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영토를 크게 넓히다
단명한 임금들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발해의 정치 상황에서 살아남아 왕위에 오른 그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는 왕실의 혼란을 잠재우고,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정하였다. 건흥이란 흥성함을 건설한다는 의미로, 발해의 정치, 사회적인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요사(遼史)] ‘지리지 흥요현’ 조에는 “발해 때에 장녕현으로 당나라 원화(당나라의 연호, 806~820) 연간에 발해 왕 대인수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락을 공략하여 군과 읍을 설치함에 따라 지금의 이름이 생기게 된 것이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선왕은 즉위한 후 곧장 남과 북쪽으로 정벌활동을 벌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장녕현은 요동 지역으로, 선왕 때에 이르러 발해가 요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요동 지역에는 소고구려(小高句麗)가 있었는데, 이 무렵 세력이 약해져 발해에게 통합되었다.
신라와 전쟁을 한 것은 819년 당시 신라가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이정기의 손자인 이사도(李師道) 토벌 작전에 3만 군사를 보낸 것과 관련이 있다. 발해는 이정기 일가와 말 무역을 비롯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732년 발해가 당나라 등주를 공격할 때 신라가 발해 남부 지역을 공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발해도 신라가 이사도를 공격할 때, 신라를 공격하여 이사도를 도운 것이라고 하겠다.
선왕의 정복활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방면은 북쪽 지역이었다. [신당서] ‘발해’ 전에는 “대인수가 바다 북쪽(海北)의 여러 부족을 쳐서 큰 영토를 개척한 공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바다는 붕어(鯽)가 특산물인 미타호(湄沱湖)로 현재 중국과 러시아가 나누어 차지하고 있는 싱카이호(興凱湖)로 볼 수 있다. 이곳보다 북쪽은 불녈(拂篞), 월희(越喜), 흑수(黑水) 등의 말갈 부족의 거주지다. 선왕은 이들 말갈 부족을 정복했던 것이다.
월희부는 740년대에 발해에 복속된 적이 있지만, 802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발해가 정치적으로 혼란한 사이에 잠시 독자 노선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자 선왕이 이를 다시 복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말갈 부족 가운데 발해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흑수말갈이었다. 흑수말갈은 말갈 부족 가운데 최강의 부족으로, 당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선왕 시기 당나라는 이사도를 비롯한 여러 번진(藩鎭)세력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흑수말갈에게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선왕은 이 기회를 노려 흑수말갈을 정복했다. [신당서] ‘흑수말갈’ 전에는 원화 연간에 흑수말갈이 두 번 사신을 보냈지만, 이후 발해가 강성해지자 흑수말갈을 비롯한 모든 말갈족이 복속되어 당나라와 만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말갈 부족을 모두 굴복시킨 선왕은 발해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발해 초기 강역은 사방 2천 리였으나, 이때에는 사방 5천 리로 크게 넓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