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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25 07:55
[한국사] 고려 서북계 위치 추적 (10) ㅡ 고려 120년의 전성기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2,051  

거란은 동경(요양)과 귀덕주 등지에 출몰하는 여진족(학계 통설에서는 정안국으로 보고 있음)을 토벌함과 동시에 이미 985 년에 대규모 고려 원정을 준비합니다.

여름에 요택(국역 DB에서는 遼澤을 ‘요나라의 습지’라고 황당하게 번역을 해놓고 있는데 그 저의에 깔린 불순성이 의심스럽습니다)에 물이 차서 이 해의 원정은 취소가 되는데요 여진 토벌과 달리 고려 원정에 더 공을 들인 모양새가 엿보입니다. 그리고 이 해 겨울에 여진을 토벌하여 다음 해(986년) 봄에 10여 만의 포로와 20여 만 마리의 말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둡니다.

그리고 993년에 대대적 침공을 감행하고 이 침공은 규모와 달리 서희의 담판에 의한 강화협상으로 일찍 종결됩니다.

그 협상의 경과가 이른 바 ‘강동 6주’의 할양입니다. 거란과 고려는 서로 성을 쌓기로 약속합니다. 이 일대는 발해의 땅이자 동단국의 땅이었으나 동단국이 928 년 이후로 유명무실해진 후 거란의 지배력이 약화, 지역에 따라 급격 상실되면서 발해부흥세력 및 여진(요사와 고려사에서는 요동ㆍ만주지역의 세력 및 집단들을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한 경향이 보입니다)족 세력의 활동 본거지가 됩니다.

요사 993년 기사에서 거란이 고려에 할양한 지역을 ‘여진국 압록강 동쪽 수백여 리(女直國鴨淥江東數百里地賜之)’라고 표현한 기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역을 포함하여 만주지역은 동단국의 영토였으나 몇 년 가지 않아서 실효 지배를 상실한 곳입니다. 거란은 이미 요서와 화북을 장악하고서 송나라의 침탐해 들어가는 상황이어서 발해 멸망 후 발해 영토의 시스템이 망가지고 동단국 중심부가 동경으로 옮겨오면서 발해인들과 동단국 거란인들이 함께 사민되었기에 만주는 밀림으로 버려저다시피 하였는데

발해부흥세력과 여진족들이 동경지역을 수시로 침입ㆍ약탈해 대면서 골치를 앓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송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여진족의 성가신 활동을 토벌하고 고려의 의중을 확인하여 후미에서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 시위로서 993년 침략을 감행한 것입니다


[秋七月甲辰朔,詔諸道繕甲兵,以備東征高麗。


聖宗 統和 3년(A.D.985; 高麗 成宗 4)
가을 7월. 모든 道에 詔勅을 내려 武器를 정비하여 동쪽으로 高麗를 정벌하는데 대비하도록 하였다.

八月癸酉朔,以遼澤沮洳,罷征高麗。

8월. 遼澤이 卑濕한 까닭으로 出兵을 중지하였다.

十二月庚辰,獵儒州東川。拜天。是月,以東京留守蕭恆德等伐高麗。

統和 10년(A.D.992; 高麗 成宗 11)에 東京留守 蕭恒德으로 하여금 高麗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十一年, 王治遣朴良柔奉表請罪, 詔取女直國鴨淥江東數百里地賜之

統和 11년(A.D.993; 高麗 成宗 12)에 王治가 朴浪柔를 파견하여 表를 올려 罪를 自認하므로 詔勅을 내려 女直國 鴨淥江 동쪽 수백리 땅을 주었다.

<요사>]

고려에서 984년부터 압록강 일대에 대한 정지 작업을 진행하였고 991년에는 압록강 바깥에서 활동하는 여진족을 백두산(장백산 : 길림합달령) 너머로 쫓아버립니다(고려의 휘하에 들어온 여진족이 아닌).

또 한편으로 송나라의 거란 공격 합동작전 요구를 회피하면서 거란ㆍ송 전쟁의 추이를 관망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993 년 5월(음력)에 여진족으로부터 거란의 대규모 고려 원정에 대한 첩보가 들어오나 여진족의 속임수로 의심해 무시하다가 재차 첩보가 당도하자 전쟁 대비 준비를 하고 드디어 거란의 침입을 맞게 됩니다.

[성종 12년, 993년

夏五月 西北界女眞報, 契丹謀擧兵來侵, 朝議謂其紿我, 不以爲備.

여름 5월. 서북계(西北界)의 여진(女眞)에서, 거란(契丹)이 군사를 동원해 침략해 오려 한다고 알려 왔으나 조정에서는 여진의 속임수로 보고 제대로 방비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秋八月 甲戌 賜李維賢等及第. 是月, 女眞復報契丹兵至, 始知事急, 分遣諸道兵馬齊正使.


가을 8월. 이 달에 여진이 거란의 내침을 다시 알려오자, 비로소 사태의 위급함을 알아차리고 각 도에 병마제정사(兵馬齊正使)를 파견했다.

冬十月 以侍中朴良柔爲上軍使, 內史侍郞徐熙爲中軍使, 門下侍郞崔亮爲下軍使, 軍于北界, 以禦契丹.

겨울 10월.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上軍使)로,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를 중군사(中軍使)로, 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을 하군사(下軍使)로 임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북계로 가서 거란의 침략을 방어하게 했다.

閏月 丁亥 幸西京, 進次安北府, 聞契丹蕭遜寧攻破蓬山郡, 不得進乃還. 遣徐熙請和, 遜寧罷兵.

윤10월 정해일. 왕이 서경(西京)으로 가는 길에 안북부(安北府)까지 가 머물렀는데,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봉산군(蓬山郡)을 공격해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자 더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서희(徐熙)를 보내 화의를 요청하니 소손녕이 전투를 중지했다.

<고려사 세가>]

거란의 1차 침입(993년)과 그 강화협상의 결과는 이른 바 강동 6주로, 양측 사료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十一年, 王治遣朴良柔奉表請罪, 詔取女直國鴨淥江東數百里地賜之

統和 11년(A.D.993; 高麗 成宗 12)에 王治가 朴浪柔를 파견하여 表를 올려 罪를 自認하므로 詔勅을 내려 女直國 鴨淥江 동쪽 수백리 땅을 주었다.

<요사>

성종 13년, 994년 봄 2월. 소손녕(蕭遜寧)이 보낸 글

尋准宣命, 自便斟酌, 擬於鴨江西里, 創築五城, 取三月初, 擬到築城處, 下手修築. 伏請, 大王預先指揮, 從安北府, 至鴨江東, 計二百八十里, 踏行穩便田地, 酌量地里遠近, 幷令築城, 發遣役夫, 同時下手, 其合築城數, 早與回報.

이 조칙에 의거해 제가 상황을 살펴본즉 압록강 서쪽에 5개의 성을 쌓는 것이 좋을 듯하여 3월 초에 축성할 곳으로 가서 공사를 시작하려 합니다. 삼가 청하옵건대, 대왕께서는 미리 신하들에게 분부하셔 안북부(安北府)에서 압록강 동쪽에 이르는 180리 사이에 적당한 지역을 답사하고 성들 사이의 거리를 측량하게 하십시오. 아울러 일꾼들을 동원해 우리 측과 함께 축성을 시작할 수 있도록 분부해주시고 축성할 성의 수가 도합 몇 개인지를 빨리 회신해 주십시오.

秋八月 癸巳. 以李承乾爲鴨江渡勾當使, 尋遣河拱辰代之.

가을 8월 계사일.이승건(李承乾)을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에 임명했다가 곧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했다.

<고려사 세가>

十三年, 率兵逐女眞, 城長興·歸化二鎭, 郭·龜二州. 明年又率兵, 城安義·興化二鎭, 又明年, 城宣·孟二州.

성종 13년(994)에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낸 다음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의 두 진과 곽주(郭州)·귀주(龜州)의 두 주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 )·흥화진(興化鎭)의 두 진에 성을 쌓았고, 그 이듬해 선주(宣州)·맹주(孟州)의 두 주에 성을 쌓았다.

<고려사 열전 서희>]

소손녕이 거란 황제를 대신하여 보낸 글과 서희의 압록강 지역 개척 및 축성 사이에 차이가 보입니다. 애초에 거란은 거란과 여진 사이에 고려를 끼어넣어 이이제이로서 여진을 제압하고 고려를 거란의 편으로 만듦으로써 후미의 안전을 보장 받고 송과의 전쟁에 집중할 계획이었기에 압록강 지역의 180리에 해당하는 적은 땅을 고려에게 허락했으나

고려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여진족을 아예 멀리 쫓아버리면서 압록강 동쪽의 보다 넓은 땅을 개척하여 6성(실제로는 8성)을 쌓고 6주를 설치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거란은 태세를 전환하여 고려가 개척한 6주를 탐내어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후일 2차, 3차의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며 이 침략은 6주 지역의 점유와 약탈에 취중되나 고려의 반격으로 성취하지 못 하고 오히려 동아시아 국제정세에서 고려의 위세만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 때에 고려가 개척하고 거란이 요구한 강동 6주는 현 혼하 상류ㆍ범하 일대에서 동요하 상류 지역에 이르는 아주 넓은 지역으로 판단되며 이러한 고려의 강동 6주 개척과 수호는 요사 지리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나타납니다.

[聖宗 以地隣髙麗、開泰 初 置州 以所俘漢民實之。

성종이 이 지역(신주)이 고려와 인접하다고 하여 개태 초반에 주를 설치하고, 한민(漢民) 포로들을 데려다 채웠다.

<요사 지리지 신주>]

그리고 이 기록에서 신주의 위치는 다음의 독사방여기요 기록으로 교차검증이 됩니다.

[三萬衛司北三百三十里。南至鐵嶺衛九十里,西至廢懿州三百七十里,東北至三衛境廢信州三百十里。

삼만위는 요양 북쪽 330리에 있으며 남쪽 90리에 철령위가 있다. 삼만위 동북쪽 300리에 폐지한 신주(信州)가 있다.

<독사방여기요 산동8>]

요와 고려의 경계로서의 고려의 서북계의 종단점이 현 중국 길림성 장춘 일대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앞의 여러 소고에서 고찰한 바 있습니다.

거란의 3차에 걸친 대규모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후 고려는 만주와 여진족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여 여진족을 서번, 동번으로 구획하여 지칭하고 또 여진족을 끊임 없이 받아들이고 행정영역을 확장합니다.

그 상황을 규모 수십에서 수백의 작은 단위의 경우는 제외하고 고려 성종 이후 예종 이전까지 근 100 년에 달하는 고려사 세가의 기록에서 찾아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습니다. 고려의 위세를 보여주는 기록은 문종 대에 특히 집중돼 나타납니다.




[현종 17년, 1026년

閏五月 甲子. 契丹遣御院判官耶律骨打, 來請假途, 將如東北女眞, 不許.

윤5월 갑자일. 거란이 어원판관(御院判官) 야율골타(耶律骨打)를 보내 동북여진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해왔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정종 10년, 1044년

十年 夏四月 庚戌 東女眞一千四十五人執贄請盟, 各賜衣著銀器. 賜金元鉉等及第.

여름 4월. 경술일. 동여진 사람 1,045명이 예물을 가지고 와서 화맹(和盟)을 요청하므로 각각 의복과 은그릇을 내려주었다.

문종 27년, 1073년

夏四月 甲戌朔 日食. 丙子 制曰, “東北邊十五州外蕃人, 相繼歸附, 願置郡縣, 于今不絶, 此實頼宗廟社稷之靈. 其令宰臣, 先告事由, 待遠近畢納, 欵拓定州縣而後, 親行恭謝. 其行禮及太子攝事之儀, 有司詳議以聞.” 壬辰 幸龜山寺, 遂置酒于龜臺. 太子諸王宰樞侍宴, 夜半乃還. 丁酉 幸外帝釋院.

여름 4월 병자일. 왕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동북 국경지역 15개 주(州) 외곽에 사는 오랑캐들이 계속 귀부해 오면서 우리 행정구역에 편입시켜 줄 것을 끊임없이 간청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종묘와 사직의 신령들 덕분이다. 재상들을 시켜 종묘와 사직에 이 사실을 먼저 고하게 한 뒤, 멀고 가까운 오랑캐들이 완전히 귀부해 와서 행정구역을 결정짓는 절차가 끝난 다음 내가 친히 종묘와 사직에 감사하려 한다. 이 행사에 따르는 의식과 태자의 대행 가부에 대해 해당 관청에서 상세히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六月 甲戌 王如奉恩寺. 戊寅 東北面兵馬使奏, “三山·大蘭·支櫛等九村, 及所乙浦村蕃長鹽漢, 小支櫛前里蕃長阿反伊, 大支櫛與羅其那烏, 安撫夷州骨阿伊蕃長所隱豆等一千二百三十八戶來, 請附藉. 自大支櫛, 至小支櫛褭應浦海邊長城, 凡七百里, 今諸蕃, 絡繹歸順, 不可遮設關防. 宜令有司, 奏定州號, 且賜朱記.”, 從之.

6월 갑술일.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무인일. 동북면병마사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삼산(三山)·대란(大蘭)·지즐(支櫛) 등 9개 촌락 및 소을포촌(所乙浦村)의 번장(蕃長) 염한(鹽漢)과 소지즐의 전리(前里) 번장 아반이(阿反伊)와 대지즐의 여나기나오(與羅其那烏), 안무이주(安撫夷州)의 골아이(骨阿伊) 번장 소은두(所隱豆) 등 1천 2백 38호가 와서 호적에 편입시켜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대지즐로부터 소지즐 요응포(褭應浦) 해변까지는 7백 리에 걸쳐 장성이 수축되어 있으며 지금 오랑캐들이 줄을 이어 귀부해오고 있는 마당에 관방(關防)을 설치하여 그들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해당 관리로 하여금 주(州)의 명칭을 정해 보고하게 한 후 밀봉한 공문을 내려 주십시오.”

왕이 이를 허락했다.

乙未 東路兵馬使奏, “東蕃大齊·者古·河舍等, 十二村蕃長, 昆豆·魁拔等一千九百七十戶, 請依霜昆例內附, 又豆龍·骨伊·餘波漢等部落蕃長阿老漢等亦願爲州縣. 此輩所處遼遠, 在古未嘗朝覲, 今皆歸服. 若定封疆, 設關防, 則餘波漢嶺外齊遮古大史·伊稱見·昆俊·丹俊·無乙比化豆等, 壤地無際, 蕃戶連居, 不可窮塞設險, 請待領外諸蕃, 盡爲州縣, 然後漸至遠蕃”, 許之.

6월 을미일. 동로병마사(東路兵馬使)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동여진의 대제(大齊)·자고(者古)·하사(河舍) 등 12개 촌락의 번장인 곤두(昆豆)·괴발(魁拔) 등 1천 9백 70호가 상곤(霜昆)의 전례에 따라 우리에게 귀부하겠다고 요청해 왔으며, 또 두룡(豆龍)·골이(骨伊)·여파한(餘波漢) 등 부락의 번장 아로한(阿老漢) 등도 우리의 주현에 편입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거주지는 우리와 너무 떨어져 있어 이제까지 입조해 온 일이 없었는데 이제 모두 귀부해 온 것입니다. 이제 만일 국경을 그어버리고 관방을 설치하려 할 경우, 여파한(餘波漢) 고개 바깥에 있는 재차고(齊遮古)·대사이(大史伊)·칭견(稱見)·곤준(昆俊)·단준(丹俊)·무을비(無乙比)·화두(化豆) 등 지역은 너무 광활한데다 오랑캐들이 넓게 거주하고 있는 만큼 그곳에 모조리 요새를 설치할 수는 없는 실정입니다. 여파한 고개 바깥에 있는 오랑캐들의 지역이 우리의 주현으로 편입된 뒤에 점차 먼 곳의 오랑캐들까지 편입시키기 바랍니다.”

왕이 이를 허락했다.

秋七月 壬寅朔 有司言, “東北面兵馬使所奏, ‘支櫛村·那發村·褭臥立村·大信村·西好村·無主其村等, 部落蕃長, 請貢方物名馬.’” 制從之. 丙午 制曰, “黑水譯語加西老諭東蕃, 爲州縣, 可授監門衛散員, 賜名高孟.” 東南海都部署奏, “日本國人王則貞·松永年等四十二人來, 請進螺鈿鞍橋·刀·鏡匣·硯箱·櫛書案·畵屛·香爐·弓箭·水銀·螺甲等物. 壹歧島勾當官, 遣藤井安國等三十三人, 亦請獻方物東宮及諸令公府.”, 制, “許由海道, 至京.”

가을 7월 초하루 임인일. 해당관청에서,

“동북면병마사의 보고에 의하면, 지즐촌(支櫛村)·나발촌(那發村)·요와립촌(褭臥立村)·대신촌(大信村)·서호촌(西好村)·무주기촌(無主其村) 등 부락의 번장들이 토산물과 명마(名馬)를 바치겠다고 요청해 왔습니다.”

라고 보고하자 왕이 이를 허락했다.

병오일. 왕이, “흑수(黑水) 말갈 출신 통역인 가서로(加西老)가 동여진인들을 설득하여 우리의 주군(州郡)으로 편입되게 한 공이 있으니 그에게 감문위산원(監門衛散員) 벼슬을 주고 고맹(高孟)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라.”고 지시했다.

九月 甲辰 翰林院奏, “東女眞大蘭等十一村內附者, 請爲濱·利·福·恒·舒·濕·閩·戴·敬·付·宛十一州, 各賜朱記, 仍隸歸順州”, 從之.

9월 갑진일. 한림원(翰林院)에서,

“동여진의 대란(大蘭) 등 11개 촌락에서 귀부해온 자들이 자기들의 거주 지역을 빈주(濱州)·이주(利州)·복주(福州)·항주(恒州)·서주(舒州)·습주(濕州)·민주(閩州)·대주(戴州)·경주(敬州)·부주(付州)·완주(宛州) 등 11개 주로 정해줄 것을 요청해 왔으니 그들에게 각각 밀봉된 공문을 내려 귀주(歸州)와 순주(順州)에 소속시켜 주십시오.”

라고 건의하자 왕이 이를 허락했다.

문종 34년(1080) 경신년

十二月 己未朔 東蕃作亂, 以中書侍郞平章事文正判行營兵馬事, 同知中樞院事崔奭, 兵部尙書廉漢爲兵馬使, 左承宣李顗爲兵馬副使, 將步騎三萬, 分道往擊之, 擒斬四百三十一級.

12월 초하루 기미일. 동여진이 반란을 일으키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문정(文正)을 판행영병마사(判行營兵馬事)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최석(崔奭)과 병부상서(兵部尙書) 염한(廉漢)을 병마사(兵馬使)로, 좌승선(左承宣) 이의(李顗)를 병마부사(兵馬副使)로 임명해 보병과 기병 3만을 거느리고 각 방면에서 공격해 적 4백 31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문종 35년, 1081년

三十五年 春正月 乙未 以廉漢爲兵部尙書. 丁酉 以文正爲長淵縣開國伯, 崔奭爲吏部尙書叅知政事, 金良鑑叅知政事判尙書兵部事, 王錫爲戶部尙書知吏部事. 丁未 知西北面兵馬事王佇奏, “西蕃酋長阿夫渙等九人, 專心保塞, 宜加爵賞.”, 命以阿夫渙等三人爲柔遠將軍, 山豆等六人爲懷化將軍, 賜物有差.


봄 정월 정미일.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事) 왕저(王佇)가, 서여진의 추장 아부환(阿夫渙) 등 아홉 명은 전심전력으로 변방을 지키고 있으니 관작을 올려주고 상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이에 왕이 아부환(阿夫渙) 등 세 명은 유원장군(柔遠將軍)으로, 산두(山豆) 등 여섯 명은 회화장군(懷化將軍)으로 임명하고 차등을 두어 물품을 내려 주라고 지시했다.

二月 辛酉朔 西女眞酋長遮亶等六人來, 獻鐵甲兵仗, 賜衣帶·綵帛有差. 制曰, “凡東西酋長欲來見者, 兵馬使申報, 取旨後, 方許赴闕, 以爲永制.

丙子 制曰, “去冬十二月, 東北路戎醜, 一朝掃滅, 邊祲廓淸, 是皆上賴宗廟之威靈, 下仗群帥之雄略. 今己凱還, 宜告大廟及六陵, 可擇日行事.”

2월 초하루 신유일. 서여진 추장 차단(遮亶) 등 여섯 명이 와서 철갑옷과 병장기를 바치자 왕이 그들에게 차등을 두어 의복과 채색 비단을 하사했다. 그리고 “동·서여진의 추장 가운데 입조하기를 희망하는 자가 있으면 병마사가 보고해 허락을 받은 후 대궐로 들여보내는 것을 항구적인 제도로 삼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병자일. 왕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지난 겨울 12월에 동북 지방의 못된 오랑캐들을 한꺼번에 소탕하여 변방의 골칫거리를 완전히 일소했다. 이는 모두 위로 종묘의 영령들께서 돕고 아래로 여러 장수들이 뛰어난 무훈을 발휘한 덕분이다. 이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한 사실을 종묘와 여섯 능에 고해야 할 것이니 날을 택하여 의식을 거행토록 하라.”

<고려사 세가>]

여진족들이 고려에 단순히 입조하거나 조공외교를 하거나 무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들이 사는 땅을 고려에 편입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고려는 적극적으로 주를 설치하며 영토를 넓히고 여진족을 고려에 동화시키는 노력을 벌임과 동시에 고려 경계 밖에 있는 여진족들도 동번과 서번으로 삼아서 관리를 한 것이 고려사 세가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고려의 동북계 역시 고려 예종 때에 여진을 정벌하며 잠시 동북 9성을 쌓았다가 도로 내어준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하겠습니다.

상기의 기록들은 여진족이 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만주의 여진족들이 곧 고려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상, 그리고 영토상은 고려와 거란이 주고 받은 표문과 책봉문에서도 교차 검증돼 나타납니다. 두어 달 전 이곳에서 고려의 서북계와 강동 6주를 고찰하며 고려가 요에 보낸 표문만을 근거로 삼았었는데 이번에 다시 고려사 세가를 면밀히 살피며 요가 고려에 보낸 책봉문에서도 고려의 영토를 짐작케 하는 구절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종 5년, 1088년 요(거란)에 보낸 표문

自天皇鶴柱之城, 西收彼岸, 限日子鼈橋之水, 東割我疆.

1) 이에 따라 우리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화표주(華表柱)가 있는 요동성 건너 강안(江岸)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옛 고주몽(高朱蒙)이 건넜던 개사수(蓋斯水)로 확정되었습니다. (국역 고려사)

2) 승천황태후가 허락하신 이래(993년)로 서쪽은 화표주가 있는 고려 쪽 강안부터 동쪽은 동명성왕(일자)의 별교지수(엄리대수, 개사수, 시엄수)까지 고려에게 할양되었습니다. (본인)

숙종 2년, 1097년 요(거란)가 보낸 숙종 책봉문

十二月 癸巳 遼遣耶律思齊·李湘, 來賜玉冊·圭印·冠冕·車輅·章服·鞍馬·匹叚等物. 冊曰,

而海隅立社, 北抵龍泉, 西極鴨緣, 祗禀正朔, 奉輸琛賮.

12월 계사일. 요나라에서 야율사제(耶律思齊)와 이상(李湘)을 보내 왕을 책봉하는 책서(冊書), 옥으로 만든 인장, 면류관, 예식용 수레, 예복, 안장 갖춘 말, 비단필 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 그 책문은 이러하다.

“고려는 바닷가에 나라를 세워 그 영토가 북쪽으로는 용천(龍泉), 서쪽으로는 압록강까지 펼쳐져 있으며, 공경히 우리의 제도를 따르고 공물(琛贐)도 성실히 바쳐왔다.”

<고려사 세가>]

ㅡ 서쪽은 학야성, 동쪽은 동명성왕이 건넌 별교지수(개사수/엄리대수)
ㅡ 서쪽은 압록강, 북쪽은 용천(龍泉)

용천은 발해의 상경용천부가 있던 지역으로 현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녕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忽汗東) 일대에 비정됩니다.

또한 그곳으로부터 서북쪽의 길림성 장춘ㆍ길림 지역 역시 상경용천부의 관할 지역으로 사서 교차에 나타납니다.

11세기 당시 요나라가, 그것도 책봉문에서 당대 고려의 영토의 서한선과 북한선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질 사료 기록의 교차 내용은 제가 그동안 백수십 시간을 들여 고찰한 고려 전기의 서북계 위치 고찰의 내용을 다시 한번 강화시켜 주면서

동시에 고려사 지리지 서문의

“그 사방 경계(四履)를 보면, 서북은 당(唐)나라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다.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其四履, 西北, 自唐以來, 以鴨綠爲限, 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盖西北所至不及高句麗, 而東北過之. ) <고려사 지리지 서문>”

라고 한 진술의 이해에 바짝 다가서게 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이는 앞 서서 분석한 고려의 만주 및 여진족 경영의 사실과 더불어 최근에 연구 발표가 있었던 연해주 지역의 고려계 석성 유적 등이 말하는 바가

고려가 실제로는 연해주 및 흑룡강 일대까지 그 영토가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할 수 있습니다.

고려는 994년부터 1120 년 경까지
근 120 년 동안

잉커우ㅡ태자하ㅡ혼하ㅡ범하ㅡ길림성 장춘ㅡ흑룡강성 동녕현

에 이르는 북방영토를 차지하며 고구려와 발해 이래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만주에서의 우리 민족 역사의 그 화려한 불꽃의 마지막을 누렸다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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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7-12-25 08:32
   
※ 고려 전기 서북계 고찰을 마치며
1) 순수 사용 시간 : 11일, 120여 시간
2) 분석 문헌
ㅡ 주 : 요사 지리지, 고려사, 독사방여기요
ㅡ 부 : 한서 지리지, 신당서, 신당서 지리지, 통전, 자치통감, 송사, 요사, 명일통지, 명사, 명사 지리지, 금사, 금사 지리지, 원사, 원사 지리지, 청사, 주해도편, 도서편, 조선왕조실록 등
3) 입력 기기 : 갤럭시 S7
4) 향후 계획
ㅡ 고려 전기 서북계 고찰에 대한 재검증
ㅡ 고려 전기 동북계 고찰
ㅡ 13~14 세기 고려 서북계 및 동북계 변화상 고찰
ㅡ 여말선초 서북계 및 동북계 변화상 고찰
ㅡ 고구려 건국부터 발해까지 서계를 중심한 영토 변화상 고찰
ㅡ 백제 연구(위치 및 영역, 대륙 및 열도 활동상 등)
ㅡ 낙랑ㆍ현도ㆍ요동ㆍ요서의 위치 및 교치상 고찰
ㅡ 위만조선 연구(강역을 중심으로)
ㅡ 역대 만주 제민족ㆍ제국가의 위치 및 영역 변화상 연구
ㅡ 후조선, 전조선, 부여의 위치 및 강역, 출자 연구
ㅡ 하가점 하층 및 상층 문화를 중심한 홍산문화 연구
ㅡ 하북, 내몽골, 요서,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의 후기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문화 연구
ㅡ 지도 제작
ㅡ 영상 제작
ㅡ 출판
     
꼬마러브 17-12-25 09:35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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