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명은 원의 몰락으로 재편된 국제 정세 속에서 각각 고려와 원에서 파생된 국가로 건국되었다는 유사성과 함께 수대에 걸쳐 진행되는 안정화 과정을 함께 거쳤다는 동질성까지 있다. 따라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충분히 적대적일 수 있었으나 충돌로 인해 확장되는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이해관계의 일치에 의해 우호적인 선린관계 즉 대외적으로는 사대관계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주변국을 효율적으로 협력하여 관리하는 동맹관계로 발전해 갔다.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전문가의 평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명 태조 주원장이 후대 황제에게 남긴 훈계인 『황명조훈(皇明祖訓)』에서 ‘정벌하지 말아야 할 나라’로 15개국을 들고, 조선을 맨 먼저 꼽은 까닭일까. 왕자의 난 전후로 조선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며 토벌을 청하는 병부(兵部)에 대해서도 명 태조는 ‘전쟁은 재앙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명나라와 주변국 관계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에서 조공이라는 외교, 국제 관계가 국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국왕이 즉위하면 명 황제가 주는 임명장인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책봉의 의례성이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관계를 확증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즉 입술인 조선이 무너지면 바로 자신들이 다칠 것이라는 자국의 이해에 대한 실리적 고려가 있었다. 또한 조선과의 평화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 및 조공국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다. 한편 조선이 일본과 공모하여 명나라를 침략하려고 한다는 의심도 끼어들었다. 결국 전통적 우호 관계를 고려하여 파병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가 됐다. 이 복잡성과 긴장의 경험을 빼고는 ‘춘추대의(春秋大義)’니, ‘사대(事大)’니 하는 관념을 이해할 수 없다.
사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맹자(孟子)는 흥미롭게도 사소(事小)를 말한다. “큰 나라인데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천리(天理)를 즐거워하는 일이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천리를 두려워하는 일이다. 천리를 즐거워하는 자는 천하를 보전하고, 천리를 두려워하는 자는 나라를 보전하리라.”
조선 초기, 명나라 사신은 조선의 토지세 징수와 군사 제도에 대해 묻는다. 조선은 명과 달리 평소에 농사를 짓다가 때가 되면 군사로 차출하는 병농일치를 시행한다는 말에 사신은 아주 흡족해하면서 돌아갔다.
또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원황(袁黃)이 조선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있음을 알고 얻어가려고 했던 일이다. 명나라는 이 법전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고, 조선은 이 책을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