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해를 당한 장애인은 자택에서 참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쪽이 아직 생활하기 편했다」파괴된 자택에서 사는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스즈키 아키미씨(51)는, 불쑥 말했다.
스즈키씨는 6년전, 다발성 경화증이라고 하는 난치병을 발증.시신경 등 중추 신경계에 염증을 반복하는 병으로, 눈앞의 것이 거의 안보이게 되고, 자주 오른쪽 반신이 저려 일어서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지진 재해로 자택이 해일에 피해를 당하자 가까운 피난소로 향했다.그러나 어슴푸레한 체육관에서는 시중이 없으면 걸을 수 없었다.「길을 기억하는 경우에는 천천히라도 걸을 수 있지만, 넓은 체육관에서는 사람의 머리나 다리, 난로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패닉이 되어 버려」
화장실을 참으면 좋다고 생각했지만, 물을 마시는 것을 자제하다보니 컨디션이 무너졌고, 몸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가족을 잃은 사람이나 자기보다 고령의 사람이 협력하여 피난소를 운영하려는 와중에,「자신이 움직이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다」라고 생각하면 괴로워서 견딜 수 없게 되었고, 지진 재해로부터 2일 후, 흙투성이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2명의 아들은 독립해 지금의 남편과 2인 생활.자택은「밝은 것이 보이기 쉽다」라고 해서 지난해 큰 창 부터 리폼을 해오고 있었다.기반 틀이 무너지고 1층은 마루 위 1·8미터 정도 침수.벽에는 구멍이 뚫렸다. 필수품도 대부분은 떠내려가고 없었다.자택에 남은 음식과 이웃의 사람들이 나누어 준 것으로 잠시 목숨을 연명할 수가 있었다.
4월 들어, 다니고 있던 난치병 지원 센터의 직원과 연락이 닿아 지원 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이시노마키시가 파견한 보건사는 6월에 도착하였고.「고령자나 장애인의 대한 지원은 없나요」라고 물었으나,「피난소가 아니면 지원은 받을 수 없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지금도 지원 단체가 가져다 주는 식료나 생활 용품에 의지하고 있다.4월 하순에 신청한 가설 주택은 아직도 응답이 없고, 여진이 올때마다 자택은 조금씩 기울어 간다.
지진 재해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게 되어, 증상이 악화된 사람도 있다.
「휠체어, 사실은 손놓고 싶지만」.이시노마키시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복지 피난소에서 생활하는 타카하시 노부유키씨(34)는, 만성 관절 류머티즘으로 오른쪽 다리가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다.그래도 지진 재해전은, 지팡이를 사용해 걸을 수 있었다.
자택은 지진 재해로 반괴.화장실이나 목욕탕을 사용할 시에는 차를 이용하여 밖으로 나와야 했으며, 부모와 형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자택 정원에 주차시켜 놓은 차 안에서 생활했다.조수석의 시트를 접고 다리를 뻗어, 숙박 하는 날들이 3개월 정도 계속 되었다.
지진 재해전은 재활훈련의 계획에 따라서 센다이 시내의 병원으로 주 2회 통원을 하였고, 관절을 풀어, 보행 훈련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지진 재해 후 3개월간 통원 치료도 받지 못하고,
약도 구할수가 없었다, 이제 휠체어 생활은 피할 수 없게 되버린 것이다.
이시노마키시의 직원이 자택을 방문하여, 간호가 필요한 고령자나 장애인을 받아 들이고는 있지만 복지 피난소를 개방한 것은 7월 10일.지금은, 데이 서비스로 가벼운 운동이나 입욕은 할 수가 있다.하지만,
「좀 더 빨리 눈치채 주지 않았던 것일까」라고 하는 생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산케이신문 8월 21일 (일) 2시 28분
번역기자: 깐따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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