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27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월 1일(병진) 5번째기사함경도 길주의 적이 성을 비워놓고 도망하였고 정문부가 관북을 평정하다 함경도 길주(吉州)에 주둔했던 적이 성을 비워놓고 도망하였다. 정문부(鄭文孚)가 관북(關北)을 평정하였다.정문부가 1년이 넘도록 길주를 포위하였는데 비록 탄환이 무서워서 성을 공격할 수는 없었지만, 적의 땔나무와 마초가 조달되는 길을 차단하였으므로 적은 민가를 뜯어서 땔나무로 쓰는 등 그 형세가 점점 군색해졌다. 청정(淸正)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인솔하여 북으로 들어가서 큰소리를 치며 ‘재차 관북을 평정하겠다.’고 하였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이 정문부에게 군사를 합하여 요격하자고 청하자, 문부가 유경천(柳擎天) 등 기병(騎兵) 수백 명을 보내 달려가게 하였다. 유경천 등이 순찰 중이던 적을 만나 수십 급을 참하였다. 청정이 드디어 대군을 이끌고 추격해 왔으므로 유경천 등이 후퇴했다.청정이 재를 넘어오자 문부가 또 영동책(嶺東柵) 외곽에서 그를 맞아 싸웠으나 세 번 교전하여 세 번 모두 패배하였으므로 경성(鏡城)으로 물러가 지켰다. 청정이 마침내 길주성과 영동책 두 영을 철수시키고 밤에 재를 넘어 남쪽으로 돌아갔다. 문부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함흥(咸興)에 이르렀으나 청정이 이미 안변(安邊)으로 들어가 버려 미치지 못하였다.문부가 경성으로 돌아와서 의병(義兵)을 해산시킨 뒤 북쪽으로 육진(六鎭)을 순행하며 반민(叛民)을 찾아내 베고 번호(藩胡)를 어루만져 안정시켰으며, 모든 보(堡)를 수복하여 장령(將領)을 파견해 두었으니, 북변이 복구된 것은 모두 정문부의 힘이었다.
장문부에 올린 장계에서는 오히려 가토와 3번 맞서 패배하여 경성으로 물러났다고 써잇습니다..
보니까 가토와 붙기전에 길주성에서 천여명 규모의 왜적 600명을 사살했다는 말은 있지만
일단 가토 본진과붙어서 3번 패배하였고..... 인터넷에 떠도는 가토군 8천명 사상자는 도대체 출처가
어디인지 궁금하군요... 가토군이 철수한것은 사실상 조명연합군이 4차평양성전투에서 고니시를 패배시키고
평양을 탈환하면서..... 우키타와 미쓰나라가 한양 이북의 모든 장수들을 한양으로 퇴각하라고 명령했으니
가토는 이미 예정된 철수를 한거죠
도대체 북관대첩의 왜군 사상자 8천명은 어디서나온건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