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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6-10 17:46
[기타] 금나라가 발해를 계승한 국가인가요?
 글쓴이 : 대은하제국
조회 : 3,712  

이게 사실이면 금나라는 한국사가 맞지 않나요?
 
청나라는 한국사가 아니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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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짐이 14-06-10 18:15
   
같은 동이족이긴 한데 예맥족은 아니고 만주족임

청나라는 한국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국사(한족사)도 아닌 만주족사
나와나 14-06-10 21:57
   
금나라, 여진족의 정체성은 발해보다는 신라에 가까웠죠 ㅋㅋ

여진족은 신라인 지배층+발해 유민 등으로 이루어져 혈통만으론 그냥 한국인이고,
문화적으로도 신라, 발해(고구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서 언어,문자 등도 고려와 유사했죠

즉, 여진족 자체가 한민족으로 봐도 무방하고,
게다가 금나라는 여진족+발해 부흥세력의 연합국이었기 때문에 금나라는 한국사죠

그래서 청나라는 몰라도 금나라는 한국사로 바로잡을 지에 대해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알아요
gagengi 14-06-10 22:00
   
금나라는 신라김함보가 시조이기 때문에 계통상으로 신라를 계승했다고 봐야합니다.
최초의 여진족은 김함보이고 초기 언어는 당연히 신라어였습니다.

청나라의 원래 국명은 금나라입니다. 후에 청으로 바꾼 것뿐이죠. 금청사 모두 원래 한국사로 최초 국사교과서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금청사를 원래대로 한국사로 복원해야합니다.

여진-고려는 공통의 언어/문화를 가진 민족공동체: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4455
여진족 초기 언어는 신라어:
http://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4456
모래곰 14-06-11 01:04
   
초반에 금나라가 병사가 적어 발해인에게 한 집안이라고 주장했는데
발해인은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금나라가 힘이 세지니까 어쩔 수 없이 같이 싸웠는데
금나라가 송나라를 밀어내고선 토사구팽을 했다고 하죠.
그리고 힘을 모으지 못하게 흩어놨다고 합니다.
니들은 여진족이 아니니까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거였죠.

천추태후라는 맛탱이가 간 드라마에서 발해인을 홀대했다고 헛소리를 했는데
실제로는 태조 왕건은 유민들을 데리고 망명온 발해왕자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고
우대를 했고 통일전쟁에 발해유민도 힘도 보탰죠.
대광현의 할아버지가 마지막 발해왕 대인선인데 태조 왕건은 대인선을 구출하려고
후진의 석경당에게 같이 거란적을 치자고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근데 후진이 대답을 미루니 성사가 안됐는데 나중에 후진에서 제안할 때는
왕건이 세상을 떠난 후라서 성사가 안됩니다.
그만큼 발해를 형제라고 생각했다는 말이죠.

금, 청을 우리 역사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주원류고에 나온 김함보라는 것을 너무 확대해석하면
고려는 중국 당나라에서 갈라진 왕국이 됩니다.
중국에서도 그런 낌새를 보이는데
결국 그런 주장을 돕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배경이 없다가 창업자가 된 집안에서 권위를 빌려썼다는게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경우는 여진족은 소수고 대부분 잡탕민족으로 이뤄졌는데
그래서 만주족이라고 개칭했는지도 모릅니다.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하기 전에도 청나라의 구성원은
만주에 살던 모든 찌끄러기 민족과 조선, 몽골, 명나라 사람으로 구성됐죠.
     
블루로드 14-06-11 11:34
   
초반에 금나라가 병사가 적어 발해인에게 한 집안이라고 주장했는데
발해인은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다고 합니다.
ㄴ 발해인이 자존심 상했다는 말에 대한 근거가 뭡니까?

그러다 금나라가 힘이 세지니까 어쩔 수 없이 같이 싸웠는데
금나라가 송나라를 밀어내고선 토사구팽을 했다고 하죠.
ㄴ 금 나라가 발해인(발해인 후손)을 토사구팽 했다는 것에 대한 근거가 뭡니까?
그리고, 금 나라가 발해인들을 토사구팽 했다면, 그 발해인들이 토사구팽 당한 자리에는 어떤 사람들이 새로 들어가 차지했습니까?

다른 것도 많지만, 일단 두 가지만...

님이 말한 모든 말이 님의 상상력 속에서 나온 거짓말이 아니기를..
          
굿잡스 14-06-11 15:53
   
그러다 금나라가 힘이 세지니까 어쩔 수 없이 같이 싸웠는데
금나라가 송나라를 밀어내고선 토사구팽을 했다고 하죠.
>>??

이건 상당히 잘못알고 있군요. 물론 금나라 3대 희종이 폭군 기질에 금황실에서

득세를 하고 주요 요직에 있는 창업 연합세력이였던 발해인들을 차별했던 건 사실인데

이게 결국 화를 부르면서 발해계 해릉(아골타의 서장자 종간과 발해여인 대씨사이에서 태

어남)이 황제로 전면에 오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한마디로

이 희종이라는 사람이 발해인을 차별 두다가 거센 반발로 도리어 이 양반이 켁~ 되어 버림.

그기에 이후의 해릉조차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계속해서 피비린내 나는

숙청속에서 폭군의 기질을 보이다 보니 송나라 정벌의 중축 병권의 핵심이였던 발해인 곽안국에

의해 시해되면서 금나라의 성군이며 전성기를 이끌었던 세종이라는 발해계(아골타의 아

들 종보와 발해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남)가 요양에서 황제로 다시 옹립됩니다.


도리어 이런 금나라의 구체적 황실의 사건들을 보면 동북아의 패권을 잡던 금나라의

100여년의 결코 길지 않는 기간중에 발해계 황후가 무려 4명이나 포진해 있고 이런

발해인(고구려계)이 얼마나 금나라 황실에 상당한 입지와 영향력을 가지고 금황제

폐위와 옹립까지 좌지했던걸 더욱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나중에 시간나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겠지만 이런 이유는 마치 개성의 토착 호족

세력이였던 왕건이 비록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만 통혼을 통해 주변 수많은

토착 재지 호족을 받아 들이며 안정화를 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당시

발해인들은 여전히 만주에서 상당한 인구수와 특히나 정치적 즉 행정, 병권, 도시문명의

중축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금나라 창업의 중요한 한축을 담당했다는 것임.

이때문에 비록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바뀌고 신라계가 일부 말갈계를 복속해서

여진족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규합을 시켰지만 여전히 이 발해계라는 오랜 토착

재지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아골타도 일가로 표현했고 실제 발해인 300여만명중에

190만에 이르는 발해인들이 여전히 발해 도시에 남아 있었고 나머지 흩어진 인구중에서도

60여만이 북쪽으로 올라가 아골타 세력의 기반이 되었음. 그외 동만주 일대에

몰려 발해 멸망 이후에도 끊없는 발해 부흥국이고 반란이 거세지자 요가 상경용천부의

발해인들을 대대적으로 요양일대로 이주시켰고 이곳이 금나라가 송을 멸망 밀어내고

북경에 고구려계 장호가 중도를 건설하기 전까지 요양은 금나라의 수도로써(이후로도

부수도로) 중심 역할을 했기에 특히나 이일대를 중심으로 상당히 포진해 있던 발해인들

의 영향력은 일반인들이 아는 것보다 매우 컸습니다.

그리고 어디 자꾸 무슨 후대 고려내에서 유행하던 일종의 쭝뽕 사상에 의한 일종의

야사같은 내용을 가지고 제대로 다른 나라에도 언급되지 않는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고려황실의 당나라설 어쩌고와는 달리 엄연히 아골타의 신라계 기록은 고려사부터 금,

송이고 삼국에서 다 기록으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다른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특히나 송나라 군주가 만주로 압송되어 송환을 위해 당시 직접 보고 기록한 송막기문의

경우 이 사신이 금황제를 신라계로 알고 기록했다는 점은 이 금황제가 대외적으로

당시 신라계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있었다는 정황에 설득력이 높음)

우리가 이걸 가지고 금나라와 무턱되고 단순 비교해서 물타기식으로 휘둘릴 필요도

전혀 없고 역사적 고증도 부실함을 다시금 이야기 하고 싶군요.(금나라처럼

고구려계가 좌지했던 구체적 역사적 사례들이 고려황실에 당나라계 어쩌고 식으로

존재했고 실제 활동을 했던게 있으면 함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모래곰 14-06-11 15:59
   
발해인은 여진족이 자신들에 밑에 속했던 종족이라는 생각에 아골타가
여진과 발해인은 한가족이니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발해인은 당연히 분노를 했습니다.

발해인이 차별를 받았다는 것은 '송막기문'에 나왔다고 하더군요.

국가의 형세가 점차 성대해짐에 미쳐서는 황통(皇統 금나라 희종(煕宗)의 연호) 5년(1145)에 요동의 발해인과 한인(漢人)이 맹안과 모극을 승습하는 제도를 혁파하여 점차 병권(兵權)을 내족(內族)에게로 옮겼다. 《금사》 식화지(食貨志)에, “모든 한인과 발해인은 맹안과 모극에 충임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다. 9년 8월에는 재신(宰臣)들의 의논에 따라 요양(遼陽)에 있는 발해의 백성들을 연(燕) 지방 남쪽으로 옮기고, 그 뒤에는 또 자주 산동(山東) 지방에서 수자리를 살게 하였다. 신유년에 이르러서 모두 내몰았는데, 옛 땅에 살고 있던 자들은 혹 거란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에 발해의 종족이 드디어 끊어져 전해지는 바가 없게 되었다
 
맹안모극이 뭔지는 아실테니 이게 토사구팽이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쓴 다른 글에 어떤 의문이 있죠?
저도 취미로 역사책을 읽지만 제가 쓴 내용들은 왠만하면 사람들도 다 아는 내용이죠.
기초적인 수준에서 쓴 것들인데 뭐가 다른 것도 많다는건지 웃기지도 않습니다.
고려왕실에서 당나라 황실의 이름을 빌린 사실에 원나라 학자가 앞뒤가 맞지 않음을
따지니 충선왕이 망신을 당할 뻔 한 사실도 있죠.
(이게 '고려사절요'에서 봤는지 다른 책에서 봤는지 모르지만 찾는게 귀찮으니
직접 찾아보세요.)
자꾸 금, 청이 우리 역사라고 떠드니 중국에서도 요즘은 이런 것을 빌미로 우기는데
이것에 항의할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 사람도 타민족을 가지고 이렇게 우기는데.

정말 답답합니다.
그런거 없어도 우리 민족은 충분히 자부심이 넘치는 민족이예요.
이러니까 기황후같은 요상한 드라마가 판을 치죠.
이게 사대주의가 아니고 뭡니까?
조선시대는 나름 얻을 것을 위해 그랬다고 생각하고 지킬건 또 지켰죠.
요즘 사람들은 요상한 만족감을 위해 큰 땅덩어리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굿잡스 14-06-11 16:17
   
고려왕실에서 당나라 황실의 이름을 빌린 사실에 원나라 학자가 앞뒤가 맞지 않음을
따지니 충선왕이 망신을 당할 뻔 한 사실도 있죠.>

잘~ 아시네요. 근데 이거랑 김함보 어쩌고는 전혀 다른 부분임을 윗글에 주지해서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 부분이 이해가 안되십니까?? 도리어 고려사는 이부분을

기록하고도 별로 시덥지 않게 일정 사실 기록만 해놓고 있습니다. 그래도 엄연히

이런 기록은 금나라 ,송, 고려 삼국에서 다 나오는 기록이기에 쭝뽕 맞아 이후

혼자서 고려황실 당나라계 어쩌고~~랑은 전혀 같은 부류로 언급하면 안되죠.



발해인은 여진족이 자신들에 밑에 속했던 종족이라는 생각에 아골타가
여진과 발해인은 한가족이니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발해인은 당연히 분노를 했습니다. >

물론 이건 당연합니다.

왕씨가 주도해서 고려를 세우면서 신라황실이 굴욕적으로 나라를 갖다 바치자

과연 이에 수긍만 한 부류가 있었을 까요? 이에 대한 반발로 나온게 다름아닌

신라계가 북으로 가서 말갈 일부 부락을 통합하고 여진족이란 정체성을 부여하고

역사적 전면에 나온게 그 자손 아골타이고.



<제발 논거를 정치인들 양비론식으로 물타기는 하지 맙시다.>

당연히 발해계 세력은 자신들이 정치적 대가리로 있고 싶죠. 그러나 당시 신라계

아골타의 힘에 눌릴수 밖에 없었지만 염언히 서로가 이해득실과 현실에 따라

손을 잡았고 그리고 님이 말하는 것처럼 금나라 황실에서 발해계 정치 집단이

마냥 토사구팽을 당할 만큼 입지가 좁거나 영향력이 약했던게 전혀~~ 아닙니다.

도리어 희종의 이 사건은 앞서 말한 것처럼 발해계의 정치적 거센 반발로 결집을

통해 발해계 황제가 전면에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음.(실제 발해인들은

금나라의 건국부터 이후 전성기와 몰락까지 함께하며 주도적 입장에 있던

위치였음. 도리어 송과 몽골의 압박에 흡수했던 거란세력들이 배신하면서

금나라가 급격히 무너진 원인이 됩니다.)
                    
모래곰 14-06-11 18:08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정말 심각하시군요.
왜 사람들이 관심을 끊으라고 하는지 알겠습니다.
님같은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어린 친구도 아니고
제가 어떻게 생각을 돌리겠습니까만
한가지 묻자면 그렇게 자신감이 없으십니까?
이것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잃어버린 자신감일까요?
일본인들이 칭기스칸이 요시츠네라고 하는 것과
칭기스칸을 중국역사라고 말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예전에 가생이에서 조선족이신 분과 대화를 한 적이 있죠.
이분이 그래도 다른 조선족과 달리 한국에 자부심이 있는 분이더군요.
그 분이 말하길 만주족들이 한국을 비웃는데 할 말이 없다는거였죠.
이유를 물으니 금, 청을 자신의 역사로 생각한다고 비웃는다더군요.
자신들이 버젓이 있는데 그런다고 자존심도 없는 놈들이라고 했다던가 그랬습니다.
제가 그랬죠.
그건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동북공정으로 자국역사로 편입하려는
술수에 대항하려는 의도이지 우리는 우리만의 역사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는데
제가 그분에게 실수를 했군요.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서로 비방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굿잡스 14-06-11 18:27
   
ㅋ 역사 이야기 하시면 논증을 들고 오세요

맹안모극 어저고 저런 일단의 조치들이 발해계에 거센 반발을 일으켜

발해계 황제가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을 아직도 이해를

못하시는 것입니까? 아님 님이 어설프게 사용한 토사구팽이 적절하지 못함을

인정못하고 이런 억지를 부리시는 겁니까?(실제 희종이후 해릉이고 세종이고

계속해서 발해인들이 주요 요직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건 뭘 말합니까?)

제가 지금 짓어낸 허구를 이야기하는가요????


그리고 <아직도 이 금사는 연구할 게 많습니다. 비록 저도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님처럼 어설프게 단정짓는 어리석음은 지양하는 측면에서는

그래도 현명하지 않나 싶군요.>  좀 더 공부하시고

전 이만.
굿잡스 14-06-11 16:08
   
그리고 고당 2차대전에서 대패를 하면서 전쟁을 포기하던 당나라가 이후 고구려 내분으로 국방부 장관급인

연남생이 일부 거란족을 데리고 투항하면서 다시 불붙게 된 당나라가 빠른 진격으로 수도 평양성

함락에는 유효했지만 이후 건재했던 황해도부터 요동일대의 고구려 군사들의 거센 항전으로

안동도호부가 제대로 세워지기도 전에 요동 요서로 밀려나면서 이후 30여년이 안되어 발해가 세워집니다.


그런데 이순간에 참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는 용어가 고구려 전역으로 등장합니다.

한마디로 발해가 들어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 저기 <말갈> 이라는 용어가 들어차고 결국

발해 구성원 대다수가 말갈 어쩌고 소수만 고구려계 어쩌고 합니다.

천년사직에 버금가든 고구려 이후 채 30여년이 안되어 다시 그 지역에 발해가 세워지자 말자

고구려백성이 어떻게 말갈로 다 채워지는지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면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죠.

이점은 이전에도 댓글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발해사 전문가인 한규철 교수의 <발해국의 주민구성에 관한

연구> 논문을 통해 사료적, 고고학적 토대를 통해 구체적이고 잘 설명해 놓았으니(고구려시대 지방민의

비칭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울지역사람은 지방 사람을 촌놈 어쩌고 부르듯 특히나 고대에는 수도나 대도시의

성곽 아닌 곳의 사람은 이런 비칭들이 존재했음. 이런 말갈이라는 지방 비칭어를 마치 고구려백성이

아닌 전혀 다른 이질적 집단이 고구려 천년 왕조속에 숨어서 상당한 세력?이 비밀리에 활동하다

30여년이 안되어 발해가 들어서자 말자 전면에 나왔다는 식은 마치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면서

서울 조선인 동래 조선 사람과 현대 서울인과 부산사람들이 전혀 다른 이질적 집단이 새로 나타나고 다른

사람이네 어쩌고 넷에서 떠벌리는 웃긴 헛소리와 다르지 않는) 시간되시면 한번씩 읽어 보시길.
꿈꾸는자 14-06-11 21:10
   
일본사신이 바다건너 오늘날의 연해주에 도착하여 연해주의 한촌락을 보고 그곳의 주민구성을 지배층은 고구려계 피지배층은 말갈족이라고 기록했는데..그게 확대해석되서 발해의 인구구성전체가 소수의 고구려계가 다수의 말갈족을 지배하는 사회라고  우리가 현재 잘못배우고 있는 겁니다..
뭐 친일사학의 영향이죠..일제시대 조선총독부산하의 조선사편수회의 일본사학자와 거기에 동조하는 친일매국사학자 이병도의 후예들인 강단사학의 폐해고..
고구려인 69만호 물론 호구에 기록되지 않는 인구도 상당히 많겠죠..만주는 가축을 방목하면서 유목하기엔 최적의 장소가 많죠..당연히 기마민족인 고구려인중에는 정착한 기마민족과 유목생활을 하면서 가축을 기르는 유목민이 모두 공존할겁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호구에 기록되지 않는 수가 어마어마했으니..비교도 안되게 광할한 영토를 가진 고구려라면 호구에 기록되지 않는 인구도 당연히 많을 겁니다..
     
나와나 14-06-11 22:10
   
네 맞습니다. 당나라에 유학하던 일본 승려가 건국 초 발해의 소규모 촌락보고 서술한 걸 순진하게 믿고 그대로 가르치는 게 현 한국사의 실정이죠...
이 블로그에서 발해인의 구성원 대다수가 말갈인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헛소리인지 잘 나옵니다 ㅋㅋ
http://m.blog.naver.com/peelip/80004835786
꿈꾸는자 14-06-11 21:21
   
고당전쟁기간에 많은 인구가 전란으로 죽었고 특히 고구려가 패망하면서 아마도 엄청나게 죽었을 겁니다..
적에게 죽은 사람도 많을테지만 패망후 무정부상태의 혼란기에서 수년간 굶어죽은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거기에 고구려 패망후 공식적으로 평양성주위의 인구 20만이 당으로 끌려갔고 신라로도 10만명이 끌려갑니다..
이때 신라로 끌려간 10만명이 후에 신라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익산으로 대규모 이주됐는데..거기서 거병했죠..
그리고 수를 알수없는 고구려인들이 돌궐등으로 탈출합니다..그 외에도 기록되지 않는 고구려인들이 당나라에 더 끌려갔을 거라고 생각됩니다..영주등에 거주하던 고구려인들은 초기에 끌려간 20만의 고구려인은 아니라고 보입니다..초기에 끌려간 이들은 노예로 고구려멸망에 공을 세운 자들에게 노예로 일부는 하사되고 민간에도 많이 팔려갑니다..
수나라 당나라시대에는 인육시장이 장안이나 낙양같은 수도를 포함하여 중국전역에서 합법적으로 거래됐는데 고구려멸망후 들어온 포로들의 노예화로 인육값이 폭락했다고 기록이 전해집니다..
나머지 포로들도 중국 변방 전역으로 흩어져서 농노화 됩니다..죽을때까지 강제노역과 농사에 전념하거나 병사로 당나라 국경을 지키고 전쟁에 나가고..여자들은 더 비참ㅠ_ㅠ..
꿈꾸는자 14-06-11 21:41
   
그래서 발해가 세워진지 수십년이 지난후에도 발해는 고구려멸망전의 인구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인구가 적으니 당연히 군사력도 고구려보다 약했을 테고..물산의 생산도 적었겠죠..

팩트는 고구려멸망과 망국의 혼란기속에서 발해가 세워질떄까지 30년간 고구려인구는 엄청나게 줄었을겁니다..임진왜란 직전과 진후의 인구에 대해서 오늘날의 학자들은 임란전 조선인구를 최소 800만에서 최대 1200만사이로 보고 있습니다..그리고 임란후의 조선인구를 최소 200만에서 최대 400만으로 보고 있죠..
그만큼 근대이전의 전쟁은 인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적에게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는 사람보다 전란기에 굶어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거죠..전쟁에 장기전이 될수록 더하구요..
뭐 고구려도 비슷했을 겁니다..고구려 패망후 발해가 세워질때까지 30년간 최소한 절반이상은 죽었을 겁니다..아니 3분의 1정도만 살아남았어도 많이 살아남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수나라가 고구려 원정실패로 패망하고 당나라가 세워지고 수십년이 지난 뒤에 당고종때 당나라 인구를 조사하니 수나라 양제때 890만호 였던 인구가 당나라 고종때 인구가 380만호 밖에 되지 않았죠..
그땐 이미 당나라가 세워진지 수십년으로 안정이 되서 호구조사가 제대로 됐을텐데..그정도로 전란은 근대이전의 인구감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당나라는 개원28년 즉 서기 740년에 당나라 인구가 841만호로 불어나는데 얼마나 전란이 무서운지 알수있죠..그때가 되서도 수양제때의 인구를 회복 못했으니..
     
굿잡스 14-06-12 01:43
   
고구려 패망후 발해가 세워질때까지 30년간 최소한 절반이상은 죽었을 겁니다>? 음..

님 당나라는 일시 평양성을 함락했지만 애초에 고구려 동만주와 북한 동북방은

밟지도 못했고 황해도와 요동일대의 건재한 고구려 군사력의 항전으로 인해 안동도호부도

평양성 일대에 제대로 처음부터 세워보지도 못하고 요동 요서로 밀려났던게 역사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요동반도 일대는 이미 소고구려를 자처하는 국가까지 들어섰다 발해

시기에 가면서 통합되고 고구려는 기본 전역을 5부로 나누어 삼경 체제와

5부 욕살로 다스렸는데  당나라가 끌고간 인구는 평양일대이고

그외 황해도는 신라 수중에 나머지 서부일대의 오골성부터 부여성 국내성이나 동만주 일대

주요 대형 도시들과 부수도격들의 고구려 백성들은 여전히 남아있고 건재했다는 사살임.

고구려 전문가의 견해 역시도 고구려 말 호가 69만호로 최소 350만이지만 이보다 많은

500만 정도에(당시 당나라가 제대로 고구려 전역을 지배못한 상황에서 나온 호구수)

고구려 부용 북방세력까지 다 합치면 고구려 세력권에는 천만 정도가 있었

다고 봅니다. 이과정에서 당나라 내지로 끌려간 인구와 신라로 귀순 흡수된 인구를

많이 쳐줘도 100만 내외겠죠.(그리고 영주에 끌려가 있는 고구려 백성들이 대조영의

주도로 다시 고구려 내지로 대탈출에 성공도 했고)
     
굿잡스 14-06-12 01:55
   
그리고 고구려시대와 발해 인구수 차이점은 달리 보면 고구려때는 북방의 주변 부용세력

즉 거란부터 실위(몽골),선비,말갈 그리고 신라를 신속하고 백제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고구려문명권으로 이에 따른 교통로와 경제권을 가지고 인구활용도도 높았지만

발해시기에 가면 이미 신라도 더이상 예전의 신라가 아니라 백제지역과 일부 고구려

남부지역을 흡수하고 남북국시대로 영토적으로는 발해보다 못하지만 결코 경제력이나 인

구측면 그리고 농업생산력에서는 적지 않는 역량과 영토를 보유하게 됩니다. 그에 비해

발해는 우선 고구려 시대에는 꺠갱하던 거란의 성장과 위협부터 과거 핵심 수도이고 농

업 생산 기반을 가졌던 평양과 황해도일대를 잃어 버림으로써 인구 부양력이나 수, 경제

력과 주변 영향력에서 고구려에 비해 떨어지는 형국을 보임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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