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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1-23 22:14
[한국사] 한사군재한반도설 반박(삼국사기)
 글쓴이 : 꼬마러브
조회 : 2,099  

마이미키님이 제시하신 한사군재한반도설 근거문헌

1. 삼국지의 왜열전
2.삼국지 동이전(동옥저 열전)(예(濊) 열전)
3.후한서 동이전(동옥저 열전)(예 열전)
4.한서 지리지
5.자치통감
6.삼국사기

-------------에 대한 반박입니다.


우선 삼국사기 부분부터 반박하겠습니다.

마이미키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낙랑이 백제,신라와 인접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마이미키님이 제시하신 근거자료

백제본기 온조왕
[서기전 11년]
온조왕이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다. 낙랑 태수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 관계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땅을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꾀가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킴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 관계에 변함이 있으랴? 당연히 집사(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책이 있다.”
이 때문에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신라 유리 이사금
[서기 40년]
화려현과 불내현(낙랑군 속현)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끌고 신라의 북쪽 국경에 쳐들어왔다.

삼국사기 고구려 미천왕
[서기 314년]
미천왕이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낙랑은 백제,신라와 인접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삼국사기 책에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다르게 고증하기도 합니다.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BC 14년 (삼국사기 제 13권 고구려본기 제 1 유리왕 33년)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縣屬玄?郡]

가을 8월, 임금은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 한나라의 고구려현[현은 현도군(玄?郡)에 속한다.]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AD 111~ 146 (삼국사기 제 15권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59년(서기 111),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속하기를 요구하였다.[『통감(通鑑)』에는 “이 해 3월, 고구려왕 궁(宮)이 예맥(穢貊)과 함께 현도를 쳤다.”고 하였는데, 혹 속하기를 원했는지 또는 침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하나는 잘못 기록된 듯하다.]

五十九年 遣使如漢 貢獻方物 求屬玄菟[通鑑言 是年三月 麗王宮與穢貊 寇玄菟 不知或求屬或寇耶 抑一誤耶]

여름 6월, 임금은 예맥과 함께 ★ 한나라 현도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菟 攻華麗城

69년(서기 121) 봄, 한나라 유주(幽州) 자사 풍환(馮煥), 현도 태수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風)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략해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菟大守姚光遼東太守蔡風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위의 기록에서 보면 같은 삼국사기 기록인데도 불구하고 낙랑의 위치를 고구려의 서쪽으로 비정합니다.
저는 이러한 모순에 대하여 이렇게 추측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백제,신라와 인접했던 낙랑과 고구려 서쪽에 있는 낙랑은 별개의 정치체이다.

즉 둘 중 하나는 한나라의 식민지(한사군)이고 나머지 하나는 별개의 낙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한사군의 낙랑인가? 저는 고구려의 서쪽이 한사군의 낙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근거는 위의 ★표시와 같습니다. 고구려의 서쪽에 있는 낙랑과 현도가 한나라의 것이라고 삼국사기에서 못을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라,백제와 인접해있는 낙랑의 정체는 무엇인가?

저는 그 궁금증을 같은 기록인 삼국사기로 증명하겠습니다.


AD 32년 (삼국사기 제 14권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15년)

여름 4월,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리오?”

★낙랑왕 최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이하지 않겠다.”

이전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것을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에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뒤에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병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낙랑을 없애기 위하여 청혼하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후에 그녀를 본국에 돌려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AD 37 (삼국사기 제 14권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20년)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위의 기록은 다들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위의 별표시와 같습니다. 호동왕자가 최리를 옥저에서 만난 것으로 보아 여기의 낙랑은 신라,백제와 인접한 낙랑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고작 한나라의 군현의 태수가 왕(王)이라는 호칭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또 나옵니다

삼국사기 책계왕조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삼국사기 기림이사금조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혼인동맹이란 국가와 국가간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맺는 것이지 국가와 군현 간에 맺는 것이 아닙니다. 군현의 태수라함은 지방의 관리에 불과할 뿐 세습되는 것이 아니며 언제든지 본국으로 소환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혼인동맹을 세습되는 것이 아닌, 언제 교체될지도 모르는 외국의 태수와 맺는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또한 아래 별표시에서 알 수 있듯이 낙랑과 대방 '두나라'가 와서 항복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나라의 군현을 왜 '나라'라고 기록한단 말입니까?


또한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BC 15년 (삼국사기 제 23권 백제본기 제 1 시조 온조왕 4년)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가을 8월,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어 우의를 다졌다.

- 이 기록에따르면  BC 15년에 백제와 낙랑이 교류했다 나옵니다. 그런데 당시 중국 사서에는 백제에 대해 기록되어진 것이 없습니다. 교차검증이 안된다는 겁니다. 중국 사서에 제대로 적혀진 최초의 백제 기록은 372년 근초고왕때(진서)로 삼국사기에서 낙랑과 교류했다는 BC 15년보다 무려 382년 뒤입니다. 거의 400년 뒤이죠. 만약 백제와 중국이 서로 교류하는 사이였다면은 어떻게 교류한지 약 400년 만에서야 백제가 기록되었단 말입니까?

이는 신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백제,신라 vs 낙랑 간의 전쟁은 중국사료로 교차검증이 되지않습니다.
고구려 vs 낙랑 간의 전쟁을 중국사료로 교차검증이 됩니다만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낙랑의 위치가 고구려의 서쪽과 한반도로 두가지가 서로 엇갈리게 고증된다. 그렇다면 이는 김부식이 잘못적은것일까?
아니다. 한반도의 낙랑과 고구려 서쪽의 있는 낙랑은 서로 다른 정치체이며,
고구려 서쪽의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고
한반도의 낙랑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봐야한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낙랑이 한나라의 군현에 불과했다면
왜 삼국사기에서는 낙랑의 태수를 왕(王)이라고 적고 군현이 아니라 나라(國)라고 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군현의 태수가 외국의 왕과 혼인동맹을 맺을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하다.
고구려 서쪽에 있는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이고
한반도에 있는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과는 별개의 정치체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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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요석 16-11-23 22:27
   
조심스럽지만

꼬마러브님과 마이미키님의 댓글 논쟁을 조용히 자켜보다가 저도 댓글 하나 남겨봅니다.

꼬마러브님은 기록을 바탕으로 주장하시고 반박하시는데

마이미키님이 주장하시는 건 기록을 바탕으로 한 주장+유물이 엄청나게 많이 출토되어 증명을 하는 거잖아요.

그럼 유물이 많이 쏟아진 쪽이 좀 더 그럴듯한 거 아닌가요?

전 역알못이라서 많은 분들이 댓글로 논쟁하시는 걸 지켜보고 따로 검색도 해보고 나름 분석 중인데

한사군 논쟁은 참으로 복잡하군요;;; ㄷㄷ
     
꼬마러브 16-11-23 22:29
   
SBS 다큐스페셜

일제의 낙랑군 유물 조작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9028&sca=&sfl=wr_subject&stx=sbs&sop=and

또한 현재 재야사학계에서 낙랑이 있었다고 하는 요서지역이
현재 중국땅이라 고고학 발견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서에서도 낙랑군 유물이 나옵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26238&sca=&sfl=wr_subject&stx=%EB%B2%A0%EC%9D%B4%EC%A7%95&sop=and

이는 그 많은 유물 들 중 하나입니다.
          
흑요석 16-11-23 22:34
   
근데 해방 이후에 유물이 더 많이 쏟아져 나왔는데

해방 이후에 일제가 유물 조작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전 이해가 잘 안 가서요..;;

제가 모르는 게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전 정말 한사군 재한반도설과 한사군 요동설 사이에서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꼬마러브 16-11-23 22:40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현 강단사학계의 통설은 아시다시피
한사군재한반도설입니다.
즉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인데..
광복 이후 쓰다소키치, 이병도, 이기백으로 이어지는 역사학계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있어
그 후 평양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을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프레임에 집어넣어
낙랑군유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들어 재야사학계에서 공격이 많아지자..
현재는 국립박물관에서 평양낙랑군 유물들이 퇴출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2/2012110201478.html?Dep0=twitter&d=2012110201478

그리고 고고학과 문헌의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는 잘못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조상과 선조를 통하여 수백년 동안 이어온 문헌이 고고학보다 정확성이 높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7912&sca=&sfl=wr_subject&stx=%ED%95%9C%EC%82%AC%EA%B5%B0&sop=and
               
mymiky 16-11-23 22:48
   
실제로, 한나라 양식의 무덤과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좋든 싫든 말이지요..팩트는 팩트일 뿐입니다.

물론, 다 조작이고, 식빠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뭐, 그분들에겐 저도 식빠인거 같네요 ^^;;

사실, 가생이에서나 흥하고, 재야사학계에서 흥하지..

학계통설에 이견은 없습니다.
물론, 이분들이 모두 식빠라고 주장한다면, 답정너인 분들에게 더이상
무슨 말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꼬마러브 16-11-23 23:01
   
고고학에 대하여 문외한이지만 그것은 중국계 세력과 한반도 중부지역 토착세력 간의 교류가 있었음을 말할 뿐이지
그것이 한나라가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나? 생각합니다.
그런식이라면 명도전 역시 한반도 중남부와 요동, 산동반도까지 넓게 발견되는데
이는 당시 연나라가 한반도 중남부를 지배했다는 소리입니까?
아니면 고조선이 산동반도까지 지비했다는 소리입니까?
둘다 말이 안됩니다.
                         
mymiky 16-11-23 23:06
   
명도전이야 돈이니 무역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평양지역에선 중국돈 뿐만 아니라, 인장, 토기 생활도구, 등등..
그밖에 한나라인들 고분만 3천기가 넘게 발굴되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발굴될지는 파봐야 겠지만..

그 지역에 어느정도 세력이 있었던건 팩트예요.

본래 재야사학계는

1.한사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2.있긴 했는데 한반도 안은 아니다-
3.유물이 나오니까, 거기 중국인들이 살긴 살았는데
고구려인들이 전쟁포로를 데려온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죠;;  뭐 아무튼 계속 말이 바뀝니다.

실제로 한나라 포로들이라고 하기엔, 규모나 부장품 같은 것들이
고작 포로들이 썼다고 할만한 것들이 아닌데;;
-어느정도 신분도 있고, 수준이 있다는 뜻입니다.
                         
뚜리뚜바 16-11-23 23:18
   
mymiky 님 평양 한나라 고분에 대한 자세한 자료 사이트 혹시 없나요; 뉴스나 블로그에 잘 보이지가 않아 그런데 중간중간 내용이 있는거 보니 있긴한거 같은데 자세한 내용이 있는 곳을 볼 수가 없네요. 혹시 알고 계시면 좀 알려주세요
                         
mymiky 16-11-23 23:51
   
님이 한자 좀 하시면, 바이두 가셔서, 중국측 자료도 보실수 있고요.

아, 물론 중화뽕 맞은 애들답게,
중국문물을 한반도에 잘 전수해주었다.. 라는 뉘앙스로
쓰여져 있는걸 보실수 있겠습니다만;;

그밖에, 돌아다니다보면,
평양발굴 한고분에 그려진 벽화도 어디 있던데..
갑작히 찾을려니까 못 찾겠네요;;

바이두엔, 낙랑궁에서 출토된 기와가 있군요.
고분에게 출토되는 칠기 제품이 유명하다던데.. 설명은 있으나,
아쉽게도 사진이 없네요.
                    
꼬마러브 16-11-23 23:22
   
고분에서 낙랑 목간은 몇개 출토되었지만 봉니가 같이 나온 보고는 없는 상태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낙랑목간이 바로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증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고분에서 한나라 양식의 인장, 토기 생활도구까지 발견되었다니요? 자료 있습니까?
도대체 무슨 유물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감이 안잡히네요
자료 부탁드립니다
               
삼바 16-11-23 23:13
   
해방 이후에 유물. 무엇을 말씀 하시는지요?
낙랑무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축조된것이 틀림없습니다.
낙랑무덤은 한사군 존재 증명 안되고 오히려 거기에 한사군은  없었다가 답입니다.
또 유물은 현대적 연구가 된것을 우선해야하나 북한이 현대적인 연구가 부족합니다.
들고 다닐수 있는거 교역할수 있는것은 존재 증명 안됩니다.
게다가 일제가 조작한것이 명백한 봉니 같은 것도 존재증명 안됩니다.
한사군 문제가 우리 역사에 중요한 만큼 조작되기 쉬운 유물은 근거에서 제외되어야합니다.
 연대측정이 안되는 물건
출토증명이 안되는물건.
이동이 자유로운 물건.
이런것으로 우리역사 구성할수 없습니다.
앞으로 출토증명이 되고 연대측정이 되고 이동이 불가능한 유물이 나오지 않는이상 논란은 계속 있게될것입니다.
                    
mymiky 16-11-23 23:26
   
보통, 중국측으로 해서 북한과 교류하거나, 한창 김대중, 노무현 정부때나
북한과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엔 남북한 역사학계가 개성 만월대를 공동발굴 하기도 했지요.

북한과 교류가 어렵긴 하지만,, 뭐,, 학계적으로 교류가 아예 없진 않아요.
다만, 정치적 문제 변수가 있어서 자주 못하고, 기간이 오래 걸리는 일은 있겠지만..

또한, 어느 학계나 마찬가지겠지만..
역사학계가 전세계적으로 네트워크가 되어 있습니다.

세미나라든가.. 국제 교류가 괜히 있는게 아니죠.
21세기인데요..
          
촐라롱콘 16-11-23 23:54
   
실체로서의 낙랑은 서기 313년에 멸망했는데....

북경 인근에서 발견된 무덤의 시기는 낙랑 멸망 이후 200년 이상이나 흐른

남북조시대의 무덤이잖습니까....??? 님이 링크하신 자료에 의하면......

낙랑이 멸망한 후 잔여세력이 요서의 모용외에게 의탁한 사실인 무시하시는 것인지.....

낙랑의 잔여세력이 요서지역으로 이동한 후에 낙랑의 행정구역 명칭들도 더불어

이치된 결과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밥밥c 16-11-23 22:37
   
흔히 말하는 중국의 정사(25사)의 기록을 보면, 사실상 유주 요서군(하북성동쪽)을 넘어서는 전혀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같은 지역에 동시에 나오게 됩니다.

 관찰자입장에서는 섬서성 장안, 하남성 낙양의 동북쪽 요서, 요동을 넘지 못하니 아예

 같게 느껴지는 것이죠.

 그래서 기록상 자세한 기록이 아예 없습니다.

 주류사학의 주장처럼 식민지를 삼았다면, 제대로 된 인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고조선계열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뚜리뚜바 16-11-23 22:35
   
낙랑만 있다면 어느정도 이해하겠는데; 님 말씀대로 한반도내에 최씨의 낙랑국이 있었다면 그옆에 있던 대방국은 무엇일까요; 고구려 서쪽에 있는 낙랑,대방/ 한반도 내의 낙랑국, 대방국 각각 동시에 존재하기엔 이름이 너무 같은거 같습니다. 같은 이름을 들고 온것인지;;
무엇이 더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일제때 한반도 내에서 나온 낙랑 유물이 조작인게 밝혀진 다큐가 있어 요서에 있는게 맞겠구나 했는데;;  대방국이라는 것도 한반도 내에 있다니 혼란이 생기네요;;
     
꼬마러브 16-11-23 22:43
   
옥저도..
동옥저 북옥저 로 나뉘며
예도
동예로 나뉘어지고
부여도
동부여 북부여..
고구려 또한
독립국가인 고구려국과 중국의 행정구역인 현도군의 고구려현

이러한 같은 지명의 반복은 삼국시대에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평양의 위치도 있겠네요.

고대사를 보면 강의 이름이라든지 도시의 지명이  많이 중복되어 나타납니다. 이상한 현상이 아니에요
mymiky 16-11-23 22:46
   
한나라는 군국제를 하던 나라입니다.
무제 때 군현제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국(國)과 군(郡)은 같은 등급의 행정단위였습니다.

그렇다면, 낙랑국의 지배자가 왕을 칭한다 하더라도 왕은 여전히 천자의 신하임으로 상관이 없고,
그 자식들도 왕자, 공주라 칭하더라도 이상할건 없을 겁니다.

실제로 낙랑군은 중국 내부의 정세 변화에 따라 자립하기도 하고 다시 종속되기도  했습니다.
낙랑군은 처음 설치시에는 중국에서 태수가 파견되는 군현이었지만 낙랑군 역사가 400년입니다.
그동안 자립과 속현을 반복합니다.

특히 유리왕시대 중국 왕망의 혼란을 통해 토착인 왕조(王調)가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살해하고 자립하기도 했고요.

혹자는, 낙랑왕 최리는(낙랑공주 아빠) 낙랑왕 왕조란 사람의 뒤를 이은 통치지가 아닐까? 보기도 합니다.  뭐, 근데 확실치는 않고.. 호동왕자랑 낙랑공주 자명고, 이야기는 유명하니 패스하고..

대무신왕 때 낙랑을 먹고 얼마후 한나라가 침공 다시 되찾아 갖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서진 왕조가 팔왕의 난으로 각 왕들이 이민족 용병을 불러들이면서 서진이 오히려 뒤집어 지고 회하 이북이 대혼란에 빠지는 시대였기에 고구려가 쉽게 성공할 수 있었지요. 물론 다시 토해내지만..

고구려에 의해 일시붕괴되었으나 중국 후한왕조가 들어서면서 다시 태수 왕준(王逡)이 파견됩니다.
물론 왕준이 통치한 지역은 붕괴이전의 낙랑군에 비하면 현저히 줄어든 지역이지요.
     
꼬마러브 16-11-23 22:57
   
국과 군이 같은 등급의 행정단위라 하더라도
한나라의 군현 중에서 스스로 왕을 칭하고 외국의 왕과 혼인동맹을 하는 경우는
공손씨의 경우를 제외하고 없습니다. 즉 극히 일부라는 겁니다.

또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가 만나기 불과 4년전
삼국사기 기록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서기 28년)

11년(서기 28) 가을 7월, 한의 요동(遼東) 태수(太守)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즉 당시 한나라와 고구려는 서로 적국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과 4년만에 한나라의 군현의 태수인 최리가 적국의 왕자와 자신의 딸을 혼인시킨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낙랑군이 중국의 정세변환에 따라 자립하기도 하고 종속되기도 하였다고 하며 설명하시는데

상식적으로..

한사군의 종주국인 전한이 망해버렸는데도 300여년동안 전한 이후에 세워진 4개 왕조가
본국과 멀리 떨어져있는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이야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구려가 전쟁한 낙랑과 백제,신라가 인접한 낙랑의 위치가 서로 같게 고증된다면 님의 말도 일리가 있겠으나

같은 책에서 한나라의 한사군이 고구려의 서쪽에 있다고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mymiky 16-11-23 23:02
   
정확히 말해서는, 반 자립지역 입니다.

님의 말씀처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신경을 잘 못 쓸 때도 있었고
영향을 강하게 미칠때도 있었습니다.

이건, 시기마다 다를겁니다.
중국에서 신경을 못 쓴다면,
뭐 간섭받지 않고, 속된말로 호랑이 없는 숲에선 늑대가 주인행세 한다고
왕행세 하면서 사는거고, 아니면 까라면 까는거겠죠..

그리고, 님은 워낙 고구려 서쪽설을 신봉하시는데-.-
제가 뭐라한들 들으실까? 싶네요;;

유물도 조작이네 하는데 ㅋㅋㅋ 아무리 뭐라고 해본들,
난 싫어! 하면 그만이 아닐까요?
               
꼬마러브 16-11-23 23:17
   
아니요. 저는 토론에 의하여 입장을 바꿀 준비가 얼마든지 되어 있습니다.

한반도에 있던 낙랑군이 본국의 지원없이 스스로 자립했다고 하시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 사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한사군이 자립했다면 진작에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거나 주변국가들에게 점령당했을 것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당시 민족개념이 없었다고 해도 중국인은 이민족이에요.
유리왕의 아내인 치희도 한나라출신이라는 이유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이후 유리왕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 황조가이고요.

뭐하러 종주국인 전한이 망해버렸는데 독립을 하지 않고 그 이후 중국 4개 왕조에 충성을 바친단 말입니까?

삼국사기 고이왕조 기록을 보면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위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한사군은 군사력을 갖추고 중국의 군사기지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또한 중국에서 직접 낙랑태수를 낙랑군에 임명하여 파견했다는 기록들이 많이 보입니다만

자립을 하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합니다.
역사는 추측이 아니라 명확한 팩트를 기반으로 해야합니다. 당연한 것 아닌지요?
                    
mymiky 16-11-23 23:34
   
치희는 걍. 자기 고향으로 간거지.. 죽임을 당하진 않았는데요?

일단, 조공의 개념을 보면 알수 있듯이

조선도 마찬가지겠지만.. 중국과 커넥션이 있는게 좋죠..

왜냐? 과거의 중국은 무역이나 물건 같은거 구하는데 있어서
꽤나 쏠쏠하니까요.
(애초에, 오늘날의 독립국가 개념은 근대의 유산인거고)

왜 우리나라 역대왕조들이 중국과 인맥을 다지려고 했겠습니까?
고구려 장수왕도 조공은 참 잘했던 왕입니다 ㅋㅋㅋ

자존심이 없어서 그랬나요? 아닙니다. 자기들에게 이득이 있으니 그런거죠.

한나라가 망해도, 그뒤에 중원왕조들과 잘 지내는게 이득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중국도 마찬가지잖아요?
경제적으로 중국에 수출잘되면 좋다고 여기지 않나요?
또 그러다가 패권주의 같은건 좀 우려스러워 하구요.
중국에게 가지는 이중적인 마음이긴한데..

적당한 밀당? 본국과의 커넥션을 중시 여기면서도,
본국이 망했다고해서, 자기들도 망한건 아니였죠.
실제로 한나라가 망해도 낙랑군은 꽤 지속했으니까요.

나름, 한반도 내에서 어느정도 자기들만의 포지션을 잘 구축했다고 생각합니다.
                         
꼬마러브 16-11-23 23:49
   
왕비 송씨의 죽음과 치희를 서로 섞어헷갈렸군요. 정정하겠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으로만 반박하겠습니다.

또한 만약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삼국사기 동천왕조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유유는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사는 마침내 혼란에 빠졌다.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을 거쳐 물러갔다.

왜 위나라 군이 본토가 있는 서쪽으로 퇴각하지 않고 한반도 깊숙히 평양으로 퇴각한단 말입니까?
                         
mymiky 16-11-24 00:04
   
근데, 님은 해로같은 뱃길은 생각을 아예 안하시는건가요?
산동에서 쭉 오면 가깝고,
당나라군도 실제로 산동반도에서 출항해
서해쪽으로 와서, 백제도 공격하고, 고구려도 공격하고 다 했는데?

위가 고구려의 턱밑인 낙랑과 대방군을 선점하고 싸웠다는 생각은 못 하시는거 같아서..
                         
꼬마러브 16-11-24 00:18
   
공격하는 것과 퇴각하는 것은 다르지요. 적국에게 패전하여 본국으로 급히 퇴각하는 마당에 낙랑으로 가 배를 타고 본국으로 퇴각?
배를 태워 퇴각했다는 기록이 있나요?
설사 그 기록이 생략되었다고 해도
퇴각하는 마당에 그 많은 군사들을 태울 배를 어디서 구하며,
뭐하러 그렇게 복잡한 경로로 간단 말입니까?


그리고 또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가정할 시 대방군은 낙랑군의 아래인 황해도에 있었다는 뜻인데

삼국사기 책계왕조에서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가 대방을 치기 위해서는 낙랑군을 거칠 수 밖에 없는데 이 기록은 서기 286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낙랑군은 서기 313년에 멸망했으니 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낙랑이 고구려의 서쪽에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전부 부정하고 삼국사기의 낙랑군을 전부 평양으로 본다면 모순되는 기록들이 매우 많습니다.
                         
mymiky 16-11-24 00:36
   
전 그리 알고 있었는데요 ㅋㅋㅋ
비행기도 없고, 그 당시에 배만큼 대량의 군사를 한꺼번에 보낼 운송수단이 없을텐데요.  육로나 해로나 전략에 따라 다른거지..
등잔밑이 어두운걸 공략했다면 충분히 있을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요?

명나라가 왜란때 조선 구할때도, 첨엔 북방의 육로로 왔다가, 해로가 편하다고 해로로 군사며, 식량이며 다 보내줬는데;;

배타고 왔으면 배타고 갈수도 있는거지..
뭐, 하기 나름이 아닐까? 합니다.

글고, 대방치는게 있을수 없다니? 뭔 뜻인지?

백제 책계왕 부인이 대방인이라서, 고구려가 대방과 싸울때 처가(?)
에 원군을 보내주는건 맞는데?
고구려는 청천강을 경계로, 백제, 낙랑은 예성강을 통해 대방과 접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일인가요?

뭐, 아무튼.. 시간이 늦었네요
안녕히 주무세요~
                         
꼬마러브 16-11-24 00:48
   
강단사학계에서 주장하는 한사군재한반도설의 핵심내용이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고 대방군은 그 아래인 황해도지방에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님이 말한 예성강 지역이요.

그런데 고구려는 낙랑군의 북쪽 압록강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고구려가 황해도에 위치한 대방군을 치기 위해서는 가운데 있는 낙랑군을 거칠 수 밖에 없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서기 286년에 고구려가 대방을 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낙랑이 멸망하는 시기는 서기 313년이므로

불가능하다는겁니다.

뭐 저도 자러 가보겠습니다. 잘자세요~
     
꼬마러브 16-11-23 23:06
   
한나라가 침공 후 다시 되찾아 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아마 이것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무신왕 27년(서기 44년) 가을 9월, 후한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만들었다. 이에 살수 이남은 한에 속하게 되었다.

저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합니다.
후한서와 책부원구등의 기록을 보면 같은 년도에 한국(韓國)인들이 낙랑군에 속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한국인들이란 고구려에 점령당한 낙랑국으로 고구려에 점령당한 낙랑국 사람들이 고구려에게 독립하기 위해 한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로인해 광무제는 고구려의 영토인 낙랑을 침입했고요.
          
아비요 16-11-24 07:02
   
음 고구려의 위치가 낙랑 북쪽이라고 하는건 좀 어불성설이지 싶네요. 정확히는 동북쪽이 정확하지 싶습니다. 그렇게보면 고구려 서쪽에 낙랑이 있었다는 말도 틀린게 아닙니다. 압록강의 서쪽 즉 하구지역은 낙랑의 통치지역이었다고 봄이 맞을거 같습니다.
그리고 대방은 낙랑의 남쪽 지역을 잘라서 설치한겁니다. 남쪽의 이민족 즉 우리민족 경기도의 마한 혹은 백제의 세력이 막강해지니 방어를 위해 세운것이죠.
그리고 고구려에서 바로 치는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거리도 그리 안멀고 함경도쪽은 사실상 한군현 세력밖이기에..
               
꼬마러브 16-11-24 08:10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에서는 낙랑에 막혀 서해가 없었다는 말인데

4년(251) 여름
4월에 왕은 관나부인(貫那夫人)을 가죽주머니에 넣어 서해에 던져버렸다.

이 기록은 어떻게 설명하실겁니까?
꼬마러브 16-11-23 23:32
   
님은 워낙 고구려 서쪽설을 신봉하시는데-.-  <<<

고구려서쪽설... 삼국사기에 적혀있지 않습니까?
만약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고 한다면
낙랑이 고구려 서쪽에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한다는 뜻이겠지요?
김부식이 잘못적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중요한 건 하나 집고 갑시다.

낙랑군과 고구려가 전쟁을 치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중국문헌으로 교차검증이 되나
낙랑군과 백제,신라가 전쟁을 치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중국문헌으로 교차검증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애초에
중국문헌에서 백제와 신라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근초고왕때입니다.

만약 고구려 서쪽에 낙랑이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한다면 그것과 교차검증되는 중국사료 역시 같이 부정한다는 소리입니다.
스파게티 16-11-24 03:17
   
논쟁 잼있는대  미키 저분  ㅋㅋ ㅋ 이거왜함  <<<    러브님은 글만보면  진지하게 댓글달고하는거같은대

 미키 저분은  글볼때마다  많이는 아는대 항상  남을 조롱하는듯한 말투임  싸가지없는

정답도없는 역사 따위~~
볼텍스 16-11-24 04:25
   
다른건 제가 지식이 짧아서 끼어들지 못하겠습니다만..
해로를 이용해서 그 많은 패전병을 실어 나르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의 조선기술을 생각해야하죠.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던 시기의 배수량과 기원후 200~300년대를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어마어마한 선단의 규모가 되어야하는거죠.
아비요 16-11-24 06:57
   
좀 착각하시는게 한군현이 세습이 안되었다고 생각하시는게 에러지 싶습니다. 그 당시 한나라는 사실상 봉건제나 마찬가집니다. 삼국지의 알아서 세금걷고 병사 뽑아서 운용하는게 정상이고 가문에서 상속하는게 당연한 세상이었던거죠. 특히 낙랑은 동방변군이라는 외군이었으니 내군보다 훨씬 독립적이었을 겁니다.
북극의곰 21-06-19 22:12
   
중국측에서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음을 명확히 했고요.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낙랑군이 아니라 그냥 낙랑이라 한 것은 한반도내의 낙랑소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반도내에 한사군이 없다고 중국측 기록에 있는데 무슨  소립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러니 주류역사학계는 무지하다고 욕을 먹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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