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스님은 《회남자》란 책의 주석에 있는
“동이에는 아홉 종족이 있다.”는 기록도 찾아냈다. 이에 멈추지 않고 불교 승려면서도 우리에게 바른
역사를 전하고자 온갖 유교 경전을 비롯한 온갖 책을 다 뒤졌다.
《논어(論語)》'정의(正義)'편에 있는 “9이는 현도, 낙랑(樂浪),
고(구)려[高麗], 만식(滿飾), 부유(鳧臾), 소가(素家), 동도(東屠), 왜인(倭人), 천비(天鄙)”라는 기사도 찾아냈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 신라 진평왕대의 승려 안홍이 쓴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까지 찾아내 우리는 이 책의 이름이라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신라 중심으로
써 놓은 이 책에는 “구한(九韓)은 일본(日本), 중화(中華), 오월(吳越), 탁라, 응유(鷹遊), 말갈(靺鞨), 단국(丹國), 여진(女眞),
예맥(穢貊)”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었나보다.
이렇게 다 찾아내 남겼기에 《삼국유사》는 더욱 값진 것이다. 이 책이 있기에 우리는 《삼국사기》에
적혀 있지 않았던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일연스님은 “명주(溟州)는 옛 예국(穢國)의 땅이었다.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도장을 얻어 나라에 바쳤다.”는 《삼국사기》의 기사도
전한다.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의 보조 기록이 아닌 완전한 역사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그에 만족하지 않고 옛 우수주(牛首州)인
춘주(春州), 지금의 삭주(朔州), 혹은 평양성(平壤城)이 옛 맥국(貊國)이라는 설도 빠짐없이 전한다.
이부(二府)
《전한서(前漢書)》는
“B.C.82년에 두개의 외부(外府)를 두었다.”고 한다. 조선(朝鮮)의 옛 땅인 평나(平那)와 현도군(玄菟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臨屯)·낙랑(樂浪) 등 두 군(郡)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설치한 것을 말한다.
《조선전(朝鮮傳)》에는 진번(眞蕃)·현토·임둔(臨屯)·낙랑(樂浪) 등 네 군(郡)의 이름이 적혀있다. 아마도 진번을 평나라고도 불렀던 듯싶다.
72국(七十二國)
《통전(通典)》에는 “조선의 유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70여개 나라가 되었다. 대개 한 나라당 사방 100리의 영역을 가졌다.”고 적혀 있다. 《후한서(後漢書)》는 “서한(西漢)은
조선의 옛 지역에 처음에는 4군을 두었다가 뒤에는 2부를 두었다. 지방행정자치법이 계속 개정되고 복잡해 지니까 그냥 78국으로 나눴다. 세제상의
문제를 고려해서 각각 1만호를 기준으로 나눴다.”고 한다. 서쪽 마한은 54개, 동쪽 진한은 12개, 남쪽 변한도 12개의 작은 나라(國)가
그것이다.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55
《논어(論語)》'정의(正義)'편에 있는 “9이는 현도, 낙랑(樂浪), 고(구)려[高麗], 만식(滿飾), 부유(鳧臾), 소가(素家), 동도(東屠), 왜인(倭人), 천비(天鄙)”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구이(九夷)에 현도, 낙랑, 고려가 보이는 대목입니다.
논어는 대략 전한 한무제 시절쯤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런 논어에 현도,낙랑,고려,부유, 왜인 등 우리가 알만한 단어들이 보입니다.
여태껏 현도와 낙랑은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붙인 한사군의 지명정도로 생각했는데..
구이에 현도와 낙랑이 보인다..??
그럼 현도군와 낙랑군의 조선 유민들을 구이로 부른것일까요?
과연 현도와 낙랑은 한무제가 한사군 설치 때 처음으로 지어낸 지명일까요?
아니면, 고조선 때 이미 현도와 낙랑이라는 지명, 혹은 부족명이 존재했던 것일까요?
훗날 고조선의 터전을 계승한 고구려는 널리 알려지다시피 5부족 연맹체였습니다.
계루부, 소노부 등 다섯 부족이 존재했죠.
더 먼 훗날.. 여진족의 경우도 건주여진 5부족, 해서여진 4부족, 야인여진 4부족.. 총 13부족이 존재했습니다.
여기서 부족이란.. 사실상 지역을 나누고 할거하는 세력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여기서 부족장은 뭐랄까..
춘추전국시대의 춘추5패나 전국7웅 같은 세력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듭니다. 왕(=천자)국의 제후죠..
춘추전국시대의 공작(제환공, 진문공 같은) 유럽으로 치면 공국의 공작급이랄까요..
(**때론 왕이나 칸이 존재하지 않고, 부족장급, 제후들만 존재하는 상황.
즉 전체적인 민족적 동질감이나 세계관의 동질감은 있는데, 그 세계의 주인인 왕이나 칸, 천자가 궐석인 상황도 있을 수 있죠. 중앙권력의 몰락에 따른 군웅할거나 전국시대와 같은 열국시대랄까..)
초창기 왕권이 약한 시절 이들 부족장들이 모여 선거로 왕을 뽑기도 했으니,
이는 또 몽골초원의 칸을 뽑고 옹립하는 쿠릴타이 회의 같은게 아닐까요..
(신라나 백제도 화백회의와 정사암회의로 그런 촌장(호족)들이나 귀족의 입김이 작용했죠)
즉, 제가 생각하는 가설은..
현도와 낙랑, 고려 등등 은 고조선의 제후국이자 일종의 부족이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고조선이 망하면서, 그 현도부족과 낙랑부족 거주지에 한사군 현도군, 낙랑군이 설치되었고..
여기서 일부 고조선 낙랑부족의 유민들이 남하해서 낙랑국을 세웠다는 가설이지요..
그리되면 한사군의 낙랑군과
훗날 신라를 침공하기도 했던 한반도의 낙랑이 다른 세력, 다른 위치라도 충분히 납득이 가지요.
현도(玄菟)의 경우 한문으로 보면 검을 현 + 호랑이 도 혹은 토끼 토인데..
검은 호랑이 혹은 검은 토끼부족..?
낙랑(樂浪)은 즐거울 낙, 물결 랑.. 즐거운 물결? 즐거운 파도.. 편안한 파도?
뭔가 해안선에 위치해서 바다의 풍랑을 가라앉히길 바라는 느낌의 작명센스네요.
그런 의미에서 한사군의 성립 이후 고조선 낙랑부족의 유민들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흘러들어 나라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왠지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했을것 같은 해양세력의 느낌)
이렇게 되면 고구려가 대무신왕 때 낙랑국을 미천왕 때 낙랑군을 멸망시키는 중복의 문제도 해결되고,
요서의 낙랑과 한반도의 낙랑 문제가 손쉽게 풀리지요.
그리고 덤으로 삼한의 78국 이야기가 재밌네요. 각 국은 1만호로 나눠진다고 했으니...
삼한의 인구는 78만호라는 소리인데.. 78만 X 5명이면.. 390만명.. 상당한 인구입니다...
저러한 농경시절엔 1가구가 5명으로 추정하는것도 상당히 낮은 기준을 잡는거죠.
그런데, 뭐.. 조금 이해안가는 부분은.. 과연 중국이 한사군을 설치하고, 이들 두개의 부를 설치했다면서..
마한,진한,변한 78개국을 쪼개고 통치한게 사실일까? 하는 부분입니다. 한나라 군대가 삼한지역까지
진출했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고.. 단지 삼한하고 교류를 했다는 수준의 이야기는 있죠.
하지만, 한나라보다 훨씬 군사력이 강력했던 명나라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저건 과장된 춘추필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름 병력이 300만이 넘는다는 명나라조차도.. 만주를 다 장악하지도 않았는데(?),
나름 넓은 만주와 한반도 지역을 한나라가 과연 무력으로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물론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상당한 간격의 공백지가 있었고 여기가 만주족 지역이었죠. 이건 명나라의 배려일 수도 있겠지만.. 한나라가 과연 요서,요동을 모두 확보할만큼 이 지역에서 군사력이 압도적이었나?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툭하면 고구려나 부여, 선비족 같은 주변국의 도전과 침입, 약탈을 겪기 때문이죠.. 그리고 한나라가 꽤 밀리는 양상을 보입니다.)
한나라의 강점은 역시 고조선 때부터 주변국들이 한나라와의 무역을 원했던것을 생각하면..
(위만조선이 그걸 가로막고 막대한 중개무역의 이익을 취하다 한나라의 공격을 받았죠)
삼한 역시 무역에서 이익을 얻기위한 경제적 목적이 가장 강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신라 건국초기 침공했던 낙랑의 군대는
아마도 이 해양세력 낙랑부족의 유민이 세운 최씨낙랑국의 군대였고,
이들은 요서지역의 한사군과는 별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가정하면 낙랑국, 낙랑군의 수수께끼도 한큐에 풀리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