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이 고구려를 때리고 때리고 때린 것은..
북방 오랑캐의 5호16국이 끝난 직후라.. 중원 주변의 강한 세력을 위협적으로 봤기 때문이고..
고구려 정도 크기의 국가를 그냥 지켜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가 있는한 중원에서 발 뻣고 잠을 못자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제거후 한반도 먹어보려고 하다.. 신라가 저항하니까..
대고구려 전쟁때만큼 필요성이 의욕이 없어 대충하다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요 성종은 송도 밀어낼만큼 당대 세계 최강 군사력을 가졌지만..
딱히 먹을거 없음에도 만만히 보이던 고려를 치다가 전성기 국력을 다 쏟아붓고..
내리막길을 갑니다.
고구려보다 작은 고려라고 쉽게 보다 당한겁니다.
금도 건국 직전에 힘이 생겼다고 고려한테 깝죽거리다..
윤관 17만에 급소를 맞은 적이 있어 잠잠합니다.
건들면 거란짝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원은.. 이걸 다 공부를 한겁니다.
수가 고구려 치다 망한거..
당태종도 고구려 못 먹었던 일..
거란이 한반도 치다가 전성기 날려먹을 일..
징기스칸 애비 죽인 천하의 금도.. 건국 바로 직전에 고려에 한방 맞았던 거..
이 모든걸 학습 효과를 했고..
거기다 30년을 고려가 버텼고..
청이 조선을 군사로 대가리 박게 하듯이..
몽골은 군사력으로 고려를 엎드리게 하지 못했고..
고려 내부 정권 변화로 고려가 귀의한 것이라.. 형식적으로 대단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상대이기 때문에.. 복속도 못 시킵니다.
이때까지는 한반도의 위상이라게 있고..
지금같이 해외에서 한반도를 그냥 기본으로 중국의 속국인양 보는 시각이 있을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나마 원의 지방으로 전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담 명이 원이 한거 따라한다고 철령위 요구좀 했는데..
되는 좋고 안되도 손해보는건 없고.. 어차피 중요한건 중원의 안정이라..
근데 고려가 미친듯이 군대를 몰고 오니까..
주원장이 나중에도 걱정했듯이 "조선이 10만으로 요동을 치면 멀로 막아내냐"..
요동에 명나라 군대가 있다고 해도..
중원 주변에 잠재적인 적이 많은 상황에서.. 전쟁은 다른 차원의 얘기입니다.
깝짝거렸다가 전쟁 직전까지 갔기에..
한반도를 복속한다.. 이런 생각은 명이 추호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힘으로 중국으로 싸우랴.. 좋은게 좋은 거라.. 납작 엎드려도 괜찮다..
이런 생각들 하는데..
복속되지 않은 것은 전부 우리 무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조상이 힘이 부족하다고 싸움을 피하고 엎드리려고 하였다면..
어느 코에 걸리든 한반도는 중국의 한 성이 됐을 것입니다.
이걸 지켜본 여진이..
비록 군사적으로 약한 조선을 대가리 쳐박게 했지만..
순전히 지기들 군사력으로 명을 깨기도 벅찬 상황에서..
조선을 복속해서 실질적으로 지배한다..
10만 이상은 상주해야 할걸요..
비용은..
저항으로 보급은 계속 애로가 있을 것이고..
대군을 몰아서 한번 조선왕을 대가리 꼬라박게 할순 있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고..
중원의 제국도 아니고.. 여진은 그럴 힘도 없습니다.
금 멸망이후 조선에 힘 한번 못 쓰고.. 명에 치어 조선에 치어 살다가..
그나마 한반도와 사대관계 맺었으면 만족할만도 하는 그런 여진의 역사적인 위상도 있고..
이런 정도로 당대 세계 최강 군사력에 대항해왔던 한반도를..
복속을 해서 장기 유지한다..
그건 중원의 명, 청 제국도 어려운 일이라고 봐집니다.
단 한번 가능했던 실현이 될뻔했던 일본식민시대는..
산업화한 나라가 아직 산업화 되지 않은 나라에 가능했던 1번의 기회였지 않나 싶네요.
원나라는 고려랑 30년을 싸웠는데 쉽게 복속을 시킬 수는 없었죠. 청나라도 후금시절에 임진왜란 직후의 피폐해진 조선을 쉽게 이기지만 그땐 자신들이 과거 형님으로 섬기던 조선을 집어삼킬 정도의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할 때였죠...원나라나 청나라도 말기에 고려와 조선을 복속시켜 자신들의 성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청나라는 원세개가 조선성 만들자고 했는데, 그때는 청나라 사정도 제코가 석자라서;;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만약 그랬다면 장담하건데,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라 원세개가 조선인이 쏜 총탄에 쓰려졌을 것임-.-
아님, 도시락 폭탄에 사지가 갈갈이 찢어졌거나;;;
그랬다면, 중국가서 1일 황제놀이도 못 했겠지ㅋㅋㅋㅋㅋㅋ
(-원세계는 말년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 뒤를 이어, 딱 하루동안 새 중국황제로 즉위 했다가, 백성들의 쌍욕듣고 도로 내려온 코메디를 연출한 사람-.-그뒤 홧병으로 병사)
원나라는 기마민족으로 말을 먹일 땅이 필요했던거지 고려와같은 지형은 별로 필요도 없었습니다. 투자대비 효율도 안나왔구요. 원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병력이 수천이라는 것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증거입니다. 처음부터 점령하려했다면 최소 십만을 보냈겠죠. 애초에 존속시기도 짧습니다.
청나라는 중국을 먹은것 자체가 운빨인데 과포화라 중국 컨트롤하기도 힘들었고 초기엔 대만정씨나 삼번의 난 등 자국컨트롤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조선을 합병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안정화된 이후로는 굳이 조공국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겠죠.
몽골은 고려를 정복하려고 침공 해들어왔으나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구서 정복은 포기하고 결국 상전-속국관계로서 고려하고 조약을 맺고 철수를 했지요,,
그래서 역사 부도에 나오는데로 몽골의 영토내에 들어가지를 않고 고려는 외곽에 위치 합니다
임금을 즈그덜 부마로 만드는등...비참한 속국 신세인 고려-원 관계를 보건데 청은 남한삼성을 함락시켜 조선을 직접적 제압함에도 매우 후하게 당시 조선을 대접 해준거이죠
근데, 부마국이 되기로 먼저 자청한게 고려예요-
무신정권동안 왕권이 추락한지 오래라, 몽골의 힘을 빌어 왕권 세울려는 이유도 있었고-
몽골과 조약을 맺었다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불안했던 고려왕실이
좀 더 확실한 관계 확인이 필요했기에,
우리쪽에서 먼저 몽골공주와의 정략결혼 동맹을 제의했어요.
서로간에 피섞고, 살 섞어서 반반씩 닮은 후계자 보는 방법이 가장 확실하니까요.
물론, 이 세상에 공짜란 없다고, 부마국이 됨으로써 고려가 이득본것도 있고, 또 감당해야 할 짐도 있었지요.
일단,
한반도가 크기가 중원보단 작아도, 나름 산깊고, 물 깊은 동네임
일본이 왜란때 위쪽으로 진격만 쳐 하고, 그게 단줄 알았지만
산속에 겹겹히 의병 게릴라들이 속출하고, 바다에서 보급로 끊어버려서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됨.
청 태종도 인조가 저기 부산까지 내려갔으면 중간에서 오히려 조선군들에게 잡혔을지 몰라요.
(고려현종이 거란을 피해 전라도 나주까지 몽진, 거란 대패/ 공민왕이 경상도 안동까지 몽진, 홍건적 탈탈 털림/ 선조는 신의주까지 몽진/ 인조는 도망도 못 가 잡혀서 나라망신을 시킴 -.-;; 오늘날까지 민폐왕으로 쌍욕을 들음;;;)
아무튼, 원이나 청이나 중원이란 큰 고기가 앞에 있는데, 한반도에서 전력을 다 쏳아부을수도 없었고
그 꼴난게 거란;;;
거란처럼 되면 자기들도 곤란했기에 걍 후방안전 차원에서 손보고,
이왕, 중원먹을때 니들도 우리편 되어주면 고맙겠고,
그게 싫으면
적어도 니들은 우리 뒷통수 때리지 말고, 중립이나 지켜라~ 요구한게 크다고 할수 있습니다.
더욱이, 몽골이나 만주나 둘다 자기 인구가 부족했기에, 자기들 혼자서 중국 다 못 먹었어요.
주변에 자기들을 도와줄 부족이나 협력자들이 필요할수밖에 없었죠.
이왕, 적하나 더 만드는거보다, 구슬려서 지 말잘 듣게 하는.. 뭐 그런게 필요한데
그런 용도로 우리나라가 필요했던거고, 우리도 나라가 없어지는거보단, 계산을 해보면 그 편이 훨
나으니까 서로간에 계산이 맞물린 결과이기도 하죠.
중원은 땅이 커서, 주인이 자주 바뀌는 동네고, 그게 한족이든 호인이든지간에
정권 교체 싸이클에 따라, 혼란의 여파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많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잠잠해지고나면, 뭐,, 특별히 싸울일도 없었던거 같구요.
'전략설계' 님 글이라 뭔가?다를줄 알았는데 실망이 큽니다 과거를 반추하고 당시 시대의 사건의 아쉬움을 돼짚어보고 그 사건 현장에 있는 사람처럼 '전략적 사고'와 '비판'을 할줄알았는데 기대를 한게 제 착각이죠 누구나 흔히할수 있는 "우리 조상들은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냈다"성격의 글로 원의 침공을 논하셨는데 '전략설계'님이 보는 입장과 저의 차이가 명확해지는 군요 일단 전략설계님은 당시 시대의 '최고결정권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며
저의 입장은 다시 '고려 백성'들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거요.그 알량한 '자존심'은 누구의 것이였습니까? 고려백성 입니까..'고려 조정'이였습니까? 성밖에서 유리걸식하고 몽골군에게 겁탈당하고 몽골군에게 끌려가는 고려 여인들을 생각해보십시요, 그들은 자존심이 짓밟혔습니다 산산히 조각났다구요. 몽골군의 최후까지 싸우자고 했던 결연한 의지 그것으로 고려 백성을 버리고 산성에서 숨어서 활만 쏘던 고려 '무신'들 그들은 고려 백성이 굶어죽는 상황에서 지들 배가고프니까 그때 부랴부랴 강화를 요구하고
'원나라'의 '신하국'이 되겠다 해서 고려 지배층 권력이 그대로 유지 시켜준것이죠 혼례로 통해 간접적으로 고려를 통치한 것이구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어느누구도 조상님들의 빛나는 업적이라 칭송하지 않습니다 고려가 몽골에 직접적으로 복속되지 않았어도 고려왕실은 원나라가 세력이 약해질때까지 그림자에 못벗어났고 사실상 고려왕조가 형식으로만 존재하게 된것이죠.그래서 역사가들은 몽골의 침입 고려의 항쟁을 소재로 민족주의를 내세우지않습니다 초라하니까요.
조선조 '인조'를 보십시요 많은 전문가들은 인조가 '삼배구고두례'를 함으로서 조선의 왕의 권위가 사라진 것이죠 앞날을 예견한 선비는 그것을 보고 '태양이 꺼진것 같았다' 말했다고 합니다 실상 조선왕실의 권위가 거기서부터 끊어지게되고 사대주의가 명에서 청나라로 대상이 옳겨질뿐이죠 사실상 사대주의가 그때부터 뼈에 박히게 되는거 아닙니까 그때 '병자호란'때 임진왜란처럼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죠 인조는 의병이 일어날줄 알았는데 전혀아닙니다 '청나라' 군인들한테 붙어서 길을 알려주거나 민간에서 강간 약탈이 횡행했죠 '노예'로 끌고가고 조선백성은 '임진왜란'때처럼 더시상 조선 집권층한테 속지않을것이라 생각한것입니다
만약 징비록을 저술한 '류성룡'이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다시 천민도 무과를 보게 다시실시하거나 양민에서 양반으로 올로갈수있게 호국정신의 생기를 불어 넣었을것입니다.보면 전부다 집권층의 권력다툼 무능 부패에요 백성은 무슨죄랍니까..만약 현실인식 능력있는 '전략가'라면 처들어 오기전에 먼저 사신을 보내 사대했을것입니다 그것이 백성이 편안해지면 되니까요 그리고 고려의 몽골침입 싸우는 것보다 어떻게든 전쟁보다 '화친'을 생가했을 것이라 봅니다 그때도 고려인들은 몽골인을 야만인으로 생각했으니 당시에봐도 전략이 없었던 것입니다
강대국 덩치들 사이에 껴서 한국인, 한국으로 어떻게든 버텨서 살아가야 할 운명이 아니라면.
거란이나 몽골때 깨끗이 손 들어버리고..
중원의 제국이 바뀔 때마다.. 지금 동북 3성처럼, 1-2개 성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랬다면.. 그렇게 피를 흘릴 필요는 없었겠죠.
그러나, 내가 한국인이고.. 앞으로도 영원이 한국과 한국인이 주변의 덩치들
사이에 남아야 한다고 했을 때는..
고려가 그 많은 인명피해를 입고도, 버텼다는 그 사실 자체만큼은..
후손들이 한국인으로 조금이라도 편히 덩치들 사이에 살아가는데 도움이 됐다고 봐집니다.
고려가 버티지 못하고.. 바로 손들어서.. 인명피해는 줄였겠지만.
몽골에 복속됐으면..
몽골이 북으로 내쫓길 때 명나라가 단지 철령위만 요구했을까요?
당연 승계하는 개념으로 자기나라 1개 성으로 그대로 갔겠지.
그때 뒤집으려고 했다면. 명나라 몇십만 대군이 지속적으로 밀려왔을 것이고..
아마도 고려인들 죽네사네 싸워야 되고..
고구려가 수양제, 당태종 물리치고도..
당고종때 지속적으로 1-3만으로 살살이 치듯이 국력을 빼는 식으로 지구전으로 들어가듯이..
한반도를 복속시키려는 기나긴 전쟁을 해야만..
조선과 같은 정도 국가로 남아을 것입니다.
최고 지도자의 입장이 아니라.. (몽골 항쟁때 무신정권 잘했단 사람은 없죠.)
작지만 앞으로도 이 땅에서 살아야 할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 것이죠.
한국이 생존하기 위해선 큰 피해가 있었지만 몽골에 쉽게 무너져서는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장의 피해가 크다고 해서,
그걸 회피하고 나면 다음이 아예 없거나 원 상태로 돌리기 위해서,
훨씬 더 큰 피를 흘려야 하는 게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