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위xx 게시글의 댓글에서 '강화(江華)가 산동에 있었다'는 의견을 잠시 보류하기로 했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었으며 단지 보류일 뿐이다. 추후 자료를 통해 보충할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강도(江都)는 양자강에 있다는 내용을 이전글인 심제선생 유투브 내용을 소개하면서 작성했다.
하지만 위xx는 개경과 개성, 강도와 강화도 구분을 못하면서
산동에 고려의 영토가 왜 있냐?면서 길길이 날뛰고 있어서 아주 짤막하게 이 글을 작성해 보려한다.
내가 내용이 정리되면 알아서 글을 쓸텐데...
의견이 정리되면 글을 써야되는데.. 이렇게 짤막글을 쓰는 나도 참 갑갑하고 답답하다.
우리가 고려사를 찾을때 주로 사용하는 사이트다.
바로 검색하면 된다.
먼저 登州를 찾아보자.
아무거나 들어가자.
고려 태조때 신라로 가는 도적들을 등주에서 줘팼다는 얘기다.
등주는 누구땅?
다른자료를 또 들어가보자.
서경(西京)·안동(安東)·안남(安南)·등주(登州) 등의 여러 도(道)에서 진수(鎭守)의 임무를 받아서 군대를 거느리는 권한이 있는 자는 맡은 바가 가볍지 않으니 어찌 마땅히 잠시라도 비울 수 있겠는가? 맡은 곳을 떠나 궁궐로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각각 임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사흘 만에 상복을 벗도록 하라.
등주는 누구땅???
등주는 누구땅???
등주는 누구땅?
이제 靑州를 알아보자.
산동의 靑州다. 충청도 淸州 아니다. 淸州로 검색하면 훨씬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할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충청도 청주 아니다.
검색결과가 뜬다.
아무거나 들어가자.
청주는 누구땅?
신유년에 청주수 파진찬 진선을 반역죄로 죽였다
청주가 말을 안들으니 태조가 직접행차해서 성을 쌓으라고 명령했다
청주가 누구땅?
신이 丙申年(1356) 6월에 아버지인 신 아무개를 따라서 현릉(玄陵, 공민왕)에게 명을 받고, 쌍성(雙城)을 평정하여 옛 강역을 회복하였습니다. 남은 힘에 의지하여 청주(靑州)까지 땅을 넓혀서 번진(藩鎭)으로 삼아 동쪽을 돌아봐야 하는 근심을 없앴습니다
이성계의 사직서 내용이다. 공민왕 시절 쌍성총관부를 탈환하고, 청주까지 회복한 것을 알수 있다.
산동지역 뿐만아니라 서경(西京)등등 중국쪽 상당수 영토는 거란시절 뺐긴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지금의 요하 근처에서는 어느정도 잘 수비를 해낸다.
천리장성과 강동 6주에 대해서는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복기대 교수가 논문으로 발표한게 있다.
영상 내에서 '천리장성과 강동6주에 대한 반론논문이 한편도 없었다'며 자신하는 모습을 볼수있다.
나도 요하에 근처 강동6주에 대해서는 이견이 전혀없다.
원나라 시절 고려국왕의 직책은 심양왕, 고려국왕을 겸한다.
강동6주와 심양이 모두 요하의 물줄기를 따라 저곳에 있다.
덧붙여 쌍성총관부에 대해 말하자면
지금의 하얼빈 근처이고, 쌍성의 지명이 나오는곳은 보시다시피 두군데다.
어디가 진짜 쌍성인지는 정확히 말할수는 없지만,
공민왕이 회복한 쌍성총관부의 영토가 어디까지인지는 가늠할수 있다.
교과서에 있는 고려의 최대영토를 한반도 내로 그려놓은 지도는 많이 보셨을것이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이 지도를 쳐다보니 속이 뒤집어 진다는 사람이 있었다.
100% 공감한다.
+ 보너스1
송나라 황제가 친히 인증해주는 고려왕의 영토
현도주(하북)
봉래산(산동)
백제(산동) 또는 후백제(???)
장회(장강,회수)
+ 보너스2
훗대 사가들이 명나라를 눈치보고 회남의 주원장이 공민왕에게 방물을 바쳤다는 사실을 차마 그대로 적지못하고 주평장으로 고쳤다.
고려사라는 책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사대주의로 조작이 상당히 가해질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유념 해야한다.
조선왕조실록 조선 세종때 삼국의 도읍,
고구려 평양의 위치도 제대로 모르던게 당대 지식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