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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29 18:14
[기타] 의자왕, 정말 무능한 왕이였나 下
 글쓴이 : 기타사운드
조회 : 4,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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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지자 성충을 찾았다고 말했던 우리의 역사서, 개소리 말라 해라)

1. 의자왕은 황산벌 패전 이후 손놓고 기다렸나


 일주일 정도 황산벌에서 적을 막아내면 백제에게 승산이 있었다. 이유는 즉슨, 당시 강력한 방위군인 지방군들이 사비성 근처로 결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5천 정예병은 예상과 달리 이틀만에 무너졌다. 여기서 의자왕의 첫번째 계산은 빗나간다.


하지만 손 놓고 기다릴수도 없는 상황이였기에 기벌포에서 살아남는 병졸들과 친위군을 모두 합친 3만 정예병들이 사비성 남부에서

격전을 벌인다. 숫자가 적기에 수도인 사비성에서 농성을 하면 될것을 왜 평야지대인 남부에서 결전을 벌였을까?


몇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1. 최후의 발악

2. 재정비를 위한 시간벌기


1번안은 우리가 흔히 알던 사실들이다. 우리가 배우던 국사에서는 황산벌 패배이후 의자왕이 낙담하였고 연이은 사비성 근교 패전 이후

신하들과 항복을 했다 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당서에서도 나와있듯이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항복하지 않았고 웅진성에서

패배했다.


2번안이 가장 현실적이다. 18만대 3만 거기다 평지, 변수가 있을수 없는 상황에서 병졸들이 전장으로 나선 이유는 시간 벌기다.

웅진 공산성은 사비성과 달리 평야가 아닌 산과 강을 끼고있는 천해의 요새다.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에게 공격 당할때 7년간 농성이

가능했던 사실은 이러한 점을 증거로 받쳐주고 있다.


그렇다면 웅진에서 의자왕이 왕 답게 자존심을 건 최후의 한판으로 망해가는 백제를 지키려 했나? 그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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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2안, 청야작전


개전 5일째인 660년 7월 13일, 의자왕은 정예병을 웅진성으로 옮기고 지휘부를 설치했다. 사비도성은 그날밤 합류 되었고 

방화와 약탈.....뭐 그 외엔 말 안해도 될거고. 


2차 방어선을 옮긴 의자왕이 웅진 공산성으로 지휘부를 옮긴 이유 중 하나는 웅진의 유력 가문 예씨 집안 때문이였지.

6월 덕물도 해전과 기벌포 해전에서 총지휘를 맡았던 백제의 웅진장군 예식인 사실로 보아 상당한 사병을 소유했고

명문가였으며 왕의 최측근과 같았다.


거기에 북방 최정예부대인 흑치상지의 부대가 남하하는 중이였고 지방군은 별동대를 조직해 적의 보급로를 끊는데 주력했다.

즉 이것은 웅진성 한복판에서 적에게 포위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굶겨서 포위한뒤 압살하려는 방식이였던 것이다.


13만 대군이 배를 타고 넘어왔다. 그리고 김유신이 약속한 날짜보다 하루 늦었기에 소정방은 목을 쳐야한다고 고래고래

노했던 대목을 보면 당군은 물자에 대한 준비를 많이 해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안 백제는 철저하게 청야작전(적에게 보급품을 내주지 않고 요충지로 옮기거나 싹다 불태우는)전술을 펼쳤고

이는 당시 흔한 국지전처럼 점령 이후 천천히 진격하는 것이 아니라 백제 멸망을 위한 조직군에 보급로가 시원치 않아

신속한 진격을 요했던 나-당 연합군의 사정을 정확히 꿰뚫어본 증거다.


신명나게 달려와서 적의 식량을 탈취해 진격하려했던 당나라는 당황했고 김유신의 식량은 2달이상 가지 못할 분량이였다.

거기다가 추가 보급을 신라에서 받자니 촘촘히 쌓여진 산성을 뚫고 와야하는데 동쪽 산맥의 산성을 수호하는 지방군들이

길을 내줄리가 만무했다.


소정방은 소위 "아놔 ㅅㅂ 너들 믿고 왔는데 쌀이 없어 이게 뭐임?" 하고 길길이 날뛸수밖에 없었고

보급도 늦은데다가 물량도 적고 비실비실한 신라군들을 보면서 반속은 느낌으로 분노를 표출할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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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을 위해 반드시 뚫었어야 했던 성흥산성, 그러나 당나라 신라 모두 번갈아가며 쳐봤지만 끔살된 시신만 쌓였다)

3. 백제군, 다 잡았던 대 역전승을 놓치다


다시 현대로 잠깐 돌아와 보자, 중국 낙양. 2007년 이곳에서 출토된 무덤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2008년 KBS다큐

역사추적에서 재조명한 이 사건은 당시 국내 사학계에 큰 충격을 줬다.


이곳에서 발견된 백제의 유물에는 당나라 조정의 금위군이라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백제웅천인 이라는 글귀가 선명.

그럼 백제의 유물에 왠 당 금위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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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진이라고 불리는 이 인물의 무덤에는 백제 멸망의 기록이 담겨져 있었다. 

‘대당좌위위 대장군 예식진’ ‘백제 웅진인으로 전엔 좌평을 지닌 인물’ 이 두개의 문구가 선명하게 보였던 거다.


660년, 11월 1일. 당나라 수도 낙양에서는 백제에서 잡아온 왕족들을 등재하면서 그들을 희롱하는 자리가 펼쳐진다.

소정방이 앞장서 이끌고온 이 포로들은 의자왕과 왕자 융을 비롯한 88명의 왕족과 1만2천여명의 처녀들과 젊은이들이였다.


왜의 사신이였던 이키도구라치의 증언에 따르면(이처럼 삼국역사가 일본,중국 고사에서 많이 등장하며 우리는 이 기록을 기반으로만

알고있는게 참 전에도 말했지만 안타깝다;)


<일본서기> 제명천황편,


"백제왕과 왕자 13인, 대좌평 사택천복, 국변성 30인…중략" 으로 자세히 명단이 기록되 있다. 그렇지만 예씨 가문은 등장하지 않는다.

당나라 신당서 소정방전에서는 이런 문구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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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예식진은 예식으로 불렸던 달솔보다 높았던 급의 좌평으로 그가 항복해왔던 것이다. 즉 프로가 아니였다.

이 이야기는 다시 백제 멸망당시로 돌아가 봐야한다.


백제 전성기를 이끌었던 무왕의 본거지였던 임존성, 이곳에서는 흑치상지의 대군이 남하하고 있었다. 그 병력만 4만.

의자왕과 백제가 전쟁에서 자신있어 했던 이유는 바로 웅진,임존성등이 건재했고 그 최정예병이 합류하면 승산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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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성님의 패기로 인해 전황은 대 역전)

당시 백제 지방군이 얼마나 강했는지 당나라 장군 유인원의 기공비에는


"백제군이 벌떼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끊임없이 몰려들어 골짜기와 산이 가득 찼다" 라는 문구가 있다.


백제부흥군이 강했던 이유는 당시 부흥군 모집때 3만의 병사가 순식간에 합류했고 곧 20여성을 회복한 기록을 보아 지방군의 강력함을

받쳐주는 증거 중 하나다.


수도 사비성을 함락했지만 나당연합군은 의자왕을 놓치고 북쪽과 동쪽에서는 최정예병이 몰려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보급로를 완전 차단.

그야말로 죽음만 기다리게 생긴 것이였으며 백제는 역전승을 손에 넣기 일부 직전이였다.


나당연합군이 벼를 수확하기 위해선 석달을 더 기다려야했으며 신라에서 보급을 받기 위해선 백제 진현성을 통과했어야 했다.

당시 주위 성들을 함락하고 천천히 진군하는것이 일반적이였던 이유는 이러한 위험이 항상 도사렸기 때문이다. 급하게 사비성을 향해

진격해오던 양군대 때문에 주변 산성들은 건재했고 천해의 요새인 산성 진현성또한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공주대 문화재보존학과 서정석 교수는 당군이 보급로를 뚫기 위해 동쪽에 산성들을 공격했지만 모두 끔살 당하고 돌아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식량과 전염병이 돌았었다는 고사 기록을 발견했다고 한다.


전쟁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 연합군이 굶주림에 지쳐서 미친듯이 소득없는 공격만 해댈때 

660년 7월 18일, 백제는 갑자기 항복한다.....왜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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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통한, 백제의 멸망


 신당서보다 구당서에서 백제의 멸망은 더욱 자세히 기록되있다. 구당서는 당시 삼국사기보다 200년앞선 역사책이다.

재미있는것은 위 사진과 같다.


이 문구는 무엇이냐. 보통 항복을 하면 왕이 앞서서 적에게 항복의 예를 표하고 신하들이 뒤에 즐비한다. 그런데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는

예식이 앞장서 있고 의자왕이 뒤에 있었다고 한다. 단지 굴욕적이라서? 나서기 싫어서?


패잔병을 이끌고 항전하다가 잡힌 태자 융은 다르다.


"태자융병여제서주개동송관"


태자융이 앞에 나서서 항복했다는 문구가 보인다. 이것을 보아 구당서/신당서 모두 기록자의 실수라고 볼 수 없다.

흉노족 출신의 김일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이민족 투항자다. 예식전 무덤에서는


"그의 공이 과거 김일제와 비할바 없음이" 라는 문구가 있다.


그렇다 예식은 투항했던 것이다. 그것도 의자왕을 붙잡아서 말이지. 그 증거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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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식의 반란, 의자왕을 사로잡다.


 백제연구사 교수들과 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구당서의 의자왕 항복 내용에 나온 한자를 풀이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젠장 정확한 한자를 내가 몰라, 기재하고 싶은데 미안해;)


예식은 구당서에 따르면 '당을 따를것이냐 저항할 것이냐'를 두고 고심했다는 구절이 있다. 나름대로 측근들과 상의해본결과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으로 가면 출세가 보장되겠구나 라는 결론이 났다는 구절도 있다.


웅진지역의 세력가는 예식이였고 예씨집안이였다. 그의 사병들은 백제 최정예 부대 중 하나였지만 의자왕의 명령 보다는

예식의 명령이 더욱 절대적이였던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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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예식은 야밤에 의자왕이 자던 틈을 타서 그를 생포했고 왕족들과 친위대를 죽이거나 생포했다.

의자왕의 계산미스 두번째는 이것이였다. 차라리 왕족 흑치상지에게 갔으면 이런일이 생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판단미스는 너무나 뼈아팟다.


구당서에 이르면 의자왕은 밧줄에 묶여 얼굴은 땅에 박혀 당나라에 순응하는듯한 모습으로 웅진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를

소정방이 크게 치하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 다 이겼던 전쟁, 우리가 알던 주색의 제왕과 정력왕으로 대표되는 의자왕은 이렇게 저항하다가 잡혔던 것이다.


660년 9월 당에 압송된 의자왕은 왕족들과 왕자들이 당나라인들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눈뜨고 지켜보아야 했다.

실제로 공주들이나 왕족여자들은 일개 수비병졸에게 시집을 가기도 했으며 척박한 서역이나 남만으로 끌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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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후손들과 딸들이 당나라 사람에게 능욕당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열이 받았을까? 결국 그는 모멸감을 못이기고

660년 12월, 당에 압송된지 몇개월 되지않아 사망하게 된다.


8.jpg


(이완용 조상같은 섹히인 예식 무덤에 적혀있는 글귀)

그리고 예식 개ㅆㄴ의 섹히는 잘먹고 잘살고 후손 3대까지 고위층으로 지내다가 672년 12월 뒤진다.



아 예식 진짜 화나네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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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라쟈 13-06-29 19:05
   
백제에 관한 역사는 아마 바로잡기 힘들겁니다. 
본문에 있듯 중,일보다 사료가 부족해 어쩌면 백제의 진실이 드러날수록 중,일에 오히려 그 정통성을
침해(?)당할 가능성도 크고 그간 수십년간 받아온 역사교육의 결과 망국 백제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지진 않을것으로 보여지네요. 역시 근대 교육도 교육이지만 천년이상 김부식등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 역사속의 백제역시 보잘것 없기에 그 또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겠지요.

백제는 그저...신라에 의해 밟힌 나라, 3국시대 최약체국, 지금의 경상도에 대조되는 호남비하(실상은
충청중심국임에도 불구하고) 풍조에 베이스가 되는 고대국가 이상의 평가를 받긴 힘들것 같네요.

뭐 앞일은 모르겠지만..
     
치우비 13-06-29 19:09
   
이병도 후손과 후학들을 피의 숙청을 해야 가능한 일이죠
     
gagengi 13-06-29 19:21
   
백제는 서울경기 중심국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합니다.  서울을 수도로 삼은 햇수만 500년에 가깝습니다.  이것도 왜곡되어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KilLoB 13-06-29 21:15
   
백제는.. 한개가 아니고 여러개의 나라입니다. 광개토 대왕비에 명문으로 나옵니다. 백잔과 잔국이 엄연히 구별되죠. 하나는 자기가 침략해 왕의 동생을 잡아온 백제의 잔당이란 뜻이고,,, 잔국이란 말그대로 자잘한 나라들..이란 의미겠죠.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죽이고도 평양을 왜 못쳐들어 갔을까요? 바로 자기 직속군사는 얼마없었고, 나머진 잔국들의 연합군이었기때문에 뭐 병사들 농사지어야된다... 어쩐다... 서로 합의가 안됬기때문. 최소 백제 중후반기 동성왕때까진 존재했었다고, 왜냐면 당시 중국 남조에 독자출병하고 제후책봉을 요구할 정도로 강성했던, 영산강유역 아파트 고분군 지역이,, 동성왕의 제주도를 친다는 핑계로 이지역에 출병후, 문화가 확달라짐. 각양각색의 고분이 백제식으로 통일 / 우리가 아는 한강유역의 백제는... 애초엔 고구려를 막기위해 군사적으로 강했던 그중 하나일수도 있다고 본다고.. 진짜 백제수도는 웅진이 었을것.... 이건 부여계의 전통임. 부여가 망해도, 망한게 아닌게.... 남부여는 660년까지 백제란 이름으로 있었다고..
seharu77777 13-06-30 13:39
   
고구려가 어떻게 보면 신라와 백제를 멸망시키지는 않고 보호관리 했지만. 신라는 이민족에 빌붙어 동족을 멸망시켰음..

신라 중심의 사관은 좀 사라졌으면~~~~.

어렸을 때 대당전쟁을 민족수호로 둔갑시켜서 배웠죠~~ㅋㅋㅋ

지들이 나쁜짓해서 배반당해서 살라고 했던 전쟁....
베르체니 13-07-01 17:47
   
망국의 왕이 무능하지 뭘...
노계백숙 13-07-02 22:59
   
귀족들의 인심을 잃어 망국의 왕이 되었으니 무능하다고 봐야죠
진정한 중앙집권적국가는 조선이고 그전에는 지방세력이 강했고
특히 삼국시대는 그정도가 강했기에 군인들도 왕의군인이아닌 귀족연합체의
군인들이었죠 막상 전쟁이 났는데 아무도 적극적인 출병을 하지않았고
계백만 혼자 군대를 이끌고 왔다가 아무도 안와있으니 모냥빠지게 도로 갈수도 없고
싸우다 죽어서 망국을 지킨 충신이 되어버린거고요
진짜 백제와 당의 싸움은 의자왕이 잡혀가고난다음이죠
강력한 백제의 군대가 그때부터 저항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저당시에 삼국사이에 같은민족이라는 의식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죠
지금의 시각에서야 신라의 친당정책이 민족배신이라는 얘기까지 나올수있겠지만요
항상궁금한게 왜 장수왕은 남하정책으로 백제와 신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영토만 조금 확장하고 말았을까 의문이 들어요
그당시 중국과 치열하게 전쟁을 할때도 아니라 북쪽신경안쓰고 밀어벼렸으면
삼국통일이 가능했을텐데
애니 13-07-06 21:20
   
예식이라. 전에도 책에서 보면서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했는데 과연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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