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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3일 (화)

[한국사] 평양의 위치 문제

감방친구 조회 : 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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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서경의 위치 문제는
고구려 평양의 위치 문제와 연결 되고
고구려 평양의 위치는
위만조선과 고조선의 왕검성(aka 왕험성, 평양성)의 위치 및 낙랑군의 위치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하고 민감합니다

현 학계 통설에서는
고구려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고정해 두고서
여기가
고려의 서경이자
고구려의 평양이며
위만조선의 왕검성이며
한나라 낙랑군이라
못을 박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류 학계는 스스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류 학계는
4세기 초 미천왕 때에 서북한의 낙랑군이 축출 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고구려는 이미 동천왕 때에 위 관구검의 침입으로 무너진 환도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깁니다

평양이 고구려의 도읍으로 처음 등장한 게 바로 이 시기로 때가 247 년입니다

후대인 미천왕은 현도군을 침입하여 현도군 주민 8천여 명을 평양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이 때가 302 년입니다

학계가 낙랑군 축출 시기로 보는 312 년에는 정작 낙랑군을 깨뜨렸다거나 멸하였다는 기술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낙랑을 침범하여 남녀 이천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돼 있을 뿐입니다

평양이 낙랑군이고
그 자리가 지금의 평양이면
또 그 낙랑군이 축출된 게 4세기 초이면
전혀 사실 기사와 맞지가 않습니다

평양은 동천왕 때에 처음 도읍이 된 후에 계속 개발이 됩니다
특히 봉상왕은 무리하게 평양을 개발하다가 백성의 원성이 높아져 죽음을 맞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평양 개발은 고국원왕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국원왕 12 년인 342 년에 다시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깁니다 환도성과 국내성은 서로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해 연나라 모용황이 침입하여 환도성이 다시 불 타자 이듬 해인 343 년에 평양의 동쪽 황성으로 도읍을 옮깁니다.

그러다 장수왕 15 년인 427 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깁니다
주류 학계의 주장대로 평양의 동황성이라면 거기가 평양인데 또다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요

게다가
안장왕 때에는 장안성을 쌓고 평원왕 때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깁니디
즉 평양성에서 다시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이곳이 80 여 년 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의 도읍으로
보장왕 당시에도 그 장안성을 평양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을 추론 가능케 합니다

1. 평양은 한 곳이 아니었다
2. 평양은 서울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3. 고구려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고 그곳이 위만조선의 왕검성이라는 주류 학계의 주장은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감방친구 17-12-04 02:28
평양의 동쪽 황성이냐 아니면 평양의 동황성이냐

주류 학계에서는 평양 고정론을 고수하면서 13 세기 삼국사기 편찬자의 주석인 "동황성은 지금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木覓山)에 위치하고 있다."을 근거로 '평양의 동황성'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 당시의 평양을 고려의 서경이자 지금의 평양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사실편취의 사례에 해당합니다

平壤東黃城은
ㅡ 평양의 동황성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게 아니라
ㅡ 평양의 동쪽 황성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음의 기사를 비교해 보세요

고국원왕 13년(서기 343)
移居平壤東黃城
1)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도읍)를 옮겼다
2) 평양의 동쪽 황성으로 거처(도읍)를 옮겼다

안장왕 11년(서기 529)
王畋於黃城之東
ㅡ 왕이 황성의 동쪽에서 사냥하였다
감방친구 17-12-04 06:05
이른 바 평양성 석각이라는 것은
지금의 평양에서 발견되었고
그 명칭이 평양성 석각일 뿐
석각의 그 어디에도 평양이라는 문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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