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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3-30 00:11
위키 본김에 박정희를...
 글쓴이 : 트로피칼
조회 : 1,404  

베트남 전쟁 파병[편집]

한편 그가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여 벌어들인 돈이 1970년대의 경제 개발의 배경이 됐다는 견해도 있다. 그에 의하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케네디 대통령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한국 정부가 베트남 파병을 3200명으로 확대하면서 이에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베트남전 파병이 이루어졌다.[184] 이후 1964년부터 파견된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향후 한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에 가속화가 되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 3556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 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국군의 파병 대가로 들어온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185]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을 향상시켰다.[185] 베트남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186]


국민들을 베트남에 파병하여 거기서 파생된 자금으로 경제를 키웠단 부분인데 

1.국민을 막 다뤘다

1.경제를 키웠다

잘한부분 칭찬하고 잘못한거 까는거면 사실에 근거해서 하지 왜 없는거 지어내고 맹글어내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시사나 뭐 이런거 영 관심없다가 스마트 폰 보면서 신문이나 이런거 많이 접하게되어 보기 싫어도 보게 되더군요 그래가 심심할때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됐는데 정치에 얽힌데는 다 좌우 나눠서 치고박는 분위기네요


좌 vs 우? 전 정치인 vs 국민 일케 생각하는데요

왜 한쪽만 취급하시는지들 모르겠네요 잘못한거는 다같이 조지고 잘한거는 칭찬해주고 이게 정상 아닙니까? 무신 당원도 아이고;;; 아님 간첩인가;;

국가를 위해가 상황에 따라 우파정치 펼수도 있는기고 좌파정치  할수도 있는긴데 정치를 잘해가 정치가가 된거니까 하는거보고 요상한 짓거리하믄 까믄되는거아닙니까?

 제가 잘 몰라가 그라니까 한수 갈챠주세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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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마귀 14-03-30 00:17
   
잘못된 이야기네요.
미군이 철수 하겠다라고 해서 미군 철수를 막기위해 파병을 제안했던것이고
파병 비용을 더 받기위해 박정희가 엄청난 노력을 했죠.
아 그리고 여야 파병 반대하는 세력은 없엇음(미군에 도움을 많이 받아 파병에 반대하던 세력은 여야가 사실상 없었음)
반대 세력은 박정희가 비용을 더 받기 위해 공작했다는게 드러났음

뭐 때문에 베트남 전쟁을 박정희가 파병을 시켜 돈벌게 했다라고 왜곡할까요
광복군후손 14-03-30 00:20
   
어차피 미국에 은혜를 입은 하나만으로도 베트남에 파병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병들은 국내에서 근무할 기준으로 83년치 연봉을 받아서 귀국을할때면 고가의 사체품이던 전자제품들고 귀국들 했습니다 패배감에 절어있던 국민은 베트남에서의 활약들을 접하고 자긍심을 심어주고 세계가 한국인을 다시보게 되었습니다 박정희의 위대성은 여기에더해 외교술로 미군기술을 들여와 국군현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는겁니다
백발마귀 14-03-30 00:35
   
교과서든 뭐든 이런 이상한 시각으로 역사를 평가하는 세력들이 문제임
트로피칼 14-03-30 00:46
   
우선 파병할수 밖에 없었다는거 잘 알앗습니다^^;
호태천황 14-03-30 05:56
   
파월 병사의 목숨으로 경제가 부강하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과정과 결론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 것은 또 당연한 것입니다...역사는 항상 평가하는 시대에 따라 한 인물이 영웅도 되고 역적도 됩니다...
Windrider 14-03-30 11:39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은 두개였습니다.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면서 또 이름을 바꾼거죠. 혈서도 사실인걸로 들어났구요.
여수 순천 사건과 그 뒤를 이은 수사 결과 박정희 조직은 김창룡 중위(나중에 중장으로 진급)에 의해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독사”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김창룡은 맹렬한 반공주의자로 일본군 시절에 헌병 사병을 지냈고, 그 자신 역시 육군 사관학교 제3기생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생도들에게 접근하는 수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1948년 11월에 체포되어 광범위한 조사를 받고 김창룡 수사대의 주무기인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49년 2월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박정희는 죄의 심각성에 근거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사관학교의 동창생들이 육군 고위직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박정희는 자신이 참회했으며 사면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증거로 자신이 맡고 있던 조직망을 폭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박정희가 남로당출신 빨갱이였다는건 아실분은 다 알겁니다. 김창룡한테 동료들 팔고 살아남게되죠.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1192


일본 정부는 그동안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손해배상을 요구할 때마다 65년 맺은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은 소멸됐다고 주장해왔다.

박정희는 한일협정을 맺으면서 검은뒷돈을 받아챙겨 정치자금으로 활용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5374

"박정희 정부, '10월유신' 北에 알려" 박정희는 독재를 하기직전 북측에 이를 두차례 예고하고 설명까지 했죠.
진정한 빨갱이입니다. 출처는 美우드로윌슨센터, 北 1971-72년 외교문서 분석입니다.

http://media.daum.net/politics/north/view.html?cateid=1019&newsid=20090924102706236&p=yonhap


"육영수, 뒤에서 쏜 경호원 총에 숨졌다"
박정희는 김대중전대통령 납치와 인권문제로 국내에서 반정부운동과 미국과의 관계악화로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지만 육영수여사로의 저격으로 인해 반전이 되었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0016458
타이밍이 너무 좋지않아서 이상하지 않나요?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혈서(최우수 제국군인)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 JS표 일본인 준비
만주군관학교를 투철한 친일정신과 열성적 훈련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한다. 수석졸업의 영광으로 금시계를 선물로 받고 졸업생 대표로 천황찬양으로 가득한 답사를 읽었다.
③ 완전한 일본인 - JS표 일본인
. 일본 육사에서도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고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다카키 마사오)이 되었다. 아니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10.26으로 김재규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 외교관은 이러한 말을 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라고 하였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텅에서 벌어진 일들』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1972년 문명자 기자가 어렵게 찾아가서 듣고 기록한 생생한 증언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어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친일파 아니 일본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일본의 지배는 영원 할 것이라고 생각한 박정희에게는 일본의 항복은 대단한 쇼크였을 것이다. 패잔병의 낭패감과 극한의 절망에 빠졌으리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한다. 그토록 노력하고 공들여 입은 황군의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에 합류한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후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지만 여순 사건으로 불리해지자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자기만 살아 남는다.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조선인 흔적 지우기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 되었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어서 창씨개명을 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여 다시 작명을 한다. 일본군에 자원입대 했던 것처럼 스스로 작명 실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하지만 이 기간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몸과 마음을 환골 탈퇴하여 일본인 일본군인이 되어 정서체계와 사고방식 등 모두 일본놈 그 자체였다. 그 증거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얌전한 행위에 속했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압권이다.

[중앙일보. 1991. 12. 14]

[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 5.16후 우방 각국에 친선사절을 보냈는데 제일 먼저 보낸 곳은?
답 : 일본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답 : 일본

-. 최초로 대외정책을 밝힌 기자회견의 주제는?
답 : 한·일 교섭의 재개.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의 망언
일본 방문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것도 유창한 일본어로 말이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걸작의 말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라고 하였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박정희는 이때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한일경제협력을 위한 지원금) 3억달러 정도를 받는 것으로 끝낸다.

장면 시절의 8억달러나 이승만 때의 80억 달러의 주장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었다. 일본은 이때 받았던 3억달러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백일을 시위해도 일본은 10원 한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모두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작품이다.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른다.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1) 긴급조치 제1호
 
유신체제기 박정희정권의 인권 탄압은 탈법, 불법의 차원을 넘어 헌법 자체가 국민의 기본권을 명문화하고도 이를 부정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헌법에 두어 사실상 인권탄압을 헌법차원에서 보장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국가와 개인을 잇는 다양한 관계망 또는 국가로부터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반 장치를 제거하고 오로지 국가기구-관변단체-개인으로 하향지시형 관계망만 두었다.
]
2) 긴급조치 제4호
 
1974년 4월 3일에 발동된 긴급조치 제4호는 이른바 '민청학련사건'과 그 배후조직으로 지목된 "인민혁명당 재건위사건(2차인혁당사건)"을 탄압하기 위해 발동한 것이다. 여기서 민주화운동은 공산주의자의 불순한 책동으로 조작되었고, 수많은 "관제공산주의자"들이 시국사건과 관련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3) 긴급조치 7호와 9호
 
긴급조치 1호와 4호는 그것이 선포된지 각가 225일, 142일만인 1975년 8월 23일 해제되었다. 박정희는 육영수피살사건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국민 사이에 죽은 자에 대한 추모와 자신에 일시적 동정의 기운이 일고 반일시위와 대북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유신체제반대운동이 주춤하자, "국민총화가 굳건히 다져졌음"을 보고 "적이 든든한 마음 금할 길"이 없어 긴급조치해제라는 은전을 "하사"했다.


긴급조치 7호는 1975년 4월 8일 약 2천명의 고대생이 [석탑선언문]을 뿌리며 "민주헌정회복"과 [민우] [야생화] 구속자 등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일으키자 즉시 발동되었다. 긴급조치 7호는 고려대학교를 휴교에 처하면서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국방부 장관은 "병력을 사용하여 동교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7호는 하나의 대학교를 대상으로 발동했다는 특징이 있으며, 군대를 동원해 학원을 장악하는 유례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긴급조치 7호를 선포한 지 35일이 지난 1975년 5월 13일 발동한 긴급조치 9호는 1호부터 7호까지 "그 모든 조치의 내용을 하나로 집대성하여 선포"한 것이었다. 그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차하는 행위 (나) 집회, 시위, 또는 신문.방송.통신 등 공중전파수단이나 문서.도서.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다) 학교당국의 지도.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의례적.비정치적 활도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도는 정치관여 행위 (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4. 유신체제 하 인권탄압의 특징
 
유신체제 아래 자행된 인권탄압의 실상은 장기간에 걸쳐 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개별 사례를 분석하기에는 지면이 허락하지 않을 정도이다. 여기서는 1970년대 양심수 구속.구류 사례만을 대상으로 통계적 차원에서 인권탄압의 특징을 정리하고자 한다. 한국기독교협의회 인권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1970년부터 1979년까지 양심수의 총계와 관련 법조항 그리고 직업별 분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관련법규와 구속(구류)자 수
국가보안법.반공법 261명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 72명
공무집행방해및폭행 38명
국가보위법.노동법 46명
게엄포고령 53명
내란죄 8명 방화죄 9명
경범죄처벌법 1,184명
긴급조치 1호 48명
긴급조치 4호 142명
긴급조치 9호 580명
소요죄 108명
기타.미상 155명
 
양심수의 직업
학생.청년 1,197명
노동.농업242명
성직자 82명
종교단체종사자 50명
언론인.문인 84명
교직 52명
정치인 70명
회사원.연구원 33명
군인.공무원 5명
상업.사업 35명
무직 25명
기타 6명
미상 805명

1) 학원과 학생운동에 대한 인권 유린.(학원 사찰, 학교의 병영화, 학교의 교육 재량권 박탈)
2)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에 대한 생존권 압살과 이에 대한 저항(전태일분신사건, 카톨릭농민화와 도시산업선교회 탄압, 광주대단지'폭동'사건, 철거민투쟁)
3) 정치권과 정적에 대한 탄압(김영삼의원 초산테러, 김대중납치, 공화당 항명파동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개입)
4) 언론 탄압(동아일보 광고 탄압,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대한 탄압, 검열)
5) 문화 예술에 대한 탄압(사전심의제도, 판금조치, 문인간첩단 사건, )
6) 종교계 탄압
7) 유학생간첩단 사건과 외국인 성직자 추방 등 국내법의 자의적인 적용
8) 안보, 반공이란 차원에서 반국가사범의 조작
9)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 침해(필화사건)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879166&logNo=110171193291&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물가도 못잡나” 말했다가 징역5년
http://news.nate.com/view/20090901n17598

과거사위 “경찰 92년까지 선거 불법 개입”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8011803151&code=940301

부마항쟁은 민란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역정을 냈다.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느냐.”(1980년 1월28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항소보충이유서’)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 차지철 실장이 거들었다. 차 실장은 박 전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를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며칠 뒤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20여 발의 총소리와 함께 숨졌다.
김재규가 쏘지 않았다면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5939.html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1/29/200401290500021/200401290500021_1.html

쿠데타직후인 5월 19일 공안조작사건을 만들어 민족일보를 폐간시키고 사장인 조용수를 사형시켰다.
사형 판결을 내린 재판관은 이회창입니다. 이회창의 부친은 일제시대 검사서기였죠.(이홍규)
Windrider 14-03-30 11:42
   
수십만평 강남 땅투기로 박정희 비자금
 
서울 도시계획의 산증인인 손정목(75.전 서울시립대 교수)씨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서울 도시계획 반세기의 '증언'을 담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한울 刊. 전 5권)를 냈다.

서울시의 모습이 가장 달라진 시기는 1966년 김현옥 시장부터 양택식, 구자춘 시장을 거친 1980년까지의 15년간. 저자는 1970-77년 서울시 기획관리관과 도시계획국장을, 22년간 중앙도시계획위원을 각각 지내면서 각종 도시계획에 참여, 겪거나 알게된 갖가지 '비화'를 가감없이 공개했다.

저자는 "서울 도시계획에 대해 최종적으로 한명이 책임져야 한다면 바로 나"라면서 "도시계획이 잘됐다 못됐다의 가치 판단을 떠나 있었던 일과 알고있었던 일을 관련자들이 살아있을 때 쓰고자 했다"고 말했다.
 
▲강남개발 = 1966년 제3한강교 건설(現 한남대교)이 강남개발의 첫 단추였다. 강남개발은 단순 인구과밀의 억제책이 아니라 전쟁이 다시 발발할 경우, 6.25 당시 서울시민이 피난가지 못했던 상황의 재연을 피하고자 시작됐다.

여기에 1968년 착공된 경부고속도로 주변 영동지역에 400만평이 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적되며 허허벌판이던 강남개발이 탄력을 받는다. 실무 책임자였던 윤진우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은 이면에서 박종규, 김종필, 김정렴 등의 배후지원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대선자금 마련을 위해 강남개발과 부동산투기를 동시에 벌이는 악역을 맡았다.

고속도로 건설에서는 땅값을 안들이려 구획정리사업의 명목으로 땅을 강제로 기부받는 방식으로 빼앗았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땅값으로 들어간 비용은 500만원에 불과했다.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강남 토지투기 =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는 서울시 실무과장에게 과천.서초.강남.잠실 가운데 가장 투자가치가 큰 지역을 꼽을 것을 지시했고 "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라는 답을 듣고 그 땅을 사모았다.  토지매입은 1970년 2월부터 시작됐다. 자금이 실무과장에게 공급돼 그가 사고 땅값이 오르면 되파는 방식이었다.  이후 영동 제2지구, 남서울 개발계획 등이 잇따라 발표됐다.
 
이 사건은 박종규.김현옥 두 사람이 장차 있을 대선에 대비해 박 대통령에게 목돈을 마련해주겠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최근의 청계천 복원과 관련, "청계고가 건설 당시 시멘트는 많았지만 철강이 모자라 적게 쓴 탓에 수명이 다됐고 이를 해체하는 것에 겸해 청계천을 복원하는 것은 잘하는 일로 본다"며 "복개한지 무척 오래됐는데 지금쯤 그 밑이 어떻게 됐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의 뒷면에는 땅투기가 있죠.그러니 김대중대통령이 막을려고 한거구요.
Windrider 14-03-30 11:42
   
71년 박정희 대선자금 - 국가예산의 10%, 600억 썼다
 
박정희 "돈을 얼마나 썼는데 표가 겨우..."
 
87년 겨울 1노3김이 맞싸운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일 때 김종필 공화당 후보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도대체 민정당이 이 나라를 거덜내도 좋다는 말인가. 이렇게 돈을 쏟아 붓고 나중에 민생경제를 어찌 수습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무책임한 사람들이야. 선거는 선거고 나라는 나라 아닌가... 야당은 군중을 떼로 몰고 다니고 집권당은 돈을 봇물처럼 터뜨리는 이런 짓(대통령 직선제)은 그만 해야 돼. 71년 선거에서도 박대통령 당선을 위해 무려 600억원이나 썼다는 걸 나중에 확인했어. 그 이후 16년만의 선거가 이 지경이니..."
 
그때 김종필 후보는 "71년 선거전에 나는 고문 타이틀만 달고 유세만 불려다니면서 돈 쓰임새도 잘 몰랐더니 그렇게 많이 썼다더라. 박 대통령도 71년 대선 개표 결과를 놓고 '우리가 쓴 돈이 얼마인데 내 표가 이것 뿐이냐' 고 하더라"  고 말했다.
 
강창성(박정희 정권에서 중정차장보, 보안사령관 역임)씨는 최근 기자에게 71년 대선자금이 모두 '700억원'이었다고 밝혔다. JP 증언보다 100억원이나 많은 액수였다. 강씨는 당시 선거전을 전후해 자금살포계획을 세우고 득표점검 결과분석을 하는 과정에서 집계한 액수가 700억원이었다는 얘기다.
 
당시 경제규모로 보아 선거자금 600억,700억원이 얼마나 큰 돈인가.
 
71년 국가예산이 5242억여원, 공화당 정권이 예산의 1할을 넘는 액수를 털어 넣은 선거가 71년 박정희-김대중 대결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해 공화당의 명목상 재산이 2억 8천만원,신민당이 4000만원, 전경련의 선관위 정치자금 기탁액이 모두 3000만원 (공화당 1600만원,신민당 1400만원으로 나누었다) 뿐인 점을 살펴보면 실로 엄청난 자금 살포였다.

(동아일보 김충식 기자)
Windrider 14-03-30 11:45
   
미국 기업, 박정희에 850만불 대선자금 바치고 석유산업 집어 삼켜
 
박정희 정권은 대선자금을 위해 한국에 진출해 있는 미국계 기업들에게서 약 850만 달러를 거두어 들였다. 여기엔 거대 석유기업인 칼텍스사가 제공한 4백만 달러와 걸프사가 제공한 3백만 달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박정희에게 정치헌금을 내고 한국의 석유 산업을 사실상 집어삼켜 버렸다.
 
박정희 대선자금 창구는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이었는데, 걸프사 사장 보브 도시는 70년대 후반 열린 미 의회 청문회에서 자신이 대선자금을 뜯긴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문제(정치헌금)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 김성곤 씨가 집으로 초대했다. 내가 평생 만나본 인물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다루기 힘든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 날처럼 모욕을 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그는 거칠고 깐깐한 자금 모집책이었다. 그는 1000만 달러를 요구했으나 결국 300만 달러로 낙착됐다. 그 돈은 걸프 본사의 자금에서 지출된 것이지만 일단 바하마에 있는 바하마탐사 회사로 돌려져 그 회사 장부에 경비로 기록했다가 한국으로 건네졌다."
 
걸프사는 1975년 5월 16일에 열린 미 의회 프레이저 청문회에서도 "우리가 전 세계의 외국 정부에 제공한 5백만 달러에 달하는 정치자금 중 80%가 한국의 공화당 정권에 지불되었다" 라고 증언했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
Windrider 14-03-30 11:48
   
베트남 특수의 가장 큰 수혜자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베트남에 온갖 물자를 대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한국이 베트남 전쟁 전 기간 동안 벌어들인 돈 보다 훨씬 많은 돈을 매년 벌어들였다. 대만은 단 20여명을 파병했음에도, 한국이 얻은 베트남 특수는 대만이 얻은 특수를 약간 웃도는 액수였다. 홍콩이나 싱가포르는 단 한 명의 병력도 파견하지 않았지만 베트남 특수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젊은이들의 피 값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소장이 미국으로부터 받는 월급은 354달러였으나, 같은 파병국인 필리핀과 태국 소위의 월급은 각각 442달러, 389달러였다. 한국군 일반 사병의 월급은 남베트남군보다도 낮은 것이었다. 한국의 협상력이 부족해서였을까? 그보다는 박정희 정부의 주안점이 다른 데 있었기 때문 아닐까? 박정희 “미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라고 말했으며, 포터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 정부는 다른 국가가 한국보다 더 받고 있느니 어떠니 하는 따위의 문제로 미국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외국군대를 베트남 정글에 보냄으로써 미국 젊은이들의 생명을 아끼는 동시에 비용까지 절감하는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주월 미군 1인당 유지비가 연간 1만 3천 달러인데 비해 주월 한국군 1인당 유지비는 5천 달러였으니, 1인당 8천 달러씩 연인원 31만 명, 약 25억 달러의 비용 절감을 본 것이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yunilcs&logNo=60073345606
Windrider 14-03-30 11:58
   
Windrider 14-03-30 12:00
   
역대정부 소비자 물가
노태우 7%, 김영삼 5%, 김대중 3.5%, 노무현 2.9%
박정희 15% 물가
     
백발마귀 14-03-30 12:22
   
아무것도 없던 나라에서 고급 제품을 쓰면서 늘어난 소비자 물가입니다.
질이 틀려요
그정도는 아시길
소득이 늘어나면서 더 좋은 상품을 찿으면서 물가가 올라가는건 정상적인 현상이지만
소득이 주는데 물가가 올라가는건 질이 틀린겁니다
최소한 이정도는 알고 살았음 합니다.
bjr18 14-03-30 12:35
   
Windrider//

신났네...
대목이네^^
헤임요 더 엄능교?
마마 더 가꼬 오소 오늘 다 무거뿌입시더...
Windrider 14-03-30 22:05
   
ㅎㅎ 근거로 반박은 못하네요.벌레님들 화이팅.
Windrider 14-03-30 22:05
   
물가가 15%가 무슨뜻인지 모르는분도 계시네요. 참 안쓰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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