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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4-10 16:10
[일본] 왜인에 대한 소견..
 글쓴이 : Centurion
조회 : 6,431  

흔히 미국인들을 부르는 명칭 중에 대표적인게 양키입니다.
남북전쟁 때에도, 남부인들은 북부인들을 주로 양키라 불렀죠,.

자, 그럼 양키는 유럽인과 구별되던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던 다른 혈통을 가진 새로운 민족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자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유럽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었죠. 

대부분 영국,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같은 
서유럽, 혹은 북유럽과 동유럽, 남유럽에서 온 사람들로써..
상당수가 게르만 혈통입니다.  

그런데, 영국인들이나 유럽인들은 미국인을 가리켜 양키라 부르죠.
유럽 귀족문화에 젖어있던 남부의 농장주들도 북부인들을 양키라 불렀죠.

그렇다고 해서 그 피가 어디가겠습니까?
그냥 별칭이고 비하적인 표현일 뿐..그들은 유럽계 백인 혈통입니다.

왜는 뭐였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왜인들은 한반도에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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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강-전라도-경남 등에 분포해 있었고, (북한쪽은 아직 잘 모름)
이들이 한반도에서 전방후원분을 만들던 세력이었고, 일본에 건너가서도 전방후원분을 만들죠.
(고고학적 증거로 밝혀졌습니다. 반박 불가..)

아마, 왜인들은 삼한 중에서도 가장 토박이인 '마한'세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예맥족의 예족이 변형되어 왜족으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옛날에 유럽에도 이와 비슷한 민족이 있었죠. 바이킹이라는 해양 민족.
얘네들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고향이지만, 조선-항해기술과 약탈문화를 갖고..
당시 유럽 모든 지역에 출몰했고, 일부는 저 아메리카 대륙에도 발을 디딘것으로 알려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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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민족 대이동.. 민족의 이동 현상은 유럽에서 역사적으로 많이 일어났습니다.

동양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겠지만, 잘 다뤄지지 않고 있죠. 
하지만 중국사서에도 역사적으로도 xx족이 패배해 서쪽으로 밀려났다~같은 이런 내용은 꽤 많습니다.

노르만족, 바이킹.. 이들이 세운 나라 중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나폴리 왕국이나..
러시아의 기원이 되는 루스족이라던가.. 프랑스 북부에 정착한 노르망디 공국이라던가..
그런 아주 넓은 활동범위를 자랑합니다만..

그들 노르만족이 나폴리왕국을 세웠다고해서..
"노르만족은 나폴리 출신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노르만족 고향이 북유럽인데, 
그걸 선후관계 바꿔서 그들이 배타고 개척한 식민지가 고향이라고 말하진 않거든요.

왜인은.. 앞서도 말했지만.. 삼한쪽의 마한과 영역이 겹칩니다. 
본래, 진한, 변한은 마한이 땅을 갈라준 것에 가깝습니다. 
특히 신라가 있던 진한은 진나라에서 흘러든 유민들에 땅을 떼준것에 가까웠죠.
대신 왕은 마한인으로 하다가, 나중에 박혁거세가 신라왕이 되면서 진한을 통합시킵니다.

신라는 건국초기부터 동네북마냥 많은 침공을 당한 나라였습니다.

一年夏四月十五日 혁거세가 거서간에 오르다
四年夏四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알영이 왕비가 되다
八年 왜인이 침범하려다 물러가다
九年春三月 살별이 왕량에 나타나다
十四年夏四月 살별이 삼에 나타나다
十七年 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농사를 권하다
十九年春一月 변한이 항복하다
二十一年 금성을 쌓다
二十四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六年春一月 궁실을 조성하다
三十年夏四月三十日 낙랑 사람들이 침입했다가 돌아가다
三十二年秋八月 일식이 일어나다
三十八年春二月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三十九年 왕이 마한 왕의 죽음에 조문하다
四十年 백제의 온조가 즉위하다
四十三年春二月 일식이 일어나다
五十三年 동옥저가 말을 바치다
五十四年春二月 살별이 견우성에 나타나다
五十六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十九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六十年秋九月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다
六十一年春三月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다

무려 박혁거세 즉위 시기인.. 기원전 57년부터 쭉 이어지는 기록 중에..
마한, 낙랑, 왜, 동옥저, 변한 등 꽤나 스케일도 만만찮고 버라이어티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삼국 중에서도 가장 빠른 건국연대를 가진 신라보다 먼저 왜가 성립되어있었다?? 희한한 일이죠.
하지만, 삼국 이전에도 부여나 옥저, 동예, 삼한, 그리고 고조선 등등 먼저 세워진 나라는 많습니다.
하지만, 일본 열도에서 왜라는 나라가 탄생하고, 그 유적이 발견된건 훨씬 뒤죠.

그러니 그 말은.. 삼국시대 이전 
삼한지역에 수많은 소국이 난립한 시대에 이미.. 삼한인들의 왜 열도 진출이 있었고,
이미 신라, 가야 건국시기엔 왜와 교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지요.


동이열전 -왜

왜(倭)는 한(韓)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고, [이들은]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무릇 100여 나라[國]이다.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멸망시킨 후에 사역(使驛)을 이용하여 한(漢)과 통한 것이 30여 개 나라[國]이다. [이] 나라들의 [수장(首長)]은 모두 왕(王)을 칭하였는데, 대대로 왕통(王統)이 이어졌다. 그 대왜왕(大倭王)은 야마대국(邪馬臺國)에 있다. 낙랑군(樂浪郡)의 변경에서 그 나라는 만 2천 리 떨어져 있고, 그 나라의 서북방에 있는 구야한국(拘邪韓國)에서는 7천여 리 떨어져 있다. 그 땅은 대략 회계[군](會稽) 동야[현](東冶縣)의 동쪽에 있고, 주애[군](朱崖郡) 및 담이[군](儋耳郡)과 서로 가깝다. 따라서 그들의 법속(法俗)은 같은 것이 많다.

땅은 벼, 모시[麻紵] 그리고 양잠에 적합하며 [왜인들은] 천을 짜는 법과 실 잣는 법을 알아서 좋은 비단[縑]과 베를 만들었으며, 백주(白珠)와 푸른 옥이 산출되고 산에는 붉은 흙[丹土]이 난다. 기후가 온난하여 겨울과 여름에 채소[菜茹]가 생산된다. [그러나] 소, 말, 호랑이, 표범, 양 그리고 까치는 없다. 무기로는 창, 방패, 나무로 된 활, 대나무로 된 화살이 있고, 뼈로 화살촉[鏃]을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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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文身)을 하는데, 왼쪽과 오른쪽, 크고 작음에 따라서 존비(尊卑)의 차이를 구별한다. 그들 남자의 옷은 모두 가로의 폭이 넓은 천을 묶어서 서로 이었다. 여인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거나 말아서 뒤로 묶었는데, 옷은 홑이불과 같고 머리를 넣어서 입는다. 붉은 가루를 몸에 바르는데, 중국에서 분(粉)을 쓰는 것과 같다. [이 나라에는] 성책(城柵)과 옥실(屋室)이 있다. 부모와 형제는 거처하는 곳을 달리 하지만, 단 한 곳에 모일 때에는 남녀의 차별은 없다. 마시고 먹을 때 맨손으로 하지만, [음식을 담는 것은] 대나무와 나무로 만든 그릇을 이용한다. 풍속은 모두 맨발로 다니고, 양 무릎은 꿇고 허리를 낮추는 것[蹲踞]으로 공경을 나타낸다. [이]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술을 즐긴다. 대부분이 장수(壽考)하여, 1백여 세가 된 자도 대단히 많다. [이] 나라에는 여자가 많아서, 대인(大人)은 모두 4~5명의 처를 두고 있고, 그 나머지 남자들도 [처를] 2명 혹은 3명 두고 있다. [그러나] 여인들은 간음(姦淫)을 하지 않고 투기(妬忌)도 하지 않는다. 또 풍속이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다투고 소송(訴訟)하는 일이 적다. 범법자는 그 처와 자식들을 몰수하고, [좌가] 무거운 자는 그 가문의 사람들이나 일족을 족멸(族滅)한다. 사람이 죽으면 10여 일 동안 매장하지 않고, 그 집안사람[家人]들은 곡을 하며 울고, [죽은 사람에게] 술과 음식을 바치지 않으며, [그들의] ‘등류(等類)’는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논다. 뼈를 불로 지져서 점복(占卜)을 치는데, 그것으로써 길흉(吉凶)을 결정한다.

사행[行]이 바다를 건너서 [중국으로] 올 때에는 한 사람에게 머리를 빗거나 목욕하지 못하도록 하고, 고기[肉]를 먹거나 여자와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그를] ‘지최(持衰)’라고 하였다. 만약 [여행] 도중에 좋은 일과 이로운 일이 있으면, 재물을 가지고 그에게 보답한다. 만약 질병이 생기거나 재해를 만나면, 지최(持衰)가 삼가하지 않았다고 여겨서 곧 함께 그를 죽였다.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57)에 왜(倭)의 노국(奴國)이 공물(貢物)을 바치고 조하(朝賀)하였는데, 사인(使人)은 대부(大夫)를 자칭하였다. [노국은] 왜국(倭國)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이다. 광무제는 [노국(奴國) 사자에게] 인수(印綬)를 하사하였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원년(107)에 왜(倭)의 국왕(國王) 수승(帥升) 등이 생구(生口) 160인을 바치고 황제에게 알현하기를 원하였다.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치세에 왜국(倭國)에서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서로 공격하고 치니 오랫동안 군주(君主)가 없었다. 이름이 비미호(卑彌呼)라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었지만 시집을 가지 않고 귀신의 도[鬼神道]를 섬기면서 괴이한 술수[妖]로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녀를] 공동으로 세워[共立] 왕으로 삼았다. [그녀의] 시비(侍婢)는 천여 인이었지만, [그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단, [그녀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한 남자가 있어서 [그녀의] 말을 전하였다. [그녀의] 거처(居處)인 궁실(宮室), 누관(樓觀)69) 그리고 성책(城柵)을 [병사들이] 병기(兵器)를 가지고 수위(守衛)하였다. 법속(法俗)이 엄준(嚴峻)하였다.

여왕국(女王國)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나아가면 구노국(拘奴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의 사람들은) 비록 모두 왜종(倭種)이지만, 여왕에게 신속(臣屬)되지 않았다. 여왕국에서 남쪽으로 4천여 리를 가면 주유국(朱儒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 사람들의 키는 3~4척(尺)이다. 주유[국]에서 동남쪽으로 배를 타고 1년을 가면 나국(裸國)과 흑치국(黑齒國)에 이르는데, 사역(使驛)이 전하는 곳은 여기에서 끝이 난다.

회계(會稽)의 바다 바깥에 동제인(東鯷人)이 있는데, [이들은] 나뉘어져서 20여 나라를 이루었다. 또 이주(夷洲) 및 단주(澶洲)가 있다. 전해 내려온 말에 “진시황(秦始皇)이 방사(方士) 서복(徐福)을 시켜서 남녀 아이들[童]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서 봉래(蓬萊)의 신선(神仙)을 찾게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서복은 [뜻을 이루지 못한 죄를 물어서]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마침내 이 주(洲)들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그들은 대대로 이어져서 수만 가(家)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인민이 때로는 회계(會稽)에 와서 교역하기도 하였다. 회계 동야현(東冶縣) 사람 중에 바다에 들어가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단주(澶洲)에 도착한 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있는 곳이 대단히 멀어서, 왕래할 수가 없다

동이열전 -한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국(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 남쪽은 왜(倭)와 접(接)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接)하여 있다. 변진(弁辰)은 진한(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倭)와 접(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 백제(伯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萬餘戶), 작은 나라는 수천가(數千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한족(韓族)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王)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三韓) 지역의 왕(王)으로 군림하는데, [삼한(三韓)의] 제국왕(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 큰 밤이 산출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며,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는 5척(尺)이나 된다.

읍락(邑落)에 잡거(雜居)하며 역시 성곽(城郭)이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이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 부분에 있다. 궤배(跪拜)할 줄을 알지 못하며, 장유(長幼)의 차례와 남녀(男女)의 분별 따위의 예가 없다.

금(金)· 보화· 비단· 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우(牛)·마(馬)를 탈 줄을 모르고, 오직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꿰메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감(勇敢)하여 젊은이들 중 축실(築室)하는 데서 일하는 사람은 매번 밧줄로 등의 가죽을 꿰어 큰 나무를 매어 달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것을] 건장하다고 한다.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지어 노래부르며 춤춘다. 춤출 때에는 수십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의 추수를 끝내고는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여러 국읍(國邑)에는 각각 한 사람이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재하는데[그 사람을]‘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소도(蘇塗)를 만들어 거기다가 큰 나무를 세우고서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마한(馬韓)의] 남쪽 경계는 왜(倭)에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도 있다.

진한(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秦)나라에서 망명(亡命)한 사람들로서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그들은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부르며, 궁(弓)은 고(孤)라 하고, 적(賊)은 구(寇)라 하며,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라 하여, 진(秦)나라 말과 흡사하기 때문에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부른다.

성책(城栅)과 가옥(家屋)이 있다. 모든 작은 읍(邑)에는 각각 거수(渠帥)가 있으니, 강대한 자를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은 읍차(邑借)가 있다. 토질이 비옥하여 5곡이 잘 자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비단과 베를 짠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니며 혼인은 예의에 맞게 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은 길을 양보한다.

그 나라에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예(濊)·왜(倭)·마한(馬韓)이 모두 와서 사 간다. 모든 무역에 있어서 철(鐵)을 화폐로 사용한다.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고 비파뜯기를 좋아한다. 아이를 낳으면 머리가 납작하게 되도록 하려고 모두 돌로 눌러 놓는다.

변진(弁辰) 사람들은 진한(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진한(辰韓)과]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변진(弁辰)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의복은 깨끗하고 형법은 엄격하다. 변진은 왜국(倭國)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문신(文身)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

과거에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準)의 후손(後孫)이 절멸(絶滅)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自立)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

건무(建武) 20년(A.D.44; 百濟 多婁王 17) 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소마시(蘇馬諟)를 봉(封)하여 한(漢)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朝謁)하도록 하였다. 영제(靈帝) 말년에 한(韓)과 예(濊)가 모두 강성해져 [한(漢)나라의] 군현(郡縣)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한(韓)으로 도망하여 유입(流入)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한의 서쪽 바다의 섬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고 머리를 깎으며, 가죽 옷을 입는데 상의(上衣)만 입고 하의(下衣)는 입지 않는다.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한(韓)의 국중(國中)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서해 섬의 주호국 사람들은 왜구들처럼 키가 작고 하의실종 패션? 게다가 배를 타고 무역까지..)

동이열전 -예

예(濊)는 북쪽으로는 고구려(高句驪)· 옥저(沃沮)와,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大海)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조선(朝鮮)의 지역이다.

일찍이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조선(朝鮮)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팔조(八條)의 교(敎)를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아 [밤에도] 문을 닫지 아니하고, 부인(婦人)들은 정절(貞節)을 지키며 음식은 변두(籩豆)를 사용하여 먹었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조선후(朝鮮侯) 준(準)에 이르러 스스로 왕(王)이라 칭하였다. 한초(漢初)의 대혼란기에 연(燕)·제(齊)·조(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준(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조선(朝鮮)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우거(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원삭(元朔) 원년(B.C.128)에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 하였다. 원봉(元封) 3년(B.C.108)에 이르러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菟)·진번(眞番)의 사군(四郡)을 두었다. 소제(昭帝) 원시(始元) 5년(B.C.82)에는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현도는 다시 [고(高)]구려(句驪)로 옮겼으며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의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은 모두 낙랑에 예속되었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시 [대(大)]령(領)의 동쪽 7현(縣)을 떼어 낙랑군에 속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예(濊)가 한(漢)에] 복속된 후부터 풍속이 점점 나빠짐에 따라, 법령도 점차 늘어나 60여조(條)나 되었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6년(B.C.30; 高句麗 大武神王 13)에 [동부(東部)]도위(都尉)의 관직을 폐지하고, [대(大)]령(領) 동쪽의 지역을 포기한 뒤, 그 지방의 우두머리(거수,渠帥)들을 봉해 현후(縣侯)로 삼으니, 세시(歲時)마다 모두 와서 조하(朝賀)하였다.

[예(濊)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그들의 관직으로는 후(侯)와 읍군(邑君)과 삼로(三老)가 있다. [예(濊)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그 사람들의 성품은 우직하고 건실하며 욕심이 적어 남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남녀 모두 곡령(曲領)을 입는다. 그 풍속은 산천(山川)을 중요시하여 산천마다 각 읍락(邑落)의 경계가 있어서 함부로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동성(同姓)간에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고 금하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곧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마,麻)을 심고 누에를 기르며 길쌈을 할 줄 안다.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흉풍을 미리 안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神)으로 여겨 제사지낸다.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벌로 생구(生口)와 소· 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책화(責禍)’라고 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보전(步戰)에 능숙하며, 길이가 3장(丈)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한다. 낙랑(樂浪)의 단궁(檀弓)이 그 지방에서 산출(産出)된다. 또한 무늬있는 표범이 있고 과하마(果下馬)가 있으며, 바다에는 반어(班魚)가 나는데 사절(使節)이 올 적에 빠짐없이 헌상(獻上)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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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지 동이열전을 살펴보면.. 

삼한... 특히 마한과 왜, 예의 공통점은.. 비단을 생산할 줄 안다는 점..
그 중에서도 마한과 왜는 소, 말을 다룰 줄 모른다는 점, 귀신을 섬겼다는 점이 통하죠.
그외에도 모두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점..

마한의 경우 땅을 파고 무덤처럼 움집을 만들어 사는데, 이게 전방후원분의 원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왜인들은 주로 얼굴에 문신을 했고, 이게 유행인지 모르겠으나..
삼한지역에서도 왜인들처럼 얼굴 문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가야 지역에서는 철의 무역이 상당했는데.. 당시의 철은 한마디로 "화폐"였죠.

그래서 철정이 돈 역할을 하던 시대였는데.. 
그 말은 즉슨.. 철이 요즘의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철로 갑옷과 무기도 만들고, 농기구도 만들고 세력과 생산력을 키우는 등 이 것 저 것 할 수 있었으니까요.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달러 조폐소 연방준비위원회가 가야에 있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죠.
왕좌의 게임으로 치자면, 브라보스의 강철 은행 정도 위상..?

고로, 철=돈, 이걸로 용병 부려먹기 딱 좋았다 이거지요.

게다가 아래쪽에 언급된 인덕왕릉인가 그것도 보니까..
대략 4~6세기경 무덤들이 대부분이라죠.. 

검색해보니 재밌는 사진들이 몇개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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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dinko00.tistory.com/m/post/806

인덕천황릉인가 그것부터 비롯해 대부분이 가야, 백제 유물이 우르르 쏟아지는 수준..
이건 뭐.. 초기 왜와 별개로 이미 한반도 도래계의 영향이 강하게 묻어나오는 수준이라 
별도로 말할 가치도 없는거 같네요.

덧붙여..

서해 바다의 섬에 살던 주호국 사람들이.. 
하의실종 패션에 키가 작고, 배타고 무역을 하는 걸 보면..
이 쪽이 왜인과 연관이 있는걸수도 있겠습니다. 
마한세력 중에서도 왜로 가장 먼저 진출한 해양세력??

그래서,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면서..
남해안 루트를 따라, 일본 열도까지 진출했을 가능성도 있어보이네요.

다만, 주호국 역시 마한 연맹체의 일부로써,
전방후원분 자체가 마한의 무덤양식이라고 봅니다.

꼭, 가야-백제가 성립된 이후 왜 열도 개척이 일어났다기보다..
이미 그 이전의 삼한시절에 왜 열도로 한반도 도래인들이 진출했다고 봐야될 거 같습니다. 


images (2).jpg

그리고 초기 왜를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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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가 15-04-10 17:07
   
마한세력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왜국을 세웠다는 가설에 대해서는 그럴수도 있다고보는데 4~5세기무렵 영산강유역에 전방후원분을 건설한 세력은 마한이 확실히 아닙니다.왜냐면 당시 마한왕가의 무덤은 그지역에 옹관묘라는 다른양식으로 축조되고 있었음. 규모면에서 전방후원분보다 더 컷구요.(그 지역의 지배주도권이 왜계 전방후원분세력이 아닌 마한계 옹관묘제 세력에게 있었다는걸 알수있죠)

그분포지역이 옹관묘(마한)세력이 지역중심부에 있었고 전방후원분세력이 이걸 외곽에서 견제하는 형식으로 되어있어 백제왕가에서 지역토착민인 마한세력을 견제하기위해 왜계세력을 사주한 걸로 보는 시각도 있더군요.
     
오투비 15-04-10 17:27
   
글쎄 전방후원분 원형인 주구묘가 한반도에서 발견됐고 왜국보다 1세기 앞선다는 결론이 낫다니까 그러시네 ㅋㅋㅋ
햄돌 15-04-10 20:37
   
고조선시대 사람들도 열도로 건너가 야요이문화를 꽃피웠고

가야세력이 건너가서 야마토정권이 된거임

이건 뭐 참 트루
햄돌 15-04-10 20:39
   
다큐에서 봤는데

한반도 남쪽 영산강유역 세력이 한반도에서 보다

열도에서 세력을 넓히고 영향력을 키웠다고 합니다.

이건 ㄹㅇ 트루같음
동화 15-04-10 22:30
   
대체적으로 동의합니다.
고대에는 일본이란 이름이 아닌..倭(왜) 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쓰였으니까..그 왜라는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할법하죠..
저는 4세기 이전과 이후로 봐야 된다는 입장이고..
4세기이전의 왜는 야요이세력의 부족국가 또는 연맹국가의 형태로 유지되었다고 봅니다..
4세기 이후부터는 가야연맹과 같은 형태로..연맹체가 있고 그 연맹체를 대표하는 왕(왜왕-->일왕)이 있었을거란 생각입니다.
Windrider 15-04-11 00:41
   
이건 유물도 확실하니 빼도박도 못하는데 일본이 절대 인정안하죠.
천우신조 15-04-11 00:58
   
위에 후한서 동이열전에 따르면 왜가 동남쪽 바다한가운데에 사는데
마한과 변한에 접하였다는 말은 아예 한반도 아주 남쪽이 왜의 영토였다는 말인데... 왜가 韓민족과 같이 두섞여서살았던 사람들로 되버리는데 확실한건가요?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와있는 내용도 그렇고 궁금하긴하네요.
한반도 남단의 왜가 본토와 같은 계열이면서 왜구가 한반도로 진출하여 살았단 영역인지 헷갈리고..
후한서를 곧이 곧대로 믿어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국사기등에도 언급되지 않은걸로 아는데 이게 학계나 사학자들사이에서 인정이 되는건지;
글쓴이님께서 예족이 왜일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건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학설인걸로 알고있는데... 이게 짧은 생각이지만 임나일본부설의 빌미가 될수 있는 논리같아서 좀 헷갈리네요.
     
햄돌 15-04-11 01:26
   
그니까

원래 왜세력이 한반도남부에 있던 세력인데

훗날 열도로 건너가서 세력을 더 팽창시켰단 말이죠
     
Centurion 15-04-11 01:30
   
위에 KBS 역사 다큐로 보충해뒀지만..
왜라는게.. 사실 일본 열도의 원주민이라기보다..
한국에서 건너간 마한세력의 일파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은 그냥 앞뒤가 바뀐거죠.
일본열도의 왜가 한반도 남쪽을 지배한게 아니라..
한반도의 마한세력의 일파이자 해양세력인 왜가 일본 열도를 접수한 것이죠.

(키가 작다, 하의를 안입었다는걸로 봐선, 서해 섬에 살던 마한 주호국 세력일 가능성이거나,
 아니면 전남쪽의 마한 남부세력일 수도 있구요)

그리고 이 마한세력의 일파인 왜를 뒤이어,
가야, 백제, 신라 계통이 흘러들어가는것이구요.

이런 범 고조선 계통의 민족들이 들어간 흔적이 일본 건국신화에서 나타나고 있구요.
(천자 강립-천송강림 신화의 유사성, 3종신기와 천부인 3개의 유사성)

고고학적 유물의 시기로 보더라도..
전방후원분이든, 그 모태 원형인 주구묘든, 하니와(원형토기), 조족문토기 등은
모두 한반도가 앞선걸로 드러났고, 한마디로.. 왜 열도로 건너가서 영향을 끼친 세력이
한반도 전남에 분포한 세력(마한, 왜) 세력이라는 게 확실하다는 점이죠.

애시당초 예족(한반도 북방의 동예와 같은 예족)이 왜라면?
이것도 결국 한반도 도래인이라는 소리라서 임나일본부랑은 전혀 다른 소리지요.

임나일본부의 근간은 일본에서 일본 왜 민족이 한반도를 건너와 남부를 점령했다는 것인데..
한반도 도래계가 일본열도를 접수하고 그 영향력을 유적, 유물로 남긴 것은 정반대의 논리죠.
          
천우신조 15-04-11 14:25
   
자세한 설명감사합니다.. 
막연하게 "왜"라는 이들이 현대의 일본인의 직접적 조상인 것이고
그들은 처음부터 일본본토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도래인이 건너가 짬뽕이 된거다.
그 도래인인은 고조선계, 백제계, 고구려계, 발해계, 신라계도 있었을테지만
하지만 역시 일본인의 직접적 토대는 본토에 살았던 토착인일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뒤집어지는 자료네요.

그럼 초기 '왜'는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 남부의 마한의 일파중에 하나였고 토착민족이었다'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또  한국어를 사용하는 마한인이었는지 아니면 현대일본어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볼수있을지(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보는관점에 따라서 180도 달라질수도 있을거 같아서요.

당연히 현대의 일본어가 도래인과 열도원주민의 언어가 혼합된것이겠지만, 가능성은 적겠지만 언뜻 일본어를 사용하는 왜가 한반도 토착세력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아찔하네요.

제가 니시지마 사다오의 '동아시아세계론과 일본'이라는 책을 봤더니
그 일본인이
"예족=왜 이고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통치를 했고 일본으로 온 기마민족은 중국계이다.
백제, 신라는 왜의 책봉을 받은 국가였으며 백촌강전투때 일본의 파견은 백제라는 왜의 책봉국을 도우러간것이다..."라고 써놨더군요.
그 근거로 "'왜'가 백제신라임나를 아우르는 책봉을 받았기때문이다"라고 하는데.. 그런것도 있고 해서 잠시 혼란왔던거 같네요ㅎㅎ
               
Centurion 15-04-11 18:04
   
제가 봤을 때 그 니시지마 사다오는 전형적인 우익계통의 학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보통 일본 혐한우익들이 한반도의 영향과 혈통을 애써 축소은폐하고, 중국계의 영향을
크게 부풀리는 경향이 강하지요.

소위 자기들은 진나라에서 온 서복이 거느린 동남동녀의 후손이다라고 생각을 하니까요.
(얘네들은 일제강점기 이후로 간뎅이가 부어서 자신들한테 짓밟힌 한국의 고대사에서의 영향력을 애써 부정하려 드는 마인드가 있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의 예와 왜의 공통점은 음주가무를 즐긴다. 양잠을 통해 비단을 짤 수 있다 정도를 빼곤 별로 닮은 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찌감치 고조선의 양대 축인 예족과 맥족 중 한 집단인 예족이 남하해서 마한에 정착했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백제, 신라가 왜의 책봉을 받았다느니 뭐 이런것도 뻔히 알수 있는 혐한우익의 짙은 냄새가 풍기는 근거약한 주장일 뿐이라고 봅니다. 아마 칠지도를 일본천황이 하사한거니 뭐니 그런 소리를 했겠죠. ㅋ
 
그리고 뭐.. 일본이 그런 관직을 받았다는건 송서에 나와있는 대목이라고 하는데..
사지절도독인가해서 왜, 신라, 임라, 가라, 진한, 모한의 육군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 벼슬을 책봉받았다고 하는데...

 이 당시에는 한반도에 모한(마한)이 망해서 없었던 시절이라더군요. 그래서 몇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왜에 있는 한반도 도래계 소국들의 통일을 이뤘다는 벼슬일 가능성이 유력해보입니다.

사실 이게 역사적 사실과도 딱딱 맞아떨어지죠. 
삼한, 가야, 신라, 한반도 왜 세력까지 진출해 각축전을 벌이다,
어느 정도 정치적 통일을 이뤄내서 단일왕조를 확립했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딱 맞아떨어지니까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일본을 통일했을 때 일본국왕 책봉을 받기도 했죠.
아마 그런 왜 열도의 정치적 통일을 이룬걸 알리고,
중국에 인정받아 얻은 벼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입니다.
보통 통일을 못이룬 상태에선 바다건너 외국과 외교를 할 여유가 잘 없거든요.
(상대가 찾아오는 외교는 모를까, 자신들이 건너가 책봉을 받는 그런 외교는 어렵죠)

그리고 언어적으로는... 어느 정도 같은 언어도 오랫동안 분리되고 고립되면 꽤 큰 차이가 발생할 수 있고, 다양한 변수들이 중간 중간 양쪽에 변형을 줄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한쪽은 원형 그대로고, 한쪽만 변했다가 아니라, 둘다 이런저런 영향에 변형되어 서로간의 거리가 쭉 벌어지는 것이죠. 마치 반대 방향으로 걷는 두 사람처럼 <---------> 차이가 벌어진다고나 할까요.)

특히 한반도의 경우엔 한자어의 사용이 아주 강력한 영향을 끼치지요.
심지어 중국에서 당나라식 한자 발음을 한국어에서 찾을 정도로..

이건 어차피 복잡하고, 변수도 많은 부분이니 확언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마한이 현재 일본어랑 크게 같다고 여겨지진 않습니다.
그래도 진한, 변한과 말이 아주 안통할 정도는 아닌거 같구요.
그런 유사성과 어느 정도 동질감이 있었으니, 진한에 땅도 갈라줘서 살게해준게 아닐까 싶네요.

어쨌든, 단군조선이 적어도 기원전 2333년에 세워진 나라였고..
그 예족이 한반도로 남하하기엔 충분한 시간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왜가 되었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
못할리도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쨌든 님이 읽으신 그 일본 우익 학자의 책은
그냥 어떤 할 짓 없는 우익의 발광이라 생각하고 넘어가시면 될 거 같습니다.

애시당초 저 위에 나오는 가라쿠니타케, 하늘의 신 아마테라스, 그 손자 니니기라는..
일본열도의 가장 앞부분의 건국신화 자체가 한반도 도래계의 증거 투성이니까요.

그리고, 마한과 달리 북방에서 내려온 진한과 신라, 백제 등은 말을 다룰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중국계 기마민족 도래도 헛소리지요. 애시당초 유물 중에도.. 말장신구 같은게
한반도꺼랑 똑같은 게 나왔습니다.

말 무덤 근처에 발견된 인골은 백제계 야요이인의 DNA였구요.
                    
천우신조 15-04-12 00:49
   
네 칠지도 이야기도 하고 나름대로 다른근거를 얘기하기도 하더라구요. 그사람이 알고보니 고대 동아시아 관계론에서 책봉론으로 나름 저명하던데, 내용은 역시 일본중심의 천하관이었네요. 중국의 절대적 영향력은 인정하지만 일본은 독자적인 세계관을 유지발전시켰다라는...대동아공영권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위에 올리신 영산강유역 고분묘에 관한 영상을 보니
확실히 몇백년 앞선 전방고분묘의 초기형태와 주구묘를 볼때
마한세력의 일본진출설은 거의 확실해보이네요.

말씀하신대로 같은 언어라도 외딴섬에 따로 사람들을 고립시켜놓으면
완전히 서로다른 언어로 발전할수있듯이
영산강유역을 기점으로하는 마한세력의 언어가 확실히 어떨것이다라고
단정짓는건 무리가 있어보이네요..
어차피 왜가 한반도와 완전히 정체성이 다른 일본이라는 국가가되는데에는
훨씬나중의 일일테니 크게 한반도 최남단에 왜가 있었다고 가정해도 문제는 없어보입니다.
               
Centurion 15-04-11 19:16
   
그리고 님께서 말씀하신 송서에 대해 좀 찾아봤는데..
송서에 왜5왕이 책봉을 받은 시기는 대략.. 고구려 장수왕 재위기간입니다.
왜5왕 (413~502년), 고구려 장수왕(412~491)

재밌게도.. 그 바로 전 시기가 광개토대왕에 의해 백제가 망하다시피한 시절이었고..
왜와 가야도 빈사상태로 넉다운 된 시기였다는 점이죠.
그 후 백제가 찌그러지고, 한강이남의 백제,신라,가야 모두 고구려 영향권에 있던 시기였죠.

왜왕은 송나라에 조공을 바쳐가며,
왜,신라,백제,임라,가라,진한,모한 등의 6국, 7국 제군사를 자칭하는데..

이 시기는 북연이 송나라와 연합해 고구려에 저항하다,
송나라 지원군의 장군 왕백구가 고구려에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던 438년 무렵입니다..

왜는 이때다 싶어, 고구려랑 사이가 틀어진 틈을 이용해 무리한 책봉을 요청합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9%9C5%EC%99%95

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늘 일이 막히고 거슬리는 바람에 어진 풍속을 잃고 있사오니,
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
신의 죽은 아비 제는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천자에게 자주 문안드리지 못함을 분통히 여겼으며, 활을 당기는 백만의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싶었으나, 갑자기 아비와 형을 잃어, 이루려는 공이 흙 한 삼태기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
만일 황제의 덕을 입는다면, 이 강한 적을 꺾어 없애고, 어려운 무리들을 이기시어 조용하게 하시면 전대의 공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

재밌게도.. 고구려에 대한 원한이 아주 심하게 드러나며,
아주 열심히 자신의 책봉을 최대한 많이 받고자 애를 씁니다.
하지만, 처음엔 그런 요청이 송나라에 의해 씹히기도 했으나..
열심히 조공을 바쳐가며 매달려서인지 결국 원하는 책봉을 따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저 표문의 내용에서도 나타나듯이..
송나라에 최대한 의지해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발버둥이었던것이죠.

자..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마도 백제는 고구려한테 와장창 깨진 시절이었고,

18대 전지왕(405~420) -  아신왕의 아들
19대 구이신왕(420~427) - 전지왕의 맏아들
20대 비유왕(427∼454) -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함
21대 개로왕(455~475) -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22대 문주왕(475~477) -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 옮기고 국방에 힘씀
23대 삼근왕(477~479) -  문주왕의 맏아들
24대 동성왕(479~501) -  삼근왕의 동생,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25대 무령왕(501~523) - 동성왕의 둘째아들,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신장하여 국제적 지위를 강화함

왜 열도는 고구려의 군대가 딱히 건너갔다고 보기 어려운데..
왜왕들이 고구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한반도 남부세력의 맹주라는 명목상의 지위를 확보하려 애쓰죠.

근데, 당시 백제는 거의 고구려한테 툭하면 얻어터지고 망하는 수준의 약소국이었습니다.
고로, 왜 열도의 백제 분국이 오히려 안정적인 시기였다 이거죠.

그래서 왜왕의 직위를 가진 백제왕이 한반도의 위태로운 백제 본국을 대신해..
필사적으로 고구려를 까고, 디스하면서 송나라한테 우리를 한반도의 맹주로 인정해달라,
그리고 고구려 좀 같이 공격해달라, 잘보이려 애쓰며 연합하려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엄연히 고구려가 자주 침략하고 집어삼키려 했던 나라는 왜가 아니라, 백제였거든요.
근데, 왜왕이 백제왕에 빙의된것처럼 고구려의 침략을 논하고 있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왜(백제 분국)왕이 고구려에 줘터지던 허약한 본국 백제왕보다 오히려 한끗발 높았던 시절의 상황을 나타낸 장면이랄까요..

이걸 일본 학자들이 필사적으로 한반도는 왜의 영향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

그리고 위태위태했던 백제 본국도 결국 신라와의 결혼동맹이나, 왜 분국과 송나라와의 관계강화등으로 필사적으로 버텨서 훗날 나제동맹을 통해 고구려 세력을 극복할 수 있게 되지요.
                    
천우신조 15-04-12 01:05
   
예나 지금이나 일본인들의 한반도 야욕은 끝이없었군요... 무려 7개국의 군사총참을 사칭하려하다니. 백제의 분국이었으면서 백제가 약해진 틈을타 보스노릇을 할려는것까지 어이가 없습니다; 니시지마 교수가 주장했던 것처럼 책봉과 조공이 거의 없었기는 커녕 고구려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책봉을 애걸복걸하는 모습만 적나라하게 드러나네요.
아무튼 센츄리온님께서 올린글 덕분에 그동안 상대적으로 몰랐던 마한세력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
                         
Centurion 15-04-12 03:50
   
허허. 별말씀을... .

그리고, 아마도 7개국의 제군사 직위를 요청한 것은..
백제 최고의 전성기였던 근초고왕-근구수왕 시기 백제가 한반도 남부(신라-가야 포함), 왜 열도의 왜왕 직위까지 손에 넣은 시기를 떠올리며..
고구려에 빼앗긴 한반도 남부(백제 본국, 신라, 가야, 삼한)에서 쫓겨나 백제 잔당=왜로 불리우던 시기에 외교적으로나마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리수를 쓴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때의 상태는 고구려가 사실상 흡수합병을 하지 않았을 뿐,
한때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던 강성했던 근초고왕의 백제를..
신하국이자 언제든 침공해서 왕을 죽여버릴 수 있는 신하국 상태의 백제로 몰락시킨 상태였죠.
그리고, 신라나 가야의 상태도 마찬가지로 고구려에게 복속된 상태나 다름없었구요.

당시 왜왕은 백제왕이 되기전에 거쳐가던 분국왕 자리로..
요즘으로 치면.. 영국왕이 되기전에 거쳐가던 웨일즈 오브 프린스 같은 자리였다고 볼 수 있을듯 합니다.
영국은 UNITED KINGDOM 즉. 연합왕국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잉글랜드-웨일즈-스코틀랜드의 작위를 다 갖고 있죠.
스코틀랜드 왕이 잉글랜드왕을 겸한 이래, 하나의 나라처럼 이어져 왔구요.(동군연합이라고 부르지요. 왕이 같아서 자연스럽게 동맹, 혹은 하나의 나라가 된 형태)

고구려에 몰락당한 백제 본토왕은 권위가 땅에 떨어졌지만..
반면에 왜 열도의 왜 분국왕은 백제 부흥세력의 중심으로 권위가 올라간 시절이지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백제의 전성기 때 확보한 한반도 남부-왜열도의 작위를 모두 인정받고..
비록 고구려 영역이 되어버렸지만, 이름뿐인 명함일지라도 거창한 그룹 회장 명함을 파놓고,
나중에 송나라의 힘을 빌려 회복해 보려한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근데 중국의 남조였던 송나라가 고구려를 친다는 것은 별로 현실성은 없는데.. 그런것에 매달릴만큼 백제잔당=왜의 상황이 안좋았다는 것이겠죠)
바가본도 15-04-12 10:27
   
고려시대 강진 고려청자 연구하시는 할배가 있는데..직접 들은 소리입니다만..통일신라때~고려시대(중국은 송나라 쯤.그후에..원나라와 명나라때 해금정책으로 해양세력은 퇴보하게됨) 에 강진이나 완도 쯤 되는곳에서 중국 닝보까지 배로 3일 걸렸다고 하더군요.돗단배로 가는데 그리 빨리 가는게 가능하냐고 하니 일명 해류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하네요.지금도 평택에서 중국 연운항까지 거의 12시간인가 걸리죠.3일이면 굉장한 속도이죠.그때 닝보는 중국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였고 엄청난 왕래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닝보에서 춘향전과 비슷한 소설있는데 사실 춘향전이 닝보가 간게 아니라 중국 소설이 춘향전에 영향을 준것임. 고려청자의 루트(사실 청자는
중국 주나라때부터 내려온 양식인데 지금의 장시성쯤에 청자 도요지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그 청자에 영향을 받아 고려가
고려청자를생산하는데 중국것보다 뛰어나 중국 황실에서도 청자가 알려지게됨)

제가 말씀드리고 하는것은 바로 해양세력입니다. 고조선 시대에 지금의 중국 압록강에서 카자흐스탄에 이르는 유목민족 뿐만아니라
해양민족이 있었다는거죠..태국쯤에서 지금의 말레이시아 까지 이르는 거대한 해양세력이 존재했다는것. 물론 한반도와 일본도 이런 해양세력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은것은 사실이고.그 해양세력은 배에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평생 배에서 태어나서
죽었다고 합니다.전남 법성포 나이지긋하신 할배한테도 들은 소리이지만 왜정때 지나고 중국이 개혁개방 하기전에
이런 해양세력(주로 중국 푸저우성 쯤으로 보이는 어부) 들 가끔 바다가에서 만나곤 했답니다. 그 할배 말에 의하면
그들은 수천년간 바닷가에서 떠돌아 다니는 세력이라고 하더군요.왜 라는것도 일본 의 무장 군사또는 해적이 아니라
이런 해양세력이라고 하네요. 일본 왜라고 불리는 수장은 대부분 중국인 출신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런 소리는 한국 역사서나 이런데는 잘 안보이더군요. 제가 한자도 잘모르고..인터넷만 뒤져서인가?
암튼  고려청자를 조금 연구하다보면 이런 재미있는 역사가 나옴.아이러니하게도 이 고쳐청자의 루트를 제대로 연구한
사람은 일본인임. 추가로 海流가 재미있는게..제주도 쯤에서 난파당하면 닝보 한참아래 표류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중국 문헌에 의하면 난파당했던 사람들이  중국에 정착해서 살던 사람이 실제 나옵니다.저도 심도있게 조금
연구하고 싶긴한데..
백제나 통일신라 고려시대쯤에는 이런 디테일한것은 깨알같이 남겨놓은것은 사라진것인지 원래 적어놓은게 없는지
의문이지만 암튼 중국 문헌을 보고 연구해야되는데 사투리 많은 광대한 중국어 번자체며 광동어며  민어하며 심지오
오나라 언어까지 연구해야되니..이건머..
바가본도 15-04-12 10:40
   
어떤 역사학자가 그러더군요. 역사에 우연이란 없다고.명나라가 해금정책을 펼치지만 않았다면 아편전쟁도 없었을것이고( 송나라 때만해도 중국과 고려는 해양세력의 강자였지만 해금정책으로 무주공산인 거대한 해양을 스페인이나 포르투칼 북유럽사람들이 슬그머니 인도로 아시아로 아메리카 대륙으로가게됨) 그리고 해금 정책이 조선에 영향을 끼쳐 독도문제도  나오게 된것이고..) 다들 아시겠지만..세월호 학생들 다니던 학교가 단원고이죠.
이게 김홍도 호이기도 합니다. 명나라에 유명한화가 단원(실제로 김홍도는 단원을 보지못하고 이름만 들엇음)
의 호이기도 합니다.지금도 중국 상하이 행정구역상 단원이 살던 집이 큰 관광지로 있지요.
재미있지않나요? 세월호 사건 불과 몇달전에 말레이시아 항공 행방불명 대부분 탑승자가 중국인 이였죠.
둘다 중화사상에 대한 일종의 경고를하기나 하는것처럼.김홍도가 한번 보지도 못한 명나라 화가를 자기의 호로 할만큼 사대주의 숭배주의에 빠진 조선.(김홍도는 욕하지 말아주세요.저의 직계선조임).
그리고 조선의  해금정책으로 시작된 독도문제..하나같이 연결 고리가 없는게 없다는게 ..어떻게 거의 오백년전 정책이 지금에 와서 영향을 끼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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