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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17 23:31
[한국사] 우리 역사에 천제 안 올린 것은 조선뿐
 글쓴이 : 전략설계
조회 : 4,179  

참고할 내용이 있어서 링크 겁니다.

http://magic.ne.kr/zbxe/ggg3/10791 (혹 내용이 틀리지 않았는 지 확인도 해주시고)


고조선 - 상제님한테 제사

고구려 - 광개토대왕이 속리산에서 천제

고려 - 공민왕이 강화도에서 상제님께 직접 천제

          고려는 천자국인 중국과 다른없는 제도로 천제를 시행

고려 우왕때 - 고려 조정에 유학 신진사대부가 득세하던 위화도 회군 3년 전 제후국 예를 갖춘다고

                    천제 폐지

조선 - 조선초부터 사대파들의 반대로 억제된 천제가 세조때 일시적으로 한 것외에는 대한제국때까지

          폐지됨


고려도 중국의 연호를 썼고 조선도 중국의 연호를 썼다고 같은 책봉관계가 아니죠.

중국이 천제 올리지 말라고 한 적도 없는데.

유학에 심취해 소중화에 취한 조선은 자기가 알아서 제후국이라고 하고, 천제도 중단합니다.

배알도 없습니다.


이런 정신이니까 왕이 황제한테 망명한다고 편지나 보내고,

전쟁도 외국 군대 불러와서 휴전회담에도 끼지도 못해.

여진족한테 왕이 대가리 쳐박어,

시아버지 잡아간다고 중국군대 불러와, 반란군 잡는다고 일분군 동원해,

황후 죽었다고 겁 먹고 황제가 외국대사관으로 튀어..


지기 스스로 제후국을 자처하고 천제 안 올려야 한다고 하고..

명나라 황제 제사를 청나라 망할 때까지 하지를 않나..

이 정도면 정신적 속국이다 그겁니다.


지금 우리 외교관들 중국 가면 속국 대하듯 한답니다..

이게 고려 때문이겠습니까..

지가 알아서 제후국이라고 천제 안 올려 기우제 중단시켜.. 이러니 속국으로 인식시킨 것이지..

통신사까지 보내놓고 전쟁 터질거 알았으면서, 병력도 안 모아놓고 도와달라고 죽는 시늉이나 하고..

시아버지 잡아가라고 군대까지 부르니.. 속국행세를 하니 후손들이 속국취급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예전부터 여기서 했던 말이지만,

쉴드 칠 궁리나 하지 말고, 조선의 대중관계를 깨끗히 인정하고,

중국이 다시 목에 힘주기 시작한 21세기 동북아정세에서,

조선의 알아서 기는 속국 마인드 버리고,

고려의 자주적인 마인드로 동북아에서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을 상대하자는 겁니다.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박근혜가 작년에 서방에서 유일하게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석해.. 속국 모드 보여주자 마자,

4차 핵실험 터지고 나서 박근혜 전화 중국이 거부했습니다.

이게 지금 중국과 소원해진 발단인데.


중국에 조선처럼 속국모드 보여줬다간 결국 속국대접 받는겁니다.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는 순간에도 항복조건에 고려의 요구조건 다 걸었고,

부역자 돌려달라는 조건 빼고는 쿠빌라이가 다 들어줬습니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고..


속국으로 알아서 긴다고 해서 중국이 잘 봐주고 잘 대해주는 것 없어요.

고려가 훨씬 더 중국에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철령위 설치도 고려가 출병하니까 바로 설치 중지했죠.

역사에서 배우란 것은 이런걸 배우란 것이지.. 조선은 자주국 이렇게 쉴드 쳐서 자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이 대중 관계로 후손에 남긴 것은 중국의 속국이란 인식을 현대 중국의 시골 촌부들까지

심어준 것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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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러브 16-09-17 23:51
   
태종실록 - 中 -

예조 우참의(禮曹右參議) 허조(許稠)가 상서하였다. 상서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신이 궐리(闕里)096) 에 들어가 선성(先聖)을 뵙고, 교수관(敎授官) 채평(蔡平)에게 묻기를, ‘지나는 주현(州縣)의 학교에 모두 동중서(董仲舒)가 있고, 양웅(楊雄)097) 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건문(建文) 연간에 예관(禮官)이 헌의(獻議)하기를, ‘동중서(董仲舒)로써 양웅(楊雄)을 대신하자.’고 하였으니, 양웅이 왕망(王莾)의 대부(大夫)인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허노재(許魯齋)를 종사(從仕)한 것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원(元)나라 때에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빌건대, 중국의 제도를 따라서 동중서·허노재로 양무(兩廡)에 종사하게 하고, 양웅은 아울러 제사하게 하지 마소서. 또 동평주(東平州)의 관리에게 들으니, 말하기를, ‘고을에 요(堯)임금의 사당이 있는데, 조정에서 해마다 사람을 보내어 제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경사(京師)에 이르니, 이부 상서(吏部尙書) 건의(蹇義)가 신 등에게 묻기를, ‘기자(箕子)의 후손이 있는가? 또한 사시(四時)의 제사를 행하는 자가 있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후사(後嗣)는 없다. 그러나, 본국에서 소재지 고을의 수령에게 명하여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본국에서 기자가 있는 것이 중국에서 요임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빌건대, 기자 사당은 조정에서 요임금을 제사하는 예에 의하여 제사하소서."

예조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하윤(河崙)이 또한 일찍이 건의하여 조선(朝鮮)의 단군(檀君)을 제사하도록 청하였다. 예조에서 참상(參詳)하기를,

"기자의 제사는 마땅히 사전(祀典)에 싣고, 춘추(春秋)에 제사를 드리어 숭덕(崇德)의 의를 밝혀야 합니다. 또 단군(檀君)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마땅히 기자와 더불어 함께 한 사당[廟]에 제사지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춘추(春秋)로 사신을 보내어 단군(檀君)·기자(箕子)의 묘에 제사드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 中 -

사온서 주부(司醞署注簿) 정척(鄭陟)이 글을 올리기를,

"지난 신축년 10월에 〈중국〉 조정이 〈북경으로〉 옮겼으니 〈의주에 있는〉 말을 점고(點考)하라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의주에 가서 말 점고하는 일을 마치고 다음해 2월에 돌아오다가 평양에 들러서 기자 사당(箕子祠堂)을 배알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자 신위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단군(檀君) 신위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신이 평양부의 교수관(敎授官) 이간(李簡)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예전에 중국 사신이 평양에 와서 기자의 사당과 후손의 있고 없음을 묻고 기자의 묘소(墓所)에 가서 배알하였는데, 그 뒤에 나라에서 기자 사당을 문묘(文廟) 동편에 세우라고 명하였고, 또 단군으로 배향하라는 영이 있었으므로, 지금까지 이와 같이 하여 제향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단군은  요(堯) 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신 분이고, 기자는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명을 받아 조선에 봉(封)하게 된 분이니, 역사의 햇수를 따지면 요임금에서 무왕까지가 무려 1천 2백 30여 년입니다. 그러니 기자의 신위를 북쪽에 모시고, 단군의 신위를 동쪽에 배향하게 한 것도, 실로 나라를 세워 후세에 전한 일의 선후에 어긋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위에 아뢰고자 하였으나, 마침 아비의 상을 만나 미처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삽더니, 이제 신을 사온서 주부로 제수하시고 이어 의례 상정 별감(儀禮詳定別監)으로 임명하시었기에, 신이 이에 공경히 삼가 본조의 여러 제사 의식을 상고하오니, 향단군 진설도(享檀君陳說圖)에 ‘신위는 방의 중앙에서 남쪽을 향한다. ’고 하였습니다. 신이 전일에 뵈온 서향 좌차(坐次)는 이 도식(圖式)과 합치되지 않사오니, 만약 단군과 기자가 같은 남향으로서, 단군이 위가 되고, 기자가 다음이 되게 한다면, 나라를 세운 선후가 어긋나지 않을 듯하오나, 기자는 무왕을 위해서 홍범(洪範)을 진술하고 조선에 와서 여덟 조목을 만들어서 정치와 교화가 성행하고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조선이라는 명칭이 천하 후세에 드러나게 되었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명나라 태조 고황제에게 국호를 정하는 일을 청했을 때, 태조 고황제는 조선이라는 명칭을 이어받기를 명하였던 것이고, 그 뒤로 중국 사신으로서 평양을 지나는 자가 혹 사당에 가서 배알하게도 된 것이니, 그런즉 명칭은 기자 사당으로 되어 있는데, 단군 신위를 모시는 것은 진실로 미편한 일입니다. 신이 또 들으니, 기자 사당에는 제전(祭田)이 있고 단군을 위해서는 없기 때문에, 기자에게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제물을 올리되, 단군에게는 봄 가을에만 제사한다 하옵니다. 현재 단군 신위를 기자 사당에 배향하게 되어서 한 방에 함께 계신데 홀로 단군에게는 초하루·보름 제물을 올리지 아니한다는 것은 또한 미안하지 않을까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단군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하도록 하여 제사를 받들면 거의 제사 의식에 합당할까 합니다."

하니, 이 글을 예조에 내리어 그대로 이행하도록 명하였다.

예조에 전지하기를,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묘제(廟制)를 다시 의논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始祖)에게 묘를 세워 치제(致祭)하는 일을 모두 고제(古制)에 상고하여 상세하게 정하여 아뢰라."

하였다.

중종실록 - 中 -

보통원(普通院)에 올라 관대(冠帶)를 고쳐 입고 가다가 산대(山臺) 앞에 멈춰 서서 구경했습니다. 고을 관사에 들어가 대청 앞에 나와 앉아 동기(童妓)의 춤추는 모양을 보고 대문 밖에서 오랫동안 잡희(雜戲)를 구경한 뒤, 문묘(文廟)를 배알하여 네 번 절하고, 또 기자묘(箕子廟)를 배알하고 네 번 절하였으며, 또 단군묘(檀君廟)로 가서 읍(揖)을 한 다음 연광정(練光亭)에 가서 무예(武藝)를 관람했는데


읭??? 조선왕조실록만 살펴보더라도 하늘에 제사지내고 단군,기자에 제사지낸다는 기사가 10페이지 이상이 되는데요?
님이 말씀하신 천제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 정확히 세어보니 태조 때 부터 세조 때 까지 호천상제에게 제사를 올린 기록이 20건 이상이네요.
그리고 원구제도 세조 이후 광해군 때 한번 시행된걸로 나옵니다만?
호천상제에게 예를 올린 것을 제외하더라도 단군과 기자에 대한 제사는 조선시대 어느왕이건 쭉 해왔던 걸로 나옵니다.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밥밥c 16-09-18 00:09
   
가장 큰 문제는 현재의 주류사학입니다. 

 극복대상또한 역시 주류사학의 식민사학이죠.

 사실과 전혀 다른내용을 적은 책들이 마치 진실이냥 독버섯처럼 퍼져있을 뿐입니다.

 기우제의 예만보더라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현재 돌아다니는 책들의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태조 이성계가 주원장으로 뒤바뀐 채 돌아다니고 있는 것부터 이미 문제인 것이죠.

 여기에서 속국문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죠.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미 뒤바뀐 상태로 설명된 책만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도 독버섯을 먹은것이 죄라면 죄죠.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C%A3%BC%EC%9B%90%EC%9E%A5&sm=top_hty&fbm=1&ie=utf8
꼬마러브 16-09-18 00:13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조공책봉질서를 이해하지 못한 채 현대의 관점으로 조선의 자주유무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설사 현대의 관점으로 조선의 자주를 재단한다 하더라도 조선은 외교권, 군사권 ,정치권, 경제권 모두 중국과 별도이므로 vassal state로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영향으로 중국의 지위를 형식적으로 인정해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이유로 조선을 중국의 속국이라 한다면 당시 중국과 교역했던 모든 국가들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말이 됩니다. 즉 오류라는 겁니다.
고로 1.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속국'과 근대화 이후의 '속국' 즉 서양의 vassal state는 다르다.
2.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속국'은 그다지 나쁜 의미로 통하지 않았다.
3.설사 현대의 관점으로 조선을 재단한더라도 조선은 서양의 vassal state와는 거리가 멀다.
4. 고려시기보다 조선시대 때 사대주의 심화된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래도 서양의 vassal state와는 거리가 멀다.
밥밥c 16-09-18 00:22
   
게다가 이성계 조선을 연구한다는 학자가 조선왕조실록의 이성계 기일(사망일)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계인지 주원장인지도 모르는 인간들이죠.

  중국과 중화인민공화국도 구별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상식3 16-09-18 00:25
   
자꾸 조선 500년의 역사 중에서도 최악의 경우를 예로 들며 일반화 시키는데,
임란 때 선조의 예나, 구한말 민비의 예가 일반적인 인식이고 경우라 볼 수 없습니다.
개인의 탐욕이 부른 참화고 형식적이던 사대관계가 현실화된 사례라 봐야죠.
 
선조가 대비를 전혀 안 한 건 아닙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시덥지않게 좀 큰 규모의 왜구나 오겠거니 생각하고 딱 왜구소탕 수준의 준비만 하죠. 무슨 명이 알아서 우릴 구해주겠거니라고 생각해서 준비 안 했다는 건 현실에 없는 님의 관심법이구요.

민비 때야, 이미 나라가 망한 거나 진배없는 때고, 조선사 최악의 인물 중 하나를 가지고 일반화 시키면 어쩌자는 거요? 조선의 모든 인물이 세종과 이순신이 아니듯, 선조와 민비가 보편적인 모습은 아닌데요?

님아, 비판을 해도 정도 좀 지키시죠. 무슨 식민사관 듣는 듯 합니다.
여기 님의 의견에 반대하는 분들도 기본적으로 주체적 의식이 조선에 이르러 이전 시대 보다 약해진 걸 어느정도 동의하지만, 님 같이 터무니 없이 일제가 식민사관논리 펴듯, 비논리적으로 비하하진 않아요.

님의 주장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이고, 예랍시고 드는 것도 극단적인 것들 뿐이니,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꼬마러브 16-09-18 00:36
   
활동기록을 보니 12시 29분에 다른 게시글에 댓글을 쓴걸로 확인 됩니다만 왜 제 댓글에는 답글을 안써주시는지 서운하군요. 님의 역사적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참고로 정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하교하기를,

"마침 고사(故事)를 열람하다가 구월 산성(九月山城)의 삼성사(三聖祠)573) 를 중수(重修)할 때 선조(先朝)께서 내리신 전교를 봉람(奉覽)하니, 그때의 예당(禮堂)이 봉심(奉審)한 뒤에 설치(設置)의 여부에 대해 본도(本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본현(本縣)에 문의하여 상세히 장문(狀聞)하게 하였었다. 이로 인하여 생각하니, 평양(平壤) 숭녕전(崇寧殿)에 이미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려 하였으나 아직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선조(先朝) 때 삼성사의 일로 인하여 도신으로 하여금 치체하게 한 전교가 있었으니, 이 또한 추술(追述)하는 한 가지 일이 된다.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어 날짜를 가려서 치제한 뒤에 장문(狀聞)하게 하라."

하였다.

삼성사란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모신 사당을 말합니다. 지금 구월산에 있습니다. 구월산은 한자로 아홉개의 달이라는 뜻으로 아사(아홉) 달(달) 즉 속칭 아사달산을 뜻한다고 나와있습니다.

단군께서 제사 지내는 일 동쪽 땅에 이어졌으니
소나무 빽빽히 사당을 가리웠네.
삼한의 다섯 도읍 어찌 시끄러운가
이분이 곧 조선의 시조일세. 

-명나라 설정총이 지은 삼성사 성시 -

http://blog.naver.com/byunsdd/220180821050

안에 들어가면 숙종이 지은 성시도 나옵니다.
비좀와라 16-09-18 00:56
   
공자는 내세의 세계에 관하여 언급을 하지 않았기에 기본적으로 유학자는 무신론자 입니다.

드라마에 사대부가 무속행위를 하는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학자는 무신론자이기에 유학에 몰입한 유학자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행위며 무속이나 보이지 않는 영혼을 대상으로 하는 행위를 멸시 했습니다.

실제로 유학자들은 성황당의 무속관련 건물 파괴를 미덕으로 삼았고요.

세종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입니다. 당연히 기우제 같은 미신행위를 멀리 했고 유학이 동양의 과학이라 미신 대신 측우기를 만들어 과학적인 데이타 축적을 대신하는 것으로 자주와는 그리 큰 관련이 없는 것 입니다.

천제에 관한 제사 역시 실존했다는 공자와 같은 인간에 대한 제사는 하지만 실존한지가 불분명한 관념의 대상에 대한 제사는 피하는 것이 유교의 교리 입니다.

이것이 홍교의 교리로 이 홍교의 교리가 서양에 전파되어 계몽시대 부터 과학이라는 사상이 시작되는 것 입니다.
전략설계 16-09-18 00:59
   
http://cafe.naver.com/jeonjulee/706
자세히 나와 있네요. 틀린 부분 있으면 지적해주기 바랍니다


원구단(圜丘壇)의 역사

1394년(태조 3년) 8월 21일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이래로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기곡(祈穀)과 기우(祈雨)를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경솔하게 폐할 수 없습니다. 사전(祀典)에 기록하여 옛날 제도를 회복하되 이름을 원단(圜壇)이라 고쳐 부르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태조께서 그대로 따랐다.


1405년(태종 5) 7월 7일에 임금이 좌정승 하륜에게 원단을 새로 축조하여 비를 빌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에 따라 두 번째로 원단(圓壇)에 비를 빌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적전(籍田)과 원구단(圓丘壇-개성에 있는 고려의 壇)은 전조(前朝)의 옛 것이오니, 청컨대, 신경(新京-한양에 있는 조선의 壇)의 단(壇)에 이를 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내(境內)의 땅이 이 하늘 아래인데, 어찌 여기에 편안히 앉아서 신경(新京-한양)에 요제(遙祭)할 수 있겠는가? 옛 원구단은 버려두고 신단(新壇)을 축조(築造)하여 이를 행하라.” 하고, 좌정승(左政丞) 하륜(河崙)을 명하여 행사(行事)하게 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이로서 조선이 창업한지 두 번째로 원구제를 올린 셈이다.

1411년(태종 11)의 실록을 보면 “다시 원단(圓壇)을 남교(南郊)에 쌓았다. 이 앞서 정부(政府)에서 상언하기를, ‘천자(天子)가 아니면 하늘에 제사할 수 없습니다.’ 하였던 까닭으로 파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진(秦)나라가 서쪽에 있기 때문에 다만 백제(白帝)만 제사하였는데, 우리나라는 동쪽에 있으니, 또한 마땅히 청제(靑帝)를 제사하라고 한다.’ 하였기 때문에 다시 쌓은 것이다.” 라고 하였을 뿐,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때에는 예조(禮曹)에서 원단(圓壇)의 제의(祭儀)를 주청하여 원구제에 대한 제법만 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1416년(태종 16) 6월 1일에는 경승부윤(敬承府尹) 변계량(卞季良)이 상서(上書)한 전문을 대략 살펴보면, 노(魯)나라의 교사(郊祀)를 운운하면서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말씀들을 인용해가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을 올렸는데, 이에 감읍한 임금이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제천문(祭天文)을 짓게 하고 자책(自責)하는 뜻을 가지고 매우 자세하게 유시(諭示)하였다. 그러나 혹자들은 “변계량이 부처에 혹(惑)하고 신(神)에 아첨하며, 하늘에 배례(拜禮)하고 별에 배례하여 하지 못하는 일이 없고, 심지어 동국(東國)에서 하늘에 제사하자는 설(說)을 힘써 주장하니, 분수를 범하고 예를 잃음을 알지 못함이 아닌데, 한갓 억지의 글로써 올바른 이치를 빼앗으려 한 것뿐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변계량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사대(事大-힘의 논리를 앞세운 중국)하기를 아첨하려는 소인배들보다는, 차리리 예를 어길지라도 신(神-천지자연의 신)에게 아첨하려는 변계량을 더 군자로 여기고 싶다.

1418년(태종 18) 7월 1일에는 좌의정 박은을 보내어 원단(圓壇)에 제사지냈다. 원단은 제천(祭天)하는 곳인데, 가물면 나아가서 기우(祈雨)한다. 승도(僧徒)들을 흥복사(興福寺) · 연복사(演福寺) 에 모으고, 판수[盲人]는 명통사(明通寺)에 모아서 기우 정근(祈雨精勤)을 베풀고, 또 호랑이 머리를 박연(朴淵) 에 잠구었다. 하였다.

1419년(세종 원년)에도 원구제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는 오랫동안 계속되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본다. 이처럼 조선조 초부터 억제된 제천의례의 원구제는 1456년(세조 2)에 일시적으로 제도화(制度化)하는 조치가 취해지기까지 네 번의 기록밖에 없다.

『상정고금례문(詳定古今禮文)』에 실려 있는 고려의 원구단을 참작하여 1457년(세조 3) 1월 15일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원구단(圜丘壇)에 올라 제사를 지내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호천상제위(昊天上帝位)·황지기위(皇地祇位) 및 태조위(太祖位)에는 임금이 친히 삼헌(三獻)을 행하고, 대명위(大明位) 및 풍운뢰우위(風雲雷雨位)에는 세자(世子)가 삼헌(三獻)을 행하고, 야명위(夜明位) 및 동남북서해(東南北西海), 악독산천위(岳瀆山川位)에는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가 삼헌을 행하였다.”하였다.

1464년(세조 10) 1월 15일에 “원구(圜丘)에 제사하였는데, 새로 만든 음악을 사용하였다.”하였는데, 이 원구제도 이때 실시된 여섯 번째의 제(祭)를 마지막으로 명나라의 간섭 때문에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1616년(광해군 8)에는 원구제를 설행(設行)하려 하였던 것이 기록상으로 보이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문헌에 보이는 원단의 위치는 한강 서동(選) 또는 남교(南郊-남쪽 성 밖)로 나타나는데, 아마도 지금의 한남동 부근으로 추정된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지배적이다.

1897년(고종 34) 9월 21일에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규홍(金奎弘)이 아뢰기를, “천지에 합제(合祭)하는 것은 사전(祀典)에서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원구단(圜丘壇)의 의제(儀制)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전에는 남쪽 교외에서 단지 풍운(風雲), 뇌우(雷雨)의 신들에게만 제사지냈는데 단유(壇壝)의 계급이 법도에 맞지 않았으니 밝게 섬기는 의절에서 볼 때 실로 미안합니다. 동지(冬至)절사의 제사를 그대로 거행할 수 없으니 앞으로 고쳐 쌓는 등의 절차에 대하여 폐하의 재가를 바랍니다. 호천상제(昊天上帝)와 황지기신(皇地祗神)의 위판과 일월성신(日月星辰), 풍운뇌우(風雲雷雨), 악진(嶽鎭), 해독(海瀆)의 신패를 만드는 것과 제사에 쓰는 희생(犧牲), 변두(籩豆) 등의 여러 가지 의식에 관한 글들은 역대의 의례를 널리 상고하여 마땅히 일정한 규례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제사지내는 예절은 어느 것이나 다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더구나 천지에 합제하는 일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아뢴 것이 실로 짐의 뜻에 부합되니 경(卿)은 영선사장(營繕司長)과 함께 함께 지형을 보고 날짜를 골라서 제단을 쌓을 것이며 제반 예식에 관한 규정은 아뢴 대로 하되 다만 서울에 있는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들에게서만 수의(收議)하여 들이라.” 하였다.

이후 장례원경 김규홍이 영선사장 이근명(李根命)과 함께 상지관(相地官) 오성근(吳聖根)을 데리고 원구단(圜丘壇)을 설치할 장소를 간심(看審)하니, 남서(南署)의 회현방(會賢坊) 소공동계(小公洞契)의 해좌사향(亥坐巳向)이 길하다 하여 이곳을 정하였고, 위판(位版)과 종향 위패(從享位牌)를 만드는 일은 봉상시(奉常司)에서 맡아 근정전(勤政殿)에서 행하였다. 실로 1464년(세조 10) 이후로부터 433여년이 지난 1897년 10월 12일에 와서야 고종황제께서 우리나라가 천자국임을 천명(天命)하면서 원구단 천제(圜丘壇 天祭)를 복원하여 봉행하였던 것이다.

이로서 500여년이 훨씬 넘도록 우리민족은 중국을 사대(事大)하여야 하였고, 그 댓가는 혹독하게도 힘없는 나라의 설움으로 이어져야만 했다. 해마다 상국(上國-중국)에 갖다 바치는 조공(租貢-세금)은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하다. 언젠가 현대그룹의 총수인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소 1,000마리를 트럭에 나누어 싣고 북한으로 향하던 일을 떠올려 보라. 아마도 그 소떼행렬이 장관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데 실록의 기록을 보면 한해에 다른 품목과 함께 소 20,000마리씩을 조공으로 바쳤다고 하니 과히 상상이나 되겠는가? 차세대를 이끌어 나갈 젊은이들이 과연 이러한 아픔의 역사를 알기나 하는 것일까?

1897년(광무 원년) 음력 9월 7일을 시역(始役)하는 날로 정하여 원구단(圜丘壇)을 조성하였고, 10월 11일에 완성하였다. 또 다른 종묘사직의 경우와 같이 원구단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으로 사제서(祠祭署)를 설치하기로 하고 제조(提調) 1인, 영(令) 1인, 참봉(參奉) 1인의 직제를 반포하여 명실공히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제천의식의 중요한 시설이 되었다.

1899년(광무 3)에 축조된 황궁우(皇穹宇)의 팔각당(八角堂) 건물은 3층 형태로 지어져 원구단의 북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화강암의 기단위에 세워 중앙에는 황전상제(皇天上帝)와 황지기(皇地祇)의 신위를 주신(主神)으로 봉안하고,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신위를 배향(配享)하였으며, 종향위(從享位)로는 대명지신(大明之神-햇님신)∙ 야명지신(夜明之神-달님신)∙ 사해지신(四海之神-동해, 남해, 서해, 북해)∙ 오악지신(五嶽之神-중악, 동악, 남악, 서악, 북악)∙ 북두칠성지신(北斗七星之神)∙ 목화토금수지신(木火土金水之神)∙ 이십팔수지신(二十八宿之神)∙ 주천성신지신(周天星辰之神)∙ 사독지신(四瀆之神-동독, 남독, 서독, 북독)∙ 오진지신(五鎭之神-중진, 동진, 남진, 서진, 북진)∙ 뢰사지신(雷師之神-천둥신)∙ 풍백지신(風伯之神-바람신)∙ 우사지신(雨師之神-비신)∙ 운사지신(雲師之神-구름신)의 위패를 각 각 봉안해 두었다.

[출처] 원구단 (우당 이정일) |작성자 송백리승재
     
꼬마러브 16-09-18 01:12
   
정말 일본식민사학자의 주장을 보는 것 같습니다.
글 중에 이런 글이 있군요?

해마다 상국(上國-중국)에 갖다 바치는 조공(租貢-세금)은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하다. 언젠가 현대그룹의 총수인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소 1,000마리를 트럭에 나누어 싣고 북한으로 향하던 일을 떠올려 보라. 아마도 그 소떼행렬이 장관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데 실록의 기록을 보면 한해에 다른 품목과 함께 소 20,000마리씩을 조공으로 바쳤다고 하니 과히 상상이나 되겠는가? 차세대를 이끌어 나갈 젊은이들이 과연 이러한 아픔의 역사를 알기나 하는 것일까?

이정도면 중증입니다. 우리가 조공을 하면 중국에서는 그의 수배 혹은 수십배의 가치의 하사품을 주는 것이 예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은 원구단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단군과 기자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조선시대 전부분에서 행해졌습니다.

또한 원구단을 폐지한 것이 뭐가 어때서 그렇죠? 종묘도 육일무로 했는데;
          
전략설계 16-09-18 01:22
   
단군, 기자는 우리 조상에 대한 제사이지..
천자(황제)가 단군, 기자에 제사할 리가 없죠.

원구단 천제는 천자가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조선의 기록에 나와 있잖습니까..

물어보신 속국이란 얘기는..
사안마다 정도차가 있는 것으로 속국이다 아니다 논쟁은 답 없는 끝없는 것으로,

조선의 경우 내정은 자주적이지만,
중국과 외교관계는 속국관계로 보는 외교적 속국관계란 것입니다.

단지 책봉만 받고 중국 연호를 쓰는 관계가 아니라,
천제마저 올릴 수 없어 간섭을 받는 중국과 외교적 속국관계란 얘기네요.

조선내부에서 스스로 자신들이 제후국이라 천제를 올릴 수 없다고 논의하는데.
뭘 더 얘길 하겠습니까?

과거 당시 그 사람들 인식이 그런데, 과거의 흔적인 역사가..
지금 사람들이 조선은 단순히 중국과 책봉만 받는 관계일 뿐,
제후국(속국)이 아니다 하는건 역사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겁니다.

우리가 듣기 좋은 것만 역사가 아니죠.
               
Centurion 16-09-18 02:15
   
기가 차네. 난 또 뭔 사료 기록 들고 왔길레.
그나마 좀 객관적인 한민족 문화 백과사전인가 했더니..

중간 중간 필자의 견해가 쭉 녹아들어 있는 글이네.

그런데 넌 조선이 사대주의고, 중국 속국이라면서...
왜 조선초기 태조부터 세조-까지 천자나 지낼 수 있는
천제(원구제, 기우제)를 지낸 이야기를 긁어왔냐? ㅋㅋㅋ

조선이 천자의 자격으로
천제 지내던 시절 이야기를 긁어와서 니 주장이 뒷받침되냐?
 
차라리 세조 이후 원구제 못지낸 이야기를 하던가.
결국 어쩃든 조선건국 당시엔 속국은 아니란 소리잖아.

태조부터 세조-까지 저게 몇년 세월 같냐?
설마 한두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원구제는 1394년(태조 3년)~1464년(세조 10년)까지다.
세조는 조선 7대왕이고.

그리고 그 전에도 중국에서 책봉 받을거 다 받았던..
고구려, 백제, 신라, 부여, 고려 왕들도 죄다 천자의 자격으로,
혹은 황제의 지위에서 올릴법한 제천행사나 팔관회 열었다.

조선도 단군에 대한 제사라고 하는데. 소위 일월성신에 대한 제사 지냈어.
이것도 하늘에 대한 제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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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로 하늘에 예를 갖춰온 한민족 

개천절은 우리나라 4대 국경일 중 하나로 양력 10월 3일을 기념일로 하고 있다. 개천절은 단군왕검이 한국 최초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일종의 건국기념일인 셈이다. 그런데 ‘개천(開天)’이란 말은 ‘하늘이 열린다’는 뜻으로 그 기원은 한민족의 시조로 불리는 환웅(桓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신인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은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하늘로부터 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를 건설했다. 이를 두고 개천이라 한다. 이와는 달리 기원전 2333년 10월 3일(음력)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개천의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찌됐건 반만년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는 개천의 핵심은 하늘에 대한 제사, 즉 천제(天祭)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 이래 한민족은 한 해의 농사가 마무리되는 가을을 즈음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가졌다. 고조선 멸망 이후 고구려는 동맹, 부여는 영고, 동예는 무천, 삼한은 계절제라는 천제를 드렸다. 대부분 10월에 제사를 드리는데, 이달을 두고 특별히 상달(上月)이라고 불렀다. 

가을에 풍성한 곡식을 내려 준 하늘에 감사를 표하는 추수감사제의 성격이 짙었다. 이런 풍습은 한국의 고대국가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로도 이어졌다. 고려에는 신라에서 비롯된 제천의식인 팔관회(八關會)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원구단 및 원구제(圓丘祭)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일월성신에 제를 올리는 '초제'가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실시된 바 있다. 이외에도 강원도 태백산의 천제단 등에서도 천제가 거행돼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 사상을 기리고 나라의 태평과 안녕을 기원했다.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22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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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성신(日月星辰)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은 무속에서 모시는 신령이다.

일월성신은
해의 신(日神)과 달의 신(月神)의 한 쌍과 별의 신(星辰, 뜻은 “많은 별”)이며,

천지신명은 하늘의 신(天神)과 땅의 신이다.

일월성신은 해와 달과 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일월성신(日月星神)은 무교가 모시는 자연신 중에 가장 근원적인 신으로 가장 중요시하는 신명이다.

일월성신(日月星神)은 글자 뜻대로 해와 달과 별을 모시는 거리로
바로 우주에 존재하는 천부삼신이라 할 수있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은 해의 신(日神)과 달의 신(月神)의 한 쌍으로,
옥황천존 과 함께 인간의 문제를 풀어 준다고 하는 무 의 신령이다.

우리 부모님들께서는 태양과 달을 신으로 섬기고 두 손 모으고 고개숙여 절을 했다.

중급별전 "일월성신 背 북두칠성도"는 일월성신(日月星辰) 에 배면은 북두칠성도(北斗七星圖)이다.

우리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日月星辰은
원시시대 天地 숭배 사상의 대상이었는데
이 별전의 日月은 王과 왕후이며 아랬쪽의 삼태성(三台星)은 三相이며 七星은
의정부와 6조(六曹)로 이들이 모두 광명해야 나라가 태평하다는 뜻이다.

좌우의 日月 아래는 구름이다. 중급 별전으로 50만원 정도이고 크기는 36mm.
일월성신궂은 것을 기피하고 양달진 것을 찾는 마음이
지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일월성신에 투사되어 그것들이 신앙의 대상이 된다.

http://ko.mythology.wikia.com/wiki/%EC%9D%BC%EC%9B%94%EC%84%B1%EC%8B%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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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산실은 『동의보감』의 처방에 따라 만들었는데, 신비한 비밀 의식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산실은 근본적으로 천지신명의 가호를 받아 무사히 출산하고자 하는 소망에서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왕비는 무사 해산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산실이 설치된 이후에는 권초관(捲草官)을 뽑았고 그에 의해 권초제(捲草祭)가 거행되었다. 권초관과 권초제 역시 왕비의 무사 출산을 위한 조치였다. 권초관은 판서급 이상의 고위 관리 가운데서 뽑았는데, 다복한 사람 중에서 골랐다. 아들을 여럿 두고, 부모 형제도 모두 장수하며, 가정이 화목하고 무난하게 출세 길을 달리는 복 많은 사람이 권초관에 뽑혔다. 조선 전기 권초관은 왕비의 출산 당일 소격서(昭格署)에서 옥황상제, 태상노군 같은 도교 신들에게 신생아의 만복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렸다. 그것도 하루가 아니라 사흘 동안이나 올렸다. 소격서는 경복궁 옆에 있었는데, 지금의 삼청동 자리였다. 도교에서 신앙하는 3청(淸) 즉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을 모신 삼청전이 그곳에 있었다.

 

권초관은 옥황상제와 태상노군 앞에 온갖 제물을 차려놓고 사흘간 치성을 드렸다. 치성은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는 것이었는데, 이를 초제(醮祭)라고 했다. 제물 앞에는 신생아가 입을 옷가지를 놓고 치성을 드렸다. 신생아가 아들이면 오색 비단, 모자, 두루마기 옷감, 홀, 신발, 띠를 놓았으며 딸일 때는 비녀, 치마, 신발을 놓았다. 사흘 후 한밤중에 권초관은 왕비가 출산한 산실로 갔다. 산실 문 밖에 도착한 권초관은 가지고 온 옷가지들을 탁자에 올려놓고 분향재배했는데, 이것이 권초제였다. 권초제 이후 옷가지들은 신생아의 건강과 만복을 보호하기 위한 옷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소격서는 임진왜란 이후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사라졌다. 유교를 신봉하던 양반들은 도교의 신들을 모시는 소격서가 국가 기관으로 존재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하였다. 소격서가 폐지됨으로써 왕비의 출산 의례에도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소격서에 모신 도교의 신들앞에서 거행하던 초제가 없어졌다.

 

하지만 임진왜란 뒤에도 권초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거행되었다. 왕비가 출산한 지 7일 째 되는 아침에 권초관은 산실로 갔다. 산실 문 밖에는 큰 탁자를 마련하고 그 위에 쌀, 은, 실, 비단을 놓았다. 쌀은 10말씩 든 자루 10포였다. 쌀이 10가마였으니 무척 많은 양이라 할 수 있다. 은은 100량, 실은 10근, 비단은 10필이었다. 권초관은 이 상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렸다. 탁자 위의 쌀, 은, 실은 신생아의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상징했다. 신생아의 미래를 위해 천지신명에게 이런 제물을 바치고 기원했던 것이다.

https://www.chf.or.kr/c2/sub2_2.jsp?thisPage=1&searchField=&searchText=&brdType=R&bbIdx=89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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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중국에서 유래된 원구제는 폐지했어도,
하늘과 땅과, 해와 달, 별의 신에 제사 계속 지냈다는데? 이걸 어쩌나?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라는게 결국 천자국에서만 할 수 있다는건데..
천지신명, 일월성신에 대해서 초제 지내면서 그거 계속 지냈다니까 그러네.
                    
전략설계 16-09-18 02:25
   
병자야~
고려는 한 것을 조선은 못 했다는 것을 지적하는거여.

책 제목이 원구단이다.
식민사관이 어쩌네 옆길로 새지 말고, 팩트가 안 맞으면 지적하라고 서두에 내가 얘기했지
팩트만 얘기해

밑에 네이버 자료도 식민사관이냐?

고려가 중국황제냐?
고려는 내내 한걸 조선만 못하게?
니 말대로 똑같이 동북아질서에서 중국 속국인데 조선만 등신이냐?

고려가 안 했담 몰라.
속국근성에 쩔어서 제후국이 어떻게 하냐고 못한거지
                         
Centurion 16-09-18 02:38
   
어이, 병자야. 너나 똑바로 알어 무식한것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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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유교를 치국(治國)의 이념으로 설정하면서
중국과 같은 방식의 제천(祭天) 의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는
국가 의례의 구성 요소인 오례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원구제는 최고 등급의 국가 제사로 설정되었다.

또한 실제로 원구에서 제사를 지낸 사례도
「예지」 및 연대기에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이처럼 원구제를 시행한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의 국가인 고려를 황제국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고려, 송나라, 요나라 3국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던 10~12세기 무렵,
고려는 송나라와 요나라에 형식적으로 사대(事大)하였지만
실제로는 황제국임을 주장하였다.

폐하·태후·황제 등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고
조종(祖宗)에게 묘호(廟號)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황제만 지낼 수 있는 원구제도 시행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을 거쳐 황제국을 표방한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뒤에는
원구제를 지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공민왕 대에 이르러 다시 시행하였으나,
이후 원(元)·명(明) 교체의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원구제를 제대로 지내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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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고려가 황제만이 지낼 수 있는 원구제를 지낸 건 사실인데..
원나라 부마국 들어간 다음에 못지냈어. 병자야.

그러다 공민왕 때 다시 원구제 부활시켰다가.
이게 조선 태조부터 세조-까지 ~~~ 쭉.. 지들이 황제만 지내는 원구제 지냈단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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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대부터 세종 대 중반까지는

고려시대 이래의 관행이며,
조선은 중국의 봉토(封土)가 아니라 단군에 의해 세워진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독자적인 지역이라는 이유 등으로 원구제를 시행하였다.

다만 왕의 친제(親祭)가 아니라 신하를 보내 기우제(祈雨祭)를 시행하는 방식이었다.

그나마 이것마저도 명나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였고,
대다수의 유학자들은 황제의 의례를 제후가 시행하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며 반대하였다.

결국 세종 대 중반에,
원구제의 권위를 빌리지 않아도 된다는
세종의 정치적 자신감에 따라 원구제는 폐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457년(세조 3) 1월 15일,
세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원구단에 나아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며
조선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면서 바뀌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조카를 밀어내고 왕이 된 세조는 정통성이 약했는데, 그에 반대하여 단종 복위를 꾀한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새로운 형태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그는 즉위 직후 통치 방식을 재상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에서 왕이 주도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로 바꾸었다. 또 직전법(直田法)을 시행하여 경제 질서를 회복하고, 보법(步法)을 실시하여 군사력을 증강하는 등 다양한 개혁을 감행했는데,

그와 더불어 관념상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황제의 의례인 원구제를 시행하였다.

세조는 원구제를 매년 정월 15일에 정기적으로 시행하도록 하되, 그 전날 시행되는 종묘제와 연결시켰다. 또한 그 의식은 명나라의 황제가 행하는 의례와 비슷하게 만들었으며, 반드시 왕이 친히 제사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원구 친제는 세조 연간에만 7차례나 시행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원구제는 제후에 불과한 왕의 지위를 황제에 비견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유교의 보편적 논리 및 당시 유학자들의 정서와는 맞지 않았다.

그 결과 세조가 승하하자 즉시 폐지되었고, 이후 400여 년간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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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설계 16-09-18 04:55
   
그 결과 세조가 승하하자 즉시 폐지되었고, 이후 400여 년간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어쩐다고?
전략설계 16-09-18 01:15
   
위 내용에서..

1. 삼국시대 이래 원구단 제사를 우리 나라에서 쭉 해왔다는 사실

2. ‘천자(天子)가 아니면 하늘에 제사할 수 없다.'가 세종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란 것이고.
    조선초부터 지속되어 논의된 것입니다.

3. 세조전까지 4번, 세조때 제도화 했다가 명의 간섭으로 중단됐다고 하네요. 내가 잘못 안 부분인데.
    원구단 천제 올리는 것도 명이 간섭해서 못하게 할 정도면.. 이걸 자주국이라고 할 수 없겠죠

조선초에 몇번 하다가, 세조때 제도화 해서 해볼려고 하다가, 중지되고..
사실상 대한제국 이전에 없었다는 것이네요.

왜 삼국시대 이래 했던 것을 조선은 거짐 못 했을까요?
꼬마러브 16-09-18 01:36
   
후... 어디서부터 설명드려야 될지 모르겠군요.

전략설계님 말씀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행해져왔습니다. 확실하지요.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제천단'이 필요합니다. 원구단은 제천단의 수많은 종류 중 하나이며 우리나라에서 원구단이 도입된 시기는 고려 성종 때 입니다.

원구단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행해진 전통적인 우리민족의 제천단이 아닙니다. 원구단은 고려시기 중국에서 넘어온 '외래제천단'입니다.

'외래제천단'이라는 것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후 원구단이 폐지되는데 큰 이유가 됩니다. 애초에 원구제는 중국의 천자가 하는 제천제이므로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의 왕이 한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않습니다. 제주도에서 삿포로 눈꽃축제하는 격이에요.

또한 원구단은 전조(前朝)=고려 의 것이기 때문에 조선의 사대부들이 극도로 꺼려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원구단이 폐지되었습니다. 그런데 님은 여기서 오해하시는게

원구단이 폐지된다고 하늘에 제사를 안지낸다는 건 아닙니다. 원구단은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한 수많은 도구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원구단말고도 다른 제천단은 많이 있어요. 강화도만 가봐도 참성단이 남아있잖아요?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은 원구단이 폐지 되든 안되든 삼국시대 이전부터 조선을 통틀어 계속 행해져왔습니다.

조선왕조실록만 보더라도 하늘과 단군에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은 수백페이지가 나옵니다.
     
전략설계 16-09-18 02:22
   
네이버 자료를 봐도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네요.

우리나라에서 제천의식이 국가적인 의례로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전해지는데, 이때부터 제천단을 원구단으로 부른 것은 아니다. 다만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古記)의 ‘고구려·백제가 다같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낸다’, ‘단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지낸다’는 기록을 통해 이때부터 제천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 계속되던 원구제는 고려 말 우왕 11년(1385) 당시 친명정책을 펴나가던 상황 속에서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천자일 뿐이니 고려는 제후의 의례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폐지되었다. 제천의식에 관한 이러한 명분론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면서 한편으로는 농업국가로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기우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원단의 설치와 폐지가 거듭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 3년(1394)과 세종 원년(1419)에 일시적으로 원단제를 시행하였으며, 세조 2년(1456)에 일시적으로 제도화되었으나 세조 10년(1464)에 중단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구단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초판 2004., 5쇄 2009., 돌베개)
          
꼬마러브 16-09-18 02:30
   
맥락은 같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제천의식이 국가적인 의례로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전해지는데, 이때부터 제천단을 원구단으로 부른 것은 아니다. 다만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古記)의 ‘고구려·백제가 다같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낸다’, ‘단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지낸다’는 기록을 통해 이때부터 제천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님의 글 - 中 -

제천의식을 위해 필요한 도구가 단입니다 제천단이요. 원구단은 제천단의 종류 중 하나입니다. 님이 올린 글에 나오잖아요
"제천단을 원구단으로 부른 것은 아니다"
원구단이 도입된 시기는 고려 성종 때 입니다.
물론 이 제천단은 삼국시대이전부터 있었지요.
               
전략설계 16-09-18 03:00
   
고려 성종이면 거의 고려초인데.
건국하고 60년 전 정도 지난..

고려는 중국 연호를 쓰고도 내내 원구단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단지 조선이 동북아 전통질서 때문에 못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죠.

동북아 전통 질서에 따라서 같은 제후국이어도
고려는 했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속국이냐 아니냐로 논쟁을 했지만. 답 없는 얘기고요
정도차로 봐야 되는데.
조선이 훨씬 심한 것이죠.
     
전략설계 16-09-18 02:33
   
조선의 원구단은 태종때 건립하라고 명이 내려졌고.
세조때 제도화까지 됐습니다.

이유가 고려 것이어서 싫어서 그랬다는 어느 자료에 근거하는 지 모르겠지만,
고려 것이어서 그렇게 싫어서 폐지한 지 300년이 넘었는데,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하고 원구단 다시 지어서 황제에 즉위했을까요?

하고 싶어 죽겠는데.. 중국의 외교적 속국이기에 못한 것이죠.

의문점은 고려도 중국의 속국인데.
고려가 내내 한걸 조선은 못 했냐 그겁니다.

동북아질서라고 포괄적으로 얘기할 게 아니라..
대중국 관계에 있어 조선이 고려보다 더 속국모드였음 보여주는 사례라는겁니다.

참고로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면서까지 부역자들 고려로 다시 보내라고 요구조건
거는 나라였습니다.
          
꼬마러브 16-09-18 02:36
   
태종실록에 보면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적전(籍田)과 원구단(圓丘壇)은 전조(前朝)의 옛 것이오니, 청컨대, 신경(新京)의 단(壇)에 이를 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내(境內)의 땅이 이 하늘 아래인데, 어찌 여기에 편안히 앉아서 신경(新京)에 요제(遙祭)할 수 있겠는가? 옛 원구단은 버려 두고 신단(新壇)을 축조(築造)하여 이를 행하라."

하고, 좌정승(左政丞) 하윤(河崙)을 명하여 행사(行事)하게 하였다.



위의 기록에서의 전조(前朝)가 바로 고려입니다.

-------------
대중국 관계에 있어 조선이 고려보다 사대주의가 심화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전략설계 16-09-18 02:56
   
그 신단을 조선은 축조해놓고도 안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고려의 것이기에 안 했다 이건 아니다.. 조선이 새로 신단을 축조했기에..

여러 자료들 보면 내부에서 제후국이니 안된다는 반발이 많이 있었고..

동아시아 전통적 질서라고 하지만.
같이 중국 연호쓰고 책봉받는 고려는 한 것을, 조선은 못 했냐는 것이죠.

세조때 명이 간섭해서 못했다는 자료가 정확한 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부터 이미 조선 내부에서 제후국으로서 해야 되냐는 논쟁이 심했고,
세조 이전에 지어놓고도 하다 말다 하네 마네 한 것이죠.

여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조선이 고려보다 사대주의가 심화된 것은 기본 상식인데.
이 기본적 사실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기 많아요.

꼬마러브님하고는 이견이 별루 없네요
꼬마러브 16-09-18 01:42
   
그리고 또한 조선은 당시 명나라의 제후국이 맞습니다. 이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질서입니다.
제후국 = 속국 이며
고구려 역시 북위의 속국이고 발해 역시 당나라의 속국입니다.
근대화 이전 '속국'이라는 단어는 그다지 부정적인 뜻이 아니였습니다. 속국의 의미가 부정적으로 바뀐 것은 근대화 이후로 서양의 vassal state를 속국으로 번역해 생긴 오류입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 속의 속국과 서양의 vassal state.. 즉 현재 속국의 의미로 통하는 것은 뜻이 서로 다릅니다.
혹시 이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신 건가요?
     
전략설계 16-09-18 02:16
   
조선은 당시 명나라의 제후국이 맞다고 해놓고,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건 뭔가요?

내가 글 쓰는 것도 이런 태도를 지적하는겁니다.
동아시아 질서 즉 중국에 대해 외교적(외형적) 속국이란 겁니다.

언제 내정까지 간섭받는 속국이라고 했나요.
여기서 그런 사람 있나요.

외교적 외형적 명나라의 속국이라는거 인정하면 됐지.
누가 내정까지 간섭받는 속국이라나요.

외교적 속국이란거 인정 안하고,
그도 인정을 안하고 자주국이란 소리를 하니까 하는 소립니다.
자주국이 왜 천제를 못 올리고 자기들끼리 제후국이니 하믄 되니 안 되니 논쟁을 하고,
원구단 만들어놓고 결국 안 합니까..

외교적 속국이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속국과 분리하기 위해 외교적이란 표현을 쓰네요.
외교적(외형적)으로는 중국 황제 하사품에 큰 절하고 속국모드였지 않습니까.
          
꼬마러브 16-09-18 02:21
   
ㅇㅇ 대부분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외교적속국이였던 국가는 우리역사중에서 조선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고려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고구려도요 신라도요. 한나라(漢) 이후 모든 국가들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 조선만을 특정해내 고려와 비교하는 의도가 뭡니까?
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장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전략설계 16-09-18 02:42
   
일일이 다 설명해드리기 그러네요.
이전 글 다 썼던거 다시 복사 반복하기가..

복사 해보자면..
우리가 아무리 조선을 두고 동아시아 국제질서 핑계대고, 자주국이라고 해봐야..
중국은 시골 촌부까지 한국을 중국의 과거 속국으로 봅니다.
일본에 대해서 그러지 않죠.

그러한 인상은 고려때 생긴 것이 아닌 조선에 의해 생긴 것이고.
구체적으로 중국에서 기원한 유교에 심취하면서 유학자들이 려말부터
형식적으로 중국과 속국관계를 마지 못해 인정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소중화를 자처하고 중국의 제후국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유학이 중국에 대한 정신적인 속국화를 가속화 시켜..

고려와 조선의 대중국 관계라는 것은 천양지차다 그겁니다.
전쟁을 하는 방식에서도 보여지고..
고려는 망할 때까지 당당했지만,
조선은 추하디 추한 역사를 남겼습니다.

현대 21세기 동북아 정세도 중국의 흥기로 중화근성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조선적 사고로는 중국을 상대할 수 없고.
고려의 자주적 정신으로 21세기 험난한 동북아 정세를 헤쳐나가자
이게 내 주장입니다.

근데 조선을 자주국으로 본다면 역사에서 뭘 배우겠습니까?
                    
Centurion 16-09-18 02:59
   
소중화가 언제부터 튀어나온 개념인데 고려말 타령을 해? 미치겠네.

소중화는 명나라 망하고 중화(문명국)가 망했으니,
천하에 문명국이 없으니, 덩치는 작지만 조선이
작은 중화(문명국)로써 나설 차례다라고 외치는 슬로건이야.

서로마제국 망했으니, 신성로마제국 타령하는거랑 같은 맥락이라고.

그리고, 조선왕도 중국의 봉토(봉건제에서 제후가 분봉받는 땅)이 아닌,
단군조선이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별개의 땅이란 인식 하에..
외왕내제의고려 황제가 지내던 원구제를 그대로 태조부터 세조-까지 쭉 계승했다고.

그리고 니가 역사에서 뭘 배우고 자시고 간에. 조선은 책봉 받은거 빼곤..
죄다 명나라에서 분리된 독립국 맞는데 뭔 개소리여.

그 때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중원 제국과 국교 수립하고,
전쟁안하고, 무역, 교류하는 방법이 책봉받고,
"사대"와 "사소"로 서로를 정식국가로 인정하고,

큰 국가는 작은국가를 덕으로써 자애롭게 대하며,
작은 국가는 큰 국가를 따르는 것..

이 관계로 엮어지는 것 뿐이라고.
그래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자주국 지위를 요구하니,
청나라가 조선이 자주국 본래부터 맞다고 흔쾌히 동의한걸 몇번을 얘기하냐?

삼국시대에도 책봉만 받았지, 툭하면 그 책봉 내린 황제국하고..
아무 꺼리낌없이 전쟁했다니까 뭔 그런 나라들보고
자주국이 아닌 '책봉'행위만으로 속국이다 개소리 멍멍이냐.
                         
전략설계 16-09-18 05:00
   
누가 명이 철령위 설치하니까 요동 출병한 려말부터 소중화 자처했대?

조선을 두고 하는 얘기지.

소중화를 자처하는 그 머리로 무슨 중국에 자주적이야?
소중화 이게 정신적 속국의 증거라니까..
망한 명나라 황제 제사를 청나라 망할 때까지 하고,
뭣이라고 망한 명나라를 조선이 대신하냐고?

이게 중국 한족에 대한 정신적 속국이지, 뭐여?

미국이 망했는데 한국이 소미국 하자고 누가 그러면 정신까지 속국근성이 배인거지.
제정신이여..
니가 말한 조선이 자주국이라면,
중국은 중국이고 조선은 조선이지.. 소중화가 뭐냐?
우리가 중국이여..
유교하다가 정신까지 중국이 된거여.

언제 고려가 소중국을 떠들고, 통일신라, 고구려 소중국을 생각했냐..
넌 부끄런지 모르지..
왜빠에서 조선빠까지 빠돌이 짓이 전문이다.
난 소중화란 소리가 몹시 부끄럽다
Centurion 16-09-18 02:31
   
꼬마러브님이 진짜 똑똑하고 많이 아시네.

그리고, 내가 위에도 적어뒀지만...
우리나라 제천의식은 원구제만 있는 것도 아니고..
동맹, 무천, 영고, 계절제, 팔관회 등등 나라별로 여러 형태로 있었고.

조선은 왕비 출산을 기원하며 천지신명,일월성신에 대한 초제는 꾸준히 지냈으며..
(물론 도교의식이라고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음)

애시당초 책봉을 받았던 다른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왕조
죄다 천자급이 지내던 천제(제천의식), 팔관회 지내며, 독자적 세계관을 가졌는데..

조선 건국 당시 천자가 거행하던 원구제 잘 지내다가 70년 뒤에 폐지했다고
애시당초 다른 왕조랑 똑같은 상황에서 갑자기 조선만 중국 속국되냐?

그러니까, 조선 태조 3년에 천자가 지내던 원구제 지냈다는데. 뭔 속국이야.?
그나마 원구제 폐지한 세조 10년부터 제후국 되고, 정신적 속국 됐다고 드립을 치던가. ㅋ

그냥, 그 전까지는 책봉 이건 별로 짜달시리 의미두는게 아니었다고.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보고 책봉달라고 그렇게 난리치다, 고명 못받았다고 요동정벌 준비한것도 글코,
심지어 황제(천자)가 지내는 중국식 원구제까지 지냈다잖아.

게다가 이 원구제는 고려시절에도 지내다 중단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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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제(圜丘祭)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유교 의식에 따라 하늘에 지내던 제사.

개설
원구제(圓丘祭) 혹은 환구제(圜丘祭)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는 관념에 따라 그 단을 둥글게 만든 데서 기원하였다.

전근대 중국에서 자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며 내세운 사상이 중화(中華)라면, 이 중화사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의례가 바로 하늘에 대한 제사였다. 하늘의 뜻을 대변하는 사람이 천자(天子)이며, 하늘의 명 곧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특별한 존재라고 주장했는데, 천자가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가 바로 원구제였다. 『예기(禮記)』에는 ‘천자는 하늘과 땅에 제사하고, 제후는 경내의 산천에 제사한다〔天子祭天地 諸侯祭山川〕.’는 유교적 제사의 원칙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원구제가 천하에서 오직 한 사람, 천명을 받은 천자만이 시행할 수 있는 의례이며, 원구제를 시행하는 나라가 곧 천자가 다스리는 황제국임을 뜻한다.

원구제는 고려시대에 유교적인 국가 예제(禮制)인 오례(五禮)가 시행되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황제국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시대별로 제사의 시행과 중단이 반복되면서 대한제국시대까지 이어졌다.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유교를 치국(治國)의 이념으로 설정하면서 중국과 같은 방식의 제천(祭天) 의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는 국가 의례의 구성 요소인 오례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원구제는 최고 등급의 국가 제사로 설정되었다. 또한 실제로 원구에서 제사를 지낸 사례도 「예지」 및 연대기에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이처럼 원구제를 시행한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의 국가인 고려를 황제국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고려, 송나라, 요나라 3국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던 10~12세기 무렵, 고려는 송나라와 요나라에 형식적으로 사대(事大)하였지만 실제로는 황제국임을 주장하였다. 폐하·태후·황제 등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고 조종(祖宗)에게 묘호(廟號)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황제만 지낼 수 있는 원구제도 시행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을 거쳐 황제국을 표방한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뒤에는 원구제를 지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공민왕 대에 이르러 다시 시행하였으나, 이후 원(元)·명(明) 교체의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원구제를 제대로 지내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조선은 국가의 안녕을 위해 명나라 중심의 세계 질서를 인정하고 사대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황제와 제후로 각각 설정된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에 따라, 이후 조선은 제천 의례를 시행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대부터 세종 대 중반까지는 고려시대 이래의 관행이며, 조선은 중국의 봉토(封土)가 아니라 단군에 의해 세워진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독자적인 지역이라는 이유 등으로 원구제를 시행하였다. 다만 왕의 친제(親祭)가 아니라 신하를 보내 기우제(祈雨祭)를 시행하는 방식이었다. 그나마 이것마저도 명나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였고, 대다수의 유학자들은 황제의 의례를 제후가 시행하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며 반대하였다. 결국 세종 대 중반에, 원구제의 권위를 빌리지 않아도 된다는 세종의 정치적 자신감에 따라 원구제는 폐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457년(세조 3) 1월 15일, 세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원구단에 나아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며 조선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면서 바뀌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조카를 밀어내고 왕이 된 세조는 정통성이 약했는데, 그에 반대하여 단종 복위를 꾀한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새로운 형태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그는 즉위 직후 통치 방식을 재상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에서 왕이 주도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로 바꾸었다. 또 직전법(直田法)을 시행하여 경제 질서를 회복하고, 보법(步法)을 실시하여 군사력을 증강하는 등 다양한 개혁을 감행했는데, 그와 더불어 관념상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황제의 의례인 원구제를 시행하였다.

세조는 원구제를 매년 정월 15일에 정기적으로 시행하도록 하되, 그 전날 시행되는 종묘제와 연결시켰다. 또한 그 의식은 명나라의 황제가 행하는 의례와 비슷하게 만들었으며, 반드시 왕이 친히 제사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원구 친제는 세조 연간에만 7차례나 시행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원구제는 제후에 불과한 왕의 지위를 황제에 비견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유교의 보편적 논리 및 당시 유학자들의 정서와는 맞지 않았다. 그 결과 세조가 승하하자 즉시 폐지되었고, 이후 400여 년간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1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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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설계 16-09-18 02:35
   
꼬마러브님은,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 맞다고 하는데.

니만 여기서 조선이 자주국이라 그래..

그냥 중국한테 내정 간섭 안 받는 국가라 그래.
          
Centurion 16-09-18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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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유교를 치국(治國)의 이념으로 설정하면서
중국과 같은 방식의 제천(祭天) 의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는
국가 의례의 구성 요소인 오례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원구제는 최고 등급의 국가 제사로 설정되었다.

또한 실제로 원구에서 제사를 지낸 사례도
「예지」 및 연대기에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이처럼 원구제를 시행한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의 국가인 고려를 황제국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고려, 송나라, 요나라 3국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던 10~12세기 무렵,
고려는 송나라와 요나라에 형식적으로 사대(事大)하였지만
실제로는 황제국임을 주장하였다.

폐하·태후·황제 등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고
조종(祖宗)에게 묘호(廟號)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황제만 지낼 수 있는 원구제도 시행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을 거쳐 황제국을 표방한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뒤에는
원구제를 지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공민왕 대에 이르러 다시 시행하였으나,
이후 원(元)·명(明) 교체의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원구제를 제대로 지내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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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고려가 황제만이 지낼 수 있는 원구제를 지낸 건 사실인데..
원나라 부마국 들어간 다음에 못지냈어. 병자야.

그러다 공민왕 때 다시 원구제 부활시켰다가.
이게 조선 태조부터 세조-까지 ~~~ 쭉.. 지들이 황제만 지내는 원구제 지냈단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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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대부터 세종 대 중반까지는

고려시대 이래의 관행이며,
조선은 중국의 봉토(封土)가 아니라 단군에 의해 세워진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독자적인 지역이라는 이유 등으로 원구제를 시행하였다.

다만 왕의 친제(親祭)가 아니라 신하를 보내 기우제(祈雨祭)를 시행하는 방식이었다.

그나마 이것마저도 명나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였고,
대다수의 유학자들은 황제의 의례를 제후가 시행하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며 반대하였다.

결국 세종 대 중반에,
원구제의 권위를 빌리지 않아도 된다는
세종의 정치적 자신감에 따라 원구제는 폐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457년(세조 3) 1월 15일,
세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원구단에 나아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며
조선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면서 바뀌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조카를 밀어내고 왕이 된 세조는 정통성이 약했는데, 그에 반대하여 단종 복위를 꾀한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새로운 형태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그는 즉위 직후 통치 방식을 재상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에서 왕이 주도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로 바꾸었다. 또 직전법(直田法)을 시행하여 경제 질서를 회복하고, 보법(步法)을 실시하여 군사력을 증강하는 등 다양한 개혁을 감행했는데,

그와 더불어 관념상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황제의 의례인 원구제를 시행하였다.

세조는 원구제를 매년 정월 15일에 정기적으로 시행하도록 하되, 그 전날 시행되는 종묘제와 연결시켰다. 또한 그 의식은 명나라의 황제가 행하는 의례와 비슷하게 만들었으며, 반드시 왕이 친히 제사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원구 친제는 세조 연간에만 7차례나 시행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원구제는 제후에 불과한 왕의 지위를 황제에 비견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유교의 보편적 논리 및 당시 유학자들의 정서와는 맞지 않았다.

그 결과 세조가 승하하자 즉시 폐지되었고, 이후 400여 년간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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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나 눈 크게 뜨고 똑바로 읽어.
               
전략설계 16-09-18 02:47
   
말 잘 한다.
고려가 황제국이다 그거지..
봐, 조선만 제후국이자나..

삼국이래로 다 하던거, 조선만 못한거 맞자나..
글 제목이 뭔가 한번 잘 봐?

위 한번 쳐다봐..
"조선만 못 했다" 내 말 맞자나..
넌 나한테 안 된다니까. 백번을 한들 안돼

니 말대로 고려는 황제국이라 한걸 조선은 제후국이라 못했다구.
의견통일됐네.

암튼 죽어도 말 바꾸지 마라~잉
여기서 말 바꾸면 사람xx 아니다
                    
Centurion 16-09-18 03:13
   
이게 또 수작부리는 거 보소.

야. 고려도 송나라에 책봉 받았다고.. 고려국왕으로..

니가 뭐~ "책봉"받은 "제후국"이니 속국이라며?

근데, 고려는 아~ 바다건너 편에서 거란한테 쳐맞고, 여진족한테 쳐맞고,
몽골한테 쳐맞던 송나라가 뭔 대수여? 나도 황제할래~ 하고..
자기들끼린 황제국처럼 굴었지.. 이게 외왕내제다.

"책봉"행위 하나만 놓고 보면..
고려는 물론, 조조의 위나라랑 전쟁하고, 후연, 북위, 수, 당과 끊임없이 전쟁한
고구려도 책봉 받아서 "속국" 된다고.

그래서, 종주국하고 수틀리면 전쟁하던 "고구려"가 제대로 된 "속국"맞어?
"속국"이 "종주국" 툭하면 노략질하고, 공격하고, 전쟁하고, 죽이고, 포로 끌고가고,
이러는데.. 이게 "자주국"이여? "속국"이여?

외왕내제 했어도 고려도 "책봉"을 받았는데, 이게 "제후국(속국)"이여? "자주국"이여?

그냥~ 짱개애들이랑 국교 맺고, 무역거래랑 문물교류 틀려고 국교 뚫은거라고 인간아.

물론, 조선은 조금 다르지..
명나라 200만 대군이랑 5만병력으로 전쟁할 뻔하다 위화도 회군으로 세워진 나라니까.
근데, 그 조선마저도 황제가 주관하는 고려 때 원구제 그대로 지내고, 지네 땅은 중국 봉토가 아니라, 단군 조선 이래 유구한 역사가 있는 별도의 외국으로 파악해서.. 독자적인 원구제 지냈다고..

나중에 유학자 사림파 유교탈레반들이
슬슬 세조무렵 성종, 연산군 이때 튀어나오다가, 아마도 반대했나본데..

와~ 진짜 형태로 치면, 다 "책봉" 받았고..
모든 왕조가 중국과 별도로 "천제"를 지냈는데..

왜 갑자기 조선만 "중국 속국"이 되냐? 병자야.

니 논리 자체가 조선 까는듯 하지만,
한국 역사 모든 왕조를 다 중국 속국만드는 논리잖아.

미친 정신적 속국 드립은 내가 정신적 패권국으로 이미 논파해줬잖아.

니가 중2병으로 세계 최고의 격투가를 자처하면, 갑자기 효도르도 때려눕히냐고? ㅉㅉ

조선유학자들이나 유교적 질서에서 '제후국'이니 "원구제"지내면 안됨~ 이랬지..
결국엔~ 청나라도 "조선은 본래 자주국인데?" 이랬다고.

일부러~ 귀막고.. 짱개 속국론 들먹이면서, 이 인간이 모르는 척 하는거 보소..
이거 못알아쳐먹으면 넌 진짜 병자다. 병자.
                         
전략설계 16-09-18 05:14
   
같이 책봉을 받어도 속국에도 정도 차가 있다고 내가 누누히 얘기하자나..

니 말대로,
<고려시대에 이처럼 원구제를 시행한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의 국가인 고려를 황제국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고려, 송나라, 요나라 3국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던 10~12세기 무렵,
고려는 송나라와 요나라에 형식적으로 사대(事大)하였지만
실제로는 황제국임을 주장하였다.>

고려가 황제국으로 생각하고 실제로 주장했는데.
그게 고려와 조선의 차이라니까..
내가 할 말 니가 다 했어. 난 이 말을 하고 싶은거야..

똑같이 중국 연호를 쓰더라도 고려와 조선은 다르다고..
조선은 제후국이고 사대 정도가 고려에 비해 조선이 심하다고 다른 분도 인정하잖아.
왜 니 혼자 자주국이래..

고려는 황제국이고 조선은 자주국이냐?

동북아 3국 체제가 거져 이루어졌냐?
40만 요 성종군과 맞서 싸우고, 10만 소배압군 전멸시키고 나서 이루어진거지.

15만 왜군에 중국군 왕창 불러오고도 한 것 없이 허송세월 보낸 조선,
10만 여진 침략에 왕이 나가서 대가리 찍는 조선이니..
거기에 맞는 합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야..

고려가 몽골때 천제 못 올린 것은..
고려라는 나라가 남아 있는 것만 다행이야..
몽골에 대해서는 예외를 둬야 해.. 어쩔 수 없어..
나라가 살아남은게 어디고,
몽골에 항복한 나라 치고 고려만큼 자치를 누린 나라가 어딨어..
그걸로 만족해야 지..

내가 쩌번에 얘기했지.
통일신라, 고려는 겉은 연호를 쓰는 속국 같지만.. 실제로 자주국이라고

그러나, 조선은 같은 패턴이긴 하지만.. 외교적 정신적 속국이라니까..
원구단 만들어놓고 천제 몇번 하고 못 하자나..
요게 진짜 중국과 외교적 속국이라니까..
자기들이 토의해서 제후국이니까 안 된다 하고..
자기들이 소중화 자처하자나.. 중국 좋아서 미치는데.. 제후국이 부끄럽겠냐..

정상적으로는 힘이 약하니까 보는 자리선 제후국이다 하더라도..
안에서는 까불어야지..
조선은 소중화를 자처한 안으로는 더 중국의 속국이여..
유교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
유교가 중국꺼잖아.. 중국이 모국인데 어떻게 중국을 욕하냐..

그 유교 하나로 군림하는데 조선 지배층인데..
                         
전략설계 16-09-18 05:17
   
명나라 200만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철령위 설치하다, 압록강 건너지도 않은 고려 5만 보고,
철령위 설치 중지하고 입 다물고 깨갱하게 명이다.

그렇게 자주성이 없냐..
최영장군의 요동출병이 무모하다 그거야..
200만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5만에 쩔어서 철령위 중지했구만

200만이니까 너는 평생 13억 중국에 쩔어 살어라..
                         
전략설계 16-09-18 05:25
   
왜 똑같이 책봉 받는데 고려는 하는데 조선만 천제 눈치보고 못하냐?
할라고 원구단까지 만들어놓고.. 제도화까지 해놓고..

왜 똑같이 책봉 받는데 고려는 황제국을 자처하고 황제국으로 생각하는데,
조선은 스스로 제후국을 자임하고 도리가 아니다고 천제까지 중지하냐고.

똑같이 책봉을 받아도,
하나는 황제국을 자임하고 하나는 제후국을 자임하냐고..

명나라가 쳐들어오든? 5만에 쩔어서 철령위 설치도 중지한 명에 겁 먹어서?

고려가 땅땡이가 조선보다 크겠냐, 인구가 더 많겠냐?
니 말대로 고려사람들은 황제국이라고 생각했고, 전쟁이 터지면 자기 힘으로 막을
궁리하는데..
조선은 스스로 제후국이라고 생각했고, 소중화를 자처했고,
전쟁 터지는거 뻔히 알면서도 준비 안 하고 중국군대 불러올 준비해..

유교에 심치해 유교의 모국인 중국에 속국근성을 보인거라니까..
그 차이여..
이런 속국근성인 태조 이성계 출신과 회군 문제도 있고, 유교 문제도 있는거여..
                         
전략설계 16-09-18 05:29
   
청나라가 조선은 원래 자주국이라 그랬어?

그래서 조선사람 50-60만을 잡아가고 조선 왕을 대가리 찍게 만들고,
왕자들 인질로 잡아가서 속국으로 삼았대..
자주국인데 왜 제후국으로 삼냐?

조선이 자주국이어서 대원군 잡으러 출병하고 원세개가 그렇게 조선에서 깝쳤나부다.

여진한테 자주국이라 인정 받아서 퍽이나 좋으시겄습니다. 뿌듯하지요
                         
Centurion 16-09-18 15:50
   
멀쩡한 나라 속국만드는 파렴치한 돌대가리야.
일당일도 못할 주제에 일당백한다고 자처하는 중2병
죽어도 입만 둥둥 뜰 밀알못 문외한아.

위에 글이나 쳐 읽어.
니 글 달린거 보고 내가 친히 어떤 상황인지 설명하는 글 퍼왔다.
                    
Centurion 16-09-18 03:22
   
그리고 니 글 제목을 봐라..

"우리 역사에 천제 안 올린 것은 조선뿐"

니가 그리도 까는 그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부터 중국식 원구제 올린 사람인데. 뭔 헛소리야.

뭔 조선 태조부터 세조-까지 원구제 지낸 사람들은 조선왕 아니고 고려왕이냐?

니 논리는 하나같이 다 병자스러워 ㅋㅋ

"책봉" 하나만 꼬집어서, 죄다 "속국" 타령할거면.. 안걸리는 한민족 왕조가 거의 없고, 심지어 비교대상으로 삼은 고려도 걸려.
"천제"를 안지냈다고 하는데, 무슨 조선 건국자부터 세조-까지 쭉~ "천제(원구제)"를 지내.

"책봉"을 받아서 정신적 속국이고 "제후국"이니 중국 속국  맞다? 에휴~ ㅉㅉㅉㅉ

그래서 "책봉"받아서 "제후국"이자 정신적 속국이었던
"고구려"와 "백제", "신라", "고려"도 황제국하고 전쟁도 불사하고 싸웠구나?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던 시절을 기준으로,
세계 군사력 상위권에 일본군이 포함될만하다고 하니 왜빠 타령하면서

뭔 세계적으로 군사강국이라고 이름붙으려면,
동서고금 시대초월해서 나폴레옹시대 프랑스군, 청나라 팔기군, 징기스칸 시대 몽골기병, 로마군단, 이딴 걸 막...주절주절...

기병이 아니면 세계적 강군이 아니네 뭔 개소리.. ㅉㅉ 이런 정신나간 영혼이 또 어디 있을꼬?

그냥 조선 까는게 아니라, 한국을 중국 속국이라고 말하고 싶은 니 춘장 카라맬 색 본심이나 드러내라. 같잖은 수작질 말고.
                         
전략설계 16-09-18 05:34
   
그래 몇번 천제 올렸다..
내가 올린 글에 몇번 올린거 있자나..

전체적으로 봐라 병자야~
원구단 만들어놓고 첨에 몇번하다 세조때 폐지하고..
그 뒤는 없어.. 대한제국 전까지는..

세조때까지 몇번 한거 장하다..
나같은 쪽팔려서 얘기 안 하겠다.
원구단 만들어놓고 세조 까지 몇번 하다 말아버린거 퍽이나 자랑스럽겠다..
니 정신승리다~잉

책봉 받아서 정신적 속국이 아니라..

같은 책봉을 받아도 고려는 황제국을 자임하고 천제를 지냈는데.
왜 조선은 못하냐 그거야..
명나라한테 뚜들어라도 맞았냐고?

이 얘길 하는데 어디다 말 장난하냐?

고려는 황제국 자임하고 천제 하는데 조선은 왜 제후국을 자임하고 천제도 못하냐?
이게 핵심이라고
                         
전략설계 16-09-18 05:45
   
지 입으로 패전했다고 해놓고,
세게적 강군이란 미친 눔이 있어.

외국과 1번 붙어 패배한 1전 1패 군대가 세계적 강군이라면 미친 눔이지.
제정신이여?

너 효도를 얘기하는데.. UFC에서 1전 1패가 세계 탑이여?

뻔치력이 좋으면 뭐해,
스테미나가 좋으면 뭐해..
나가서 깨지는데..
그게 강자야?

기병이 아니면 세계적 강군이 아니네.. 누가 이런 소리하든..
동북아에서.. 기병 아니고 동북아 정복한 군대가 어딨냐?
차량이 나오기 전에 동북아를 보병이 걸어서 정복해?

그렇게 믿는담 넌 병자야..
왜 임란 책에 조선수군과 의병 활약이 첫머리에 나오냐..
보병위주인 왜군이 걸어댕기니까 보급에 약점이 있어서 나온 얘기지..

임란 30년 뒤 여진애들 전격전 하는 것 안 봤냐?
동북아는 차 나오기 전에 기병이라니까..
그 넓은 땅을 어떻게 걸어다녀서 정복해??

결국 보급문제로 니가 빠는 왜군들 실패했자나.

동북아는 기병이라니까.. 동북아는 쏙 빼고 헷소리하는거 봐라..
니가 그렇지 무러..

핵보복 전략원잠 얘기했다가 밀계서 미친 눔 소리 듣는다고 하니까,
갑자기 나한테 들은 공격원잠 얘기 꺼냈다가..
중국 원잠을 쫓는다나..
내가 중국 잠수함기지 매복할 일이 뭐 있냐고 하니까..
대잠기가 잡아준다나..
이런 소리가 모른 소리야..

정신좀 수습해라.. 왜 그러고 사냐.. 쪽팔리지도 않냐?
어떻게든 안 지는 척 하고 싶어?
그니까 임란7년도 물고 늘어지지

임란때 왜군이 세계적 강군이라고 주장해놓고,
나중에 임란은 왜군이 패전이라고 했다가..
전쟁은 실전이야 병자야..
실전에서 못 이기는 군대가 어떻게 강군이냐..

수나라 130만 군대 누가 강군이라고 하냐?
실전에서 이겨야 강군이지..
밖에 나와서 1전 1패한 군대가,
니 입으로 임란서 졌다는 군대,
세계적 강군이라고 끝까지 왜빠질 할네..

뭐 자랑스럽다고 자꾸 지껄이냐..
그렇게 임란때 니 조상 죽인 왜군이 뿌듯햬?
니 가슴속엔 세계적 강군이여?

이런 정신나간 인간을 보나..
니 조상들이 추석때 무덤에서 울겠다..

정신좀 수습해라..
체육관(섬)에서 스파링 잘하면 뭐해..
본 게임에서 못하는데..

세계적은 개뿔이다.. 이름없이 사라지는거여..
7년 동안 명나라 육군하고 제대로 한번 붙어본 적이라도 있냐?

그래놓고 세계적 강군.. 니 말은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어디 나폴레옹, 로마에 갖다 대..

해놓은 것은 여진 누루하치 발 밑도 못 가는구만..

나는 팔기병 세게적 강군이라고 한 적 없다. 그 글 잘 읽어봐..

(중원을 정복한 여진군대도 세계적 강군을 꼽질 않는데,
섬 나와서 암 것도 한게 없는 왜군 따위를 인정하겠냐 그거야
눈높이가 높다. 암나 립서비스 못해)
(사르후는 인정한다만.. 그걸로 끝이지.. 명나라가 지 혼자 망했지 여진이 잘해서 망했냐)
                         
Centurion 16-09-18 11:32
   
제목: "우리 역사에 천제 안 올린 것은 조선뿐"

니가 그리도 까는 그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부터 중국식 원구제 올린 사람인데. 뭔 헛소리야.

뭔 조선 태조부터 세조-까지 원구제 지낸 사람들은 조선왕 아니고 고려왕이냐?


전멸설계 :    원구단 만들어놓고 세조 까지 몇번 하다 말아버린거 퍽이나 자랑스럽겠다.. 니 정신승리다~잉  <== 너 이러고도 우기고 싶냐? ㅋㅋ
                         
Centurion 16-09-18 11:40
   
게다가, 너 말고 딴 사람 다 알아먹은 소리, 지 혼자 우기다 다굴쳐맞고도 쪽팔린 줄 모르고, 아직도 개소리 하고 있네.

한두번이어야지 인간이. 에혀~ 병자야 병자야~ 너 그러고 살고 싶니? ㅋㅋㅋ

게다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세계적으로 강한 군대이라고 몇번을 얘기해?  이 인간은 정신승리가 거의 아큐정전급이야.

당대 유럽최강 스페인군이나 오스만군이나
이런 군대의 숫자와 화승총 비율에 육박하는 일본 군대가
단지, 쪽수 330만의 당대 세계 최고의 쪽수를 자랑한 직업군인 위주의
명나라군대에 몇번 깨졌네. 조선군 의병에 깨졌다고. 약골군대?

미국한테 깨지기 전 이라크군도 세계 군사력 4위 랭크된 국가였다고 몇번을 말해.

넌 일부러 말귀 못알아 쳐먹는 코스프레 좀 고만해. 병자야.
디바2 16-09-18 07:23
   
위안부와 독도로 중국과협력이절실한데 반중은아닌듯 합니다.
님 친일이신듯.시진핑주석이 한국에와서 하신 음수사원한중우호라는 말을 잘생각해보시길.
중국이 상행임정을보살피고 돕지않앟다면 백범선생도 안중근의사도 없었을테고 일제로부터독립도없었을것입니다.
오천년 혈역으로이어져온 중한관계를파토내는건아니라고봅니다.
상해임정을백범을보호하고지켜준게  누구였는지 우리가마시는물잉어디서온건지.
은혜를잊어면 금수나마찬가지죠
우리를지켜죽고보호해줄수있는건 중국뽄입니다
11학번 16-09-18 10:12
   
조선을 속국이라고 하는건 NATO에 가입한 국가들 다 미국의 속국이라고 하는거랑 똑같은 개소리 아닌가? 애초에 속국이란 말이 제국주의 시절에 나온 말인데 자꾸 근세 시대 있던 나라를 제국주의 시대 용어로 해석하려고 함? 세상에 스스로 속국하고 싶은 나라가 어딨음? 속국은 곧 착취, 핍박과 직결되는데 조선은 뭐 미쳐서 스스로 속국이 된건가? 이성계는 노망들어서 속국 안 시켜준다고 요동정벌 준비한건가? 제국주의 속국과 개념이 다르니까 명한테 얻어먹을게 있으니 사대한거지.

애초애 조선 속국 얘기 나온게 일제가 제국주의 프레임으로 한국 식민지화할 때부터 생긴거고 그 전에 청나라는 조선이 속국이라고는 생각도 안하고 있었음. 그리고 중국에서 조선 속국드립 나온건 국민당 장제스 놈 때부터 중화사상이랑 제국주의가 결합된 끔찍한 혼종이 나오면서 그 뒤로 지금 중공 빨갱이들까지 속국드립치고 있는건데 이 상황에서 조선 속국드립 동조하는건 식민사학자나 중화뽕에 심취한 우마오당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음
     
디바2 16-09-18 11:40
   
상해임정상해백범선생을지지해주고보호해준게 장개석총통임.
장개석총통이없었다면 임정도 백범도 그리고 장개석총통의 지원하에 의거한 이봉창윤봉길의거도 존재할수없었음.
하물며 안중근의사의의거또한 중국의지원이있었기에가능한것이었음.
음수지원 한중통일  김구선생의아드님이신 김신장군이 중국의대은에보답코자  쓴글아님
장개석총통우  님이함부로폄하할인물이아님
그리고위안부할머니들 보상받고 한풀어주기위해서라도 중국과의 우호는 너무나중요함.
친중반미.가까운친척이 먼  가족보다 나은속담도있잖어
          
Centurion 16-09-18 13:36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2487&sca=&sfl=mb_id%2C1&stx=diehard05&page=2

장개석이 한국 독립에 찬성했던게 아니라는 미국측 증언이 적힌 기사입니다.

심지어, 임시정부 외무부장인 조소앙도
장개석의 중화주의 야심을 느껴서 미국에 귓뜸했었구요.

장개석이 임정을 돕긴 도왔지만,
이건 윤봉길 의사에 대한 호감의 표시 성격도 강하고,

실제론 중국 국민당 아래 묶여있어서,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답답하게 여겼던 부분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의용대처럼 중국 팔로군쪽과 연합하는 방향으로 가는 비율이 꽤 됐죠.

어쨌든, 장개석의 한국 독립에 대한 무관심으로..
오히려 미국측에서 한국 독립을 초안에 끼워넣었다는 내용입니다.
미스테리 16-09-18 20:36
   
조선은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하는 것을 권장한 국가입니다. 유교를 위해 조상을 모셔야 한다는 미명하에 종묘를 만들고 조상에게 제사하게 합니다. 이게 발전 해서 차례를 지내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이 정도가 지나쳐서 양반은 1년에 20번 정도 조상 제사를 모셔야 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물질과 권력을 내세우는 도구로 제사가 사용됩니다. 서민들 중에도 부를 내세우기위해 2대 3대 제사를 모시게 되면서 제사 풍습이 이상하게 생긴 거죠..실제 평민들은 부모에게만 제사를 지냈지만..조선 후기에 이런 폐단으로 인해 2,3대 까지 지내는 제사로 바뀐 겁니다. 쉽게 말해서 조선은 천신이나 이런 제사 보다는 조상을 섬기는 제사를 나라에서 권장한 국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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