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록은 <고려사 세가>에는 나오지 않고 <동국통감>에서 확인되는 자료이다.
고려사 문종 대의 여타 기록과 함께 고려 전성기의 강역이 만주까지였을 알려주는 방증 가운데 하나로 널리 활용되는
기록이지만
나는 이 기록을 지난 고려 서북계 고찰에서 활용하지 않고 일단 제외하였다.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서북로 병마사가 아뢰기를,
“장성(長城) 밖에 개간한 전답 1만 1천4백94경(頃)은, 청컨대 가을 수확을 기다려 군량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제가(制可)하였다.
<동국통감> 문종 27년(1073년) 2월
11세기 <고려사> 세가에는 994년 성종 이래 강동 6주를 농경지로 활발히 개간한 기록과 함께 거란의 압록강 변 성보와 다리 축조로 그곳 고려 백성들이 농사에 불편을 겪는다 하여 고려가 거란에 항의한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 천리장성은 학계 통설에 따라 현
압록강 하구로부터 함경남도 바닷가까지 이어진 것이다.
학계 통설에서는 공민왕 대의 일시적 점유를 제외하고는 고려 전체 시기 500여 년에 걸쳐 현 압록강에 그 영토가(압록강 하구 제외) 미치지 못 했고 압록강까지 우리 영토가 도달한 것은 조선 세종 대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앞서 이미 984~991의 성종 대에 압록강 변 성보 축조와 여진족 퇴치 사실을 고려사 세가 기록에서 찾아서 이러한 학계 통설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고려 덕종 2년 (1033년) 기사의 관성(關城)에 주석으로서 제시된, 학계 통설이 설명하는 천리장성 설명은 다음과 같다.
[덕종 2년(1033) 8월 옛 국내성(國內城)의 경계에 있던 압록강(鴨綠江) 하구의 바닷가부터 관방[關防·關城(관문·국경요새지)]시설을 설치하기 시작한 사실을 말한다. 고려조정은 거란과 여진의 남하에 대비하여 현종 때부터 북쪽 변방의 요새지에 부분적으로 성책을 축조하였으나, 덕종 2년부터 서해에서 동해까지 1천 리나 넘는 소위 천리장성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하여 정종 10년(1044)에 완성하였다. 그 지역은 위원진(威遠鎭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흥화진(興化鎭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피현군 백마 동쪽)·정주(靜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영삭진(寧朔鎭 : 지금의 평안북도 천마군 고영삭)·운주(雲州 : 지금의 평안북도 운산군)·안수진(安水鎭 :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시 조양)·청새진(淸塞鎭 : 지금의 자강도 희천시)·평로진(平虜鎭 : 지금의 자강도 동신군 신풍)·영원진(寧遠鎭 : 지금의 평안남도 녕원군 녕원)·정융진(定戎鎭)·맹주(孟州 :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삭주(朔州 : 지금의 평안북도 삭주군) 등지를 거쳐 요덕진(耀德鎭 : 지금의 함경남도 요덕군 요덕)·정변진(靜邊鎭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영흥)·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영흥) 등지까지 이르렀으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尺)이었다. 이 장성의 완성 결과, 고려의 북쪽 국경선이 획정되었으며, 여진 및 거란과의 문화적 구분선도 가지게 되었다. 이 관방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82, 병지, 성보(城堡), 정종(靖宗) 참조. 『고려사절요』 권4, 덕종 2년 8월.]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623929&cid=49629&categoryId=49629
그러나 고려사에서 장성이라는 것은 서북로에 정종 원년인 1035년에 쌓게 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정종 원년(1035). 서북로의 송령(松嶺) 동쪽에 장성(長城)을 쌓아 변방 외적의 침구를 막게 하였다. 또 재전(梓田)에 성을 쌓고 민(民)들을 이주시켜 인구를 채웠다.<고려사 병지 성보>]
(뿐만 아니라 해당 성보의 정종 기록에는 장성을 완성했다는 식의 그 어떤 표현도 없다 사실 고려는 전 시기에 걸쳐, 특히 11세기에는 성과 보를 계속 쌓았다. 정종 이후에도 여전히 활발히 말이다.)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674055&cid=49630&categoryId=49630
즉 동국통감 문종 27년 기사에서 서북면 병마사가 보고한 "장성 밖 전답 11,494경"은 바로 저 1035년에 서북로에 축조한, 혹은 축조케 한 장성을 가리키는 것으로밖에 달리 볼 수 없다
학계 통설에서 설하는 강동 6주와 천리장성의 위치는 우리가 학창시절 국사교과서를 통해 배운 바 대로 다음과 같다(링크 참조)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056953&cid=40942&categoryId=31682
문종 27년 기사의 전답 11,494 경의 크기는
조선 세종 대의 기준으로 소급시
대략 30 만 km²로 한반도 전체 먼적인 약 23 만 km²보다 넓다
조선 세종 대의 1경의 크기
https://m.blog.naver.com/okyes0612/220142283545
이 기사의 진위는 무엇이며
이 곳은 어디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