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병마용갱의 진짜주인은 누구인가? (11부)
13대 흘달·22세 색불루 단군이 빈.기를 점령했을 때 만든 유적
편집부 ㅣ 기사입력 2016/11/12 [15:47]
(단군세기 원문) 2세 부루단군 재위 58년
계묘 3년(B.C2238) 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안하였다.
(해설) 위 기록인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는 댕기머리 또는 땋은 머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이 우리 민족의 상징인 상투로 발전하는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머리를 땋는 풍습이 없었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할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상투가 조선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위만이 조선족이 되기를 희망했다는 의사를 망명 시 조선인들에게 표현해보이기 위한 재스츄어라고 할 수 있다.
섬서성 서안 부근에서 발견된 병마용갱(兵馬俑坑)에서 발견된 토용(土俑)들도 모두 상투를 튼 모습이다. 그 무덤이 진시황의 것인지 아직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따지고 보면 진시황도 동이족이었다. 또한 병마용갱은 13대 흘달단군과 22세 색불루단군 때 조선이 서안 서쪽에 있는 빈.기(邠.岐)를 점령하고 있을 때 조선이 만든 유적일 가능성도 있다. <단군세기>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 서안에 있는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토용이 상투를 튼 모양. © 편집부
“13세 흘달단군 갑오 16년(B.C1767)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가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이 조약을 위반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라는 기록이다.
위 기록에서 우리는 조선의 의중에 따라 하나라와 은나라의 판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하나라 도읍은 안읍(安邑)으로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하현(夏縣)이며, 은나라 도읍은 조가(朝歌)로 지금의 황하 북부 하남성에 있는 신양시 위휘현이다. 이 두 나라가 싸우는데 조선이 적극적으로 개입을 했다는 것은 조선이 이 두 나라와 가깝게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견(畎)은 섬서성에 있던 견이(畎夷)를 의미하는 것이고, 낙랑(樂浪)은 산서성 최남부 원곡(垣曲) 일대, 빈(邠)은 섬서성 함양시 일대, 기(岐)는 섬서성 기산현의 동북쪽이다.
安邑县 : 夏禹所都,春秋时魏绛自魏徙此,战国为魏都,汉置县,今夏县安邑县之地,后魏分安邑为南安、邑北、安邑三县,旋改北安邑为夏县,故城在今山西夏县北,即后魏分置之县也,清属山西解州,民国移治运城,寻复故,属山西河东道,县境有盐池,为山西省惟一产盐之区,左传谓郇瑕氏之地,沃饶而近盐,即指此地而言,池水不流,凝成固粒,朝取夕复,终无灭损,其利甚溥。
(안읍현 : 하나라 우의 도읍.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하현 북쪽의 땅)
朝歌县 : 古沫邑,帝乙所者,(按今本竹书纪年,武乙三年自殷迁于河北,十五年自河北迁于沫,帝王世纪,帝乙复济河北徙朝歌,罗振玉殷虚书契考释云,以卜辞证之,迁沫必在帝乙之世,竹书误,)周武王灭殷,封康叔为卫国,《书酒诰》明大命于妹邦,《孔传》“纣所都朝歌以北是也,”项羽立马邛为殷王,都朝歌,即此,汉置县,三国魏置朝歌郡于此,寻废郡,故城在今河南淇县东北,隋移治,改为卫县。(조가현 : 하남성 신양시 위현으로 기현의 동북쪽 - 은허 서쪽)
▲ 빈과 기는 섬서성 서안 서쪽, 하나라 도읍 안읍은 산서성 남단 하현, 은나라 도읍 조가는 황하북부 하남성 ©
▲ 빈과 기는 섬서성 서안 서쪽, 하나라 도읍 안읍은 산서성 남단 하현, 은나라 도읍 조가는 황하북부 하남성 ©
또한 은 탕왕이 하 걸왕을 정벌한 곳은 순임금이 죽은 명조(鳴條)라는 지명으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따르면 산서성 남부 운성시에 있는 염지(鹽池) 일대이다. 맹자가 말하길 “이 땅이 동이족의 땅”이라 했으니 바로 여기까지 단군조선의 영토였던 것이다.
“명조 : 고대 지명으로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안읍진 북에 있다.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정벌한 전투지이다.고후원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산서성 운성시 하현의 서쪽, 일설에는 하남성 낙양부근, 또 일설에는 하남성 신향시 봉구 동쪽에 있다고 한다.
(鳴條:“古地名。在今山西运城安邑镇北,相传商汤伐夏桀战于此地。又名 高侯原 。●古地名,又名高侯原,其地具体位置,异说甚多,一说在今山西省运城市夏县之西,一说在今河南洛阳附近,还有一说在河南省新乡市封丘东。)”
▲ 순임금이 돌아가신 명조는 산서성 남부 염지 근처로 동이족의 땅이다. ©편집부
▲ 순임금이 돌아가신 명조는 산서성 남부 염지 근처로 동이족의 땅이다. ©편집부
위 <단군세기>의 기록은 중국의 고대 사서인 한나라 사람 유향이 쓴 <설원 권모(設苑權謀)> 편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성탕이 걸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말하기를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걸왕이 진노하여 구이(九夷=조선)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이듬해에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어버리자 걸왕이 노하여 다시 구이의 군사를 요청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됐습니다.'라고 말하자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토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위 <단군세기>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위 기록 이외에 조선이 빈.기를 점령했다는 기록이 <단군세기>에 또 있다. "22세 색불루단군 을묘 20년(B.C 1266) 이때에 람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과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람씨(藍氏)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 람국의 위치는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 일대 © 편집부
▲ 람국의 위치는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 일대 © 편집부
여기서의 람국(藍國)은 산서성 장치(長治)시 일대에 있던 나라이다. 중국통사 참고자료 고대부분(中國通史參考資料古代部分)-4에 따르면, “람수는 산서성 둔류현 서남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장으로 들어간다(蓝水,源出於山西屯留县西南,东流入漳。)”라는 문구가 있으며, 보다 상세한 자료로는 아래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나오는 “강수(絳水)는 산서성 동남부 둔류현을 흐르는 강”이라는 설명이 있다.
绛水 : 源出山西屯留县西南八十里盘秀山之阴,八泉涌出如珠,合而东流,至潞城县界交漳村入漳,水经注谓之陈水,《清一统志》水经注有绛水而无蓝水,其绛水所行之道,皆今蓝水也,而别有陈水,则今绛水所行之道也,与今府县诸志不合,惟魏书地形志有绛水,又有蓝水,与今水道相同。
(강수 : 산서성 둔류현 서남 80리 반수산 남쪽에서 나와 동으로 로성현 경계와 만나는 장촌까지 흘러 장수로 들어간다. <수경주>에서는 진수라 한다, <청일통지> ‘수경주’에 강수라고 있는데 무람수라 하는데 그 물길이 모두 같다. 다른 이름으로 진수라 한다. ‘위서지형지’에는 강수와 람수가 있는데 물길이 같다. 즉 강수=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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