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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29일 (금)

[한국사] 삼국사기로 본 낙랑과 대방의 성격과 위치

감방친구 조회 : 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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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글은 댓글로 제시하였습니다. 본문은 참고 자료로 눈여겨 보세요.>

1.

온조왕 8년(기원전 11)
8년(기원전 11)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八年 春二月 靺鞨賊兵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渝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2.


고이왕
13년(서기 246) 여름, 크게 가뭄이 들어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十三年 夏大旱 無麥 秋八月 魏幽州刺史毌丘儉 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책계왕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責稽王[或云 靑稽] 古尒王子 身長大 志氣雄傑 古尒薨 卽位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 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旦城蛇城 備之

2년(서기 287) 봄 정월,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13년(서기 298)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 爲敵兵所害 薨

분서왕
7년(서기 304)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七年 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 冬十月 王爲樂浪太守所遣刺客賊害 薨


3.


동천왕
20년(서기 246)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에서 나와 침입하였다. 임금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병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겨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임금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위나라의 대병이 오히려 우리의 소병만 못하다.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 그의 목숨은 나의 손아귀에 달려 있도다.”
임금은 곧 철기(鐵騎) 5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이 방(方)형으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임금은 기병 1천여 기병을 데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毌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毌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淥原
겨울 10월, 관구검이 환도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곧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임금을 쫓았다. 임금은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임금의 옆에 있다가 임금에게 말했다.
“지금 추격병이 매우 가까이 닥쳐 있으므로 이 형세를 피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죽을 각오로 적군을 방어하면 임금께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과 함께 적에게 가서 전력을 다하여 싸웠다. 임금은 간신히 빠져 나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병졸들을 모아 스스로 호위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만약 밀우를 찾아올 능력 있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下部) 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마침내 전장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업고 돌아왔다. 임금은 자신의 다리에 밀우를 눕혔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깨어났다. 임금은 사잇길로 여러 곳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의 추격은 멈추지 않았다. 임금은 마땅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꺾이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동부 사람 유유(紐由)가 나와 말하였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다고 하여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들을 위로하면서 틈을 엿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이 성공하거든 임금께서는 적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승부를 결정지으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좋다.”
유유가 위나라 군대로 들어가서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하였으나 몸을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귀국의 진영 앞에 나와 항복을 청하고 법관에게 목숨을 맡기려고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위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사는 마침내 혼란에 빠졌다.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에서 물러갔다. 임금은 나라로 돌아와 공적을 논하였는데 밀우와 유유가 1등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주고, 유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杜訥河原)을 식읍으로 주었다. 유유에게는 벼슬을 더하여 구사자(九使者)로 삼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이번 전쟁에서 위나라 장수가 숙신(肅愼)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공을 새기고 돌아갔다.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 追王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犒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淥杜訥河原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예전에 동천왕의 신하 득래(得來)가 임금이 중국을 침입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수차례 간하였으나, 임금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머지않아 이 땅에서 쑥대가 자라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득래는 결국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무덤을 무너뜨리지 말고 그 무덤가의 나무도 베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그의 처자들을 잡았으나 모두 풀어 주도록 하였다.[『괄지지(括地志)』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라고 했으니,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양서(梁書)』에는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한 틈을 노려 고구려의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였으므로, 관구검이 침입하여 온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통감(通鑑)』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은 고구려왕 위궁(位宮) 때의 일이다.”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毌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 梁書 以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 襲西安平 毌丘儉來侵 通鑑 以得來諫王 爲王位宮時事 誤也]

미천왕
3년(서기 302)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菟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14년(서기 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5년(서기 314) 봄 정월, 왕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孛于東北



4.

동천왕 20년 (서기 246)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에서 물러갔다.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감방친구 17-06-11 07:16
1. 꼬마러브님의 견해는
"백제 본기 온조왕조의 낙랑은 '나라 사이의 일을 이야기 하고 있'으므로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다.", "'태수'는 오기로 봐야 한다."
ㅡ 이는 고구려 대무신왕의 낙랑국 정복과 맞물려
ㅡ 이후 200 년 넘게 백제 본기에서 낙랑이 사라진 것과 서로 맞으므로 타당
ㅡ 신라 본기 초기 기록과 서로 맞으므로 타당

그런데
ㅡ 태수를 오기로 봐야 하는가 하는 것은 불신이 남음
도배시러 17-06-11 07:17
낙랑왕의 똘마니 중에 낙랑태수가 있다라고 하면 안될까요 ?
암튼 낙랑태수의 윗사람을 찾아내야 하는 문제네요.
도배시러 17-06-11 07:16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근거한 낙랑의 위치 토론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중국사서나 다른 사료의 언급없이 오직 삼국사기, 삼국유사로 낙랑의 위치 개념을 1차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유식한척 하면서 다른 책에는 이렇게 되어 있던데...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겠지만...
감방친구 17-06-11 07:28
2. 꼬마러브님의 견해로는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는 틈을 타 고이왕 이후 중국 요서 서부와 그 아래, 즉 전국시대 연과 제의 사이인, 고죽국으로부터 산동반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 획득했다."

 그런데
ㅡ 고이왕 246 년 기사에서 낙랑의 백성을 잡아왔으나 낙랑태수 유무가 분노하자 곧 백성을 돌려주었다라고 돼 있어서 공간적으로 무슨 정황인지 불확실함

그런데 또 책계왕과 분서왕의 죽음이 수상함
ㅡ 책계왕은 대방과 혼인동맹을 맺은 사이인데
ㅡ 한나라와 맥족 연합군의 침입에 맞서다 전사
ㅡ 분서왕은 낙랑군의 서현을 약탈했다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함

그래서
ㅡ 고이왕 이후 백제가 산동과 요서 아래의 땅을 점유했는가와 낙랑군은 백제의 동쪽에 있었는가, 낙랑군과 낙랑국은 서로 다른가 하는 것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남음
도배시러 17-06-11 07:33
일단 낙랑태수는 수시로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끌려 다녔으니, 관구검의 똘마니로 보는게 맞지 않나요 ?
유주자사>낙랑태수
도배시러 17-06-11 07:39
백제의 동쪽에 낙랑국이 있고, 고구려의 남쪽에 대방군이 있다 ?
도배시러 17-06-11 07:31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나중에 고구려 유주자사 진, 으로 바뀌는거죠 ?
감방친구 17-06-11 07:33
그거 아닙니다
관구검은 고구려 침략 후에 중국 남부를 정벌하는 총사령관이 돼 활약합니다

유주는 북경을 포괄하는 넓은 지역입니다
도배시러 17-06-11 07:36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관구검 사망후 고구려가 나중에 유주를 점령하고
거기에 고구려인 유주자사 진을 파견한다는거죠.
유주자사 진은 이후에 고향 덕흥리로 돌아와 생을 마감하구요.
감방친구 17-06-11 07:43
그것까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도배시러 17-06-11 07:45
유주자사 진의 평양 덕흥리 고분 이야기 입니다.
감방친구 17-06-11 07:55
예, 그건 아는데
그 주인에 대한 의견은 이견이 분분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백제가 대륙에 진출한 증거라고 합니다

이 게시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양해해주세요
감방친구 17-06-11 07:31
2. 한나라가 맥족과 연합해 백제를 침략했다는 책계왕조의 기사는
ㅡ 한나라면 동한일텐데 동한은 220 년에 망하지 않았는가?
ㅡ 고이왕조에서 분명히 위나라를 언급하는데 다시 한나라라니?
ㅡ 한나라가 무슨 수로, 무슨 이유로 한반도 중부의 백제를 침략하는가?

하여 의문이 깊이 남음
감방친구 17-06-11 07:40
3. 다음의 기사를 보자. 비록 후대이지만 고구려의 강역을 유추할 수 있다

ㅡㅡㅡㅡㅡㅡㅡ

2년(서기 332) 봄 2월, 임금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 안을 두루 살피고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12년(서기 342) 봄 2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임금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입위장군(立威將軍) 모용한이 모용황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은 후, 우문(宇文)씨를 멸망시킨 후에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었다.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항상 북쪽 길을 선택하였다. 모용한이 말했다.
“적국은 일반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 대군이 반드시 북쪽 길로 올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북쪽 길을 중요시하고 남쪽 길을 가벼이 여길 것입니다. 왕께서 마땅히 정예부대를 이끌고 남쪽 길을 택하여 기습 공격을 하면, 환도성은 공격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별도로 소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면 다소 차질이 있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그들은 전의를 상실할 것입니다.”
모용황은 모용한의 말을 따랐다.
十二年 春二月 修葺丸都城 又築國內城 秋八月 移居丸都城 冬十月 燕王皝遷都龍城 立威將軍翰請 先取高句麗 後滅宇文 然後中原可圖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 衆欲從北道 翰曰 虜以常情料之 必謂大軍從北道 當重北而輕南 王宜帥銳兵 從南道擊之 出其不意 丸都不足取也 別遣偏師 出北道 縱有蹉跌 其腹心已潰 四支無能爲也 皝從之
ㅡㅡㅡㅡ

ㅡ 북쪽의 평탄한 길과 남쪽의 험한 길 이야기가 나온다
ㅡ 이들은 고구려 정벌을 논의하고 있다. 변경 약탈이 아니라
ㅡ 즉 이 내용을 보면 딱 요하를 중심한 요동반도가 그려진다
ㅡ 이 시대 고구려의 중심지는 요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ㅡ 지도를 찾아보시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도배시러 17-06-11 07:44
미천왕
15년(서기 314) 봄 정월, 왕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감방친구 17-06-11 07:53
4. 시기가 서로 맞지 않지만 책계왕은 대방(국이든 군이든)과 혼인동맹을 맺은 사이로 책계왕조에 고구려가 대방을 쳐서 백제에 구원을 요청한 기사가 있다. 그런데 제대로 구원을 못하고 오히려 고구려의 침입에 방비하기 급급한 모습이다.

ㅡㅡ

15년(서기 314) 봄 정월, 왕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ㅡㅡㅡ

이 기사를 보면 대방군은 분명히 고구려 남쪽에 있다
고구려는 태조대왕 때 요동을 중심지로 하며 남으로는 살수, 동으로는 동해까지가 남방 경계였다
그렇다면 대방군은 당연히 살수 이남, 그것도 낙랑 이남이 돼야 하지 않은가?
ㅡ 사학계의 통설은 대방군을 황해도로 비정하며, 중국 중앙 정부의 힘이 미약하여 사사로이 왕을 칭했을 것으로 본다(내왕외태수)

꼬마러브님을 비롯한 비주류사학계는 한반도의 낙랑과 대방은 낙랑국과 대방국이요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대의 요동인 지금의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ㅡ 꼬마러브님의 견해는 백제와 혼인동맹한 대방은 대방국이라는 것이다
ㅡ 그런데 이는 "남쪽으로 대방군을 쳤다"는 미천왕조 기사와 맞지 않다
감방친구 17-06-11 08:13
5. 낙랑군의 중심지는 한반도가 아니고, 한반도 북부의 낙랑은 낙랑군이 위치한 지역(요서)에서 이주한 옛 고조선인들이 세운 낙랑국이고 대무신왕 때 점령된 후 중국 동한에 구원요청을 하여 스스로 낙랑군에 편입한 것인가?

다음은 꼬마러브님의 견해이다
ㅡㅡㅡㅡㅡ
<책부원구> 한국(韓國)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으로 와서 공물을 바치니 황제께서 소마시를 염사읍의 군사로 삼아 낙랑군에 속하게 하였고 계절마다 조알하게 하였다.

 <후한서> 건무(建武) 20년(서기 44년), 한국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군에 배알하고 조공을 바쳤다. 광무제는 한염사읍군에 봉하고, 낙랑군에 복속시켜 사철마다 입조시켰다.

- 이 기록에 나오는 한국이 낙랑국일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낙랑국이 위치했던 평양지역이 원래 마한의 영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기록에 따르면 낙랑국(한국)은 낙랑군에 속하기를 바랬으며, 서기 44년(건무20년)에 한사군의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어서, 삼국사기를 보면 의문점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삼국사기> 대무신왕 27년(서기 44년)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 광무제가 살수 이남의 낙랑을 군현으로 삼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서기 44년입니다. 위의 <후한서>의 기록 역시 서기44년이고요. 다시 말해, 교차 검증이 된다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평양의 중국계 유물들이 후한시대의 것이 집중되서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딱딱 들어맞죠.

낙랑국은 고구려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중국에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삼국시대 후기의 신라처럼 말입니다.

ㅡㅡㅡ

다음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백제 본기 기사를 보자.

동천왕
20년(서기 246)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에서 나와 침입하였다. 임금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병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겨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고이왕
13년(서기 246) 여름, 크게 가뭄이 들어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十三年 夏大旱 無麥 秋八月 魏幽州刺史毌丘儉 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ㅡ 유주(북경을 중심한 지역)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와 삭방태수를 거느리고 현도에서 출병하여 고구려를 침입했다
ㅡ 현도는 요서 북쪽이 아닌가?
ㅡ 낙랑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면 낙랑태수는 멀티를 뛴건가?
ㅡ 왜 살수 이남에 위치하며,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는 낙랑(국이든 군이든 군예속 정권이든)에서는 아무 활동이 없는가?
ㅡ 왜 낙랑태수(태수가 뜬다는 건 태수예하 군대가 움직인다는 말)는 제 관할지가 아니라 바다 건너 멀리 현도에서 출병하는가? 군사를 배에 태워 그리로 결집했는가?
ㅡ 왜 한반도 북부에서 고구려의 후방을 공격하는 양동 작전을 펼치지 않았는가?

신라 본기에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 정복 이후 유민 5천명을 받아들였다는 기록 이후 낙랑이 사라진다
ㅡ 그 이후는 낙랑이 빠지고 백제가 신라를 괴롭힌다
도배시러 17-06-11 08:18
낙랑태수 유무의 관할지역과 낙랑국의 위치에 대한 논란이 나오겠네요.

그리고 낙랑국 멸망이후에는 신라-낙랑의 관계가 사라지네요
감방친구 17-06-11 08:34
6. '낙랑을 거쳐서'가 맞는가 '낙랑에서'가 맞는가?

동천왕 20년 (서기 246)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에서 물러갔다.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ㅡ 비주류 사학계에서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근거로 꼭 제시하는 게 바로 이 문구입니다 遂自樂浪而退

ㅡ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어떻게 '낙랑을 거쳐서' 퇴각할 수 있는가? 위로는 고구려 땅인데 배를 타고 퇴각했다는 말인가? 배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없지 않은가?" 가 저들 주장의 요지입니다
ㅡ 그런데 두 가지 의문이 들더군요
ㅡ 하나는, 고구려군이 와해되어 비록 고구려가 최후에 승리했어도 고구려군과 동천왕은 옥저 지역에 찌그러져 있는 상황인데 한반도 북부에서 요동을 거쳐 퇴각할 수 있는 거 아닌가?
ㅡ 더구나 저 기사에서는 '낙랑'이라고 했을 뿐 그게 군인지 뭔지 확실치 않지 않은가?
ㅡ 두 번째는, 제가 젊은시절에 학원에서 5 년동안 중고등 한문을 지도했습니다. 하여 한문을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것 중에 어조사가 있어요.
ㅡ 말이을 이 而의 뜻과 쓰임은 기본적으로 순접입니다
ㅡ 순접이 기본으로, 그리고, ~하며, 그래서 등의 순접의 뜻을 지닌 한자어입니다
ㅡ 그리고 ~로부터라는 뜻도 있습니다
ㅡ 遂自樂浪而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을 거쳐서'라는 뜻의 한자어가 없는데, 내가 무식한 건가, 왜 을 거쳐서로 해석할까, 억지 아닌가 하는 불신이 들었습니다
도배시러 17-06-11 08:40
후한 광무제가 낙랑을 점령했다면
낙랑태수 유무(劉茂)의 존재는 납득이 되는데, 뜬금없이 대방태수도 아니고
대방왕이 나오고 장인의 나라 ?  대방왕이 문제네요.
감방친구 17-06-11 08:43
7. 遂自樂浪而退

ㅡ 신라의 서북부, 고구려의 남부에 위치한 지역(평안도 비정)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으로 볼 때에 그것이 나라든 군현이든
ㅡ 분명히 '낙랑'으로 불리웠고
ㅡ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는 백제 기록에서 보이듯 늦어도 3세기에는 고구려 땅이었다
ㅡ 다만 그 지역 명칭이 낙랑이었을 뿐이다
ㅡ 미천왕 조에서도 현도군을 깨뜨렸다는 기록은 있어도 낙랑군은 약탈했다는 기록만 있다
ㅡ 이 시대는 고구려가 서쪽으로 확장하여 가며 중국계, 선비계 정권과 끊임 없이 대립하던 시기이다
도배시러 17-06-11 09:20
삼국사기에 나오는 전한의 한사군에 한정해서 고대국가의 위치를 추론하면
말갈---고구려
---백제--낙랑
---------신라
후한 광무제 이후는 위치자료가 부족

후한 광무제이전, 삼국사기만으로 고대국가의 위치를 개념화 했는데 어떤가요 ?
감방친구 17-06-11 09:31
아닙니다
삼국사기 초기로 보자면
말갈은 백제와 신라 위쪽, 고구려 아래 쪽에 위치합니다

고구려의 서쪽으로는, 고구려에 속한 예맥, 맥족 등이 나옵니다

특히 예, 맥, 예맥 등은 그 출몰 범위가 광범위 해서 황하 북부부터 요동까지 넘나듭니다
도배시러 17-06-11 09:34
예/맥---고구려
-----말갈
---백제--낙랑
---------신라

이렇게 되면 백제는 고구려에 대해 고민할 이유가 없어지는데요 ?
감방친구 17-06-11 09:40
고구려
낙랑ㅡ말갈
백제ㅡ신라

이 시기의
말갈은 제 생각으로는 마한의 일부 유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시기의 낙랑(최씨 낙랑국)은 이들 말갈을 이리저리 부리죠

백제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는
낙랑, 예, 말갈, 또한 맥국 등이 있었고
서북으로는 옥저가 있었죠
이들 조무래기 사이에서 낙랑이 대가리 역할을 하다가
대무신왕 때 먹히는 겁니다
도배시러 17-06-11 10:04
이건 아니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말갈
백제 - 낙랑"  개념은 유지하셔야 합니다.
지도에 표기할려는 생각은 나중에 하시고 개념을 잡는게 더 중요합니다.

백제 온조왕 13년(기원전 6)
13년(기원전 6) 봄 2월,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다.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61세로 돌아가셨다.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
감방친구 17-06-11 10:21
이 보시오
그게 확실하면 이 휴일 새벽부터 아침까정 이 긴 글을 썼겠습니까

이 긴 글을 다 핸드폰으로 작업해서 쓴 겁니다

이 게시글뿐만 아니라 전에 쓴 글도 읽어보세요

그리고 낙랑을 키워드로 이 게시판 글들을 읽어보세요 지난 7 년 간 많은 분들이 좋은 글 많이 남기셨습니다
도배시러 17-06-11 10:25
그러면 삼국사기는 일단락하고
삼국유사에서 다시 추적하는것은 어떨까요 ?
감방친구 17-06-11 10:28
삼국사기가 정사니까 일단 삼국사기 글만 가지고 추적해 본 겁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비해 삼국유사는 민족적이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신데

제가 중학교 이후로 삼국유사를 예닐곱 번은 읽은 사람이고 지금도 수시로 읽는데

영토 문제에 있어서는 삼국유사는 말짱 꽝이에요
충남이니 전라도까지 중국땅으로 보는 게 삼국유삽니다

그리고 삼국사기보다 더 사대주의적 색체가 강합니다
도배시러 17-06-11 10:43
그럴수록 삼국유사의 위치기록도 대조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본인의 의도와 다른 내용이라하여 외면하는것은 진실을 찾기 어렵지 않을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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