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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17 09:43
[한국사] (실제) AD.386년 한반도 지도
 글쓴이 : 러키가이
조회 : 3,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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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인터넷에있는 백제지도

이와 같은 백제 지도가 태동하게 한

근초고왕(?∼375 백제 제13대 왕)

즉위 후 왕권 강화 및 확립에 주력해 왕위 계승에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는 왕과 아들 근구수왕(近仇須王)의 왕명이 각각 초고왕·구수왕 앞에 ‘근(近)’자를 붙여 만들어진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진씨(眞氏)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 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 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한편, 왕권 확립을 바탕으로 해 사방으로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남으로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여 세력을 경략·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부용(附庸)하게 함으로써 백제의 영향권 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방 지역의 평정이 일단락된 뒤에는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 정책을 추구하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雉壤城 : 지금의 황해도 배천)싸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平壤城)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은 태자와 더불어 정기(精騎)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帶方故地)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왕은 정복 활동과 더불어 대외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형제와 같은 우호 관계를 맺음으로써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중국의 동진(東晉)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해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은 요동 지역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 무역 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열도 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백제 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열도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七支刀)’가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銘文)의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내용의 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졌고 백제의 후왕(侯王)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백제는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이용해 고대 상업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대(漢代)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는 한족의 동방 침입과 동시에 고대 상업로로서도 중요한 길이었다.

그런데 낙랑군·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 교통로와 상업로는 백제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요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 지역에 자리잡은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해 고대 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 구실을 하게 되었다.

동시에 근초고왕 대에 백제는 문화의 진흥과 일본으로의 전수 면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대방 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을 포섭해 문화의 질을 높였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수해 주었다. 그 좋은 예로는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 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지배 영역의 확대와 통치 조직의 정비를 통해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왕은 이와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 書記≫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 정리와 더불어 왕실 전통의 유구성·신성성을 과시하고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에서 취한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근초고왕 대에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 동성왕(?∼501) =====

삼근왕을 이어 즉위한 동성왕은 웅진천도(熊津遷都)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키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였다.

금강 유역권을 지배기반으로 한 신진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해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며, 한성(漢城)에서 온 남래귀족(南來貴族)과의 세력균형을 꾀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웅진시대 초기에는 한성시대 이래 왕비족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해씨(解氏)와 진씨, 그리고 목협만치(木劦滿致)를 중심으로 하는 목씨(木氏) 등이 여전히 정권의 중심에 있었다. 또한 정권을 장악하고자 서로 치열한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왕권조차도 이들의 정치적 향방에 좌우됨으로써 혼란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동성왕은 오랫동안 왜에서 체류하여 국내정세에 정통하지 못했고 정치적 기반도 미약하였다. 또한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음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국정을 장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해구의 반란을 평정하였고 또한 동성왕의 즉위에 절대적 역할을 한 덕솔(德率) 진로가 동성왕 4년 ‘병관좌평겸지내외병마사(兵官佐平兼知內外兵馬事)’로 임명되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동성왕 즉위 초반까지 남래귀족들과의 정치적 타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성왕대 전기는 웅진시대 초기의 관행인 실세귀족을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기는 했지만 후기에는 남래귀족의 활동이 거의 보이지 않는 대신 신진세력들이 중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동성왕은 정치의 중심지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겨진 이상 금강유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유력세력들을 주목하게 되었으며, 이들을 등용시켜 실세인 남래귀족들을 견제하고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여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다. 또한 유력세력들 역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현실적 욕구가 팽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신진세력으로는 사씨(沙氏)·연씨(燕氏)·백씨(苩氏) 등을 들 수 있다. 신진세력들은 점차 세력기반을 확대해 동성왕 후기에는 해씨·진씨 등 남래귀족을 대신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어 지배세력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동성왕은 신진세력을 중앙정계에 등용하면서 기반세력의 대소와 충성도에 따라 적절하게 관직을 부여했다. 특히 유력한 토착세력에게는 좌평제도(佐平制度)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좌평직은 백제 최고의 관직으로 중앙 정계에 확고한 기반이 없었던 이들을 등용한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 동성왕대 이전까지 좌평직에 오르는 인물들은 모두 왕족과 해씨 진씨 등 외척세력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성왕은 재위 6년에 사약사(沙若思)를 내법좌평(內法佐平), 8년에 백가(苩加)를 위사좌평(衛士佐平), 19년에 연돌(燕突)을 병관좌평으로 등용하였다. 이것은 진씨와 해씨 등 남래귀족들의 전횡을 방지하고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동성왕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특히 사씨는 백제 왕실의 웅진천도를 계기로 새롭게 중앙귀족으로 진출하였다. 동성왕 6년에 내법좌평 사약사가 남제(南齊)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있으며, 17년에는 사법명(沙法名)이 남제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북위(北魏)를 격파하는데 공을 세우고 남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있다. 사씨는 동성왕대에 대외교섭이 활발히 전개되자 이를 이용하여 대외적 측면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져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웅진천도 이후 미약해진 왕권은 동성왕대에 크게 회복되었다.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이유를 남래귀족을 견제하기 위한 신진세력의 흡수라는 대내적인 정국 운영의 개편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 외에도 동성왕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들 수 있다. 대외정책의 성공여부는 내정의 안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웅진천도 이후 백제는 고구려 수군에 의해 서해의 해상교통로를 차단당했다. 동성왕은 집권 초기부터 남제와의 외교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동성왕 2년 남제에 사신을 파견, 대 중국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문주왕 2년 고구려의 저지로 대송외교(對宋外交)에 실패한 이후 약 5년만에 재개되는 중국에 대한 외교였다. 이는 남제와의 관계를 통해 적대세력인 고구려와 북위를 견제함은 물론 신라와의 외교관계에서의 주도권 장악과 가야·왜에 대한 정치외교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동성왕대 남제와의 교섭은 백제가 고구려에 대한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 확립에 커다란 뒷받침이 되었다.

동성왕은 신라와의 외교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신라의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신라가 살수원(薩水原)에서 고구려와 싸울 때 원병을 파견했고, 고구려에게 치양성(雉壤城)을 공격받았을 때는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등 공동전선을 형성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백제와 신라 동맹군의 승리는 양국으로 하려금 고구려의 공세에 대응하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백제와 신라사이의 신뢰는 매우 돈독해졌다.

한편,『남제서』백제전에는 동성왕이 사법명·찬수류(贊首流) 등의 장군을 중국 요서(遼西)지역에 파견해 북위군을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사는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의 근거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여기에 보이는 왕·후·태수·장군 등의 관명은 백제의 해외경영 문제와 관련해 주목되는 자료이다.

488년과 490년에 있었던 ‘위로침공’으로 표현된 전쟁은 백제가 고구려군을 격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동성왕은 궁실을 중수해 수도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우두성(牛頭城)·사현성(沙峴城)·이산성(耳山城) 등을 축조해 수도의 방어망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사정성(沙井城)·가림성(加林城) 등을 쌓고 중앙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 밖에 탐라(耽羅)가 공납을 바치지 않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무진주(武珍州)까지 출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진귀한 짐승을 길렀으며, 이것을 비판하는 신하의 간언을 물리치는 전제군주적인 풍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동성왕은 신진세력을 등용해 구귀족과 신귀족 사이에 세력균형을 도모하고,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추진해 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하였다. 그러나 신진세력이 점차 증대해 왕권에 압력요소로 작용하게 되자 동성왕은 신진세력에 대한 견제조처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한 조처 중의 하나로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위사좌평 백가를 가림성 성주로 강제로 내보낸 것을 들 수 있다. 동성왕의 이 같은 견제는 백가를 위시한 신진세력의 불만을 초래했고, 마침내 백가세력은 동성왕이 사비서원(泗沘西原)에서 사냥하는 틈을 타서 왕을 암살하였다.


국사 교과서

백제 전성기.JPG



TV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백제 지도
백제 전성기2.JPG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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