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인터넷에서 많은 논란의 상황이 되는 6세기 후반 부터 7세기 까지 흔히
백제가 신라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전 그 반대라고 생각함..
물론 백제가 신라와의 소규모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한 것은 분명함... 하지만 6세기의 진흥왕때 부터
신라와 백제간의 저울추는 신라쪽으로 기울어졌다는게 정설아님? 이미 백제 성왕이 나제동맹을 배신하고
고구려로 부터 빼앗은 한강지역을 신라가 백제를 쳐서 빼앗고 독점하자 이에 신라에 대한 정벌을 감행하는
데 여기서 신라에게 패하고 당시 성왕 자신을 비롯 좌평4명과 군사3만명을 몰살 당하는 엄청난 패배를 당하
됨.. 여기서 좌평은 백제에는 원래 6좌평이 있는데 이들은 지금으로 따지면 국무위원 즉 장관급들인데
왕과 장관들과 당시 군병력3만명의 몰살은 고대사회에서는 엄청난 혼란과 패배를 안겨주는 전투임..
이 때 부터 백제는 신라에게 회복할수 없는 국력차이를 가지게 됐다고 생각함...
물론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의자왕때 대야성을 비롯 수십개의 성을 공취하였다고 나오지만
분명한것은 국정교과서에도 그렇고 사관학교 기본교제에도 나오듯 삼국시대 기본전략은 1+1=/>1 임.
즉 약한나라 2개가 동맹을 맺어 하나의 강국보다 더 큰 전력을 유지하며 삼국의 균형을 유지하는게 기본
전략이었음.. 그래서 신라의 진흥왕 이후로 한강유역과 함경도 일대를 빼앗긴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어 신라를 견제하였음.. 그 이전 백제가 근초고왕때 강했던 4세기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동맹이었고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강세였던 5세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으로 고구려에 대항하였음.
이러한 사실을 보더라도 약한쪽을 견제하기 위해 강한쪽 2나라가 동맹을 맺은 경우는 없음..즉 백제와 고구려가 동맹을 맺었다는 것은 신라가 이미 이 두나라와 비슷한 국력을 갖췄다는걸 의미함..
그 뒤 의자왕때 대야성을 신라로 부터 빼앗아 오지만 이것도 결국 김춘추의 사위였던 김품석의 ㅄ짓으로
지들 부하의 마누라를 건들이고 다니는 바람에 앙심을 품은 부하에 의해 대야성의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백제가 빼앗은 거지, 실제 백제와의 전투에서 잃어 버린게 아님..
그리고 이때를 흔히 신라 최대의 위기라고 많이 하는데 사실 대야성 이 지금의 합천인데 여기서 부터 신라
수도 경주 까지는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꽉꽉 막혀 있음...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합천위에가 고령이고 고령을 지나 대구 까지는 험준한 산악으로 곳곳에 산성이 들어서있어 생각보다 그렇게 위기 상황이 아니었음
실제로 백제가 대야성을 빼앗은 이후 그 뒤에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완전 포위 당하여 결국 김유신에 의해
다시 대야성을 내준것을 볼 때 그렇게 국가적 위기 상황은 아니었음. 오히려 성왕때 백제가 왕과 좌평들이
신라에 잡혀 죽임을 당하고 옥천까지 뚫려 버린 백제가 더 다급하면 다급했던 상황이었음..
옥천에서 부터 백제의 수도까지는 신라의 산악지형과는 다르게 뻥 뚫린 평야 지대였음..
그리고 의자왕 시기 신라와의 전투시 항상 고구려가 문제였음. 신라는 고구려가 당항성을 포위하고 치는 바람에 백제와의 전선에 집중할수 없었던 어려움도 컸었고 백제가 빼앗은 성은 대부분 성이라고 하는 데
실상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성이 아니라
작은 토성수준의 간이 요새정도 였음,, 그렇지 않다면 백제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빼앗았다고 말하는
2~300여개의 성은 신라의 지역을 살펴봐도 도저히 300개 정도의 성이 있을 지형이 없음
백제와 신라가 소규모 국지전을 벌이며 서로 뺏고 빼앗긴 지역은 경상남도 쪽의 일부 지역 즉 이러한
제한된 곳에 300개의 성이 있다는게 말이나 됨? 그리고 더 중요한건 백제가 빼앗은 것은 이야기 하지만
그 뒤에 도로 다 신라에게 빼앗긴 것은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고 앞서의 사실만 가지고 백제가 더
강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틀린 말임..
그리고 김춘추는 자기의 딸과 사위를 백제가 죽임으로써 뼈속까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가졌음.. 물론 개인의
원한으로 당을 끌어들인것은 잘못이었으나 김춘추 입장에서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싶었을것임..
그래서 우선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끊기 위해 고구려를 찾아갔지만 고구려에 억류되고 겨우 탈출하였음
고구려만 전선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신라로서는 전력을 백제에 기울인다면 충분히 백제를 멸할수 있다고 생각했었고 실제로 성왕이후 국력에서도 신라가 더 압서게 됨.
당시 백제는 의자왕의 폭정과 지도층 내부의 내분등으로 자신의 수도 바로 코 앞에 덕적도란 섬에 3개월 동안 당나라가 주둔하는걸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13만의 당군과 신라 5만에게 무너졌지만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매소성 전투에서만 20만의 당군을 몰살 시켰음. 흔히 당시 당나라는 토번과의 전쟁으로 전력을 집중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제가 막지 못한 13만 당나라군사보다 훨씬 많은 20만 대군을 매소성 한 전투에서만 싸워서 물리쳤음.. 이 말은 아무리 전력이 집중안된 당나라라도
20만이 넘는 대군을 상대할 역량이 신라에겐 이미 있었다는 이야기임.. 흔히 나당 전쟁에서 백제 고구려 유민의 도움도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고구려 유민쪽에서는 신라군대에 편입되어 도움을 받은 적은 있어도
백제쪽은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는 상황이었다고함.. 당시 백제 부흥군들이 도처에 창궐하여 오히려 신라군을 공격하는 상황이었다고함. 이러한 내외환의 위기를 잘 넘기고 결국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며
불완전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민족기틀을 마련해줬다는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임.
물론 백제도 전성기때 꽤 강력했던 나라였고 또한 문화역시 화려했던 선진국임.. 그리고 고구려도 그렇고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당한것은 신라의 김춘추가 외세를 끌여들어서라기 보다 내부의 문제로 망했
다고 봄. 어느 나라도 영원한 국가가 없지만 고구려 또한 무려 수나라때부터 100년을 가까이 전쟁을 해왔던
나라임.. 그렇다고 고구려가 물자가 풍족했던 나라도 아니고 그들은 전쟁시 마다 청야작전으로 그들의
곡식과 수확물을 불태웠는데 이러한 상황을 100년가까이 끌어왔다는게 너무나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음.
게다가 지도층 내부에서도 연개소문이 귀족들 100명 가까이를 죽이면서 지도층 내부의 분란의 소지도
키웠왔고 결국 그의 사후 그 아들들에 의해 망국의 길을 걷게 된것임..
그리고 우리가 아쉬워하는 만주땅.. 그 만주땅 고구려 멸망후 발해가 건국 됨으로써 만주에 대한 지배력이
신라의 통일때문에 상실했다는것은 맞지 않음. 그 발해가 멸망하고 그 뒤 만주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북방민족들로 부터 과연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까지 우리의 영토로 지킬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난 불가능했을것이라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