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병력이 정예군인데 동원 안할리가 있나요. 부산함락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긴급 남하 명령을 내렸지만, 일본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서 도착하기 전에 한양이 함락되었죠.
임진왜란 초기 상황을 보면 신립의 탄금대 전투 이후 무저항상태로 진군하던 일본군이 임진강에서 조선군과 충돌하는데 이 조선군이 바로 평안도 군사들이었습니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진 남방군사들과 달리 이들은 초전에서 일본군 선봉을 격파하고 임진강을 건너 도강전투를 시도하는 등 비교적 제대로 싸웠었죠. 그리고 패배당하고도 분산되지 않고 후방에서 다시 집결해서 개성, 평양까지 축차후퇴하며 전선을 유지했습니다.
본래 여진이 건주여진 5부족, 해서여진 4부족, 야인여진 4부족으로 나뉘어지는데.
누르하치는 건주좌위에 해당하는 건주여진 5개 부족 중 하나를 이끌었지요.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교탕가, 아버지 타쿠시는 명나라 요동총병 이성량에게 잘협력했으나,
교탕가의 사위인 아타이를 설득하러 갔다가, 명군에게 살해당해 당시 이성량의 볼모였던 누르하치가
분노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합니다.
그리하여 훗날 1583년 무렵에 군대를 일으켜 몇년사이 건주위 여진을 통일하고,
1589년 무렵에 명나라의 도독첨사 관직을, 1595년에 명나라 용호장군의 칭호를 받게 되는데요.
1593년 해서여진의 예허 부족이 주도하는 여진 몽골 9개부족 연합군 3만의 공격을 받고, 이를 물리치고,
1599년 해서여진의 하다를 멸망시키고, 1607년 후이파, 1613년 우라를 병합해 여진 대부분을 통일한 뒤..
1616년 칸의 지위에 올라 후금을 개국한 후, 1618년 명을 공격하기 시작.. 1619년 사르후 전투..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부상당채 사망했다고 합니다.
즉,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무렵까지는 아직 여진의 1/3 정도 세력을 가진 수준이었고..
이 때까진 명나라 요동총병 이성량에게 발톱을 숨기고, 명나라에 충성하는 척하며 뇌물도 바치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다 이성량이 1591년 뇌물혐의로 해임되는데, 이후로도 요동총병들에게 계속 뇌물바치고 싹싹하게 군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해서여진의 반격을 물리치고, 나머지 여진을 통일하는데 힘을 기울였고..
이러한 움직임은 명나라의 이이제이 전략에 어긋나는 것이었죠.
이성량은 같은 명나라 장수들은 여진족에 내분을 조장해 서로 치고 싸우게 만들었고,
실제로 그런씩으로 흘러갔는데, 누르하치는 자신의 세력규합이 명나라에 위협적으로 안비춰지도록
애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그래도 뽀록날 가능성이 높았지만, 천운인지.. 임진왜란이 터져 명나라가 조선에 신경쓰느라..
사실상 만주지역에 대해 신경쓸 틈이 없는 사이.. 나머지 해서여진 등의 반격을 물리치고, 그들을 흡수합병해..
여진통일을 이뤄낸 것이죠.
이성량도 1601년 복직되어 돌아오긴 했지만, (그 와중에 이성량 자식들이 요동총병을 지냈더군요)
누르하치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 1606년 6보를 철폐시키고, 민간인들을 이주시켰는데,
조정의 반감을 사서 1608년 다시 파면당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감시와 견제를 뇌물과 거짓충성으로 무마시키며..
건주여진을 일단 통일했고, 그 뒤로 임진왜란이 터진 이후엔 해서여진과 몽골 등의 반격을 받았지만,
이를 물리치고 해서여진을 장악했고, 그렇게 어느새 세력을 키운뒤론 이제 명나라가 손을 쓸 수 없는 단계까지
성장했다고 볼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