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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05 14:33
[기타] 고구려에서 '구句'가 빠진 사연 (광개토대왕-장수왕때)
 글쓴이 : 열심히공부
조회 : 4,764  

고구려가

398-423 년 사이 (광개토대왕 - 장수왕)

어느 시점에서 고구려라는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다.


중국에서는 왕망(기원전 45년 ~ 기원후 25년) 때부터

고구려라고 표기하다가(하구려 라고 멸칭하기도 함)

그 이후에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서길수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아래 시기에 국호가 바뀌었다.

-. 위서에는 398년(광개토왕 영락 8년)에 처음으로 고려高麗 (고리로 읽음)로 표기

-. 송서에는 423년(장수왕 11년)에 처음으로 고려국高麗國 (고리로 읽음)으로 표기


그리고 당시 중국사서에 [려麗]를 반드시 [리]로 발음 하라고 강조를 하고 있다.



그러면 고구려와 고려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

결론만 먼저 말하면 아래와 같다


   고구려 - 가우 고리 ( 가운데 + 고을 )     -->   고려 -  고씨 + 리아 ( 고씨의 나라 )


[ 가운데 우뚝 서있는 큰 고을] 이라는 뜻에서  [고씨의 나라] 로 의미를 전환하고

그에 맞도록 국호를 세글자에서 두글자로 줄인 것이다.



세글자 국호인 高句麗는  [ 고 + 구리 ] 로 구성되어 있으며 뜻은 아래와 같다.


고高   (가우 - 가운데에 해당하는 고구려인들의 발음, 중원인은 당시에 고 였음 ,

          같은 글자라도 발음을 달리했음, 북경과 홍콩도 지금 같은 현상나타남)



구리句麗    ( 구리 또는 고리  -->  골 = 홀 = 성 = 작은 소국 = 도읍 ,

                  받침의 ㄹ 을 뒤로 빼서 발음함 , 갈비 = 가루비(일본)와 비슷한 현상)


가운데 있는 (홀,성) 이라는 뜻으로 국호를 정한 것이다.

그리고 주몽은 자신의 성을 해解씨에서 고高씨로 바꾸었다.

부여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장인의 나라인 졸본부여를 먹고 나서 그 이름도 버리고 고구려라고 국호를 정했다.

아마 주몽의 지지 세력이 바로 고구려현(현도 시절)의 사람들이 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금와왕이 죽고 대소가 부여의 왕이 되자 주몽은 아들 유리를 탈출시켰는데

이는 고구려현 세력이 기존 졸본 부여 세력(소서노, 비류, 온조 - 주몽의 아들이 아닐 것이다)과

맞짱뜨겠다는 신호인 것이다.


소서노는 자신의 아들 비류가 (비류,온조는 주몽의 씨가 아닌 것이다)

주몽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을 기대하고

주몽이 전前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를 부여에서 데려오는 것을 계속 반대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주몽은 대소가 부여왕으로 등극하자

소서노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 유리를 부여에서 탈출시켜

전격적으로 태자로 삼았다.

그로 인해 졸본 부여 세력과 주몽의 고구려현 세력이 한판 붙었다가

그 와중에 40살의 팔팔한 주몽은 죽었을 것이다.


먼저 공세를 취했던 소서노 세력이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불리해지자 전격적으로 배를 타고 남으로 도망을 가서

백제를 건국하고 부여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선포한다.

부여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뜻으로 국호를 백제라고 했을 것이다. (추후 이에 관해 글올릴 예정)


그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수백년간 철천지 원수로 피터지게 싸우게 된다.



수백년간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자신이 부여의 적자임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광개토대왕대에 이르러 410년에 동부여를 무너뜨린 후에

고구려은 더 이상 부여의 정통성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부여가 아닌 고씨의 나라임을 만방에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국호의 변경이다. 


고 高 ( 고씨 )

려 麗 ( 나라 )


성읍을 뜻하는 구리(골=홀)에서

나라를 뜻하는 려(리어 = 리아 =  라 = 나라, 신라, 가라, ..) 로 바뀌면서


구句  자는 버리고

려麗 도 [리] 와 [려] 둘다 허용했을 것이다.

(조선 말기까지 민중들은 리, 사대부들은 려 로 발음하였음

 고려취 高麗臭 = 고린내 ,  高麗 ㅅ 적 = 고릿적 ... )


그리하여 지금까지

고구려가

가우구리   --> 가우리, 고리, 고려(고리어 = 코리아korea) 등으로 발음되게 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당연히 [가우려] 라는 발음은 성립되지 않으며 있을 수 없기에 그런 발음은 없다.


고구려 라고 읽는 것은

려麗가 당시 중국 발음으로 [려] 였으며 오랜 세월을 그렇게 내려 오다가

요, 금, 원, 청 등의 만주 북방 세력이 중국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그 영향으로 [려麗] 발음이 북방식의 [리] 로 변하여

오늘날 북경 중국어는 [리] 로 발음 하게 되었다.

물론 북방의 영향을 적게 받은 홍콩에서는 려麗를 [리아] 라고 발음한다.



정리해보면

광개토대왕이 부여를 정복하고

백제와의 정통성 시비가 끝났음을 알리려고



고구려 ( 가운데 골 城 )  -->  고려 (고씨의 나라)  


로 국호를 바꾸는 바람에 고구려가 고려로 된 것이다.


고구려 건국 초기 고구려인의 당시 발음은

가우구리

국호 변경후 고구려인의 발음은

고리 , 고려  (둘다 허용)



현재 중국인들은 북방의 영향으로

[고]발음을 [가우, 가오]로 바꾸었기 때문에


고려를  가오리 라고 함

18 세기 조선의 실학자 박지원의 글에

청淸나라 아이들이 사신일행에게

 [ 가오리 哥吾里 ....] 라고 부른 내용이 나옴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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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노 15-03-05 14:59
   
부여가 완전히 멸망한 시점이 345년 경으로 알고 있는데, 그 보다 몇 대 후에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등장합니다.
시차의 간격이 많이 나지 않나요...
그리고 고구려는 자신들의 출자를 북부여라고 한정해 말했지 나머지 부여에 대해 적통임을 주장한 적 없어요. 반면에 백제는 부여가 멸망하고 그 잔존세력들이 남하해 백제의 왕이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바로 근초고왕이고 이때부터 백제 왕족의 성씨가 여씨, 부여씨가 되고, 국호도 남부여로 바꿀 정도로(동성왕 즈음일 것임) 부여의 후손임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오부족 연맹의 나라이기 때문에 함부로 성씨로 국호를 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원래 고구려 왕족은 해씨였어요. 해모수, 해명(대무신왕 형), 해무휼(대무신왕), 해색주(민중왕), 해우(모본왕) 등 왕과 왕족이 모두 해씨임.
5대까지 해씨였는데 태조대왕때부터 고씨가 집권합니다. 신하에게 5대 모본왕이 암살당해 죽는데, 그가 사람의 몸을 밟을 탔다는 등 필요이상의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죠. 이는 쿠데타로 집권한 왕이 이전의 왕을 폭군으로 묘사하는 것과 같은 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6대 왕의 시호가 태조인 것 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태조는 주로 나라를 연 왕한테 붙이는 시호니까요...
이런 마당에 자신들의 성씨를 가지고 나라 이름을 짓기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열심히공부 15-03-05 15:35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동부여가 410년 광개토왕에게 망하고

부여의 나머지 세력은 

494년 고구려의 문자명왕에게 항복하여 멸망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410년 어간에 고구려가

부여라는 이름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부여를 넘어서는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국호를 그리 바꾼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6대 태조대왕부터 고씨라고 한다고 해도

광개토왕까지 300년이 지난 후이므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되어서

더 이상 신하들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고씨를 나라 이름으로 정한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고씨의 나라 가 아닌 다른 뜻으로

국호를 바꾸었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더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님의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디노 15-03-05 16:11
   
부여는 346년 모용씨의 공격을 받아 국가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어요. 모용씨에게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왕족의 일부와 약간의 부여인들이 남옥저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의 부여는 부여라기 보다 남옥저에서 명맥을 유지해 가던 잔존세력으로 봐야 맞을 듯 한데, 이들을 멸망시킨 것에 의미를 두고 나라 이름까지 바꾸었다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 아닌가 봅니다.
               
열심히공부 15-03-05 16:24
   
국호를 바군 것이

-. 부여를 멸망시켜서가 아니라

-. 형제(이복이든 실제든)가 세운 경쟁자인 백제에 대해

너희는 부여에 집착하든 말든 맘대로 해라

우리는 이제 부여를 넘어선 고씨의 나라이다 라는 선언으로 보는 것입니다.

[고씨는 상국(높은 나라)라는 의미도 포함해서]


님의 예리하신 지적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사실

고씨의 나라 외에

가운데 나라 (中國)의 의미도 있다고 생각도 해봅니다.

가우리아(central nation)으로 高麗도 생각해 보지만

너무 국뽕이지 않을까하는 지나침에 경계도 해봅니다.

역사 해석이 항상 주관적으로 흐를 경향이 커서리...ㅎㅎㅎ
          
디노 15-03-05 16:25
   
또한 님이 말하는 410년의 동부여 멸망은 논쟁이 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동부여 멸망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은 없고 같은 시기
 "나라의 동쪽에 독산 등 6성을 쌓아 평양의 민호를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데 그 이전 독산은 고구려의 동쪽에 있는데도 백제의 영역으로 나옵니다.
근초고왕 28년 "독산성의 성주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도망쳤다" 라는 기록입니다.
이에 대해 백제왕이 신라에 서신을 보내는데,
"두 나라가 화합하여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지금 대왕이 도망한 우리의 백성을 받아들이면..."

이런 기록들로 보면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동부여는 독산이고 이곳은 백제의 영역 혹은 백제가 이 지역의 부여인들을 자신들의 백성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꼬마러브 15-03-05 17:50
   
글쎄요..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동부여가 독산이라고요? 광개토대왕비문에는 동부여는 그냥 동부여라고 나옵니다..
광개토대왕 비문 -中-
영락 20년 경술년에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왕께서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하셨다. 군대가 (부)여성에 이르자 온 나라가 놀라 ㅇㅇㅇㅇ, 태왕의 은혜가 널리 퍼졌다. 돌아올 때 (태왕)의 덕을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온 사람이 있는데 미구루압로·비사마압로·서사누압로·숙사사압로·ㅇㅇㅇ압로이다. (태왕께서) 공격하여 함락시킨 성이 64개, 마을이 1,400곳이었다
                    
디노 15-03-05 20:02
   
광개토대왕비문에는 동부여라고 나오는 게 맞습니다.
한데 같은 시기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동부여 멸망에 대한 기사는 없고 고구려가 독산지역에 성을 쌓고 평양의 인구를 옮겼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같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 동부여라고 한 지역이  삼국사기의 독산일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지요.
꼬마러브 15-03-05 18:00
   
그리고 개인적으로 동부여가 410년에 멸망했다고 하는 것은 부정합니다..

자치통감 진기 영화 2년조의 기록입니다

 처음에 부여는 녹산에 거주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퇴하고 흩어져서 서쪽의 연 가까이로 이주하였으나 미리 방어를 하지 않았다. 연왕 황은 세자 준을 파견하여 모용군·모용각·모여근 세 장군과 군사 1만 7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부여를 습격하도록 하였다. 준은 중군에 있으면서 지휘를 하고 군대의 업무는 모두 각에게 맡겼다. 마침내 부여를 빼앗고 그 왕 현(玄)과 부락 주민 5만여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모용황은 현(玄)을 진군장군으로 삼고 그의 딸을 처로 삼도록 하였다.

위 기록에 따르면 부여는 원래 녹산에 거주했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고 모용선비가 세운 연나라 가까이 이주하였는데 방비를 못한 탓에 연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멸망한 부여왕을 진군장군으로 삼고 연나라 모용황의 사위로 삼았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백제의 대륙 진출의 증거가 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 기록에 나오는 부여는 북부여일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 위에 올린 광개토대왕비문을 보면 동부여는 영략20년까지는 실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10년) 참고로 이 기록은 346년의 기록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기록의 부여가 동부여였다면 410년까지 실존할 수 없었겠죠.. 즉 이 기록에 나오는 부여는 북부여이고 동부여는 문자명왕때 멸망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문자명왕  3년(서기 494년) 2월,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 기록에 나오는 부여가 바로 동부여일 것이라고 생각함..
     
디노 15-03-05 20:26
   
자치통감의 기록에 부여가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퇴하였다는 기록에서 백제는 원래 고구려인데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동부여라는 명칭은 광개토대왕비문, 모두루묘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국내의 기록에만 동장하고 중국의 기록에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 명칭이죠. 북부여의 경우는 중국 위서나 신당서에 간략하게 언급되는 정도예요.
그리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동부여는 대무신왕 때 서기 22년에 이미 멸망해 없어진 나라로 나옵니다. 그래서 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동부여의 실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실정인데, 광개토대왕비문의 동부여는 남옥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리고 그곳이 독산이라는 겁니다.
          
꼬마러브 15-03-06 00:01
   
광개토대왕비문의 동부여가 남옥저를 지칭한다? 의견을 더 들어보고싶네요.
그리고 삼국사기에 동부여가 대무신왕 때 이미 멸망해 없어진 나라로 나온다고 하셨는데...

삼국사기 대무신왕조의 기록입니다

“내가 부덕하여 경솔하게 부여를 공격하였다. 비록 그 왕을 죽였지만 그 나라를 멸망시키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우리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
곧이어 전사자를 직접 조문하고 부상당한 자를 문병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임금의 덕행과 의리에 감동하여 모두 나라 일에 생명을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삼국사기에서 동부여는 왕이 죽임을 당하였어도 끝까지 투항하여 결국 고구려군사들을 겹겹히 쌓아 고구려의 동부여정벌의 야심을 무너뜨립니다.

이에 더 보태서 비슷한시기 위서의 기록을 보더라도

여율(如栗)이 죽자  막래(莫來)가 대를 이었다. 막래는 임금이 되자 부여(夫餘)를 쳤다. 부여가 크게 졌다. 마침내 부여를 합쳐 고구려 밑에 두었다.

여기서 고구려왕인 막래가 부여를 속국으로 삼았다 나오는데 위서를 보면 막래 이전의 고구려왕은 여율로 나오고 또 여율은 고구려 3대왕이라고 합니다(대무신왕) 즉 여기서 나오는 막래는 4대 민중왕 또는 5대 모본왕이겠죠.. 개인적으로 5대모본왕이라 생각함
               
디노 15-03-06 03:45
   
대무신왕 5년 서기 22년
2월의 기사
님이 위에 적어 놓으신 부여왕 대소의 죽음 이후,

3월의 기사에
대소의 동생이 압록곡에 갈사국을 세운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대소왕이 태자가 없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나라 안이 어지러웠던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7월의 기록
부여왕의 종제(從弟, 사촌동생)가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선왕께서 돌아가시고 나라가 멸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다. 왕의 동생은 도망하여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 역시 어질지 못해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
마침내 1만여 명을 데리고 투항해오니 임금이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있게 하였다.

이것이 동부여가 망한 기록입니다.
                    
꼬마러브 15-03-06 19:00
   
흠 그렇네요. 동부여가 고구려에 속하게 된것은 모본왕 이후라 보지만 동부여가 멸망한 때는 대무신왕 때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부여는 그 후에도 여러번 독립을 했던 것 같네요
찌짐이 15-03-05 21:50
   
명칭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고려든 구려든 고구려든 조선이든 고조선이든 다 한민족을 얘기하는 건데
     
열심히공부 15-03-06 08:35
   
옳으신 말씁입니다.

그 당시에 어떤 명칭을 사용했든지간에

다 우리 조상들이 이룩하고 번성시켰던 나라였고

그 후손들이 우리라는 것을 잊지않는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투 15-03-06 18:56
   
아 이런 설도 있구나 하고 보고 넘어가시면 될지 않을까 싶네요.
이게 바로 진리인듯이 생각하지는 마시고요.

우리 나라 국가  명칭 의  정확한 기원 또는 어원도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왜 고구려 인지 왜 부여라 했는지 왜 조선이라 했는지 왜 백제 신라라 했는지... 
이런 고민는 계속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KilLoB 15-03-07 22:11
   
오호~~ 뭔가 사소한듯하지만 흥미롭습니다... 좋은글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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