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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8-04 22:06
[한국사] 박정희가 만주로 떠난 이유
 글쓴이 : 객관자
조회 : 5,949  

반일교사 찍혀 일본인에게 집단린치 당했다”“만주군 장교 시절 광복군 탈출 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 제자 이순희씨, ‘숨어있는 집사’ 이진화씨 본격 증언


cover story modern history controversy

조 우 석
 

 
 

안정된 교사생활을 접은 채 만 스물셋 나이에 결행했던 1940년 초 만주군관학교 늦깎이 입학, 해방된 조국에 세워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제2기생 입교 전까지 1년 1개월 동안 사회활동의 완전 공백, 바로 이때 남로당에 가입했다

는 혐의 때문에 피할 수 없었던 생애 최대 시련과 복권(復權)의 긴 드라마…. 박정희 전 대통령(1917~79)의 생애, 참 만만치 않다. 놀라운 건 따로 있다. 

이 드라마에 숨겨진 진짜 동기와 배경은 지금껏 알려진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극과 극을 오갔던 박정희 삶을 흔히 ‘비약과 단절의 생애’라고 하지만, 실체를 잘 몰라 얼버무려 표현한 건 아닐까? 

20대 폭풍의 시절, 뜻밖의 선택을 거듭해야 했던 박정희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 혹은 삶의 결정적 매듭이란 과연 무엇일까? 5·16 이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 언제까지 그를 둘러싼 논쟁을 거듭해야 하나? 

혈서 지원서를 보도한 옛 신문 사본 이 공개됨에 따라 지난해 ‘친일파 박정희’ 논쟁이 벌어졌지만, 숨어있는 당시의 진실을 밝혀줄 제3의 증언이나 물증은 과연 없을까?

70년, 64년 만에 입을 연 두 증언자


 
 
예기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의 문경초등학교 시절 여제자 이순희(81·한국극빈아동선도회장)씨가 그의 만주군관학교 입학 직전에 벌어졌던 ‘교무실 린치 사건’을 공개했다. 

70년 만의 이 증언은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제기되지 않았다. 더없이 생생한 그의 말을 종합하면, 교사 박정희는 학교 재직 기간 내내 반일사상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불령선인(不逞鮮人, 일제에 비협조적인 인물)으로 찍혀 있었고, 이를 조사하려고 나온 시학관(視學官, 장학관) 일행이 학교를 방문하던 날 불미스러운 일이 터져 일본인 교사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했다. 

1939년 10월께 벌어진 상황이다. 피투성이가 된 채 “복수할 거야!”라고 외치며 학교를 떠났던 박정희는 그 길로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했으며 그 사건이 돌연한 만주행의 동기라는 주장이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 못지않게 이전 상황도 중요하다. 

왜, 무슨 활동 때문에 그가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혔을까? 의문을 잠시만 접어두자. 다른 증언도 경청해야 한다. 또 다른 각도에서 반일주의자 면모를 확인해주는 얘긴데, 박정희의 ‘숨겨진 집사(執事)’ 이진화(83·전 중앙정보부 부산대공분실장)씨도 64년 전 고향 구미에서의 대화를 공개했다. 

그의 증언 역시 해방 이듬해 만주에서 돌아와 무위도식하던 ‘낙향거사’ 박정희를 말해주는 전에 없던 자료인데, 지금까지 공백 기간으로 남아있던 1946년 여름 상황을 복원시켜준다. 당시 사회활동 공백은 각종 전기·평전의 사각지대이자, 박정희 전기적 생애 구성에서 ‘잃어버린 연결고리’였다. 

이걸 메워줄 증언은 박정희가 당시 구미면사무소 호적계장으로 있던 이진화씨의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 나눈 대화다. 그의 아버지(이원기 노인)가 지역 유지였기 때문에 인사차 찾아왔다. 놀랍게도 셋째 형 박상희가 주선한 자리였다. 일제시대 때 신문기자로 활동하던 박상희는 여운형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 계열로 읍내에 ‘선산인민위원회’ 간판을 내건 채 활동하고 있었다.

대구·경북 지역의 청년 엘리트 박상희와, 만주군 장교 출신의 동생이 함께 움직였다는 증언 자체가 이례적이다. 통설과 다르기 때문이다. 통설은 연세대 박명림 교수의 말대로 “중도좌파 성향의 박상희가 만주에서 돌아온 뒤 무위도식하는 동생을 소 닭 보듯 했고, 황태성 등 지역 유명 좌파인사와의 관계 때문에 되도록 멀리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날 자리의 중요성은 형제애 확인, 그 이상이다. 박정희가 이원기 노인과 나눈 대화가 지닌 각별한 무게 때문이다. 

“물어볼 게 하나 있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위탁교육을 받고 장교생활을 했던 자네가 광복군과 총을 마주 대고 전쟁을 벌인 적이 없었던가?”

 

 

“반일교사 찍혀 일본인에게 집단린치 당했다”“만주군 장교 시절 광복군 탈출 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 제자 이순희씨, ‘숨어있는 집사’ 이진화씨 본격 증언

cover story modern history controversy
조 우 석
 

 
 

당시 누구라도 품었음 직한 궁금증이다. 세상이 바뀌어 해방 직후의 상황이 아니던가? 더구나 이원기 노인은 지역 유력인사인 데다가 그의 아버지(이우인· 전 ‘만주일보’ 발행인)가 문중 재산을 털어서 1920년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었던 사람의 하나다. 초점이 분명한 그의 정교한 질문에 박정희가 입을 열었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던 즉답이다.

“전혀 없습니다. 저는 전투행위 자체를 한 적이 없거든요. 만리장성 북쪽 러허성(熱河省)에서 만주군 제8단(연대) 소속으로 근무했는데 보직이 부관 겸 기수였습니다. 만일 제가 광복군과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에 계속 몰렸더라면 광복군 진영으로 탈출했을 것입니다.”

박정희 생애 재구성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이 대화는 20대 청년 박정희의 만주활동 실체와 당시 내면의 갈등을 말해주는 자료다. 6년 전 문경초등학교에서 린치를 당했던 불령선인 박정희만큼이나 그의 반일 성향을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대화는 만주군 장교 시절의 그가 비밀 독립군이었다거나, 독립투사를 잡으러 다니던 정보 장교였다는 식의, 극과 극의 억측이 모두 무효임을 보여준다. 증언의 진실성은 주변 정황으로 확인된다. 

우선 박정희가 이원기 노인과의 사이에서 쌓았던 신뢰는 이후 오래 계속됐다. 한국전쟁 때 서울 수복 직후 박정희는 그를 찾아가 아들의 장래를 상의했다. 어차피 병역을 마쳐야 한다면 장교가 좋을 것이라고 설득을 해 이진화씨의 소위 임관(1952년 4월)을 관철했다. 당시 이원기 노인은 “군자는 군인과 멀다(好人不當兵)”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전형적인 양반 가문 사람인데, 그걸 꺾고 박정희 말을 따랐다면 그만큼 서로를 신뢰했다는 얘기다.

81세 제자가 전하는 린치 사건의 전말

박정희 논쟁에 새 국면을 열어줄 두 증언 중 교무실 린치사건이 시기상으로 먼저다. 이를 증언하는 이순희씨는 ‘우리 선생님’(그가 박정희를 지칭하는 말)으로부터 3년을 배웠다. 2학년 개학 날 학생들과 첫 대면했던 교사 박정희의 첫 인상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선생님은 무섭고 근엄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이 작은 키에 까만 얼굴, 검정 운동화 차림이었다. 당시에는 4월 초에 새 학기를 시작했다. 추위가 남아있는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옷가지도 초라했지만, 그래도 왠지 친근한 모습이었다. 더없이 섬세한 기억력을 가진 그는 문경초등학교 시절 박정희를 말하는 다른 증언은 대부분 정확하지 않다는 점부터 지적했다. 

일본인 교장 아리마(有馬近芳)와 크게 충돌한 박정희가 그를 두드려 팬 뒤 만주로 도망갔다는 말이 각종 박정희 전기에 등장했지만, 그건 근거 없다. 자기처럼 2~3m 코앞에서 린치 사건을 지켜봤던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더구나 부임 직후 박정희는 문경읍내 자기 집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그가 보기에 조갑제의 책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도 잘못된 증언을 토대로 했다. 출간 당시 저자를 찾아가 오류를 지적했고, 새 책을 펴낼 때 고치겠다는 약속까지 직접 받아낸 적이 있다.

“하숙시절 우리 선생님은 한량이자 제재소 사업을 하던 우리 아버지(이춘동, 1980년 사망)와는 술친구 사이로 발전했습니다.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막걸리를 앞에 놓고 대청마루에 앉아 새벽녘까지 두런두런 말씀을 나누시곤 했어요. 그때 선생님은 평소와 달리 잘 웃었고, 때론 박장대소도 했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자기만의 공부를 하곤 했는데, 제재소를 겸한 살림집이 전기톱 소음으로 시끄럽다며 6개월 뒤 하숙을 옮겼다. 이순희씨는 하숙을 옮기기 전까지 매달 찾아오던 박정희 부친 박성빈의 모습도 기억한다. 봉급을 건네 받으려고 오는 그는 무명저고리에 파나마모자를 눌러쓴 채 트럭이 출입하던 큰 대문으로 거침없이 들어오는 휘적휘적한 걸음걸이가 특징이다. 

허리 아래의 저고리 양끝을 위쪽의 양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차림도 별났다. 저고리가 때 탈까 해서 접고 다니던 당시 풍속이다. 그러고는 자전거로 퇴근한 박정희와 얘기를 나눈 뒤 “바쁘다” 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다.

“4학년 진학을 앞둔 1940년 초 저를 포함한 학생들은 우리 선생님을 모시고 과외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진학 준비인데, 남자 셋 여자 셋의 과외 멤버들은 선생님이 하숙하던 주막집에 놀러 가서 공부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할머니가 지어준 제 어릴 적 이름을 부르며 ‘석룡아, 경성 구경이나 시켜줄까?’하면서 제 귀를 잡고 번쩍 위로 들어올리기도 했습니다. 교무실 린치 사건이 벌어진 빌미가 바로 과외공부 때문이었습니다.”

과외 시작 얼마 뒤 박정희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내용을 가르쳤다. “오늘 들은 말을 밖에서는 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일본이 조선역사를 모르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크레용으로 일장기의 아랫부분을 파랗게 칠해 태극문양을 만들고 네 귀퉁이에 사괘까지 그려 보였다. “이게 우리 태극기”라는 말에 꼬마들 가슴이 떨렸다. 그러고 며칠이 지난 뒤 사달이 생겼다. 운동장에서 놀던 한 학생이 어린 마음에 우쭐해서 친구에게 속삭였다.


 
 

“야, 너 알아? 저기 걸린 게 우리 국기가 아니래.”

이 말이 일본인 교사의 귀에 들어갔고, 진원지가 박정희라고 드러났다. 사실 전부터 박정희는 일본인 교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기시(大岸)·시마디(島田) 두 교사와 특히 으르렁댔다. 

돈이 없어 머리 깎지 못한 학생들 머리칼에 마구 가위질을 한 뒤 복도에 무릎 꿇리는 것을 보고 그때마다 항의한 탓이다. 당시 복도는 새로 지은 시멘트 건물이라서 바닥이 딱딱하고 차가웠다. 

시비가 붙을 때는 “칙쇼” “바가야로” 등의 거친 말도 튀어나왔다. 박정희의 반일 성향은 다른 제자들이 제기하기도 했다. 1937년 학교 첫 부임 때는 조선어 교육이 허용되던 시점이라 박정희가 조선어를 가르쳤지만, 그때도 태극기 교육을 종종 시켰다. 학생 한 명을 보초 세운 채 비밀 교육을 실시했다. 이게 과외시간 때 태극기 교육과 얽혀 문제가 커졌다. 

“문제의 그날 도교육청 시학관 일행이 학교에 감찰을 나왔습니다. 그날 저는 시학관 일행 차 심부름 조에 뽑혀 교무실에서 있었습니다. 저보다 1년 위인 학생으로, ‘김약국 딸’로 불리던 김경숙, 면장 딸이던 박순애 그리고 저 등 모두 세 명인데, 옷 잘 입고 깔끔하다고 해서 일찍부터 대기중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시학관을 영접한다면서 역전에 도열했는데, 그날 웬일로 교감 가토(加藤)가 영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에요.”

당시 박정희는 학생 5~6명에게 트럼펫을 가르친다며 뒷산으로 올라갔다. 가토가 고즈카이(소사) 한씨(2008년 작고)에게 “시학관 일행이 왔으니 내려오도록 하라”고 일렀지만 허탕을 쳤다. 

한 씨는 “트럼펫 교육도 엄연한 교육인데 나중에 내려간다”는 박정희의 말을 대신 전했다. 화가 치민 가토가 “지가 감히 오라면 와야지!”하며 와다닥 올라갔다. 10분 뒤 둘이 함께 들어섰다. 박정희는 가토의 우악스러운 손목에 멱살을 잡힌 채 질질 끌려왔다. 

“조!센진은 사람도 아냐. 모두 돼지나 개의 먹이로 줘야 해.”(조!센진다치와 닌겐자나이. 부타토 이노누 에사니 아케다라 조도이) 

가토의 욕설에 박정희가 지지 않고 “도둑놈들은 너희들이 아니냐?”(도로보다치와 오마에 다치자나이카?)고 맞고함을 쳤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찰나 가토가 “나니 구소?(제기랄. 이 거지 같은 놈)”라는 말과 함께 박정희를 업어치기로 메다꽂았다. 코피가 터졌다. 가토는 당시 서예와 유도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 일본인 교사들이 바닥에 쓰러진 박정희에게 덤벼들어 손찌검을 했다. 

당시 한국인은 여교사 박옥희와 남자 교사 하나가 더 있었으나 대적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5~10분 내내 얻어맞던 박정희가 운동장으로 도망치듯 내려갔다. 소리소리 질렀다.

“언젠가는 내가 복수할 거야!”

큰소리로 울며 외치던 박정희는 하숙집으로 달려갔지만, 일본인 교사들이 그곳을 찾아가 다시 린치를 가했다. 최악의 사태 이후 박정희는 만주로 갔다고 이순희씨는 말했다.이 대목은 선후 관계가 다소 부정확하다. 박정희는 1940년 3월 말 학생 통지표에 서명했다는 기록이 문경초등학교에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자신의 입으로 린치사건의 성격과, 불령선인으로 찍혔던 당시 배경까지 확인해준 셈이며, 둘 사이의 인연은 계속됐다. 4년 뒤인 1964년 이순희씨는 충주여고 교사로 근무했다. 마침 충청북도를 찾은 박정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는 서로 여유가 있었다. 한량이던 아버지가 요즘도 술을 좋아하시느냐며 안부를 물으며 함께 웃었다. 

한참 뒤 이순희씨는 ‘대통령 선생님’이 타계한 뒤 추모사업을 시작했는데, 문제의 하숙집을 어엿한 박정희 사적지로 만들었다. 그게 1982년에 세운, 지금의 청운각(靑雲閣)이다. “청운각이란 이름은 청년 박정희가 푸른 꿈을 안은 채 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했고 일본인의 항복을 받아낸 통쾌한 장소라서 내가 직접 그렇게 지었다”고 그는 말했다. 

한 가지, 박정희는 대통령 자격으로 문경을 방문했을 때 하숙집을 일부러 찾았다. 린치 사건 28년 만인 1967년도의 일이다. 첫 부임지이자 마지막 근무지였던 학교 귀향, 그때 2차 린치의 현장이던 하숙집 주변을 묵묵히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번졌던 만 가지 심회를 헤아릴 수 있던 이는 많지 않았다. 

고향 후배인 광복군 출신 박일상

1946년 여름 박정희 고향에서의 움직임을 밝혀준 이진화씨 증언은 64년만의 언론 첫 공개이지만, 지난해 법정 자료로 제출됐었다. 박지만씨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를 대상으로 발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을 때 ‘1946년 여름’의 진실을 자필로 써서 제출했다. 법정 자료라고 해서 진실성이 바로 보장되지는 않는다. 진정성은 오히려 증언의 디테일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상희 형제의 고향 어른 방문 인사는 최소한 세 곳이다. 

“옛말에 조선 인재의 8할은 영남에서 나오고, 그중 8할이 선산(구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구미 지역은 선산(善山) 김씨, 청송(靑松) 심씨, 벽진(碧珍) 이씨 세 집안이 쥐고 있었는데, 박정희 형제는 이 집안 어른을 모두 찾아뵈었습니다. 선산 김씨 집안의 김준용 어른이 먼저입니다. ‘이관 어른’으로 불렸던 그는 우리 선친보다 10년 연상이지만 서로 맞담배를 태웠지요. 하지만 명절이면 우리 부친이 몸소 세배를 가셨습니다.” 

그 다음 박정희 형제가 인사 간 게 같은 선산 김씨 가문이지만 노론 쪽이 아닌 남인 계열의 김성동 어른이다. 그는 당시 ‘구면장 어른’으로 불렸다. 그리고 벽진 이씨 집안을 대표하는 자기네 집을 박정희 형제가 찾아왔다. 이들은 모두 구미역 근방에 모여 살았는데, 일제 말 박상희는 명절 때 꼬박꼬박 세배를 올렸다. 

1946년 여름의 그 자리는 동생의 귀향을 알리는 새로운 자리였다. 분위기도 좋았다. 귀한 손님을 맞을 때 풍속대로 닭 국물로 만든 손칼국수가 대청마루 식탁에 올랐는데, 당시 만 19세이던 이진화씨가 동석했다. 박정희와 아버지 사이의 대화도 직접 들었다. 그날 이후 박정희는 이진화씨를 아끼고 좋아했는데, 벽진 이씨가 애국자 가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이진화씨의 할아버지(이우인)가 종중의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간 뒤 애국활동의 일환으로 ‘만주일보’를 경영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만주일보’는 혈서설에 등장하는 ‘만주신보’와는 다르며, 박준규 전 공화당의장의 6촌형 박인규를 전면에 내세워 만주 봉천에서 발행됐다. 

애국자 집안 젊은이를 좋아했던 박정희가 아꼈던 또 다른 인물이 박일상(1923년생, 육군 소령 예편)이다. 구미 출신 박일상은 일본 릿쿄(日本)대 유학 중 1944년 1월 탈출해 광복군이 된 인물로, 박정희보다는 여섯 살 아래다. 그런 박일상과의 오랜 교유와 우정은 “만주군을 탈출한 뒤 광복군에 합류하려 했을 것”이라는 박정희 발언의 진실성을 간접적으로 가늠케 해준다.

“박일상은 당시 박부잣집 아들로 통했더랬습니다. 구미 시청이 있는 형곡동이 그의 집인데, 동네 사람들은 인물이 나온다면 박일상이라고들 생각했지요. 그렇게 자부심이 크고 많이 배웠던 박일상 형님은 박정희를 무척 존경했습니다. 깍듯하게 모신 배경에는 같은 젊은이였고, 생각도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셋이 자주 어울렸고요.”

박일상은 1947년 말 구미중학교 교사로 취직하기 전후해서 박정희와 우정을 다졌다. 1950년대 군에 투신, 소령으로 예편을 한 뒤 부산에서 활동했을 때도 어울렸다. 박정희가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재직하던 무렵이다. 둘은 1963년 총선 때 다시 얽힌다. 그가 야당 공천으로 구미 국회의원에 출마해 공화당 김봉환과 대결하는 구도였다. 이를 뒤늦게 안 박정희는 이진화씨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서로 뜻을 같이했던 사이가 엇갈릴 수 없으니 당장 출마 포기를 시키고, 원하는 걸 들어준다는 뜻을 전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선산에 내려가 제가 몰고 간 중앙정보부 지프에 그분을 태운 채 메시지를 전했더니 일상이 형님이 꺼이꺼이 흐느끼시는 거예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해서 그랬던 것이죠. 이미 당 자금도 꽤 끌어다 썼기 때문에 도의상 출마 포기는 안 된다는 건데, 저도 따라서 울었죠. 대통령께 그걸 보고하니 ‘박일상의 이력서와 신원조회 서류를 갖춰놓으라’고 지시하더군요. 그건 박 대통령의 스타일입니다. 언젠가 중용하겠다는 건데, 서류를 지금도 제가 모두 보관하고 있습니다.”

박일상이 박정희 집권 때 이렇다 할 공직을 맡은 기록은 없다. 하지만 둘 사이의 우정과 신뢰는 오래 유지됐다. 만주군 출신 박정희와, 학도병을 탈출한 광복군 박일상은 가는 길이 외양만큼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그의 아들 박찬규(54·부산 명호고등학교장)씨의 최근 증언과도 일치한다. 고인은 죽을 때까지 박정희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아들에게 종종 전했다는 것이다.

광복군 장준하와 만주군 출신 백선엽

물론 ‘만주군 중위 출신의 대통령’이란 해방 직후 신생 대한민국에 썩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었다. 항일투쟁 경력이야말로 정치적 정당성이 컸다. 바람 잘 날 없었던 친일파 논란에는 이런 아픔이 묻어난다. 

그 점에서 박정희는 이런 모순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역설적인 인물이다. 2차 대전 이후 등장한 제3세계 지도자 중 박정희와 비슷한 이력을 가진 이는 없다. 유례없는 경제적 성공을 거둔 인물도 박정희가 거의 유일하다. 

“박정희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만주군 장교가 되어 우리의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눴다.”

박정희에게 퍼부어진 그런 공격은 광복군 출신 장준하로부터 나왔다. 장준하는 학도병 징집 6개월 만에 광복군에 합류해 김구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잡지 ‘사상계’를 운영했다. 1967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 지지연설을 계기로 반박정희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그건 사실에 근거를 둔 비판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공격이었다. 이진화씨가 이번에 증언을 결심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본래 이씨는 박정희가 제1군사령부 참모장(소장)이던 1958년 6월을 전후해 박정희 사람으로 활동했다. 1군 산하의 병력 30만 명에게 제공되는 부식(반찬)에서 핵심이 되는 콩나물·두부공장을 맡은 사연도 그 맥락이다. 5·16 이후 중앙정보부 부산 부책임자로 내려간 이유도 마찬가지다. 당시 “중정을 보는 여론이 좋지 않아 다른 데서 근무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런 풍토를 바꿔라”며 강권했다. 

결정적으로 그의 기여는 부산지역 밀수품을 근절한 점이다. 이순희·이진화씨 둘의 증언은 거의 기억의 물리적 한계를 넘나드는 수준이다. ‘살아있는 화석’으로 평가될 만큼 정교한 이 증언을 신뢰할 경우 청년 박정희의 삶의 ‘결정적 고비’에 숨겨진 진실 파악에 요긴해지며 진실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 때문에 20대 시절 박정희의 선택을 기회주의적이라고 비판하거나, ‘박정희=식민화된 군인’이라고 단정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가를 보여준다. 그런 그가 왜 하필 만주행을 고집했을까? 사실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생도 대부분은 만주 출신이었다. 이북 출신 약간 명을 빼고 이남 지역 출신은 박정희가 거의 유일하다. 

사범학교 출신으로 군관학교에 입학한 케이스는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이다. 그는 평양사범을 나온 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3년간 의무적으로 교단에 서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했다. 이 경우 재학 시의 장학 혜택을 현금 500원으로 환산해 반납하라는 최후통첩까지 받았다. 백선엽은 당시 은행원·교사 등의 1년 연봉이 넘는 큰돈을 학교에 낸 다음 만주행을 선택했다. 그만큼 흔치 않은 기회였다. 최근 여러 차례 만났던 백선엽은 이렇게 말했다.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를 친일파라고 합니다. 일제시대 한복판에 한창 젊은 나이였던 우리 세대 중 몇몇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배웠다면서 그걸 탓하는 모양새인데, 우리가 그렇게 배우려 했던 건 알고 보면 참 눈물 나는 과정이었습니다. 중국어·일본어·영어 등 어학과 군사지식을 배우지 않았던들 해방 이후 어떤 전문가가 남아있었을까요?”

[필자는 문화평론가이며 ‘박정희, 한국의 탄생’의 저자다.]

조 우 석

“박정희의 과거 억측, 이제는 접을 때”
‘증언 이후’에 남는 의문과 반론
의문 1 린치 사건과 혈서설은 어떤 관계? 혈서설은 조갑제의 책에서 처음 등장했다. 만주군관학교 입학 연령 제한(16~19세)을 뚫으려고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을 다짐하는 혈서 편지를 만주군관학교 측에 보냈다는 것이다. 보낸 시기는 1939년 초다. 

이걸 ‘전시하의 미담’ 기사로 다룬 ‘만주신보’ 보도가 그해 3월 31일자였다. 문제의 혈서설은 당시 문경초등학교에 근무했던 교사 유증선의 증언을 토대로 한다. 혈서설은 ‘설’에 불과하지만 정황적 증거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훗날 최고회의장 비서였던 이낙선이 정리한 1962년 자료에도 상당 부분 암시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혈서와 교무실 린치 사건은 어떤 관계일까? 둘은 당시 박정희의 삶을 설명하는 증거로 서로 보완적이다. 즉 교무실 린치 사건은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에 전혀 뜻이 없다가 돌발적으로 만주로 떠났다기보다 이전부터 준비해오던 목표를 앞당긴 계기다. 

당시 혈서가 만주지역 신문에 보도됨에 따라 특별응시 자격이 주어진다는 식의 연락을 이미 받아놓았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배수진을 친 채 응시했을 것이다. 1939년 10월 만주군 6관구사령부현지에서 치른 입학시험에서 그가 15등으로 합격했다는 사실이 만주국 공보(1940년 1월 4일자)에 실렸다. 그걸 확인한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서류를 마무리했다고 보는 게 앞뒤가 맞는다.

문제는 우리의 인식이다. ‘만주신보’ 사본을 공개한(그래서 아직 진부 논란이 없지 않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혈서 자체를 소신파 친일의 명백한 증거로 보지만, 그 자체가 억측이다. 당시 나이 많은 시골 교사 박정희로서는 입학을 위한 편법으로 대일 충성의 수사(修辭)를 발휘했다고 보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즉 제스처에 불과했다. 교사 시절의 유다른 반일성향을 염두에 두자면, 면종복배(面從腹背)의 트릭이었다. 일제 앞에 복종하는 척하며 다른 꿈을 품었던 경우다. 박정희가 두 차례에 걸쳐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을 요즘 트집 잡는 이도 있지만, 이것도 면종복배의 사례로 풀 수 있다.

의문 2 광복군 합류, 과연 가능했을까? “만일 제가 광복군과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에 계속 몰렸더라면 광복군 진영으로 탈출을 했을 것입니다”는 말은 청년 박정희의 흉중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언이 분명하다. 그러나 의문이 없지 않다. 그게 혹시 ‘해방된 조국이라는 변화된 상황에서 꾸며진 자기변명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제 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군 대열에 합류한 경우는 장준하를 비롯해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씨, 그리고 경북 구미 출신의 박정희 고향 후배 박일상 등 꽤 많지만,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광복군에 합류한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 1944년 만주계 만주군관학교 출신 두 명이 장제스 군대로 탈출한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 일본 육사에서 위탁교육을 마친 박정희가 동기생들과 함께 만주로 막 돌아왔던 1944년 5~6월의 일이다. 자대배치 직전 견습사관 훈련을 받던 참에 터진 이 사건으로 박정희 일행은 꽤나 혹독한 대접을 받아야 했다. 

또 박정희 동기생으로 같은 제8단(연대)에 소속됐던 만주군 소위 방원철도 자신의 미공개 회고록에서 “일본 패망이 뚜렷해진 당시 팔로군으로 탈출할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도 실행했던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박정희의 “광복군 진영 합류 용의” 발언의 공개로 친일파 논란이 완전히 수그러든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박정희의 복잡했던 속마음을 보여주는 증언으로 훌륭한 자료다. 그가 일제 말 상황에서 ‘식민화된 군인’이기는커녕 누구보다도 큰 심리적 불화를 겪었음을 보여주는 단서로 두고두고 음미할 만하다. 

결론은 이렇다. 일제에 맞선 당시 조선 사람의 반일·생존의 방식은 크게 보아 1)무장투쟁형 반일주의 2)실력양성파 반일주의 3)노골적인 부일 협력 등 셋으로 분류된다. 물론 수동적인 관망파가 다수였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런 통념상의 분류를 크게 뛰어넘는다. 그를 ‘면종복배형 반일주의자’로 봐야한다.



그 이전 박정희는 만주에서 시험을 치른 게 분명하고, 직후 학교에 돌아와 서류를 정리했다. 문제의 린치 사건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2~3년 뒤 역전 드라마가 뒤따랐다.

“제가 여학교 2학년이던 무렵인데, 하루는 밥하는 아주머니가 흥분한 채 말해요. ‘읍내에 일본 경찰이 쫙 깔렸다. 옛날 그 일로 박정희 선생을 잡으러 온 것 같다’는 거예요. 부랴부랴 뛰쳐 나갔더니 아주머니 말과 달리 긴 칼 찬 박정희 선생님이 저쪽에 계시잖아요? 문경에 잠시 들른 것이겠지요. 지금도 선한 게 양쪽 어깨 붉은 견장 위에 달려있는 노란 별과 붉은 띠가 둘러진 모자 정중앙에 달린 노란 색 별입니다. 왼손으로 쥔 긴 칼은 뒤쪽으로 살짝 들어 끌리지 않게 했는데, 정말 위풍당당했지요.”

박정희의 극적인 문경 귀환은 다른 증언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순희씨 증언은 더욱 상세하다. 시내를 거쳐 예전 하숙집에 간 박정희가 정좌를 한 채 방문을 활짝 열었다. 옆에는 긴 칼을 뽑아 문지방에 콱 찔러 넣었다. 대단한 위용 앞에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서슬에 놀란 파출소장과 학교 교장(가토는 당시 타교로 전근을 갔고, 다른 이가 대신 찾아왔다), 

그리고 면장 등 문경의 일본인 권력자 셋이 박정희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 달라” “우리가 잘못했다”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그들을 한참 내려다보던 박정희가 한마디를 던졌다. 

“됐다.”

그게 하이라이트이지만, 증언을 뒷받침해주는 스토리가 있다. 그로부터 꼭 20년 뒤 그는 ‘우리 선생님’을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4·19가 나던 1960년 한참 더웠던 여름 갓난아이를 등에 둘러 업은 채 당시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를 찾아갔고, 그 끔찍했던 옛일부터 회상했다.

“선생님이 그렇게 피투성이로 두드려 맞으신 채 사라졌는데, 저는 그날 그 일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석룡아, 내게는 군인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었단다. 군인이 아니면 도저히 행세할 수가 없었거든. 전부터 요시찰 인물로 찍혀 있었던 상황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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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만주로 떠난 이유는 좌파들의 주장처럼 갑자기 일본에 대해 충성심이 생겨서 간게 아니라..

정반대로 국내에서 민족주의 교육을 하다가 일본인들에게 낙인찍혀 집단 폭행당한 후 국내에서는 설자리가 없어져서 떠난 것입니다.

만주는 물론 일본이 만든 괴뢰국이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은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뒤섞여 있는 일종의 신세계 같은 공간  국내의 조선인 차별상황보다는 훨씬 나았던 겁니다.. 적어도 조선인이라고 차별받지는 않았던 상황으로 보입니다.

만주로 가 '출세'하여 자신을 차별하고 폭행했던 일본인들에게 으스대고 싶다는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 일본인에게 당했는데 되려 독립운동으로 뛰어들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에는 손기정옹을 보라고 할 수 밖에 없네요.  당시 독립의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시절 일본인으로부터의 차별을 오히려 일본체제내에서 '성공'을 통해 보상받고 싶어했던 조선인들이 오히려 압도적이었습니다.

이를 독립운동이라고 할수는 없을 지라도  친일 매국노라고 해석하는 건 정말 불공정한 자세에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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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16-08-04 23:03
   
진충보국 멸시봉공..
불체자몰살 16-08-04 23:21
   
좋은 글입니다!
페닐 16-08-05 00:03
   
압록강 건너갈땐 나뭇잎 타고 건너갔다고 하지?

솔방울로 수류탄 만들어서 독립군 때려 잡던 얘기는 안하나?....ㅉㅉㅉ
의로운자 16-08-05 00:06
   
ㅋㅋㅋㅋㅋ훗날 죽기싫어서 하는 궤변을 혹시 믿으시는겁니까?
자기한일을 왜곡해서 말하는데요 ..세뇌는 정말 무섭습니다.
우리나라가 세뇌정치에서 벗어난게 정말 다행이네요
Mandara 16-08-05 00:0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본왕 암살하려고 일본군에 자진입대한거라고 안하는게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을 지경...유전자가 남북이 같다는걸 이리 과학적으로 증명을 하네....뭐 그래도 나뭇잎탓다고 하는것보단 현실적이게 웃기긴 함...ㅋㅋㅋㅋ근대 빨갱이짓한건 어찌 포장할꼬?ㅠ
오자서 16-08-05 03:17
   
동아시아 게시판에 왜 다카키글을 적는건지 모르겠네요.
만주로 간 이유라. 뭐 있겠습니까? 일본장교가 되기위해서였죠.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는 좌익이였지만 지식인이였고 다카키가 존경하던 인물이였지만 그런형의 만주행 만류에도 다카키는 만주로 갔습니다.

가서 일본군인이되었습니다. 혈서까지 썼죠. 아주 멋진사람입니다. 해방후에는 남로당이라는 좌익활동도 했다가 밀고한후 살아남죠. 아주명이 길죠.

쿠데타로 집권한후에도 다카키의 일본사랑은 남달랐습니다. 만주에서 배운경험이있으니 일본을 존경하는것은 당연하겠죠.
덕분에 졸속으로 한일협정맺어 배상금타먹어 이후 일본에게 아무런 배상요구도 할 명분을 없애버렸드랬죠.
유신이란것도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떠서 부른거고 뭐 아무튼 그랬습니다.

잘한부분도 있겠죠. 그런부분을 부정하고싶진않습니다.(뭐 그런부분도 일본에 배상받고 미국에 원조받고 노동자굴리고 독일로 광부간호사보내고 월남파병하여 달라모으고 뭐 국민들 피와땀이 적지않은데 그런부분은 쏙빼고 당시는 독재라 언론은 맨날 미화만 하고 칭송했으니 좋게 보일수도있겠네요.)

하지만 친일을 미화한다는것은 있을수없는일입니다.
객관자 16-08-05 08:51
   
일제시대 당시에 교사는 굉장히 좋은 직업이었습니다. 

일제의 조선 농업화 정책에 따라 조선 국민의 삶은 전근대 사회때의 농경사회를 벗어나질 못했죠..  대부분의 국민들은 글자도 제대로 배우질 못한 문맹상태에서 농사를 지으며 그냥그냥 먹고 사는 게 천명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이 중에서 집안에 어떤 마인드(?)가 있었던 소수의 사람만 글자를 배우고 학문을 배웠으며 당대 조선인들이 가질수 있었던 최고의 직업이라면 하급 공무원-조선인은 고위직 못갑니다 - 교사와 동아 조선 기자 정도였죠.. 

박정희가 그저 '친일'을 목적으로 해서 만주로 떠났다는 좌파분들의 주장은 항상 뭔가 앞뒤가 안맞는다는 느낌 있어왔습니다. 그저 친일이 목적이라면 만주로 안갑니다.  일제치하 조선에서 더 친일할수 있어요.  그것도 당대 최고의 직업이었던 교사를 버리고 간다는 게 허황되게 들렸죠.

그러다 이 기사를 접한겁니다.  모든 퍼즐처럼 풀리더군요. 

박정희는 최고의 직장을 버린게 아니고 쫓겨난겁니다.  민족주의적 감상(!)에 사로잡혀 눈앞의 어린애들에게 반쯤은 민족주의와 반쯤은 우월감(?)에 사로잡혀 소시민적으로 몰래 우리의 조국이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라고 했다가 일본인들에게 걸려서 집단폭행을 당하고 쫓겨났다.
막상 쫓겨 나가서 백수가 되어보니  할일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다 어린시절 꿈인 군인이 생각난거죠.
조사해보니 나이가 미세하게 걸렸고  이 정도는 혹시 아부(?) 잘떨면 받아주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모순적이라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흔한 현상입니다.  과거 민주화운동시절 민주화운동하던 분들이 군대에서는 의외로 적응(?) 잘하는 경우 많았습니다.  학생때는 민주주의가 어떻니 사회주의가 어떻니 하다가 막상 군대가서는 국가(?)에 충성하자는 구호를 어색하지 않게 했던거죠..

어차피 국가에 충성하겠습니다 그 시점에서 거부한다고 민주주의 조국독립이 오는 것도 아니고 개인의 측면에서 어려운게 아니었던 거죠..

이 기사를 가져온 이유는 그 막혔던 부분을 풀어주는 증언이라서 가져온겁니다.  저와 비슷한 의문을 가졌을 분이 많을 거 같아서요.
흐아앙 16-08-05 10:35
   
응 소설
     
객관자 16-08-05 11:05
   
소설처럼 보이는 진실이지요.  증언자가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바늘천사 16-08-05 12:54
   
이거 바보아닌가? 아니면 초딩?
아니 증언자가 존재한다고 해서 모두 진실?
그 증언의 진실성을 따져 봐야지.
글구 그 증언자들의 객관성은 누가 뭘로 보장할건데?
이미 다까끼에 대한 쉴드는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졌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이미 허구임이 드러났다.
도대체 이따위 글을 일베저장소가 아닌 여기다 올린 이유가 뭘까?
               
객관자 16-08-05 12:55
   
다른 박정희 이승만에 불리한 증언을 했던 경우에도 증언의 진실성 따지신거 맞나요?

증언들이 특별히 거짓말을 해야하는 근거가 없는 이상 어지간 하면 팩트로 받아드리셨던거 같은데요?

이 증언이 박정희에 유리한게 맞습니다만.. 이 증언을 하신분들이 굳이 거짓말을 했다는 근거는 뭔가요?

이 증언 이전에도 박정희가 교장과의 마찰로 인해 떠났다는 건 알려진 얘기였습니다.  교장을 두들겨 팼다라고 들었었죠.  이 증언에서는 반대로 교장측 (일본인들)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했다고 나오네요. 때렸건 맞았건 싸움질 한게 팩트가 맞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왜 교장측과 박정희가 갈등을 빚었는가가 확실하게 나오는 게 추가된것일뿐입니다.
                    
고독한늑대 16-08-05 13:50
   
이걸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군요 ㅋㅋㅋ
파파이스에서 이런 소설이 돌아다닌다고 예전에 다 파해쳐서 철저하게 깨던데..
이게 가생이까지 유포 되어서 보게 되는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경부대로 16-08-06 14:45
   
파파이스는 믿을만곳 되는건가요??ㅋㅋㅋㅋㅋㅋ

그냥 믿고 싶은곳 믿으세요 괜히 파파이스는 진짜 믿을만곳이라고 말하지 마시고 ㅋㅋ
                    
바늘천사 16-08-05 15:30
   
그렇게 애국심이 강했던 다까끼라면 왜 나이 때문에 떨어진 만주군관학교를 천황에게 목숨으로 충성하겠다는 혈서까지 써 가며 들어가려고 기를 씁니까?

이러한 당시 신문기사와 그 당시 생도시절의 박정희의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증언한 같은 생도들의 증언 등은 팩트로 받아들이기 힘든가요?

도대체 이름도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고 그렇게 기를 쓰고 일왕 빨아가면서 일본 사관학교까지 들어가 만주의 우리 독립군을 때려잡는 간도특설대 장교까지 해쳐먹으면서 당신같이 몇몇 측근들이 빨아주는 쉴드쳐주고 싶습니까? 그러고도 당신 닉네임인 '객관자'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내가 당신과 같은 생각이라면 그냥 속으로망 아닥하고 있겠네요.
                         
객관자 16-08-06 09:34
   
당시 천황에 충성한다는 맹세해야하는 곳이 만주군관학교 뿐이었나요?  오히려 만주군관학교에서 충성맹세하는 대상은 형식적으로라도 일본천황은 아니었죠.  만주국 황제 푸이였지.

조선에 산다는 자체가 일본에 대한 매일 충성맹세하던 곳 아닌가요? 
충성맹세는 학교가도 했고 회사가도 했고 그냥 행사가면 항상하던 그런것이었습니다.

뭔가 큰 착각속에 사시는 거 같아요..  당시 조선은 독립운동가의 눈으로 보면 일본에 점령되어서 오랜기간 그 통치하에 살아온 '적진' 그 자체였던 곳입니다.  그만큼 일본에 대한 충성맹세 복종없이 살기 어려운 시대였어요.

당시 해외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심하면 국내에 살았던 사람은 모두 친일파다 발언까지 했었던 시대입니다. 

그 시대에 만주군관학교 진학이란 어차피 국내에 있어도 매일해야하는 충성맹세 똑같이 하고 (혹은 조금 덜하고) 외국으로 가서 선진문물을 배워오는 개념이었어요. 

객관이라는 단어뜻을 정말로 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추신 : 물론 왜 가족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안했느냐?라고 하면 할말없습니다.
       
        그런데 보복당할게 뻔한 독립운동의 길은 정말 지난하고 힘든일이었죠.
          
jmin87 16-08-06 14:36
   
미화하고 각색한 소설을 동아게 까지 배설해 놓는 이유가 뭐죠 일1베 회원님..?
다까끼가 비밀독립군이었다고 증언했다는내용도 날조소설임이 밝혀졌고 국가에서
발행한 육본 창군전사 라는 자료조차 그에 관한 내용은 소설을 쓴게 드러난 마당에 누가 그랬더라...
아주 꼴값을 떨어요..다까끼에 관한 자료는 서슬이 시퍼렇던 박정권 때 측근이거나 잘 보이기 위한 소설이 대부분이고 증언이라는것도 속속 거짓이 탄로나는 마당에 신빙성도 없는 소설을 여기다가 싸지르는 이유가 뭡니까..혈서로 지원한 유일한 조선인 다까끼 그렇게 자랑스러우면 당신 본진인 일1베에나 올려요 소설가님..님 일1베인거 커밍아웃 했잖아요..

당신 지역 편가르기 하고 패드립 하다 G 먹고 다시 돌아 와서 얼굴에 아예 철판 두르고 하루종일 날조소설 쓰는게 하루일과인데 계속 이딴식으로 살지 말아요..이건 독립운동가들을 욕 보이는 일이고 사람이라면 할 짓이 아닙니다.
무라드 16-08-05 10:42
   
제대로 된 놈이면 독립군에 투신했겠지 왠 만주군

갖다 붙이는것도 정도껏 하자 좀

청와대에서 일본군 장교복에 칼차고 술먹던 넘이 뭔 애국자 행세야
문삼이 16-08-05 11:15
   
잘정리된 블로그가 있어 올립니다.
일본군복이 아주 잘 어울리는 박정희네요....

http://blog.naver.com/saskian/40146303206
웋호홓 16-08-05 11:35
   
아주 바람직하게 소설로 멋있게 포장되어있는 글 같습니다.

말도안되는 글
구름위하늘 16-08-05 12:19
   
저는 박정희를 좋게 보는 사람이지만,
위의 내용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으로 봅니다.
오스카 16-08-05 12:47
   
기분좋은 날이면 청와대에서 일본군복을 차려입고 말에 올라 '요시!!'를 외치던
그분에 대한 소설입니까?
     
고독한늑대 16-08-05 13:51
   
만주군 출신 일본인 동료들의 인터뷰까지 다 있는데..
이렇게 소설 쓰면 안쪽팔리나 몰라요 ㅋㅋㅋㅋㅋ
고독한늑대 16-08-05 13:52
   
그렇게 비밀독립군으로 활동한 사람이 해방되고 자신이 군사독재할 시절에 일본인과 친일파들에게 그렇게 훈장을 남발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태강즉절 16-08-05 14:44
   
아!~~~~ 몰랐네!..
근데..왜 청기와에서 일본놈 군복을 종종 입고 일본 군가를 즐겨 불렀을까?..
지 밑 매국 동료 출신들과 왜놈 말로 대화했고?.
왜 ..대본영 작전참모출신 세이죠인가가  방한하면..그앞에서 센베이 센베이 했을까?

인생 자체가 다중이었던거야?
막걸리 먹는척 언플하곤..뒤에선 양주나 때리고..
검소한척 하곤..스위스로 비자금이나 빼돌리고?..
반공인척하면서..남로당이었고?.
마눌 죽어 독신으로 처량 코스프레하면서 ...채홍사 동원해 지 딸같은 여배우들 작살내고?..

너 박통 실제로 못봤지?..못본것들이 어서 처들어갖곤..꼭 개뿔도 아닌걸 우상화 하더만..ㅋㅋㅋ
태강즉절 16-08-05 14:47
   
몇년 더 가면..
소년 박이 윤봉길 도시락 폭탄도 제조했다고 나오겠네!!!!...김구 밀명으로...ㅋㅋㅋㅋ
길잃은농부 16-08-05 14:49
   
역사는 모름지기 좋은일이든 나쁜일이든 사실을 적어놓고 후세가 평가하게 만들어주는게 역사다..

선대가 기록하지 못한 선대의 자료들 역시 후대들로서 당연히 기록 해야될 의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는 말그대로 종북이나 좌빨이나 수꼴이나 전부 한 인물에 대한 평가질만 하려드는

돼먹지못한 족속들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있는그대로 생존자 증언 사실 내용만 그대로 기록해라..

주제넘게 평가질 하려들지말고.. 지들이 뭔 예수라도 돼는냥 손바닥에 올려놓고 평가질이냐?

이래놓고 주재넘게 후손들 가깝게는 지 자식들에게 부끄러움을 못느끼는 개돼지인생밖에 더있겟냐?
도비띵 16-08-05 16:28
   
김일성이가 북한인민들 세뇌시키던 책자에서 이름만 바꾼건가요???
호태왕담덕 16-08-05 17:21
   
흠 요즘 이상한 주장과 논리로 무장한 인사들이 자꾸 기웃거리내....
타샤 16-08-05 17:43
   
다까끼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군을 때려 잡으셨고,
박정희가 되어서 빨갱이들을 쳐부수기 위해 빨갱이가 되셨고..
사단장이 되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 때려 부순 거룩하신 분이시다.

니들이 뭘 알아?


참 마지막엔 저격을 모면하기 위해 일부러 저격 당하셨다능...

그의 따님도 봐바...
무상복지를 지켜내기 위해 무상 복지를 때려 부수고... 증세 무복지를 관철하시잖아...
한국어를 지키기 위해 한국어를 파괴하기도 하고...
     
바늘천사 16-08-06 13:29
   
영광스런 자신의 심적 조국인 일본의 역사를 위해 조선의 역사교과서도 새롭게 다시 쓰시고...
ㅋㅋㅋ
엄청 재미지내요.
싸나이 16-08-05 18:53
   
지랄이 풍년이네..
즈믄다솜 16-08-05 19:11
   
다가키 마사오. 이 이름 하나로 쓰레긴거다. 70년지나 이시기에 내용 하나하나가 소설같은 이야기를 읇었다고 믿는다면 그게 등신이지.! 다가키마사오 이 이름과 사진이 일본에 지금도 공신 목록 한자리에 떡하니 박혀있는 이유는 뭘까? 최악의 민족 반역자이자.. 최초 빨갱이였고 지 한목숨 살겠다고 같은 빨갱이였던 동료들 죄다 팔고는 목숨 연명한 쓰레기가 박정희란 인물이다. 아무리 희석하려해도 한번 찌든 똥내음이 어딜 가것냐.!친일 사관 망령에 홀리지마라.
     
떡하나 16-08-06 22:33
   
다까끼 마사오  로도 부족해서
한번더 창씨개명 합니다.
전형적인 일본놈 인척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의 마지막 일본이름입니다.

천황에게 혈서로 개가 되어 충성을 다하겠다고 편지를 보내고
이승만에게는 남조선노동당 동지들의 인명부를 넘기고 자리를 보장받고
이승만이 쫓겨나자 그 자리를 노리고 쿠데타를 하고
28년간 독재권력을 누려오며
여고생 여대생 여군 간호사들을 매일 궁정동 안가로 불러들여
밤시중을 들게하던 자임.
화려한외출 16-08-05 21:44
   
캐면 캘수록 구린일만 나오네요 허허
아롱홀로 16-08-06 00:44
   
박정희 욕하지만 열매를 누리는 건 결국 한국 사람.... 김일성과 박정희라는 두가지 선택중에 옳은 선택은???? 이민이라면 떠나세요
     
떡하나 16-08-06 21:40
   
허허 어이없는 친구네
자네가 빨리 천국으로 가는게 애국일것 같네.
rozenia 16-08-06 04:32
   
아롱홀로님 그건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양박의 선택에서 우리는 잘살고 북한은 못사니 좋은 선택이다? 그런논리로는 발전이 없는것이고 계속 잘못된 사회풍조와 세습을 만드는겁니다. 그런게 쌓여서 지금 대한민국이 그 이상의 성장을 못하고 부패로 만연한것이구요. 그렇게 어설프게 " 그래도 재보다는 잘했자나, 어쩔수없었겠지, 둘중에 그게 낫자나" 같은 논리로 안일하게 50년 넘게 살아오니까 나라팔아먹은 애들도 당당하게 얼굴들고 다니고 일본과 중국이 번갈아가며 싸다구를 때려대도 찍소리 못하는 상황이 온겁니다.

아주 적절한 비유로, 이명박대통령의 자서전을 보고 사람들이 " 아! 정말 대단히 훌륭하신 대통령님 자랑스럽구나~~" 합니까? 실제로 자서전에는 수백명의 증인과 증언, 자료들이 즐비합니다. 그 자료는 중세도 아닌 현대 오늘 대한민국 헌법의 판결을 거스리지 않고 정부의 자료조차도 수정되서 인용되며 써진 책입니다.

국민중 심지어 이명박대통령을 지지한다던 분들도 그 자서전의 진실성을 반도 쳐주지 않습니다.

하물로 증거와 현대적 사고와 논리가 전무했던 그시절의 증인과 증언들이 확인없이 무조건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인게 당연합니다. 더불어, 그 증인과 증언들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님이 말씀하셨듯이 사실이 뒤집어지지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못된 살인자아들이라도 내아들이라며 아들숨기고 거짓말해주는 부모처럼. 진짜 안타깝고 어찌어찌한 사연이 있다한들 바뀌지 않는 기록과 역사가 있는겁니다. 공개된 미국 CIA문서와 일본 외무성에서 조차 서류상으로 수없이 박정희대통령이 친일인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행적을 했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성향이 그러했다는 이야기이고 그것이 국내외 명확한 기록과 사건으로 증명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님이 하는 말은 그저 밑도 끝도없이 귀하니까 내아들 뭐라하지 말아요. 못됐든 그동안 엇쨋건 욕듣는거 싫으니까 내아들인데? 그런 코앞만 보고 자식 망치는 모양새나 다를바 없습니다. 민주주의국가에서 대통령은 비판받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걸 모르고 시작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역사에 그 비판이 듣기 싫어서 탄압하고 공작하고 여론조작 유도한 시대가 한국역사의 대다수지만 그게 옳고 당연하게 아니란 뜻입니다.

욕 먹을건 먹고 인정하고 바꿀려고 하고 다음세대에 교훈을 남겨야지요. 독일의 예가 있지않습니까? 성장과 발전은 외형과 내형에서 균형있게 잘못한것을 숨기거나 포장하면 할 수록 추악해지는 법이고 윗사람일수록 권력과 힘을 지닌자리의 사람일수록 작은 실수도에도 반성해야 집단과 체제가 청렴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저건 소설입니다. 님이 증언 증인하지만 위안부할머니들 세대 조차도 이제 정말 몇분 안남아있는 이시절에 일제가 통으로 조작했던 한국의 역사가 아직도 남아 숨쉬는 이시대에 박대통령의 증거도 외교 혹은 공적문서도 아닌 증언이 얼마나 신뢰도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만수길 16-08-06 06:34
   
이런분들이 계시니까 지 아버지 우상화에 국민 혈세를 쏟아붓고
이런분들 만들고자 교과서 국정화 한다는 겁니다
2016년인데도 가능하다는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아이구두야 16-08-06 07:21
   
안타깝지만 20년 뒤까지 잘 먹힐것 같아요
그 때쯤부터 슬슬 사그라들겠지만 그래도 20년은 더 갈것 같고
한 40년은 우려먹을 수 있을것 같아요
나무아미타 16-08-06 07:47
   
스네이크박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
스파게티 16-08-06 09:46
   
개극혐  ㅉㅉ  개쓰레기 나라로 변하는거같네
9걸 16-08-06 12:30
   
뉘 내용이
소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1940년 2월 문경 불온교사로 파면 당합니다
일본측 자료에서
인터넷에서도 찾아보면 나옴 ~!
보보스 16-08-06 15:42
   
우당 이회영 선생의 전기를 보는것같이 착각을 일으키네요....
객관자님은 오늘부로 무시해야겠네요....독립운동가라는 말을 함부로 박정희에게 쓰다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박정희는 반민족행위자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말아야 합니다...감히 그런자에게 독립운동가와 비교하고 독립운동가라고 하다니 ....김일성, 김정일과 견져보아도 뒤지지않는 박정희에게 그런 미화를 하다니...
오늘부로 객관자는 무시하겠습니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사람으로요....
엘비스 16-08-06 17:35
   
이글을 보고 죽은 박정희가 벌떡일어나 이렇게 이야기할것같네요.... "  미친놈아 그런적 없다고 ~!!"
     
동방불패 16-08-07 07:38
   
ㅋㅋㅋ
limfor 16-08-06 19:32
   
박정희 대통의 니뽄도에 주거간 독립군과 포로로잡혀 731부대의 마루타로 실험당한 독립군 및조선족에게 심심한 소금을 드립니다.
패닉호랭이 16-08-06 19:34
   
이승만이랑 박정희는 절대로 커버치면 안되는 인물. 커버치는 사람은 출신성분(!?)이 의심됩니다.
떡하나 16-08-06 21:39
   
역사책을 왜곡하더니

박정희 도 옥립유공자 만들고 싶은건가?

박정희는 뼛속까지 친일파다

다까끼 마사오 로 개명하였으나

이름에서 조선인의 냄새가 나서

다시한번 일본이름을 바꾼게

오카모토 미노루.

친일파
만주군 장교로 독립군들 때려 잡으며 전과를 올림

해방되고 죽을 줄 알았는데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좋은 세상이었음.
더 큰 권력을 잡기위해 남조선노동당에서 활약하다 이승만에게 발각되자
남조선 노동당의 동지들의 명부를 가지고 이승만에게 팔아넘기고 자신의 영달을 구함
6.25 발발
전쟁통에 군사지휘관이 필요했음.

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타도시키고 4.19 민주혁명이 달성되고 민주주의를 시작하려하자
바로 기회다

다음해 5.16일 군사 쿠데타 일으켜
그후로 28년간 철권통치 독재를 하다
여대생 벗겨먹고 술마시다
친구 김재규에게 총맞아 뒈짐.

무슨 미화가 필요하냐.
떡하나 16-08-06 22:39
   
글쓴이가 미쳤네.
술만 먹으면 일본 엔까를 불러제끼며
청와대에서도 혼자 일본군 장교복 입으며 뿌듯해 했단 증언들이 있는데

무슨 독립투사 ...

정신이 외출했냐?

왜곡도 정도껏 해야지.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 잡고 대통령이 되서

일본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국교 수립을 다시하자며

 일본에 가서 일본 의회에서 연설한 유명한 일화가 있지.
90도로 절하며
싸무라이가 뭘 알겠습니까.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일본 의원들의 박수를 받고 돌아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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