.
당초에 그 많은 숫자를 배타고 갔을리도 만무하지요.
징기스 17-06-13 10:52
그러니까요. 황해도 평안도면 그냥 만주로 가든지 충청 전라 경상으로 내빼면 되는데 굳이 수천리나 떨어진 모용씨한테? ㅋㅋㅋㅋ 강단이 돌대가리들로 넘쳐 난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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