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를 잘 아는 것, 그것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고 한국인이 되기 위한 시민적 조건인듯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은 일제강점기때 형성된 방어적 민족주의이고 이것이 2015년까지 시대적 압박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걸 좋게 표현한게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고 하지만 (정확히 이 문장은 다른 곳에서 기원했지만) 독립운동가 신채호가 떠들었다고 하기에 이게 타당한 문장인가를 놓고 의식적으로 비판해본 적은 없을 겁니다.
일단 '미래'라는 것을 놓고 역사와 비역사는 갈립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일상 생활을 둘러보면 영어공부에 바쁘고 스펙을 쌓아야 하고 기업들도 글로벌이니 뭐니 해서 전 지구적 마케팅, 여가 생활에 도움이 될 영화, 그리고 음악, 수다를 나누기 위한 카페, 그 카페인테리어, 메뉴판 전부 '역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웹툰이며 온라인게임이며 역사하고 관련없습니다. Kpop음악은 서양화성학과 미국팝시장을 얼마나 잘 듣느냐의 문제일 뿐이에요. 평균 한국인들이 접하는 생활공간마저도 역사를 전혀 몰라도 미래를 논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도 이미 서양에서 축적된 학문을 얼마나 쌓아올리냐정도로 판매수익이 되거나 '글로벌인재'가 됩니다. 여기서 '역사'는 왜 등장해야 할까요? IT업체에 나갈려면 회로이론, 프로그래밍언어를 배우지 한국철학사를 배우지는 않습니다. 전혀 몰라도 됩니다. 바리스타자격증을 따는데 한국사자격증은 필요가 없어요. 일상과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 기업들이 으레 인재라고 하니까 역사를 잘 아는 것도 유용하다라는 인식이 박혀 있는데 이 기업인사담당관이나 CEO, 오너들도 왜 역사가 필요한지 생각을 깊게 해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도발적인 요청이 나오지요. 현대사회, 미래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역사같은건 전혀 필요없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로부터의 압박이 한국인들을 '역사강박증'으로 몰고 갔다라고 할 수 있어요. 윤리적으로 옳니 그르니를 떠나서 진짜 현실에서 얼마나 잘 먹고 살 수 있는가를 논하는 것, 과학기술강국이 될 수 있는 것을 분석한다면야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역사는 탈락됩니다. 과거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과거가 주는 압박감도 의미가 없어요. 여기까지는 쉽습니다. 도리어 역사로부터 해방을 떠들어 주는 것 같아요. 그러나 진짜 압박감은 역사가 종말한 뒤입니다.
한국, 한국인이 당연하게 있기 위한 요청, 윤리, 당위를 역사에서 찾는게 아니라 비역사에서 찾는 수순으로 갑니다. 일본으로 예를 들어보죠.
지금까지는 일본을 놓고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으니 일본이 싫다라고 말을 할 수는 있어도 이러한 헛소리는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간략하게 말해서 역사없이도 '나는 한국인이니까 일본을 부정하겠다'라고 떠들 수 있는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닥 찬동할 사람들이 많지 않지요. 이미 글로벌화가 진행된 세계경제질서가 있는데 이러한 소리는 이상하지 않나? 그렇죠. 이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겁니다. 한국인들은 너무나 쉽게 일본을 상대하면서 '역사'에만 의존해왔습니다. 마치 그래야 하는 식으로 집단적인 관념이 있었고 이것만이 정답인듯 말이지요.
그래서 근현대사 그거 2~3시간이면 죄다 암기할 수준을 놓고 일본아 반성해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진짜 했어야 하는건 역사지식은 지식일 뿐이고 '너는 얼마나 역사 없이도 일본을 부정하고 있는가' 입니다. 물론 이래야 할 이유는 없어요. '미래는 세계정부로 통합될 것이고 이러한 과정에 있다'라고 인지하는 사람이라면야 일본을 부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강요하지 않아요.
역사가 아닌 자기가 소비할 수 있는 영역에서 일본을 의식적으로 극복하고 있는가, 그것도 비역사적으로 할 수 있는가 문제일 뿐이에요. 예를 들어서 일본애니메이션을 소비하면서 난 근현대사, 위안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라는 변명은 필요가 없습니다. 일본애니를 모에, 츤데레, 오타쿠(파생어 덕후, 덕질) 라는 식의 일본식 감수성이나 유통시키면서 소비하고 희희낙낙거리는 소비자들, 생산자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 했어야 하는건 단순히 일본문화를 즐긴다라는것 자체에서 나오는 비역사적 압박감입니다. 역사로 도피할 이유도 없이 단순히 외국/일본문화를 수입, 소비하는 와중에서 '한국인이라는 자체만으로' 했어야 하는 압박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라면 일본식 용어부터 안 쓰고 순화할 것이며 소비의 수준을 더욱 끌어올렸을 겁니다. 일본인들보다 더욱 세밀화된 요소를 분할하면서 '오타쿠보다 더 오타쿠스럽게', 그리고 서브컬쳐는 이렇게 소비하는 것이다라고 세계에 떠들 수 있을 정도로 전문적으로 해야 하는 겁니다.
학술쪽도 다르지 않습니다. 일본법학을 교묘하게 베꼈던 수준에서 이제 한글표기가 정상화되고 일본식 표현을 제거해가는 와중에 있습니다. 수학에서 쓰이던 개집합, 콤팩트집합, 폐집합라는 용어도 이제서야 열린집합, 긴밀집합, 옹골집합, 닫힌집합이라는 식으로 바꿔가는 중입니다.
역사가 없어도 일본을 극복할 정신이 필요하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본문화, 일본상품을 소비하면서도 역사로 도피하면서 그곳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나는 근현대사, 위안부할머니에 동조하고 일본을 규탄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일본만화를 소비해도 괜찮아'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런 역사이야기는 현대사회, 미래에는 전혀 쓸모없는겁니다. 일본만화를 소비해도 되는 이유를 '지금한국' 에서 구해야 하는게 진짜 논변이 될 수 있어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이건 일단 차치하고 지금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보시죠. 물론 일본만 대상이 되는건 아닙니다.
일본제상품이 유통되고 일본문화는 한국문화의 일부에서 지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거부하든 하지 않든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주고 있으며 표면에서는 한국문화로서 치환되지만 그 심층에는 일본과의 관련성이 적지 않습니다. 라이트노벨, 일러스트레이션, 보컬로이드 전부 일본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일본문학서적이 한국서점가에서 잘 진열되어, 그것도 하나의 목차와 코너로서 제시됩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국적을 따지는건 우습지 않은가?' 물론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역사는 끝났다라는것을 인지한채 역사에 목을 매서는 안 될 거니다. 지금 같은 시대, 그리고 앞으로의 새로운 시대도 마찬가지일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종말한 이 시대에 와서 비역사가 주는 진짜 압박감이 시작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과는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단지 일본이기 때문에, '지금' 한국과 일본의 관계성 그 자체 하나만으로 일본을 넘을 수 있는 정신과 논리, 의지가 필요한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진짜로 싸워야 할 전쟁터는 여기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꾸 이미 닫혀버린 과거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도 전쟁터이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거기를 전쟁터로 오인해서 진짜 자기가 싸워야 할 곳에서 못 싸우거나 면죄부라도 얻은 듯 행동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굳이 예를 일본으로 들었고, 그게 쉬웠을 뿐입니다. 일본만이 아니라 거리를 지나치면서 느끼는 수많은 알파벳간판들. 한글날 한글이 우수한지 아닌지는 아는건 상관없습니다. 한글날 같은건 없어도 한글을 써야 하는 당위감이 더 중요한 겁니다.
그렇다면 역사를 어떻게 등장시켜야 하고 지금과는 다른 위상이 필요한가 논해야 할 차례입니다. 어차피 지금 이대로 시대가 흘러가면 역사학은 고고학과 동급으로 치부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