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태조대왕은 이미 55년에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았으며
5세기 광개토 태왕 이후 장수, 문자명태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는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며 북조사를 좌지함.
이후 남북조사에서 기병을 운용하던 선비족 군사력이 접목되어 실전을 거치면서 탄생한 서토 고금 사상 최대의 물량을 구가하던 통일 왕조 수나라 대군. 이들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수백만 대군을 거듭 동원하고도 결국 패망.
역대 이후 가장 화려한 전적(戰績)을 자랑하던 당나라 이세민 백만 대군마저도 결국 고구려 정벌을 하려다 쫓긴 채 돌아와서 병사.
이런게 단순히 고구려가 운빨로 혹은 불굴의 의지만으로 이겼다고 보심?
우리 고구려 인구 추정에 대해서는 설왕설래 하지만 저는 고구려 인구 5백만 정도에 복속한 인구를 합쳐 천만명 가까이 되었다는 것에 나름 더 타당성을 가지고 보고 있음.
이 이유는 링크를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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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이와 같이 추론했던 것이고, 그것이 350만 설보다는 더 타당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는 고구려인의 인구를 약 500만 정도로 보고, 여기에 복속민까지 합쳐서 약 1000만으로 보는 것입니다.>
산세가 복병하고 출입할 만한 곳이며, 고구려와 말갈이 군사를 합하여 진을 쳤는데 방(方)이 40리나 되었다. 황제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으니
황제가 응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연수를 속여 말하기를,
“나는 그대 나라의 강신(强臣 연 개소문(淵蓋蘇文)을 가리킨다)이 군주를 시해한 까닭으로 죄를 물으러 왔다가 싸우기에 이르렀으나 이는 나의 본뜻이 아니고, 그대 나라에 들어와 추속(蒭束)을 공급받지 못하였으므로 그대 나라의 몇 성(城)을 취하였으나 그대 나라가 신례(臣禮)를 닦는다면 빼앗은 것을 꼭 돌려주겠다
육군(六軍)이 고구려에게 패하여 거의 떨치지 못하였고, 염탐하는 자가 고하기를 ‘영공(英公 이세적(李世勣))이 거느리는 흑기(黑旗)가 포위되었다.’ 하니, 태종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을사년 신라 선덕여주 14년, 고구려 왕장 4년, 백제 왕 의자 5년(당 태종 정관 19, 645)
두 달 동안 공을 들여서 쌓았던 토산을 고구려군에게 빼앗기고 안시성을 함락하는 데 실패한 당 태종은 회군을 하는데, 당시의 정황을 『삼국사기』에서는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는데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일을 도왔다.’
『삼국사기』에는 ‘여러 군대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서 사졸들이 습기에 젖어 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명령을 내려 길에 불을 피워 맞이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