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년 고구려가 멸망했다.
이로써 한반도 민족의 기가 끊기게 되었다.
7세기는 인류 대격변의 시기였다.
서아시아에서는 '인류의 아버지' 메흐메트가 등장하여 민중의 강한 지지를 얻으며 불과 1세기만에 중앙
아시아와 스페인을 휩쓸었다.
동아시아에서는 태종이 등극하여 동으로는 고구려와 백제, 서로는 아프가니스탄까지 진출하였다.
양대 세력은 751년 탈라스에서 대격돌하였다.
당나라 편에서 전투를 이끌었던 고선지 장군은 비운의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다.
어째서 그는 남의 나라를 위해 전장 한복판에 서야 했을까?
고구려에서 태어나 고구려 장수로 활약했더라면 남의 나라 군대를 이끌고 남의 나라 군대를 살육하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 모든 원인 가운데에는 신라와 김춘추가 있었다.
648년, 신라의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 댓가로
대동강 이북의 땅을 약속한다. 마치 이승만이 38선 이북의 땅을 포기하는 전제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대한민국의 불행한 현대사와 매치된다.
642년, 백제 의자왕의 집요한 신라 공격은 대야성 공격으로 이어졌고, 김춘추의 사위와 딸은
대야성 한복판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의자왕이 그토록 집요하게 신라를 공격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551년, 백제와 신라, 가야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북진군(北進軍)을 일으킨다.
북진군은 백제군을 주축으로 하여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군과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가야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었다.
이 시기의 고구려는 안장왕(519~531)의 피살과 양원왕(545~559)대 외척 사이의 내분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북진군은 백제군이 먼저 평양(平壤: 지금의 서울)을 공격,
고구려군을 격파함으로써 승리의 기세를 잡았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죽령
이북 고현(지금의 철령) 이남 10군을 점령했다.
그러나 신라로써는 최초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된 것이었고, 이는 신라로 하여금
새로운 탐욕을 꿈꾸게 만들었다.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한 신라의 진흥왕은 553년에 돌연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지역마저 점령하는 가열찬 뒷통수를 날린다.
동맹국 신라의 배신은 백제의 갓 회복한 한강 유역 상실은 물론, 북진의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백제는 신라에 대한 보복공격에 나서고, 이번에도 가야는 원군을 파견해 백제군에 가세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어난 양국의 전투는 관산성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관산성 전투의 초기에는 백제가 우세해 신라군을 여러차례 패주시키며 승기를 잡는 듯
했으나, 백제 왕 성왕이 전선에 나가 있는 태자 여창을 위문하러 가는 길에 신라 복병의 매복에 걸려들어 죽임을 당하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왕이 허무하게 죽자 백제군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이로써 최종적으로 고구려에 수복한
한강 하류를 신라에 빼앗기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게 의자왕의 대야성 복수의 전말이다.
그러나 신라는 난생 처음으로 백제를 패퇴시키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나니까 은근슬쩍 고구려까지 먹을 욕심이 생겼다.
고구려는 과거 신라가 왜구에 유린당할때마다 여러차례 군사를 원조해줄 정도로 우방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딸과 사위를 잃은 김춘추가 가장 먼저 찾아간곳은 원래 고구려였다. 김춘추는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이던 연개소문에게 백제에 복수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빌자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원래 고구려 땅이었던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하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김춘추가 놀라 거부하자, 연개소문은 이 염치없는 놈이 자기 사위와 딸이
죽었다고 그저 원한만을 갚으러 고구려에 온 것이 아니더냐며 당장 김춘추를 객관에 가두라고 명한다. 그리고 날이 새면 목을 치겠다고 엄포한다.
김춘추는 고구려 왕실 측근 인사인 선도해를 뇌물로 매수하여 살아남기 위한 계략을 구한
뒤, 고구려의 보장왕에게 귀국하면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신라 왕에 청하여 돌려주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일화가 그 유명한 판소리 소설인 '별주부전'의 배경이다.)
그러나 김춘추는 귀국 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대신 당으로 건너가 태종에게 대동강 이북의 땅을 떼어주기로 약속하고 당나라 군대를 빌리는데, 이렇게 해서 나당 연합군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웃기지 않은가? 조령과 죽령 이북은 원래부터 고구려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어차피 당나라에 그렇게 쉽게 넘겨줄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춘추는 고구려를 버리고 당나라와의 동맹을 택했다.
그 뒤 이야기는 여러분이 아는 그대로이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와 고구려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660년과 668년에
두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킨다.
그리고 과거 연개소문이 신라에 요구한 조령과 죽령 이북은 물론이요, 대동강 이북의
땅을 송두리째 당나라에 떼어 넘겨준다.
당나라에 이렇게 쉽게 넘겨줄거였으면 애초에 연개소문이 조령과 죽령 이북을 반환하는 댓가로 신라를 도와주겠다고 했을때 왜
거절했단 말인가?
그 후 당나라 고종이 신라 땅 전체를 빼앗을 계획으로 신라를 공격하자 나-당 전쟁이
일어난다.
당 태종의 아들 당 고종은 한반도의 마지막 구원 투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필자는 만약 이때 한반도가 중국 땅에 편입되었더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만약 그랬다면 미개한 신라의 통치를 받는 대신 적어도
천조국에 편입되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또 나중에 기회를 보아서 독립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당나라의 방심과 이적 장군의 결정적 전술 미스로 매소성 전투(675)와 기벌포
전투(676)는 신라의 승으로 싱겁게 끝나게 되고
이로써 한반도의 마지막 구원 카드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대동강 이북을 포기한 미완의 통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카스트 제도로서 골품제가 한반도에 정착됨으로서 계층간의 이동을 막아 이후 한민족의 역동성이 축소되는 기형을 낳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