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앙군 2군 6위 편성시기
현재까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서로가 추측하여 태조, 성종, 목종, 현종 시기 중 하나로만 추측 하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 성종 시대에 6위가 형성됐다는 추측을 대세로 받아 들이고 있다. 2군은 현종 시대에 성립됐다는 것에는 일치하고 있다.
결론적으로는 6위는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시기동안 점차 확대 완성되었으며, 2군은 금위군과 6위 사이에 새로운 편제의 존재 필요성에 의해 현종이 만들었다.
태조, 광종 시대
"고려태조는 3한을 통일하고 처음으로 6위를 설치하여 위에는 38령이 있고, 령은 각기 1천명의 군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하가 서로 연결되고 체계가 세워져 있어서 당의 부위제도와 비슷했다." - 고려사 권81 병지 서문
"정월, 송악의 남쪽에 도읍을 정해 궁궐을 짓고 3성 6상서를 두고 9시를 설관하고 시전을 세우고 방리를 갈라 5부를 나누고 6위를 두었다." - 고려사 권1 태조 2년조
"태조2년 정월에 6위를 두었다." - 고려사 권81 병지15 군
"태조원년에 령令 경卿 낭중郎中을 두었고 뒤에 병관이라 칭하였으며 어사御事 시랑侍郞 낭중郞中 원외랑員外郞이 있었다. 속관에 고조庫曹가 있었다." - 고려사 권76 백관1 병조
태조의 건국 초기에도 통상적인 국방기구인 병부(兵部)가 존재했으나 비상군사기구 성격인 순군부徇軍部가 따로 있어서 순군부 중심으로 병권이 행사됐을 것이다. (의장 물품을 관리하던 내군內軍도 존재 했다.)
광종 11년에 순군부는 군부軍部로 (내군內軍은 장위부掌衛部로) 개편됐다. 개편과 동시에 역시 지방에서 신체조건이 빼어 난 청년들을 선발해 개경으로 불러 올렸다.
(한편 태조 때를 보면 원병援兵중에 제성군諸城軍이 들어 있다. 제성군이란 말 그대로 모든 성의 군사, 즉 각 지방 호족의 일부 군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기록한 고려사에서 여러 번 태조가 6위를 만들었다고 강조하는 것은 태조 때에 6위를 두었다기 보다는 6위에 대한 개념으로 발전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중군과 좌우강이 중앙군 6위의 개념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광종 때는 지방에서 신체조건이 좋은 청년들을 개경으로 착출 했다.
2군은 현종의 몽진이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에 태조 때의 중군이 2군의 개념으로 발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종 시대
"국가 초기에는 대광大匡, 정광正匡, 좌승佐丞, 대상大相으로서 階를 삼았다. 종1품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정2품은 보국대장군補國大將軍, 종2품은 진국대장군鎭國大將軍, 정3품은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종3품은 운휘대장군雲麾大將軍, 정4품 상上은 중무장군中武將軍, 하下는 장무장군 將武將軍, 종4품의 상은 선위장군宣威將軍, 하는 명위장군明威將軍, 정5품 상은 정원장군定遠裝軍, 하는 영원장군寧遠將軍, 종5품 상은 기마장군遊騎將軍, 하는 유격장군遊擊將軍, 정6품 상은 요무장군耀武將軍, 하는 요무부위耀武副尉, 종6품 상은 치과교위致果校尉, 하는 치과부위致果副尉, 종7품 상은 익위교위翊威校尉, 하는 익휘부위翊麾副尉, 정8품 상은 선절교위宣折校尉, 하는 선절부위宣折副尉, 종8품 상은 어모교위禦侮校尉, 하는 어모부위禦侮副尉, 정9품 상은 인용교위仁勇校尉 하는 인용부위仁勇副尉, 종9품 상은 배융교위陪戎校尉 하는 배융부위陪戎副尉로써 무산계武散階를 정하여 29로 했다." -고려사 권77 백관2 무산계, 성종15년(996년)
성종은 무관직을 새롭게 편성하면서 군대의 많은 변화를 추진했다.
지방 호족들의 군사력을 제거하기 위해 향리직을 개편하면서 병부兵部를 사병司兵으로 바꾸고(성종2년), 지방의 무기를 몰수하여 농기구로 만들었다(성종6년).-고려사절요. 군복의 복색제도를 제정했다(성종3년).-고려사, 고려사절요
(성종 2년에 12목을 설치하고, 중앙행정조직으로 3성 6조 7시寺를 정하고, 주부군현의 리吏의 명칭을 바꿨다. 6년에는 5부와 방리를 정했다. 성종2년에는 과거제도로 처음으로 복시覆試를 실시했다.-고려사절요)
군적軍籍에 올라있던 나이들고 자손이 없는 병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성종7년). (이러한 조치는 대사면령과 동시에 실시되어 민심을 얻으려는 목적이었다. 성종6년에는 주인을 대신해서 전쟁에 나간 노비들 중에 나이가 40이 넘은 자들은 양민이 될 수 있도록 했다.-고려사절요)
6위의 성종 14년 성립설은 무관직 명에 새로운 이름이 등장했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태조 때에는 없었던 상장군과 중랑장이라는 명칭이 나타나는 등 무관직이 세분화 됐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행정조직과 관직이 당나라 중앙군주제를 본따 새롭게 시행했기 때문에 역시 군대도 새롭게 혁신했을 것이라는 추측하면서 성종14년에 12주목을 12군으로 편성하고 (무관 성격이 경향이 강한) 절도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성종 때 6위가 구성됐다고 보기에는 약하다. 태조 때부터 관직명 뿐만 아니라 지방의 행정구역 등 개편되고 이름들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좌.우 군영(左右 軍營)을 설치했다."-성종9년 10월, 고려사절요, 고려사 권81 병지1 병제 5군
6위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은 전혀 없다. 따라서 태조 때부터 지속적으로 6위를 설립해 나가는 과정중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좌우군영를 설치했다는 사실에서 아직은 6위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좌우군영이 나중에 6위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성종 16년 12월에 거란이 천우위千牛衛 대장군 야율적열耶律迪烈을 보내어 천추절(성종의 탄생절)을 축하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