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미키님이 제시하신 한사군재한반도설 근거문헌
1. 삼국지의 왜열전
2.삼국지 동이전(동옥저 열전)(예(濊) 열전)
3.후한서 동이전(동옥저 열전)(예 열전)
4.한서 지리지
5.자치통감
6.삼국사기
-------------에 대한 반박입니다.
우선 삼국사기 부분부터 반박하겠습니다.
마이미키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낙랑이 백제,신라와 인접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마이미키님이 제시하신 근거자료
백제본기 온조왕
[서기전 11년]
온조왕이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다. 낙랑 태수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 관계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땅을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꾀가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킴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 관계에 변함이 있으랴? 당연히 집사(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책이 있다.”
이 때문에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신라 유리 이사금
[서기 40년]
화려현과 불내현(낙랑군 속현)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끌고 신라의 북쪽 국경에 쳐들어왔다.
삼국사기 고구려 미천왕
[서기 314년]
미천왕이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낙랑은 백제,신라와 인접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삼국사기 책에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다르게 고증하기도 합니다.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BC 14년 (삼국사기 제 13권 고구려본기 제 1 유리왕 33년)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縣屬玄?郡]
가을 8월, 임금은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 한나라의 고구려현[현은 현도군(玄?郡)에 속한다.]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AD 111~ 146 (삼국사기 제 15권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59년(서기 111),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속하기를 요구하였다.[『통감(通鑑)』에는 “이 해 3월, 고구려왕 궁(宮)이 예맥(穢貊)과 함께 현도를 쳤다.”고 하였는데, 혹 속하기를 원했는지 또는 침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하나는 잘못 기록된 듯하다.]
五十九年 遣使如漢 貢獻方物 求屬玄菟[通鑑言 是年三月 麗王宮與穢貊 寇玄菟 不知或求屬或寇耶 抑一誤耶]
여름 6월, 임금은 예맥과 함께 ★ 한나라 현도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菟 攻華麗城
69년(서기 121) 봄, 한나라 유주(幽州) 자사 풍환(馮煥), 현도 태수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風)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략해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菟大守姚光遼東太守蔡風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위의 기록에서 보면 같은 삼국사기 기록인데도 불구하고 낙랑의 위치를 고구려의 서쪽으로 비정합니다.
저는 이러한 모순에 대하여 이렇게 추측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백제,신라와 인접했던 낙랑과 고구려 서쪽에 있는 낙랑은 별개의 정치체이다.
즉 둘 중 하나는 한나라의 식민지(한사군)이고 나머지 하나는 별개의 낙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한사군의 낙랑인가? 저는 고구려의 서쪽이 한사군의 낙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근거는 위의 ★표시와 같습니다. 고구려의 서쪽에 있는 낙랑과 현도가 한나라의 것이라고 삼국사기에서 못을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라,백제와 인접해있는 낙랑의 정체는 무엇인가?
저는 그 궁금증을 같은 기록인 삼국사기로 증명하겠습니다.
AD 32년 (삼국사기 제 14권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15년)
여름 4월,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리오?”
★낙랑왕 최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이하지 않겠다.”
이전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것을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에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뒤에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병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낙랑을 없애기 위하여 청혼하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후에 그녀를 본국에 돌려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AD 37 (삼국사기 제 14권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20년)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위의 기록은 다들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위의 별표시와 같습니다. 호동왕자가 최리를 옥저에서 만난 것으로 보아 여기의 낙랑은 신라,백제와 인접한 낙랑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고작 한나라의 군현의 태수가 왕(王)이라는 호칭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또 나옵니다
삼국사기 책계왕조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삼국사기 기림이사금조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혼인동맹이란 국가와 국가간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맺는 것이지 국가와 군현 간에 맺는 것이 아닙니다. 군현의 태수라함은 지방의 관리에 불과할 뿐 세습되는 것이 아니며 언제든지 본국으로 소환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혼인동맹을 세습되는 것이 아닌, 언제 교체될지도 모르는 외국의 태수와 맺는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또한 아래 별표시에서 알 수 있듯이 낙랑과 대방 '두나라'가 와서 항복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나라의 군현을 왜 '나라'라고 기록한단 말입니까?
또한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BC 15년 (삼국사기 제 23권 백제본기 제 1 시조 온조왕 4년)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가을 8월,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어 우의를 다졌다.
- 이 기록에따르면 BC 15년에 백제와 낙랑이 교류했다 나옵니다. 그런데 당시 중국 사서에는 백제에 대해 기록되어진 것이 없습니다. 교차검증이 안된다는 겁니다. 중국 사서에 제대로 적혀진 최초의 백제 기록은 372년 근초고왕때(진서)로 삼국사기에서 낙랑과 교류했다는 BC 15년보다 무려 382년 뒤입니다. 거의 400년 뒤이죠. 만약 백제와 중국이 서로 교류하는 사이였다면은 어떻게 교류한지 약 400년 만에서야 백제가 기록되었단 말입니까?
이는 신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백제,신라 vs 낙랑 간의 전쟁은 중국사료로 교차검증이 되지않습니다.
고구려 vs 낙랑 간의 전쟁을 중국사료로 교차검증이 됩니다만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낙랑의 위치가 고구려의 서쪽과 한반도로 두가지가 서로 엇갈리게 고증된다. 그렇다면 이는 김부식이 잘못적은것일까?
아니다. 한반도의 낙랑과 고구려 서쪽의 있는 낙랑은 서로 다른 정치체이며,
고구려 서쪽의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고
한반도의 낙랑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봐야한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낙랑이 한나라의 군현에 불과했다면
왜 삼국사기에서는 낙랑의 태수를 왕(王)이라고 적고 군현이 아니라 나라(國)라고 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군현의 태수가 외국의 왕과 혼인동맹을 맺을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하다.
고구려 서쪽에 있는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이고
한반도에 있는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과는 별개의 정치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