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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1-18 13:25
[한국사]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 (11)- 베일에 가린 대목탑, 신라 실상사 實相寺
 글쓴이 : 햄돌
조회 : 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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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대목탑 추정도 (9층목탑)


열 한번째로 소개하는 한국의 사라진 대사찰은 신라때 건립된 천년사찰 실상사實相寺입니다. 많은 우리나라의 유적지가 그렇듯 90년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발굴과 연구가 되고 있는 곳중 하나인데, 시리즈 이전에 소개한 대사찰들보다도 그 전모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는 건축지입니다. 


실상사의 역사

삼국의 대사찰들, 특히 신라의 사찰들이 그러했듯, 실상사 역시 호국사찰로 잘 알려져있는 가람입니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가 매우 재미있는데 차차 짚어보지요. 실상사는 9세기초인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불교의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 심신을 닦을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인 남원시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습니다. 흥덕왕은 태자 선광과 함께 이 가람에 귀의했습니다. 지금도 실상사터는 풍수지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가 좋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이 곳은 이전에 소개한 강릉의 대사찰 굴산사와 같이 '구산선종(九山禪宗)'의 하나로 세워집니다. 아래 지도에 굴산과 실상의 두 파가 보이지요 (참조- 통일신라-고려 굴산사 편). 굴산사는 '사굴', 실상사는 '실상'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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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구산 (구산선문)


조금 흥미로운 점은 사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이전에, 한국의 가람들이 현재처럼 '산속으로' 들어가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근본원인이 바로 이 '선불교'의 도입때문이었는데, 재미있게도 정작 선종 9산중 하나인 이 실상사는 그 이전의 대사찰들처럼 넓은 평야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증각대사는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습니다. 그뿐아니라 제자중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나왔고, 그들에게서 계속해서 많은 선종의 대가들이 쏟아지면서,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킵니다. 즉, 한국 선불교의 커다란 흐름을 실상사가 주도한 것입니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실상사의 규모와 미는 가장 절정에 달합니다. 조계종 실상사파로 종명을 개칭, 1127년-1130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최근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도 창건 이후 약 300년이 지난, 1100년대 (12세기) 대대적으로 중창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현재 나오고 있는 유구도 고려시대 것이 가장 많습니다. 하지만, 실상사문이라는 선종의 종파가 저물면서, 고려시대 초기 이후 계속 가람의 위세는 쇠퇴했다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료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는 시기입니다).



실상사 1차발굴시 사진 (1996년-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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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되고 있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의 수많은 사찰들이 그러하듯 축소되어 전하고 있습니다. 우선 실록에 보면 세조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되면서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사찰터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논밭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남원의 실상사와 부안에 지금도 작은 규모로 전하는 실상사는 구분되어야 하는데, 7세기에 건립된 부안의 실상사 역시 꽤나 큰 규모의 가람이었음을 다음의 구절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연산군때 기록입니다.
연산 45권, 8년(1502 임술 / 명 홍치(弘治) 15년) 8월 12일(신해) 
정언 조옥곤(趙玉崑)이 아뢰기를,
“신이 전라도 부안(扶安)에 살 때에 실상사(實相寺)의 전결(田結)이 매우 많았으니, 학전(學田)에 소속시키기를 청합니다. 또 각 관아(官衙)에서 나누어 기르는 무소는 수령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사육하게 하므로 폐단이 아주 많고 국가의 용도(用度)에도 이익이 없으니 목장에 놓아 기르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길를,
“무소는 뿔이 소용 없고 또한 논밭도 갈지 못하니, 과연 아뢴 바와 같다.”
하였다.

전결은 해당 지역 내의 토지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는 부안의 실상사 역시 꽤 큰 규모였음을 유추케 합니다.

아무튼 다시 원래의 주제인 남원 실상사로 돌아가서. 조선중기 화재로 소실된후, 숙종 때인 17세기중반이후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다시한번 무려 36개의 건물을 가진 대가람을 중건합니다.  이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장사에 속한 8개 말사와 실상사에 속한 9개 말사가 남아 있었습니다- 즉, 내원ㆍ정각암ㆍ이명전ㆍ남대암ㆍ조계암ㆍ양수암ㆍ보명암ㆍ세전암ㆍ상암ㆍ금당ㆍ백련암ㆍ수성대ㆍ일출암ㆍ봉계암ㆍ양직암ㆍ장계사ㆍ백장암등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가람은 1882년과 1884년의 화재 사고로 약사전, 명부전, 극락전 등 3채의 불전과 승당 1채만 남겨두고 다시 모두 전소되어 버립니다. 

이렇듯 유교의 전성기인 조선중기이후에도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19세기 후반인 고종 21년(1884)에도 월송대사가 세번째 중건을 합니다 (이 세번째 중창은 위에 나오는대로 함양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출신 민동혁(閔東赫)이 절을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이때 대적광전이 불탄 자리에 지금의 보광전 건물을 새로 중창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나오는 발굴결과와 현재의 사역을 보면 역시 고려시대 초기의 융성기보다는 훨씬 못한 듯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사문이 점점 쇠퇴했고, 몇번의 전소를 거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전쟁때 주지스님이 피살되고, 가장 최근인 20세기에도 83년 함양댐건설계획으로 수몰위기를 겪었으나 주민들과 당대 주지였던 혜광스님의 노력의 결실로 천년고찰의 맥을 잇게 됩니다.

이러한 풍파를 겪은 현재의 실상사는, 따라서 전성기의 몇분의 일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발굴조사자체가 아직 멀었지요). 사실 이러한 역사를 거치며 쇠퇴한 (그래서 원래의 사역을 모르는) 절은 국내에 많습니다. 그러나, 실상사의 중흥기때 규모가 현재 발굴보다 훨씬 컸을지도 모르는 대사찰의 증거가 될 이유는 이제부터입니다. 즉, 황룡사 9층 목탑급의 목탑터가 나온 것입니다.

하이라이트인 대목탑을 다루기 전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짚고 넘어가지요.



1999년 1차발굴 보고서중 가람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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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실상사의 '반비례 역학관계'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집니다. 사실 임진왜란때 전소된 문화건축물이 한두개가 아니지만, 언급한 정유재란때의 왜구에 의한 명확한 전소기록은 다른 대가람과 다르게 그 기록이 정확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찰 곳곳에 반일의 감정이 배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바로 일직선으로 그 너머에는 일본의 상징 후지산이 위치한다고 합니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모든 병을 고쳐주는 불인데 그러면 일본을 '병'으로 보든가 '병의 근원'으로 보든가, 혹은 일본을 '치유'해 주거나 이런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아래 붉은색 화살표가 바로 약사여래의 방향입니다. 정말 특이한 것은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인데, 아래 그림을 보시면 알겠지만 평지에 세워진 가람배치치고는 꽤 특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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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절내에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위치한 법계사에서도 직접 전해지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건,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범종은 강희(康熙) 33년(1694)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 일본열도 지도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다 닳은듯 흔적만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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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황룡사, 사천왕사 등 고대의 많은 가람이 호국가람으로써 당나라나 주위국가들에 대한 호전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실상사처럼 특정국가에 대한 반감이나 호전성을 대놓고 드러내는 고대가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21세기의 대발굴, 실상사 대목탑

앞에서 살펴보았듯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 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현재 작은 가람이 되어버린 사세에도,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고, 국보-보물급 문화재가 수두룩합니다. 

보물급에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개산당시),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년),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철제여래좌상(41호,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등 11점이 보존되어 있고.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 백장암보살좌상(166호,고려), 백장암범종(211호, 1743년)등 5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중요민속자료는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가 있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 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고,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가람으로 향하는 강옆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때 떠내려 가고 없습니다. 



흔히 보는 조선후기 목장승과 분위가 사뭇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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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에는 위에 언급한 17세기 범종 이외에도 통일신라시대의 동종(銅鐘)이 있었는데, 깨져서 지금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이 그것입니다.



시대뿐 아니라 그 예술적 수준도 성덕대왕신종과 비견될 실상사동종(동국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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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드디어 대목탑터입니다.
앞서 설명했듯 실상사의 전성기 규모나 가람배치는 아직 전혀 파악이 안된 상태인데, 현재의 이러한 사역구도만 보아도 단숨에 알수 있습니다. 여러 번의 중창으로 또한 현재 조선시대의 가람이 위치한 관계로 그 땅밑에 어떠한 사역이 배치되어 있는지 현실적으로 알기가 힘들다는 것인데, 이는 한일 월드컵때인 2002년에서야 발굴된, 극히 최근의 한국문화재 대발굴인 실상사 대목탑터만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목탑터에 대한 인식과 조사는 90년대에도 있었습니다만). 

사진을 보면 보광전의 사진상 오른쪽으로 커다란 정사각형의 터가 보입니다. 가운데 심초석을 중심으로 거대한 목탑터입니다. 탑을 금당앞쪽에 배치했던 고대 대사찰들을 생각할때, 현재의 구조는 완전히 기형적이지요. 따라서 원래의 실상사가 이러한 구도가 아니었음을 추정해 볼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 건축물의 규모와 저 거대한 목탑터의 규모가 전혀 비례적으로 맞지 않음도 단번에 느껴집니다. 목탑과 마을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장육전(커다란 장륙존상을 모신)이 이 터에 후대에 따로 별도로 만들어졌다는 설도 존재하기도 합니다. 또한, 2002년 당시 목탑터와 함께 여기서 북쪽으로 60m쯤 떨어진 곳에서는 온돌시설을 갖춘 건물로는 궁궐을 빼고는 최대 규모(2백16평)인 건물터가 함께 발굴되었습니다 (즉 한국최대의 온돌단일 건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1999년의 1차발굴때는 위의 가람배치보고서의 건물지 8은 남북 27.45미터, 동서 19.37미터에 (기단은 30.8미터 x 22.6미터) 달하는 규모이기도 합니다- 이는 현재 경복궁 근정전 (30.7 x 21)의 규모이자 황룡사의 대금당 좌우의 건물 (각각 36 x 21)에 견줄만한 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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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온돌 대건물터 발굴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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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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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사실 문화재청에서는 실상사의 사적지로 현재의 사찰사역과 전혀 무관하게 무려 10만 평을 지정해 놓고 있습니다. 10만평이면 무려 33만평방미터로 거의 경복궁의 현재규모입니다. 발굴조사서에 따르면 전성기의 실상사는 남문, 중문, 랄, 대금당이 일직선상으로 놓이고 (고대사찰답게), 그 주변으로 여러 전각과 당우들이 늘어서 있었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실상사에 대한 제대로 된 첫 발굴은 1996년에서야 이루어집니다. 그때부터 2005년까지 10년간 발굴한 것이 유일한 발굴이지요.

이러한 가운데 위에 보이듯 보광전의 옆, 동서삼층석탑의 동남편에서 거대한 목탑지가 발굴됩니다. 정방형으로 각각 7칸인 이 대목탑은 유명한 황룡사 9층목탑보다도 가로 0.11미터, 세로 0.93미터가 더 큰 23.08미터 X 23.20 미터의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21세기 들어, 발굴조사단은 기단석 일부와 초석, 중심부의 심초석이 노출된 면적과 목탑지의 기단토에서 화려한 문양의 쌍조문 암막새, 초화문 암막새, 백자편등의 유물도 확인, 목탑의 존재 사실을 입증했습니다.이러한 거대한 문화유적이 이렇게 안 알려질수가 없는 것이 신기할 정도인데, 두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우선 여러 사료에 등장하는 경주의 심볼격이었던 황룡사 9층목탑과 다르게 아직까지 사료에 등장하지 않고 있는 베일에 쌓인 목탑입니다. 두번째로, 비교적 최근에 발굴된 탓에 아직까지 그 위상이 알려지지 않을수 밖에 없습니다.



발굴초기 정비이전의 목탁 심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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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에서 발췌한 실상사 대목탑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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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드렸듯 목탑지에서 여러 유구가 쏟아지는데 그중 암막새와 수막새만 몇점 소개합니다 (1999년 발굴조사서중). 사실 목탑지에서
는 후대에 목탑이 사라진 후 지은 건물지도 같이 발견됩니다.



수막새 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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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막새 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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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탑에 대해서 연세대의 고건축전문가이자 객원교수인 김동현교수는 선종계사찰에 이러한 대목탑이 들어선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면서 이 목탑이 들어설 무렵인 통일신라말기에서 고려시대초기에 실상사가 이렇게 중흥을 맞고 거대화되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바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 대목탑의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은 사료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문화재사의 커다란 퍼즐맞추기 과제가 한가지 더 나온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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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탑터


이 목탑의 높이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너비를 계산할 때 황룡사목탑의 추정높이인 82미터를 넘어 적어도 85미터~90미터이상이라는 설과 황룡사 목탑과 비슷하거나 약간 작았을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작은 쪽이 73미터설인데, 이는 황룡사 9층목탑보다는 작지만 또 하나의 고대 대목탑인 60미터의 미륵사 9층목탑보다는 약 10여미터가 높은 추정치입니다. 아래는 실상사 대목탑에 대한 몇몇 추정복원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의 일입니다). 첫 발굴후 5년후인 2007년에는 김경표교수의 [실상사 목탑 복원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2011년의 실상사 대목탑 추정도 (9층, 이 복원도는 73미터설에 근거해서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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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성기의 실상사 규모를 말해주는 말없는 유물이 한점 더 있습니다. 바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석등 (보물 제35호)입니다. 무려 높이 5미터로 국내석등중 유일하게 사다리 받침대가 같이 전해오는 유물입니다. 역시 현재의 사찰규모와 언밸런스합니다.



앞의 남자분과 비교해보면 이 석등의 크기를 느낄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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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탑을 소유한 경주 황룡사와 익산 미륵사등을 비교할때 (후일 소개할 고구려 평양의 청암리사도 그렇고), 사실 대목탑을 가진 대사찰들은 고대국가의 수도급 도시의 한가운데 상징적으로 우뚝 서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남원의 이 대목탑은 약간은 생소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는데요. 사실 이 목탑이 세워질 무렵으로 추정되는 나말려초시기의 남원은 통일신라시대부터 후백제를 거쳐 남원소경으로 유지되어오던 중이었습니다 (즉 신라의 5소경 (특별시같은)중 하나였죠). 그러다가 고려 태조 23년(940) 3월에 주 부 군 현의 이름을 고칠 때 남원부로 격하됩니다. 따라서 행정역사를 볼때 그다지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없었지요. 

다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12세기 즉 1127년-1130년의 기록에 나오는 고려시대의 실상사 대중건시기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시기는 절묘하게도 고려와 거란간의 3차에 걸친 (993 - 1019년) 대전투가 귀주대첩으로 종결된 고려의 승리로 끝난 직후이자, 1231년(고종 18년)의 몽고제국의 제1차 침입의 직전의 시기입니다. 당시까지도 '호국사찰'의 이미지가 강했던 실상사를 확실하게 키우면서 호국의 의미로 대목탑을 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고려시대는 이미 풍수지리설이 그 위세를 떨칠 때였지요. 글 서두에서 언급했듯 '고려 최고의 기를 가진 땅에 위치한 호국사찰'였던 이곳에 대목탑과 사세를 밀어줄 이유는 꽤나 타당해 보입니다.

사실 그러한 맥락에서 작년 (2012년) 2월의 같은 남원에서 비슷한 시기 (고려초기)의 문화재급 석불과 알려지지 않은 절터의 발견은 눈여겨 볼만 합니다. 남원서 문화재급 석불 발견… 고려초기 작품 추정
기사일부: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화재급 석불이 발견됐다고 남원문화원이 12일 밝혔다. 이 석불은 남원시 수지면 유암리에서 발굴된 것으로 전체 높이 192cm, 가슴둘레 176cm, 어깨 폭 68cm이다. 석불의 발 아랫부분이 땅속에 묻혀있어 전체 높이는 2m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남원문화원은 석불이 마을 뒷산 기슭에 있다는 마을 사람의 제보를 받고 지난 10월부터 4차에 걸쳐 조사를 해 발굴에 성공했다. 석불이 발견된 곳은 고려시대에 절이 있었다고 전해져온다."
                                           


2012년 발견된 정체불명의 통일신라-고려초기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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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남원에는 또 하나의 사라진 고려의 대사찰 '만복사'가 (11세기 건립, 바로 그 시기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남원땅'이 고려왕조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상당히 궁금해집니다. 다만, 남원시의 한가운데 위치한 만복사와 달리 실상사는 상당히 떨어져 있습니다. 위의 불상이 발견된 절터는 만복사의 아래, 즉 지도에서 아랫쪽의 '수지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왼편이 만복사 오른편이 실상사로, 사실 거의 산하나를 넘어야 하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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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눈여겨 볼 문화재로는 실상사 철제여래좌상 (보물 41호)가 있습니다. 대개 선종계의 사찰에서 이러한 철불이 많이 나오는데 높이 2.69미터로 비슷한 시기의 역시 대사찰인 백제 보원사의 철불 (2.57미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보다도 큽니다. 두 불상모두 직접 가서 보면 위압감이 느껴집니다. 보원사 철불과는 많이 다른 생김새같지만 사실 이전대인 삼국시대의 여유로운 표정과는 달리 딱딱한 표정이 비슷하기도 합니다.



비교대상인 사람이 없어 사진에서는 작아보이지만 직접보면 규모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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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현재 발굴로 쏟아져 나온 기와로 만든 기와탑 (2005년 발굴직후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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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찰이지만, 일반대중들에게 아직도 생소한 이름인 실상사, 그리고 베일에 쌓인 황룡사 9층목탑급의 대목탑. 어느정도 규모의 사역과 어떠한 건물들이 있었는지, 이제야 첫걸음을 뗀 발굴연구가 아쉽기만 한 또하나의 신라-고려의 대가람입니다.

사족으로 7세기중엽 건립된 황룡사 9층목탑은 실상사 대목탑이 세워질 무렵 함께 존재했습니다. 실상사 목탑이 12세기초반 (아마도 1127년 중건때)에 만들어졌다면, 황룡사 목탑이 몽골의 3차침입때 전소되니 (1235년), 약 100년간 공존한 셈입니다. 그리고, 건립시기상 고구려 정릉사 팔각대목탑이라든가 백제 미륵사 9층목탑같은 삼국시대의 목탑들이 아닌 사실상 광통보제사의 5층목탑(60미터추정-조선초까지 존재)과 만복사의 대규모 5층목탑과 개성의 흥왕사 동.서 팔각대목탑과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대목탑이 될 가능성도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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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호국사찰다운 실상사 귀면와들 


쓸데없는 곳에 돈을 낭비하지말고, 전통의 문화국가로서 문화재청이나 지역발굴관련 기관에 부디 제대로 된 예산을 배치하고 인력자원도 투입해서, 이러한 우리의 소중한 규모미를 갖춘 문화재의 진면목을 많은 국민이 보다 직접 느낄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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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 [한국사] 대한민국에서는, 북한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벌… (6) 두리네이터 11-18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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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 [한국사]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시기였던 여몽전쟁 기간. (19) 흑요석 11-18 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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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 [한국사] 일본왕실도서관 서릉부에서 일본에 의해 약탈&조작&… (1) 햄돌 11-17 3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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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5 [한국사] 발암을 유도하는 무능한 조선시대 (16) 선황제 11-15 3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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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 [한국사] 저희학교에선 고조선 국가가 아니라 배웁니다 (29) 최상컨디션 11-14 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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