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삼국사기로 본 낙랑과 대방의 성격과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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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온조왕 8년(기원전 11)
8년(기원전 11)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八年 春二月 靺鞨賊兵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渝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2.
고이왕
13년(서기 246) 여름, 크게 가뭄이 들어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十三年 夏大旱 無麥 秋八月 魏幽州刺史毌丘儉 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책계왕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責稽王[或云 靑稽] 古尒王子 身長大 志氣雄傑 古尒薨 卽位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 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旦城蛇城 備之
2년(서기 287) 봄 정월,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13년(서기 298)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 爲敵兵所害 薨
분서왕
7년(서기 304)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七年 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 冬十月 王爲樂浪太守所遣刺客賊害 薨
3.
동천왕
20년(서기 246)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에서 나와 침입하였다. 임금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병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겨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임금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위나라의 대병이 오히려 우리의 소병만 못하다.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 그의 목숨은 나의 손아귀에 달려 있도다.”
임금은 곧 철기(鐵騎) 5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이 방(方)형으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임금은 기병 1천여 기병을 데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毌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毌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淥原
겨울 10월, 관구검이 환도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곧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임금을 쫓았다. 임금은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임금의 옆에 있다가 임금에게 말했다.
“지금 추격병이 매우 가까이 닥쳐 있으므로 이 형세를 피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죽을 각오로 적군을 방어하면 임금께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과 함께 적에게 가서 전력을 다하여 싸웠다. 임금은 간신히 빠져 나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병졸들을 모아 스스로 호위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만약 밀우를 찾아올 능력 있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下部) 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마침내 전장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업고 돌아왔다. 임금은 자신의 다리에 밀우를 눕혔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깨어났다. 임금은 사잇길로 여러 곳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의 추격은 멈추지 않았다. 임금은 마땅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꺾이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동부 사람 유유(紐由)가 나와 말하였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다고 하여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들을 위로하면서 틈을 엿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이 성공하거든 임금께서는 적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승부를 결정지으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좋다.”
유유가 위나라 군대로 들어가서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하였으나 몸을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귀국의 진영 앞에 나와 항복을 청하고 법관에게 목숨을 맡기려고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위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사는 마침내 혼란에 빠졌다.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에서 물러갔다. 임금은 나라로 돌아와 공적을 논하였는데 밀우와 유유가 1등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주고, 유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杜訥河原)을 식읍으로 주었다. 유유에게는 벼슬을 더하여 구사자(九使者)로 삼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이번 전쟁에서 위나라 장수가 숙신(肅愼)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공을 새기고 돌아갔다.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 追王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犒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淥杜訥河原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예전에 동천왕의 신하 득래(得來)가 임금이 중국을 침입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수차례 간하였으나, 임금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머지않아 이 땅에서 쑥대가 자라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득래는 결국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무덤을 무너뜨리지 말고 그 무덤가의 나무도 베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그의 처자들을 잡았으나 모두 풀어 주도록 하였다.[『괄지지(括地志)』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라고 했으니,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양서(梁書)』에는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한 틈을 노려 고구려의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였으므로, 관구검이 침입하여 온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통감(通鑑)』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은 고구려왕 위궁(位宮) 때의 일이다.”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毌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 梁書 以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 襲西安平 毌丘儉來侵 通鑑 以得來諫王 爲王位宮時事 誤也]
미천왕
3년(서기 302)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菟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14년(서기 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5년(서기 314) 봄 정월, 왕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孛于東北
4.
동천왕 20년 (서기 246)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에서 물러갔다.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1.
온조왕 8년(기원전 11)
8년(기원전 11)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八年 春二月 靺鞨賊兵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渝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2.
고이왕
13년(서기 246) 여름, 크게 가뭄이 들어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十三年 夏大旱 無麥 秋八月 魏幽州刺史毌丘儉 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책계왕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責稽王[或云 靑稽] 古尒王子 身長大 志氣雄傑 古尒薨 卽位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 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旦城蛇城 備之
2년(서기 287) 봄 정월,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13년(서기 298)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 爲敵兵所害 薨
분서왕
7년(서기 304)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七年 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 冬十月 王爲樂浪太守所遣刺客賊害 薨
3.
동천왕
20년(서기 246)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에서 나와 침입하였다. 임금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병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겨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임금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위나라의 대병이 오히려 우리의 소병만 못하다.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 그의 목숨은 나의 손아귀에 달려 있도다.”
임금은 곧 철기(鐵騎) 5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이 방(方)형으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임금은 기병 1천여 기병을 데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毌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毌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淥原
겨울 10월, 관구검이 환도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곧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임금을 쫓았다. 임금은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임금의 옆에 있다가 임금에게 말했다.
“지금 추격병이 매우 가까이 닥쳐 있으므로 이 형세를 피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죽을 각오로 적군을 방어하면 임금께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과 함께 적에게 가서 전력을 다하여 싸웠다. 임금은 간신히 빠져 나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병졸들을 모아 스스로 호위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만약 밀우를 찾아올 능력 있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下部) 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마침내 전장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업고 돌아왔다. 임금은 자신의 다리에 밀우를 눕혔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깨어났다. 임금은 사잇길로 여러 곳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의 추격은 멈추지 않았다. 임금은 마땅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꺾이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동부 사람 유유(紐由)가 나와 말하였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다고 하여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들을 위로하면서 틈을 엿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이 성공하거든 임금께서는 적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승부를 결정지으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좋다.”
유유가 위나라 군대로 들어가서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하였으나 몸을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귀국의 진영 앞에 나와 항복을 청하고 법관에게 목숨을 맡기려고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위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사는 마침내 혼란에 빠졌다.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에서 물러갔다. 임금은 나라로 돌아와 공적을 논하였는데 밀우와 유유가 1등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주고, 유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杜訥河原)을 식읍으로 주었다. 유유에게는 벼슬을 더하여 구사자(九使者)로 삼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이번 전쟁에서 위나라 장수가 숙신(肅愼)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공을 새기고 돌아갔다.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 追王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犒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淥杜訥河原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예전에 동천왕의 신하 득래(得來)가 임금이 중국을 침입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수차례 간하였으나, 임금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머지않아 이 땅에서 쑥대가 자라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득래는 결국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무덤을 무너뜨리지 말고 그 무덤가의 나무도 베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그의 처자들을 잡았으나 모두 풀어 주도록 하였다.[『괄지지(括地志)』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라고 했으니,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양서(梁書)』에는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한 틈을 노려 고구려의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였으므로, 관구검이 침입하여 온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통감(通鑑)』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은 고구려왕 위궁(位宮) 때의 일이다.”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毌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 梁書 以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 襲西安平 毌丘儉來侵 通鑑 以得來諫王 爲王位宮時事 誤也]
미천왕
3년(서기 302)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菟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14년(서기 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5년(서기 314) 봄 정월, 왕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孛于東北
4.
동천왕 20년 (서기 246)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에서 물러갔다.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