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예식진은 예식으로 불렸던 달솔보다 높았던 급의 좌평으로 그가 항복해왔던 것이다. 즉 프로가 아니였다.
이 이야기는 다시 백제 멸망당시로 돌아가 봐야한다.
백제 전성기를 이끌었던 무왕의 본거지였던 임존성, 이곳에서는 흑치상지의 대군이 남하하고 있었다. 그 병력만 4만.
의자왕과 백제가 전쟁에서 자신있어 했던 이유는 바로 웅진,임존성등이 건재했고 그 최정예병이 합류하면 승산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당시 백제 지방군이 얼마나 강했는지 당나라 장군 유인원의 기공비에는
"백제군이 벌떼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끊임없이 몰려들어 골짜기와 산이 가득 찼다" 라는 문구가 있다.
백제부흥군이 강했던 이유는 당시 부흥군 모집때 3만의 병사가 순식간에 합류했고 곧 20여성을 회복한 기록을 보아 지방군의 강력함을
받쳐주는 증거 중 하나다.
수도 사비성을 함락했지만 나당연합군은 의자왕을 놓치고 북쪽과 동쪽에서는 최정예병이 몰려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보급로를 완전 차단.
그야말로 죽음만 기다리게 생긴 것이였으며 백제는 역전승을 손에 넣기 일부 직전이였다.
나당연합군이 벼를 수확하기 위해선 석달을 더 기다려야했으며 신라에서 보급을 받기 위해선 백제 진현성을 통과했어야 했다.
당시 주위 성들을 함락하고 천천히 진군하는것이 일반적이였던 이유는 이러한 위험이 항상 도사렸기 때문이다. 급하게 사비성을 향해
진격해오던 양군대 때문에 주변 산성들은 건재했고 천해의 요새인 산성 진현성또한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공주대 문화재보존학과 서정석 교수는 당군이 보급로를 뚫기 위해 동쪽에 산성들을 공격했지만 모두 끔살 당하고 돌아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식량과 전염병이 돌았었다는 고사 기록을 발견했다고 한다.
전쟁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 연합군이 굶주림에 지쳐서 미친듯이 소득없는 공격만 해댈때
660년 7월 18일, 백제는 갑자기 항복한다.....왜냐고?
4. 통한, 백제의 멸망
신당서보다 구당서에서 백제의 멸망은 더욱 자세히 기록되있다. 구당서는 당시 삼국사기보다 200년앞선 역사책이다.
재미있는것은 위 사진과 같다.
이 문구는 무엇이냐. 보통 항복을 하면 왕이 앞서서 적에게 항복의 예를 표하고 신하들이 뒤에 즐비한다. 그런데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는
예식이 앞장서 있고 의자왕이 뒤에 있었다고 한다. 단지 굴욕적이라서? 나서기 싫어서?
패잔병을 이끌고 항전하다가 잡힌 태자 융은 다르다.
"태자융병여제서주개동송관"
태자융이 앞에 나서서 항복했다는 문구가 보인다. 이것을 보아 구당서/신당서 모두 기록자의 실수라고 볼 수 없다.
흉노족 출신의 김일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이민족 투항자다. 예식전 무덤에서는
"그의 공이 과거 김일제와 비할바 없음이" 라는 문구가 있다.
그렇다 예식은 투항했던 것이다. 그것도 의자왕을 붙잡아서 말이지. 그 증거는 이렇다.
5. 예식의 반란, 의자왕을 사로잡다.
백제연구사 교수들과 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구당서의 의자왕 항복 내용에 나온 한자를 풀이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젠장 정확한 한자를 내가 몰라, 기재하고 싶은데 미안해;)
예식은 구당서에 따르면 '당을 따를것이냐 저항할 것이냐'를 두고 고심했다는 구절이 있다. 나름대로 측근들과 상의해본결과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으로 가면 출세가 보장되겠구나 라는 결론이 났다는 구절도 있다.
웅진지역의 세력가는 예식이였고 예씨집안이였다. 그의 사병들은 백제 최정예 부대 중 하나였지만 의자왕의 명령 보다는
예식의 명령이 더욱 절대적이였던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
결국 예식은 야밤에 의자왕이 자던 틈을 타서 그를 생포했고 왕족들과 친위대를 죽이거나 생포했다.
의자왕의 계산미스 두번째는 이것이였다. 차라리 왕족 흑치상지에게 갔으면 이런일이 생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판단미스는 너무나 뼈아팟다.
구당서에 이르면 의자왕은 밧줄에 묶여 얼굴은 땅에 박혀 당나라에 순응하는듯한 모습으로 웅진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를
소정방이 크게 치하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 다 이겼던 전쟁, 우리가 알던 주색의 제왕과 정력왕으로 대표되는 의자왕은 이렇게 저항하다가 잡혔던 것이다.
660년 9월 당에 압송된 의자왕은 왕족들과 왕자들이 당나라인들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눈뜨고 지켜보아야 했다.
실제로 공주들이나 왕족여자들은 일개 수비병졸에게 시집을 가기도 했으며 척박한 서역이나 남만으로 끌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아 예식 진짜 화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