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NLL 대화록 초안이 삭제된 것 때문에 시끄럽던데...
여권이나 보수층에서 이를 두고 "사초 폐기", "사초 은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더군요.
당장 네이버에서 '사초 폐기'라고 검색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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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도 안 한 사초 폐기 (개인 블로그)
與 “文, 사초 폐기 입장 밝혀라” (문화일보 기사)
새누리 "친노 말바꾸기 지나쳐…사초 은닉 진실 고백해야" (조선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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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엄청 많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하게 될 겁니다.
"아, 조선시대에는 사초를 절대로 폐기하지 못하도록 했었나 보구나."
응?
그런데 이건 내가 아는 상식과 다르거든요.
"세초(洗草)"라는 용어를 아실 겁니다.
이 단어를 안다면 내가 왜 그러는지도 아실 겁니다.
조선시대에는 사초를 전부 세초해서 삭제하여 폐기하는게 원칙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초의 내용을 세초해서 폐기하고, 종이는 재활용)
일전에 드라마 "이산"에서도 세초 하는 장면이 나왔으니 잘들 아실 겁니다.
연산군도 사초 폐기 안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연산군이 합법적인(?) 프로세스대로 세초를 통해 폐기되기 이전 단계에서
사초를 열람하려고 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럼 다시 돌아가서..
"사초 폐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잘못 이해한데서 나온 표현의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신기한 것은...
기계공학과를 나은 전형적인 공돌이인 나도 아는 이 사실을
공부 잘한 인문계 출신의 그 많은 기자들, 정치인들 중에 아무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더라는 거죠.
시간도 꽤 흘렀쟎아요.
노무현 정권에서 NLL 대화록 초안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냥 초안이 안 남아있다라고 표현하거나
문서의 버전관리가 제대로 안 되었다고 지적을 하던가.
(체계적인 문서관리 시스템은 문서의 버전관리 기능이 대부분 기본적으로 들어갑니다.
소프트웨어 개발할 때 쓰는 git, CVS 같은 툴들은 물론이고
회사에서 지적 자산을 관리하는 시스템인 형상관리, PLM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노무현 정권때 만들어진 이지원 시스템에는 이 기능이 구현되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추측컨데, 이지원 시스템은 일반적인 문서관리 시스템과는 달리,
당시 청와대에서 특주개발한 것이므로 기록물에 대한 관리 패러다임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공계인으로서 보기에는 정치권의 문돌이(?)들은 참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간단하게 만들어서 접근하는게 이공계 방식이라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서 결코 해결할 수 없도록 만드는게 정치권의 방식이니까요.
그냥 그렇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