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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29 15:58
[한국사] 고려 문종 27년 "장성 밖 전답 11,494 경"의 소재 검토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2,728  

고려사와 동국통감에 기록된 고려 문종 27년 "장성 밖 전답 11,494경"이 최근 우여곡절을 통하여 그 크기가 대략 6천 만 평 내외로서 서울시의 절반 크기의 3/5 정도 되는 규모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전답의 규모는 이 전답이 소재하여 속한 장성 밖 고려 소유의 땅이 이보다 두세 배 이상 넓었을 것이라 추정 가능케 하며

해당 장성이 송령의 동쪽, 혹은 송령에서 동쪽으로/송령에 동쪽으로 잇대어서(迤) 설치된 만큼 장성의 서쪽, 혹은 북쪽, 혹은 동북/서북 쪽에 소재하며

서북로 병마사가 관할한 만큼 고려의 서북면에 소재하였던 것을 추정 가능케 합니다

이러한 사정을 사서 기록을 통하여 검토해 보겠습니다

우선 '11,494경'의 해당 기록입니다

27년(1073년) 4월.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가, “장성 밖에 개간한 전(田) 11,494경(頃)에서 나오는 곡식은 가을철 수확 후에 군의 비축 물자로 삼도록 하십시오.”라고 건의하자 왕이 제가(制可)했다.

<고려사 병지 둔전 문종 조>

서북로 병마사가 아뢰기를,
“장성(長城) 밖에 개간한 전답 1만 1천4백94경(頃)은, 청컨대 가을 수확을 기다려 군량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제가(制可)하였다.

<동국통감> 문종 27년(1073년) 2월

서북로 병마사가 건의하고 문종이 허락하여 해당 경작지를 둔전으로 활용했다 한 기록입니다

다음은 서북로 관할 장성의 소재와 관련된 기록입니다

정종(靖宗) 원년 9월, 1035년 9월 미상(음)

是月, 築長城於西北路松嶺迆東, 以扼邊寇之衝.

이달에 서북로(西北路)의 송령(松嶺) 동쪽으로 장성(長城)을 쌓아 변방 적들과의 충돌을 방어하려고 하였다.

<고려사 세가>

정종(靖宗) 원년, 1035년 미상(음)

靖宗元年 築長城於西北路松嶺迆東, 以扼邊寇之衝. 又城梓田, 徙民實之.

서북로(西北路)의 송령(松嶺) 동쪽에 장성(長城)을 쌓아 변방 외적 떼의 요충지를 제압하였다. 또 재전(梓田)에 성을 쌓아 민(民)을 옮겨 그곳을 채웠다.

<고려사 병지 성보>

문종 11년 4월, 1057년 4월 16일(음)
 
壬戌 制曰, “去年遣使, 請罷弓口門外郵亭, 時未撤毁, 又於松嶺東北, 漸加懇田, 或置庵子, 屯畜人物. 是必將侵我疆也, 當亟請罷之.” 中書省奏, “彼朝時無擾邊, 且新皇帝卽位, 來加冊命, 今未回謝. 先言疆場之事, 似爲不可.” 王曰, “彼若先置城柵, 則非惟噬臍, 彼必謂我不覺也. 宜於仲秋, 先遣使謝冊, 繼行奏請.”

임술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지난 해 거란에 사신을 보내 궁구문(弓口門) 밖의 우정(郵亭)을 철거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아직 철거하지 않았으며 또 송령(松嶺) 동북쪽에 점차 간전(懇田)을 넓히고, 혹은 암자(庵子)를 두어 사람과 가축을 증식시키고 있다. 이는 반드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려고 하는 것이니, 마땅히 그것을 철거해달라고 빨리 요청하라.”
라고 하였다. 중서성(中書省)에서 아뢰기를, “거란은 지금 변방을 소란하게 하지 않고, 또 새 황제가 즉위하여 책봉을 더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아직 회사(回謝)하지 못하였습니다. 먼저 국경에 관한 일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일 먼저 성책(城柵)을 설치하면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 될 뿐 아니라, 저들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마땅히 중추(仲秋)에 먼저 사신을 보내 책명을 사례하고, 계속해서 주청(奏請)하여라.”라고 하였다.

<고려사 세가>

문종 27년 6월, 1073년 6월 7일(음)

己卯 西京將軍柳涉防守鴨綠, 船兵有契丹人來投. 其追捕者, 越入長城, 逼靜州, 涉不能守禦, 制令免官.

기묘 서경(西京) 장군 유섭(柳涉)이 압록강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선병(船兵) 중에 거란인(契丹人)으로 투화(投化)한 자가 있었다. 〈거란에서〉 그를 추포(追捕)하려는 자가 장성을 넘어 들어와서 정주(靜州)에 접근하자, 유섭이 능히 방어하지 못하였으므로 〈왕이〉 제서(制書)를 내려 그를 파직시켰다.

고려사의 상기 기록은 서북로 송령 동쪽에 축성한 장성이 거란, 그리고 압록강에 인접한 지역인 것을 확인케 합니다

고려사에 비하여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보다 구체적입니다

정종(靖宗) 1년 9월, 1035년 9월 미상(음)

築長城於西北路松嶺迤東, 以扼邊寇之衝. 又城梓田, 徙民實之, 號昌州.

장성(長城)을 서북로(西北路)의 송령(松嶺)에서 동쪽으로 쌓아 변방 도적의 요충지를 막았다. 또한 재전(梓田)에 성을 쌓아 민(民)을 이주시켜 이곳을 채우고 창주(昌州)라 호명하였다.

<고려사 절요>

문종 11년 4월, 1057년 4월 미상(음)

夏四月. 制曰, “去年, 遣使請罷弓口門外郵亭, 時, 未撤毀, 又於松嶺東北漸加墾田, 或置庵子, 屯蓄人物, 是必將以侵我疆也. 當亟請罷.” 中書省奏, “彼朝時無擾邊, 且新皇帝卽位, 來加冊命. 今未回謝, 先言疆場之事, 似爲不可.” 王曰, “彼若先置城柵, 則非惟噬臍, 彼必謂我不覺也. 宜於仲秋先遣使謝冊, 繼行奏請.”

여름 4월.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지난해에 사신을 파견하여 궁구문(弓口門) 밖의 우정(郵亭)을 철폐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당시 철폐하지 않고 또다시 송령(松嶺) 동북쪽에 개간한 밭을 점차 늘리면서 혹은 암자를 두어 사람과 물자를 비축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장차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기 위함이다. 철폐하도록 극력 요청해야만 한다.”
라고 하였다. 중서성(中書省)에서 아뢰기를,
“저들 조정에서 당시 변경을 소요시키지 않았고 또한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뒤에는 와서 책명(冊命)을 더하였습니다. 지금 미처 사례[回謝]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강역의 일을 말하는 것은 불가할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먼저 성책(城柵)을 설치한다면, 후회해도 이미 늦을 것일 뿐만 아니라 저들은 분명히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의당 중추(仲秋)에 먼저 사신을 보내어 책봉에 대하여 사례하고 곧이어 주청해야만 한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 절요>

장성을 설치하고 또 따로 성을 짓고 백성을 사민하여 농사를 짓게 한 지역을 창주라 이름 붙였고

그 농지를 개간한, 장성 밖 지역이 방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거란 쪽 방위에, 거란이
농지를 개간하고 가축을 길러 물자를 비축한다 하여 문종이 거란에 항의하고자 한 거란 땅이 송령의 동북쪽에 위치했으며 이 지역이 이와 같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인접하여 서로 민감하게 반응한 정황이 나타나 있습니다

迤는 비스듬히, 또는 이어서라는 뜻으로, '거란이 송령 동북쪽 개간한 땅'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에서 이 장성은 송령 동쪽에 남북으로 비스듬히 쌓은 성이 아니라 송령에서 동쪽으로 쌓은 성임을 추정케 합니다

즉 송령 북쪽, 혹은 동북쪽, 혹은 서북쪽에 고려가 개간한 장성 밖 전답이, 또 송령 동북쪽에 거란이 개간한 전답이 있는 것이죠

993 년 강화 협상에서 거란과 고려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각각 성을 쌓되 서로 성의 수와 위치를 알리자고 했으나 고려 측이 할양된 애초의 강동의 땅보다 훨씬 넓게 개척하여 6주를 개척하니 거란이 그 땅을 빼앗고자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침략을 하였으나 결국 빼앗지 못한 사실이 있습니다

학계 통설과 달리 기록 상에는 거란과 고려가 압록강을 경계로 하며 또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축성하였고 군사적 신뢰를 위해 고려측 관리자가 압록강변의 거란 측 성에 가서 고려 쪽을 내다보며 상호감시하는 체제였습니다

또한 당시의 거란은 요동지역을 제외한 만주 지역의 지배력을 상실했고 그 땅에 여진족이 활개를 치며 다녔던
 점을 염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993년 당시에는 거란 땅도 아니었던 것이죠 또 요사에 강동 지역 할양에 대하여 여진국압록강이라 기록돼 있으니 거란이 할양한 강동 6주는 거란과 고려 사이가 아니라 거란과 여진의 사이로서 여진족이 점유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고려는 이미 고려 성종 984년부터 991년 때에 압록강 지역을 개척하여 991 년에는 그 지역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보낸 사실이 있습니다

또 993년 강회협상에 따라 여진국압록강의 동쪽을 개척, 개간, 축성, 사민하며 그곳의 여진족들을 퇴치하여 거란의 기대나 예측과는 달리 훨씬 넓은 지역을, 그것도 아주 잘 경영한 사실이 있습니다

또 거란이 그 땅을 빼앗고자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고 그 이후에도 다리를 설치하거나 축성하며 군사적 위협을 수시로 가하여 거란이 망하기 전까지 거란과 고려는 이 지역을 두고 긴장관계를 지속합니다

즉 고려 정종 원년, 1035년의 서북로 송령 장성 축성은 이러한 역사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당하다고 봅니다

즉 서북로 송령 장성은 993년 이전에 거란과 고려가 경계로 한 압록강 지역이 아니라 거란과 여진이 대치한 압록강 지역으로, 후에 강동 6주가 들어서며 압록강의 상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류 지역이기에 쉽게 건널 수 있으므로 군사적 요충지가 되며 이 때문에 고려는 이에 해당하는 송령에 장성을 축성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에서 송령은 공민왕 대 기록에도 나옵니다

공민왕 12년 3월, 1363년 3월 11일(음)

王遊賞興王寺北松嶺.

왕이 흥왕사(興王寺) 북쪽에 있는 송령(松嶺)에서 노닐며 구경하였다.

<고려사 세가>

흥왕사는 옛 경기도 개평군에 있던 절로 이곳의 송령을 서북로 장성이 있던 송령으로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송령이라는 지명 자체가 송골, 솔고개 등으로 평범한 이름이기에 송령이라는 지명이 전국에 여럿 산재합니다

장성도 마찬가지인데 우선 여진족과 관련한 동북면 지역 장성 관련 기록을 보겠습니다

문종 27년 6월, 1073년 6월 6일(음)

戊寅 東北面兵馬使奏, “三山·大蘭·支櫛等九村, 及所乙浦村蕃長鹽漢, 小支櫛前里蕃長阿反伊, 大支櫛與羅其那烏安撫夷州骨阿伊蕃長所隱豆等一千二百三十八戶來, 請胕藉. 自大支櫛, 至小支櫛褭應浦海邊長城, 凡七百里, 今諸蕃, 絡繹歸順, 不可遮設關防. 宜令有司, 奏定州號, 且賜朱記.”, 從之.

무인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아뢰기를, “삼산(三山)‧대란(大蘭)‧지즐(支櫛) 등 9개 촌(村)과, 소을포촌(所乙浦村) 번장(蕃長) 염한(鹽漢), 소지즐전리(小支櫛前里) 번장 아반이(阿反伊), 대지즐(大支櫛)과 나기나(羅其那)‧오안(烏安)‧무이주(撫夷州)‧골아이(骨阿伊) 번장(蕃長) 소은두(所隱豆) 등 1,238호(戶)가 와서 부적(附籍)하기를 요청합니다. 대지즐로부터 소지즐(小支櫛) 요응포(褭應浦) 바닷가 장성(長城)에 이르기까지 무릇 700리인데, 지금 여러 번인이 끊이지 않고 귀순하므로, 그들을 막기 위하여 관방(關防)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주호(州號)를 아뢰어 정하게 하고, 또 주기(朱記)를 하사하십시오.”라고 하자,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고려사 세가>

예종 14년 12월, 1119년 미상(음)

是歲, 增築長城三尺. 金邊吏發兵止之, 不從, 報曰, “修補舊城.” 葛懶甸孛菫胡刺古習顯以聞, 金主詔曰, “毋得侵軼生事, 但愼固營壘, 廣布耳目而已.”

이해에 장성(長城)을 3척(尺) 증축하였다. 금(金)의 국경의 관리가 병사를 출동시켜 제지하였지만, 따르지 않고 대답하여 이르기를, “옛 성을 보수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갈라전(葛懶甸)의 발근(孛菫) 호라고습현(胡刺古習顯)이 이 사실을 보고하자, 금의 임금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국경을〉 침범하여 괜한 일을 만들지 말고, 다만 군영(軍營)과 보루(堡壘)를 견고히 하고 정찰이나 강화하라.”라고 하였다.

<고려사 세가>

11세기 고려사에서는 귀순하거나 조공하는 여진족 기록이 대부분으로 침입과 약탈의 조짐은 11 세기 말 문종 말, 숙종 시기에 나타나 12 세기 초 예종 때에 이르러 극적으로 거세집니다 그리고 1115 년에 현 중국 하얼빈 지역에서 금이 건국이 됩니다

여진족은 하얼빈 일대에서 세 잡고 있던 금 창건자 아골타의 숙부가 되는 영가가 무리를 규합하기 시작해 이미 고려의 백성이 된 동북면 여진족을 충동하는데 문종 말기에는 이를 잘 처리합니다

여진 부락인 대지즐로부터 700리 거리에 있는 요응포 장성이 학계 통설 대로 과연 함경남도 지역이냐 하는 시비는 차치하고라도 서북로 송령 장성과 동북면 요응포 장성을 연결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고구려 천리 장성의 예와 같은, 혹은 그 비슷한 기록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영류왕 14년, 631년

春二月, 王動衆, 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 千有餘里.

봄 2월에 왕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동북은 부여성에서 동남은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里)였다. 모두 16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영류왕 25년, 642년

二十五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王命東部大人蓋蘇文 監長城之役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금이 동부대인(東部大人) 개소문(蓋蘇文)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631년에 천리에 이르는 장성을 16년 만에 완공하고서 642년에 또 장성을 쌓지요?

삼국사기에는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여럿 등장합니다 특히 평화롭게 번영을 누린 하대 신라에서는 여러 곳에 장성을 쌓습니다. 한성주(서울, 성남 지역), 국원(충주) 등에 쌓은 장성이 대표적입니다

즉 장성이란 것이 꼭 중국 만리장성이나 고구려 천리장성의 성격이 아니라 조선시대 남한산성과 같이 규모가 큰 방어용 성을 가리키는 말로 봄이 타당해 보입니다

이러한 장성이 서로 체계를 갖추어 일렬로 점점이 늘어져 있으면 고구려 본기에서 이르 듯 천리에 이르는 장성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죠

정리하면
0) 고려 정종이 1035년에 장성을 쌓고 문종 대 기록에 등장하는 서북로의 송령은 거란과 고려의 사이에 있는 곳이며
1) 서북로 송령 장성은 강동 6주 지역에 거란을 방비하고자 쌓은 장성이며
2) 문종 27년의 "서북로 장성 밖 전답 11,494 경은 이 장성 동북쪽에 거란과 인접하여 압록강 상류 변 평야 지대에 개간한 농지이다
3) 또한 앞의 10회에 이르는 고려 전기 서북계 고찰에 근거하면 이 전답( 및 송령과 송령 장성)은 현 중국 요녕성 철령 근처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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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uder 17-12-29 20:15
   
문득 든 생각인데... 만약 장성밖 농토가 매우 컸다면 오히려 재야사학계에게 말도안되는 일이었을것같군요.
재야사학계에는 고려천리장성을 고구려 천리장성으로 보는 경향도 있던데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요서에서 그만큼 영토를 더 넓혀야하죠.
물론 고려천리장성을 현 주류사학계와 같게 비정하는 입장이라면 상관없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서경과 천리장성을 비정하면서 서쪽으로 요양까지 가기는 어렵다고 생각되더군요.
반대로 이전에올리신 두만강유역. 즉 동쪽지역의 경우 주류사학에 충실한 나무위키에서도 그 영토가 넓었을 개연성을 인정하는 터라서(물론 가능성은 적다고보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지구요.
     
감방친구 17-12-29 22:24
   
고려사를 다룬 우리 사서에서 천리 장성 관련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었어요

주류 학계가 압록강 하구와 원산을 자기들 멋대로 연결해 천리 장성이라는 명칭을 붙인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학계 통설에서는 소위 고려 천리장성의 축조와 완성이 덕종 때부터 정종 때까지 근 반백 년인데

이들 시기의 성들을 연결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고 고구려가 16 년 걸린 사업을 더 오래 걸려서 했다는 게 의아스럽고 고려사에서 성보의 신축과 중축은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기에 이게 천리 장성이다 할 게 없어요

복기대 팀의 요동 천리장성은 고려에 천리장성이란 게 있었다면 기존 고구려 천리 장성을 재활용한 것일 게다ㅡ하면서 비정한 것이고요

또 고구려든 고려든 소위 천리장성은 중국 만리장성처럼 연결시킨 게 아니라 각기 독립된 성들이 일정 방향으로 놓여 단일 체계를 이룬 것을 가리킨 것이고요
          
Marauder 17-12-29 22:39
   
사실 생각해보면... 반은 유목국가인 고구려에서 그런 장성을 쌓았다고했을때 이상하다생각은 했었죠.
감방친구 17-12-29 22:32
   
학계 통설에서의 강동 6주와 압록강 위치 지도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056953&cid=40942&categoryId=31682
     
감방친구 17-12-29 22:42
   
이거는 역사 사기에 가깝습니다

0) 압록강이 고려와 거란의 경계인데 학계 통설 지도에는 압록강은 여진족 차지
1) 장성 밖에 전답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음에도 장성 안쪽만 고려 땅으로 표시
2) 고려보다 그 인구가 소수였고 고려에 귀부하거나 스스로 고려 백성이 되길 바라고 자기들 땅을 고려 행정구역으로 삼아 달라고 한 여진족을 마치 고려나 요의 맞상대가 되는 거대한 세력으로 표시
3) 고려의 서북로 성들이 압록강을 따라 상류까지 포진했음에도 압록강과는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비정
4) 서북로와 동북면의 성을 연결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음에도 다 연결시킴
5) 압록강 변 여진족을 991 년에 백두산 너머로 쫓아버리고, 994년부터 강동6주를 개척하면서 그 지역에 살던 여진족도 쫓아버렸는데 백두산이 평안도나 함경남도에 있다는 말인가?

아가리로는 늘 실증 어쩌구 떠드는데 실증이 아니라 실성한 수준
없습니다 17-12-30 02:35
   
고려장성은 2개가 있음. 천리장성과 대령강장성.. 두개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논리를 펼치는것 같음.
     
감방친구 17-12-30 05:28
   
그거는 별도의 이야기죠
이거는 서북로 송령 장성과 그 장성 밖 전답의 위치에 대한 고찰입니다

그리고 송령은 고려 천리장성 구간으로 보고 있는 건 제가 아니라 학계 통설입니다 저는 학계 통설에 동의하지 않구요

대령강 장성 이야기는 이 고찰과 관련이 적어 별도로 발제를 해야 할 주제입니다

'송령 장성ㅡ압록강ㅡ거란과 붙어 있는 고려 서북 지역' 이게 고려사 기록에 등장하는 상호연결점입니다
감방친구 17-12-30 10:02
   
1. 송령은 서북로에 있다
2. 송령에서 동쪽을 연결해 장성을 쌓았다
3. 이 장성 밖에 고려의 둔전 11,494 경이 있다
4. 송령의 동북쪽 인접지에 거란의 둔전이 있다
5. 송령과 송령 장성은 고려 쪽에 있다
6. 송령 너머에 압록강이 있다
7. 이 압록강이 거란과 고려의 경계이다
8. 이곳은 정황상 압록강의 상류로서 강동 6주 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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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한국사] 고려 서북계 위치 추적 (5) ㅡ 압자수와 혼동강 (3) 감방친구 12-20 2029
185 [한국사] 고려 서북계 위치 추적 (4) ㅡ 봉집현(옛 철령위)은 현… (19) 감방친구 12-19 2622
184 [한국사] 고려 서북계 위치 추적 (3) ㅡ 요와 고려의 접경은 현 … (1) 감방친구 12-19 1568
183 [한국사] 고려 서북계 위치 추적 (2) ㅡ 학야성과 내원성의 위… (7) 감방친구 12-19 2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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