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역사서는 당연히 일정한 논리구조 즉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게 마련입니다.
삼국사기같은 실록이 아닌 편찬사서는 더욱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다음의 부분에서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신라본기 진덕왕 4년(650)
사론(史論): 삼대(三代)가 정삭(正朔)을 고치고 후대에 연호를 일컫는 것은 모두가 통일을 크게 여겨 백성들이 듣고 보는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까닭에 때를 타고 나란히 일어나 둘이 마주 서서 천하를 다툰다든지, 간교한 사람이 틈을 타고 일어나 제왕의 자리를 엿보는 경우가 아니면 변두리의 작은 나라로서 천자의 나라에 신하로 속한 자라면 진실로 사사로이 연호를 칭할 수 없다. 신라와 같은 나라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중국을 섬겨 사신의 배와 공물 바구니가 길에서 서로 마주 볼 정도로 잇달았다. 그런데도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칭한 것은 알지 못할 일이다. 그 후에도 그 잘못된 허물을 이어받아 여러 해를 지냈다. 태종의 꾸지람을 듣고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 때에 와서야 당나라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였다. 비록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는 잘못을 저지르고 능히 허물을 고친 것이라 할 만하다.
신라본기 말미
사론(史論): ......지금 다만 그 시초를 추구해 보면, 위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고 남을 위해서는 관대하였으며, 관직을 설치함에는 간략하게 하고 일을 행함에는 간소하게 하였다. 지극한 정성으로 중국을 섬겨 산 넘고 바다 건너 조회하는 사신이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으며,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 조정에 나아가 숙위하고 국학(國學)에 들어가 배우고 익혔다. 이에 성현의 풍습과 교화를 입어 거친 습속을 변화시켜 예의가 있는 나라가 되었다. 또 황제 군사의 신령스러운 위엄에 기대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차지하여 군현으로 삼았으니 융성하다고 이를 만하다.
고구려본기 말미
사론(史論): ......고구려는 진한시대 이후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었다. 그 북쪽 이웃은 모두 천자의 관리로서, 난세에는 영웅으로 빼어나서 이름과 자리를 함부로 도둑질하였으니, 가히 두려움이 많은 땅에 거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겸손한 뜻이 없고 중국의 봉토(封土)를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고, 그 군현에 들어가 살았다. 이 때문에 전쟁이 이어지고 화가 맺어져 거의 편안할 때가 없었다. [고구려는]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통일한 때를 만나고도, 오히려 천자의 명에 거역하여 순종하지 않고, 천자의 사신을 토굴에 가두었다. 그 완고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므로 여러번 죄를 묻는 군사를 불러들였다. 비록 혹시 기이한 계책을 세워 대군을 이긴 적도 있었으나, 마침내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한 후에야 그치게 되었다.
백제본기 말미
사론(史論): ......백제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행하는 일이 도(道)에 어긋남이 많았으며, 또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고 고구려와는 계속 화호하여 [신라를] 침략하고, 이익을 따르고 편의에 좇아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鎭)을 빼앗아 가기를 마지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사람과 친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국가의 보배』라는 말과는 틀린다. 이에 당나라의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서 그 원한을 풀도록 하였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명령을 어기어 대국에 죄를 얻었으니 그 망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도다.
특히나 각 나라 본기 말미에서의 사론이 말하고 있는 바는 곧 이 책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중국을 섬겨야만 나라가 흥한다는 사대주의임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리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총 편집자로서, 삼국사기의 주제의식은 그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월간조선의 논조가 편집장 조갑제씨에 의해 결정되듯이.
이처럼 명백한데, 고작 서문과 주필산전투의 일부분을 가지고 삼국사기의 논조가 그리고 김부식 개인의 사상이 사대적이 아니라는 주장은 너무나 비상식적입니다. 그리고 서문에서 '중국 역사는 알면서 우리 역사를 몰라 유감'이라는 말은 김부식이 한 말이 아니라 왕이 한 말입니다.
또한 삼국사기의 집필자는 김부식 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고, 따라서 주필산전투에 대한 사론 역시 김부식이 쓴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것은 김부식과는 사상적 경향이 다소 다른 사람이 쓴 것인데, 총 편집자 김부식이 보기에 그다지 어긋나지 않아 보여서 삭제되지 않고 남아 있었을 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가 그 논조와는 관계없이 절대적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결코 '간장 병 뚜껑'이 될 수 없는.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 논조와 주제가 사대주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삼국사기를 제대로 읽었으나, 일부 편견에 사로잡힌 후학들은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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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퍼왔습니다 죄송 ㅎㅎ
출처:다음카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