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루
처음에는 부여국(扶餘國)의 지배를 받았으며, 3세기 전반(前半)에 독립하여 주위의 여러 민족과 전쟁을 벌였다.
읍락
마가
말갈
주(
周)나라 때에는 숙신(
肅愼), 한(
漢)나라 때에는 읍루(
挹婁)라 불렀다. 본래
쑹화강[
松花江] 유역의 물길(
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이라 부른다. 이들 부족 중 대표적인 것은
예맥(
濊貊) 계통으로 농업을 주로 하던 속말(
粟末), 백산(
白山)과 순수 퉁구스계로 수렵에 의존하던 백돌(
伯咄)·불녈(
拂涅)·호실(
號室) ·흑수(
黑水) ·안차골(
安車骨) 등 7개 부족이었다.
그 중에 속말과 백산부족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자 영주(
營州:
遼寧省朝陽)로 이주하였고, 후에 발해가 성립되자 대부분의 말갈족이 발해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흑수부족만은
쑹화강과
헤이룽강[
黑龍江] 하류 지역에 근거를 두고 발해에 대항하였고 발해 멸망 이후 흑수말갈은 거란에 복속되어 여진(
女眞)이라 불렀으며, 그후 생여진(
生女眞)과 숙여진(
熟女眞)으로 나뉘었다가 생여진은 금(
金)나라를 건국시킨 주체가 되었다.
숙신
고조선 시대에 만주 북동방면에서 수렵생활을 하였다. 숙신이라는 호칭은 중국의 《국어(
國語)》 《사어(
史語)》 및 그 밖의 고전에서 볼 수 있고, 특히 《국어》의 숙신공시(
肅愼貢矢)는 전설로도 유명하여 성천자(
聖天子)의 출현과 그들의 입조공헌(
入朝貢獻)을 결부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중국의 《
사기》에는 식신(
息愼)·직신(
稷愼)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서천왕(
西川王) 때 일부가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며, 398년(
광개토대왕 8) 완전히 병합되었다. 뒤에 일어난
읍루(
挹婁)·말갈(
靺鞨) 종족이 숙신의 후예로 추측되기도 한다. 한편 당(
唐)나라 때는 선진(
先秦)시대의 북동방면 거주 민족의 총칭으로 쓰였다.
고조선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
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
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
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출처: 네이버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이 숙신(肅愼)에서 나온 것이라 하고, 그 원래 명칭이 주신(珠申)이라 주장 한바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