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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5-10 02:16
[한국사] 임진왜란때 정말 조선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까요?
 글쓴이 : 국산아몬드
조회 : 6,397  

모두들 임진왜란에서 조선은 상처뿐인 승리라고 기정사실화 하는데 정말 조선이 일본이 주장한데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까요?

일본이 전황을 주도한 기간은 고작 2개월입니다.

그리고 점과 선으로 주요 도시만 점령한 상태고 대부분의 지역은 조선정부의 행정력이 작동되었었죠

그 나머지 기간은 조선이 압도적인 우세였고 일본군은 6년간을 남해안에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그리고 왜군이 약탈과 살인, 방화나 하고 다닐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전쟁초기부터 극심한 저항에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고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이고 다닐만큼 한가하지 않았단 말이죠

그리고 그 당시 도시의 인구가 많으면 5만 서울이 10만~20만 정도 되었으며 대부분 농촌에 거주했기 때문에

왜군과의 조우도 거의 없었으며 곡창지대인 호남은 멀쩡했습니다

그런데도 누구는 100만, 심지어 400만까지 죽었다고 주장을 하니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지 않을까요?

고작 3개월간의 피해로 100만, 400만이 죽을 수 있을까요?

살상력이 극대화된 1,2차 대전에도 나치가 6년간 유태인을 샅샅이 죽여서 겨우 600만이었고

1차대전 4년간의 전쟁에 전세계에서 죽은 전사가가 900만입니다.

그런데 전 근대시대 고작 3개월의 피해에 100만 400만이 죽었다고요?

한국인은 특별한 유전자가 있어서 그렇게 쉽게 죽나요? 아닐꺼라고 봅니다

조선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고정관념은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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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가생 16-05-10 02:27
   
일본군이 전적으로 삼는게 코와 귀였습니다. 걍 다 죽이고 코 귀를 다 베어갔죠...

유대인은 막죽이진 않았어요...수용소에 가둬놓고 실험에 필요한 만큼 죽였으니깐요
뷩글이 16-05-10 02:31
   
일본에서 유럽으로 팔려간 조선인노예가 있다는 기록도 있는데 노예가격이 공급이 하도 많아서 헐값이었다고 합니다. 이건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에 한한 것이고 일본인 현지에도 귀무덤 코무덤이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국산아몬드 16-05-10 23:49
   
그당시 일본도 화약을 얻기 위해 여자들을 40~50만 서양상인들에게 팔아제끼던 시절이죠. 일본여자노예들도 노예가격을 낮추는데 많이 기여했을 겁니다
Centurion 16-05-10 04:12
   
제가 찾아본 바에 따르면,
학계에서 추정하는 임진왜란 피해는 15~100만까지 추정됩니다.

400만까진 절대 무리구요.
6.25랑 베트남전때에도 그만큼은 안죽었습니다.

글고, 특히 피해가 많았던건 정유재란이었죠.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실패의 원인인 전라도 지역을 집중 타겟으로 설정해 이 지역이 대거 학살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과 진주성도 진주성 내에 모든 사람이 학살되었고,
코베기, 귀베기 하던 시절엔 이게 사람 머리는 부피가 크다고 이게 대신하게 된건데...
코랑 귀만 베고 살려준 케이스도 꽤 있었는지 전쟁 끝나고, 코랑 귀가 없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죠.

그리고 일본은 전국시대 때에도 사람 죽인 머릿수로 전공을 인정받던 살벌한 동네였고,
코베기 요런건 출세랑 연관된거라 열심히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건 조선이나 명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여송 같은 경우엔 조선인 시체의 머리를 깍아서 왜구로 둔갑시켜 전공을 부풀리기도 했고,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 장수들에게 왜군 머리 넘겨달라고 윽박지르는 일도 많았습니다.

특히 항왜, 즉, 투항한 일본군 출신 무장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명나라 장수한테 수급 문제로 시비털려서,
명나라군에게 팀킬을 당하기까지해서 선조랑 명나라 지도부까지 안타까워했다는 기록도 있죠.

왜군 몇명 죽이면 천민신분에서 양인되고, 병사에서 장수까지 출세도 되던 시절이니.

어쨌든 제일 심각했던게.. 히데요시가 코베기를 지시한 정유재란 시즌인데..
이땐 남원성부터 여기저기 싹 도륙을 당합니다.

http://www.news4000.com/news/articleView.html?idxno=3151

제가 찾아보니, 이게 한 5만에서 많게는 12만 정도에 달한다고 합니다.
즉, 이런 피해집계는 대체로 전투랑 각종 기록에서 보이는 피해를 합산한게 아닐까 싶은데..
7년 전쟁에 15만 피해는 너무 적은 감이 있고, 꼭 전사가 아니라도 굶어죽거나, 강간, 약탈 과정에서
죽은 사람도 많으니 최대 100만 잡는 걸겁니다.

조선의 경작지가 90만 결에서 30만결까지 뚝 떨어지는데..
이건 뭐... 점과 선만 장악했다고 보기엔 너무 경제적 피해가 컸다는 말이기도 하구요.

대체로 일본군이 의병들 토벌한다고 학살도 상당히 했던 모양인데..
아무래도 조선에서도 남부지역, 즉 삼남지역이 인구도 많고, 곡식 수확도 상당한 지역이라..
이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와 학살 이런건 아무래도 타격이 클 수 밖에 없죠.

특히 경상도가 신라시대 이후로 원채 인구가 많던 지역이라..
왜성 쌓고 주둔하는 일본군들 근처에 있던 인구가 결코 적은 편이 아닙니다.
고구마깡 16-05-10 09:06
   
사실 역사적관점에서 보면 이해 못하겠음
일본이 악랄하다고해도
역사기록으로도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은화를 주고 식량을 얻어 먹었다고 하는 기록도 많고
그 기록대로 임진왜란후 은화에 의한 물물교환이 급증한것도사실 (청나라 때문이기도하지만 남부지역에서도 널리퍼진걸 보면 일본에 영향도 무시못함)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일지 알수가없음
     
문삼이 16-05-10 09:25
   
은화가 퍼진 이유는 명나라 덕입니다 꼴통 황제로 유명한 만력제지만 우리에겐 은인입죠.
만력제 찾아보시면 이유를 아시게 될겁니다
일본이 길잡이에게 몇푼준 은화하고는 비교불가죠
     
비좀와라 16-05-10 09:37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해석을 더럽게 해서 그럽니다.

인류의 역사는 장자권 다툼의 역사 라는건 의문의 여지가 없는데 장자권을 지닌자는 제사의 의무가 있어서 제사권은 권리인 동시에 의무 입니다. 제사권(장자권)을 지닌 집안이나 국가를 종가나 종주국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속가나 속국 중의 한곳 입니다.

조선왕조는 건국시작에서 부터 공자에 대한 제사를 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은 유교에 관해서는 종주국이란 의미 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제사는 아무나 또는 아무국가나 하질 못합니다. 오직 천자국이나 황제국만 할 수 있는데 조선은 다른 국가들도 유교의 국가(종주국)임을 인정 했습니다.

그럼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택한 모든 국가의 종주권(지배권)을 가진 국가이며 황제국이고 천자국이며 지금도 이 지위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만이나 중국이 한국에서 제사방법을 배워 하고 있지만 확실하게 한국에서 배웠다는 걸 기록에 남기었기에 그들의 종주권을 인정 못 받습니다. 따라서 공자는 한국인의 조상이 되는 것 입니다. 이건 혈육과는 상관이 없는 교종의 문제이기에 혈육이건 아니건 제사를 모시는 종가만이 그의 후손이 되는 것 입니다.

일본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합니다. 그럼 조선의 속국이며 피 지배국입니다. 거기다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왕도 아닌 일개 장수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요청합니다. 왕의 인정은 종주국의 특권인데 조선이 아닌 명에 요청 했다는 것은 조선과 명이 같은 나라라는 의미 이며 임진왜라는 일종의 종교전쟁적인 성격이랄 수 있는 것 입니다.

이런 구도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그래서 대륙조선사의 학설이 처음 시작 한것은 임진왜란의 기록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기에 연구 하면서 시작 된 것 입니다. 임진왜란 특히 일본쪽 기록은 완전히 엉터리 입니다. 일본의 기록은 세계적으로 인정 받지 못합니다. 그런 기록을 가지고 왈가불가 하는것 자체가 넌센스 입니다.

거기다 이런것을 중폭시키는 집단까지 있고 참....

임진왜란은 반란이지 전쟁이 아니고 일본은 조선으 피 지배국으로 조선의 통제를 받던 국가 입니다. 단지 느슨한 통치 지금의 영연방과 같은 형태를 띠었을 뿐인데 영국과 조선은 같은 홍교의 국가 입니다. 유교와 개신교 특히 성공회가 홍교계열로 같은 사상입니다. 그래서 영연방과 같은 형태의 국가 형태이라 추측이 가능 하다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에도 막부는 동북세력입니다. 그리고 만주 청나라 역시 동북세력이고요. 그럼 에도막부가 토요토미 히테요시 세력을 싹 쓸이 한것이나 청나라가 이자성 세력을 청소하고 명나라를 청소 한것과 아무 관련이 없을 까요?
          
촐라롱콘 16-05-10 13:22
   
님의 댓글 마지막 부분에서 에도막부가 동북세력이라는 것은 일본내에서의 기준입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 동북세력이라는 것도 중국의 영역 내에서의 기준이구요....^^
지금도 우리가 만주지역이라고 일컫는 흑룡강성,요녕성,길림성 일대를 중국에서는
동북3성이라고 일컫습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 전체를 기준으로 한다면 한반도 동북지역은 함경도일대가 되겠네요!
현 남한지역내에서만 기준으로 한다면 강원도지역이 동북지역이 되려나요..??
               
세끈한펭귄 16-05-11 00:48
   
....
영원히같이 16-05-10 09:55
   
...
촐라롱콘 16-05-10 13:14
   
1592년~1598년의 만으로 7년 가까이 지속된 전쟁기간 가운데
1593년 후반기~1597년 초반기까지의 만4년 가까운 기간은
일본군이 남해안일대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에 전란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가 경미했다고 하더라도.......

임진왜란 발발 후 ~ 1593년 전반기까지는 일본군이 호남과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을 휩쓸고 다닐 때였고, 그 후에 정유재란이 한창 진행되는 중에는 적어도 삼남지역이
주요 전장이었기 때문에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었습니다.

그리고 전란의 희생자는 일본군의 총칼에 희생된 숫자보다도
전란중에 더욱 악화되기 마련인 기근, 전염병으로 인한
희생자가 더욱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호남이 물론 그 당시도 조선의 곡창지대라 할 만 했지만......
고려후기~조선전기에 왜구의 지속적인 침입으로 인해 호남 도서지역과
육지의 연안지역은 개간이 이루어지지 못한 지역도 상당했기 때문에
조선후기와 같은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더구나 정유재란 당시에는 호남도 역시 일본군에게 침탈을 면치 못했습니다.
심지어 호남 서해바다에도 명량해전 이후 일본수군 일부가 현 전라남도의 북단인
영광앞바다에까지 침입하여 이 당시 강항 일가가 포로로 잡히기도 했습니다.

이순신의 수군 역시 이 당시 전력차가 극심하여 현 전라북도 고군산군도로 피신하여
은신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일본군으로 인한 피해도 피해지만....
전쟁기간 동안 차이는 있지만 전쟁기간 내내 수만~ 최대 10만에 달하는
명나라구원군의 식량과 마초를 마련하느라 정작 굶주리는 조선백성을 위한 대대적인
구휼작업도 실시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일본군과 싸워야 할 조선군과 의병들도 지원하지 못해 1593년 이후가 되면
그 많은 의병들의 활동도 중단되기 시작하여 정유재란 발발 이후에는 의병의 존재는
미미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조선군 총 병력수도 2만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정유재란 당시 육지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정규전에서는 조선군이 명나라군의
연합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보조적인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Misue 16-05-10 14:08
   
직접적으로 죽인것도 많지만 농작물을 다 약탈해가서 굶어죽는게 더 많았지요.
전략설계 16-05-10 23:39
   
글쓴 분 저번에 병자호란때 50만, 60만 조선인 청군이 끌고갔다고 하니까,
"청군에 뭔 식량이 있어 그 많은 사람들 끌고 가냐?"고 했던 그 사람이네.

병자호란은 영원성전투 패배하고 누루하치 죽고, 수세에 몰린 청이
조선에 물자를 얻으러온 전쟁이었습니다.
또 사르후전투때처럼 조선군이 만주로 출병하는 것을 문단속하기 위함이었고요.

물자 얻으러온 전쟁인데, 뭔 식량이 있어 인질들 끌고 가냐고요.
그 사람들 끌고 가면서 같이 약탈한 조선 식량요.

위의 내용 참 답답한 소리입니다.

<일본군은 6년간을 남해안에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그 나머지 기간은 조선이 압도적인 우세였고 일본군은 6년간을 남해안에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그리고 왜군이 약탈과 살인, 방화나 하고 다닐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전쟁초기부터 극심한 저항에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고 전전긍긍했습니다.
고작 3개월간의 피해로 100만, 400만이 죽을 수 있을까요?>

뭔 전쟁 보고 저런 소리 하나 싶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400만 죽었다고 하는거 아니지만)

6만이 학살된 진주성 2차전투 - 1593년 7월입니다
1만이 학살된 남원성 함락 - 1597년 8월입니다
칠천량해전(1597년 7월), 울산성전투(1598년 1월), 노량해전(1598년 11월) 등에서도
조선군 다수 전사자가 나옵니다.

왜군이 가면 갈수록 포악해지는데..
초반 3개월, 첫 해에만 피해자가 나온 것처럼 얘기하네요.

6년간을 왜군이 남해안에 성짓고 살아요?
조선 수군을 칠천량에서 격파하고 라도를 휘어잡던 정묘호란은 어디갔습니까?

저번에 뇌는 생각하라고 있는거라드만..
허구헌날 우리는 피해 안 입었다, 우리는 안 졌다.. 그것만 연구하는 뇌 같습니다.

일본이 전황을 주도한 것은 2개월 뿐이라고요?
     
국산아몬드 16-05-10 23:52
   
병자호란의 전쟁포로 50만설은 최명길의 지천집, 나만갑의 남한일기등 개인기록에만
나오는데 국가 공식기록이 아니니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죠

게다가 창야전술로 서북지방은 백성들이 전부 산성에 들어갔는데 대체 60만이란 숫자가 어디서 나오나요?
한양인구가 20만인데 전부 붙잡아간다해도 얼마나 될까요?
게다가 포로들을 먹일 양식은 어디서 나옵니까? 백성들이 다 산으로 도망갔는데

상식적인 선에서 의문을 가져본 겁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전투 기록을 살펴보면 2개월 이후 왜군이 크게 고전한걸로 나와요
간간히 중간에 뛰쳐 나와 분탕질을 치지만 대부분 틀어박혔어요

진주성 2차 전투처럼 어쩌다 승리해도 3~4만이 죽어나가요.
워낙  상처뿐인 승리라 진주성을 점령하고도 전라도 진출을 포기합니다

정유재란도 97년 7월 15일 칠천량 해전을 지작으로 두달후인 9월 16일 명량해전을
끝으로 남해안에 틀어박혀요
겨우 두달이라고요

전투기록을 연대순으로 보면 그게 보여요
좀 제대로 기록을 보시길
          
전략설계 16-05-11 00:52
   
병자호란에 청야전술이라..

청군이 황해도 지날 때, 조선 조정에 전쟁이 난 것이 첫 보고됩니다.
황해도 올 때 왕이 알았는데, 일반 백성들이 성으로 들어갔다고요?

청군이 개성을 지날 때, 왕이 피난을 떠납니다.
개성 지날 때까지 왕이 피난도 안 가고 있었는데, 일반 백성들이 성으로 들어갔다고요?

겨울 빙판이라 왕이 말을 탈 수 없어 빙판 걷다가 다리 삐끗해서,
강화도로 못 간게 당시 상황입니다.

왕의 거동도 어려운 그 겨울(1월)에 집 나가면 얼어죽거나 굶어죽어요.

최명길이 누굽니까? 그 사람이 머더러 허위로 과장하겠습니까?
그렇다고 5만, 10만 이런 수치도 없습니다.

명과 전쟁에서 밀려서 자원 채울라고 작정하고 내려온 애들이고.
양반집 아녀자까지 싹 쓸어담아 가서, 나중에 환향녀로 돌아와서
이혼하니 마니..
양반집 아녀자까지 쓸 정도면, 청야가 됐다고 볼 수 없죠.
병자호란때 청야전술.. 이거 잘 검색이 안 되네요.

피난간 왕, 강화도로 간 왕실 다 잡혔는데..
그 겨울에 어디가 그렇게 청야를 잘 했답니까.
          
촐라롱콘 16-05-11 01:38
   
병자호란에서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청나라군이 최대 남한산성 주변까지만 남하한 것으로
많은 이들이 알고 계시는 것 같던데......

물론 청나라군 주력은 남한산성 주변과 강화도 주변을 비롯한 경기지역에
포진한 것은 맞는데...

일부 병력은 약탈과 포로취득을 목적으로 충청지역의 상당수 지역(영남이 바로 코앞인
괴산일대까지)과
심지어 호남북부의 익산 일대까지 출몰하기도 했습니다.
전주 인근까지도 진출했지만 병력부족으로 바로 철수하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전략설계님께서 언급하신 부분 가운데....

청나라군이 개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강화도를 향해 피난간 부류는
인조일행이 아니고 봉림대군,세자빈을 비롯한 비빈과 종실, 권력층 사대부가문의
부녀자들이었습니다.

인조일행이 그 다음날인가 청나라군이 임진강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강화도로 피난하려고 했지만, 벌써 청나라군 선봉대가 양철평(현 은평구 불광동과
녹번동 경계부근)까지 진출하는 바람에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겨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튼 것입니다.

피난을 떠난 인조일행과 청나라군 선봉의 거리가 한때 불과 10km 내외에 불과할
정도로 아찔한 상황이었으나, 최명길이 청군 진영을 방문하여 지연전술을 펼치는
바람에 가까스로 남한산성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전략설계 16-05-10 23:58
   
1592년 4월 14일날 소서행장이 부산성 공격했으니까..
2개월이면, 1592년 6월 14일인데.
6월 15일이 소서행장이 평양성 입성하던 날입니다.

명군 본진이 압록강을 도하한게, 1592년 12월이고, 1593년 1월에 조명연합군이 평양성 포위하는데.

1592년 4월에 터진 전쟁,
1592년 그 해 끝까지 선조는 의주에 쳐박혀 명나라에 망명 타진하고 퇴짜맞고
국토 정중앙도 아니고 국토 끝자락에서 개꼬라지였는데..

1592년에 신립이 1차로 망하고, 임진강에서 2차로 망하고, 광교산에서 코메디하고..
일부 잘 싸운 의병을 빼고 1만 단위 군대라도 후방에서 왜군과 필드에서 대적한 군대가 있었나요?

일본이 전황을 주도한건 2개월?
나머지 6년간 해안에 갇혀..? 역사를 다시 써야겠네요. 정묘호란은 없애버려야지..

2개월?
조상이 좋아하겠네요. 후손이 있었던 사실보다 역사를 잘 써줘서
전략설계 16-05-11 00:09
   
15만 얘기가 나왔는데. 말이 안 되는 것은..

2차 진주성 6만, 남원성 1만, 신립군대 1만, 울산성 & 순천왜성 & 칠천량 & 노량해전
이것만 잡아도 10만이 되고..
동래성 & 부산성 & 평양성 1차, 2차 & 1차 진주성 & 임진강 & 각지 의병
이거 합치면 15만 넘겠구만요.

KBS 역사저널에서 출연한 교수가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을 10만으로 보던데..
바로 25만 나오고..
도처에서 학살하고 코베고 귀벨려고 도망가다 죽인 사람들..
집 떠나 피난가다 먹을거 없어 굶어죽은 사람들, 병 걸려 죽은 사람들..

당시 비참한 상황은 유성룡 징비록에 나와 있죠.
후대가 어찌 알겠습니까만, 전쟁이 없어도 평화시에도 보릿고갠대. 안 봐도 훤하죠.

내가 세볼 수 없으나 이런거 다 합치면 100만이 꼭 불가능한 수자가 아니겠구만.
첫해만 피해본 것처럼 하면서 무조건 아니라 그럽니까..
     
Centurion 16-05-11 00:23
   
전쟁의 여파[편집]

조선에 끼친 영향[편집]

민간인을 포함한 조선 측 사망자는 180,000여 명에서 1백만 명으로 추정된다.[17][18] 또한, 경작지 중에서 66%가 파괴되었다.[19]
문화재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을 위시한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었는데 역대실록 등 귀중한 사서를 보관했던 사고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경복궁이 파괴되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에도 한동안 월산대군이 개인 저택으로 사용하던 집을 궁궐로 대용했다.[20]
이외에도 민가 많은 수, 포도청, 서원 등이 파괴되어 한국전쟁과 비견될 정도로 심각한 피해(被害)였다.[21] 한편 병제 개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얻어서 절강무예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三手兵)을 두어 무예를 조련시켰다. 무기로서 원래 무기인 궁시창검·총통·완구·화전 외에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발명되었고 조총과 불랑기를 이용하였다.
또 백성의 사상 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 애국심과 자아반성 등 여러 방면에서 개선과 명(明)을 향한 사대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고 전란 중 명군이 관우를 숭배하는 사상을 전래하여 민간신앙이 크게 영향받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 사람을 독한 고추로 독살하려고 가져왔으나 이로 인하여 오히려 한민족이 고추를 즐기게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이 떨어지고 오히려 일본의 여러 문헌에는 고추가 임진왜란 때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으론 이재위(李裁威)의 《몽유(蒙纜)》(1850년대)에 북호(北胡)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의 포로가 된 홍호연의 일본인 후손과 한국인 후손이 400년 만에 경상남도 진주국립박물관에 만났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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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후의 인구 손실과 변화[편집]
임진왜란 인구 손실[편집]
(전사자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전쟁기간동안 죽은 모든 인구)
명나라 - 70,000여명 이상
조선 조선 - 1,400,000명~2,300,000명
일본 일본 - 35,000명 이상
임진왜란후 삼국의 인구[편집]
명나라 - 1억 3,800만명
조선 조선 - 400만명
일본 일본 - 2,700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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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9C%A0%EC%9E%AC%EB%9E%80

나는 이거 보고 말한거임. 태클 사양...
불만이면 님이 사료 직접 읽고 합산해서 고치시고.
     
국산아몬드 16-05-11 00:24
   
징비록은 개인의 경험이고 어려운 곳을 골라다녔을 뿐더러 후대에 교훈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비참한 상황을 부각시켰을 것이니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정황상 상식선에서 판단한 겁니다

임진왜란때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멀쩡하고 고니시는 평양성에 처박혀 있고 가토는 함경도 북쪽에서 정문부에게 유린당하고 있고 우키다, 이시이는 권율에게 쳐발리고 있고 구로다는 황해도에서 이정암에게 패퇴하고 경상도는 곽재우때문에 곤경에 빠지고 진주에서는 김시민장군이 나가오카, 하세가와의 3만 대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와키자카는 이순신장군에게 그야말로 전멸까지 가는데 한마디로 한반도 끝자락까지 진출했지만 전국에서 왜군들의 꼴이 말이 아니죠

그런데 무슨 정신으로 살인, 약탈만 하고 있었겠습니까? 자기몸 건사하기도 바쁜데

6년간 왜군들 그림자도 못본 백성들이 태반이었을 텐데 농사가 힘들었을까요?

농토가 기록상으로는 150만결에서 30만결로 격감했지만 관공서의 전답문서가 소실된 탓이 크죠

전답이 한두해 농사안짓는다고 황무지로 바뀌나요?

그리고 정유재란때 의병이 크게 줄어든 이유는 조선정부가 의병을 가능한 관군으로 편입시키고
그외는 일부러 약화시킨 이유가 큽니다. 의병이라고 해도 결국은 조정의 권위를 약화시키니까요
전쟁의 피해가 커서가 아닙니다
          
촐라롱콘 16-05-11 01:14
   
함경도방면에서 가토와 나베시마군의 주력은 함경도에서 비교적 남쪽인
북청 이남의 함흥,안변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고.....

정중부군이 상대한 일본군은 현 함경북도 지역의 수 십~수 백 단위의 일본군들 또는
상대한 일본군 가운데 최대규모는 길주성에 주둔한 일본군 1~2쳔명 수준이었습니다.

구로다군을 이정암이 연안성에서 막아냈지만, 나머지 황해도 지역의 대부분은
구로다군에게 유린되었으며......

그리고 결론적으로 국산아몬드님께서 주장하시는 조선군이 승기를 잡았다는 부분은
주로 수성전에서 물리친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는 달리 보자면 수성에 성공한 해당 성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이 일본군에게 유린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례를 들면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비록 승리했지만, 그 이후 일본군이
진주성 주변고을인 하동, 심지어 호남의 구례지역까지 약탈하고 부산지역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정부가 의병을 관군으로 편입시킨 사례는 임진왜란 시기입니다.
정유재란에서는 의병봉기는 거의 미미한 수준이었고 관군 규모도 2만명 남짓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조명연합군이 울산,사천,순천 등 남해안에 웅거한 일본군을
향해 공세를 펼치던 시점에서도 동로군, 중로군,서로군에 동원된 명나라군은 각각 3~4만에
달하는데 비해 각 방면의 조선군은 불과 각각 수 천명에 불과하며 세 방면의 조선군을
함산하더라도 1만여명에 불과할 정도로
명나라군의 보조전력의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촐라롱콘 16-05-11 00:37
   
그리고 전공을 세우려는 명나라군에 의해서도 조선인들이 상당수 희생되었습니다.
조선인을 살해하고 목을 베어 일본군 수급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일례로 평양성 전투에서도 많게 잡으면 수 천명에 달하는 성내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는 조선군,의병, 심지어 무뢰배들에 의해서도 상대적 약자인 조선인이 상당수 희생되어
일본군 수급으로 위장되었다는 개연성이 큽니다! 출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관련 기록을
어디서 접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수군 전함이나 수송선에 탑승한 격군들의 상당수는 조선인들이었으니....
특히 전투중 왜선이 침몰한 경우라면 선박의 하단부에 자리한 격군들이 가장 큰 희생을
치를 수 밖에 없으니.... 왜선에 탑승한 조선인들도 적어도 수 천명은 희생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만행 가운데 특히 기억나는 부분은....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할 무렵 성내의 조선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왜란 이전 인구 10만이 넘었던 한양인구가 한양수복후 3~4만 수준에 불과했다고 하니
줄어든 인구의 절반 가량은 피난 등으로 인해 줄어들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수 만명 가량의 한양성민이 일본군점령기간과 철수과정 전후시기에 희생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왜란이 종료된 후 삼남지방을 시찰한 관리의 기록에 의하면....
발길이 닿은 지역 대부분이 대읍(큰 고을)의 경우 수 백호, 소읍(작은고을)의 경우
수 십호 밖에 남아있지를 않았고.... 하루종일을 가도 인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당한 과장이 섞였겠지만... 조선에서는 비교적 인구가 밀집되었던 삼남지역이
이와 같은 참상이었으니 왜란 이전과 비교하여 전체 인구의 1/3이 희생되었다고 하더라도
큰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국산아몬드 16-05-11 01:00
   
격군이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나요? 아무나 붙잡고 격군시키면 할수 잇습니까?
게다가 노젓는 방식이 조선과 일본은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조선인을 안택선 격군으로 써요?
세키가하라 전투때도  노를 저을 수 있는 격군이 거의 다 죽어서 수군이 활약을 못했다면서요

그리고 여러번 말했지만 왜군은 학살을 자행할 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어요
전국 곳곳에서 쥐어터지고 있는데 무슨 학살을 합니까?

한가롭게 학살하다가 의병이나 관군에게 습격당하면 그야말로 몰살인데

그리고 전라도는 정유재란때 1개월 유린당한 것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평온한 지역이었습니다
               
촐라롱콘 16-05-11 01:24
   
왜선의 격군 상당수가 조선인이었다는 것은 난중일기에도 기록된 부분입니다.
특히 정유재란 시기를 기록한.....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를 저을 수 있는 격군이 다 죽어서 수군이 활약을
못했다는] 부분의 기록은 저도 대략 일주일 전 무렵에 이 사이트에서 접한 기억이 나는데

문제는 그 기록을 인용했던 분이 사서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고작 NHK드라마 대사에서 인용했다고 하니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

그리고 전란에서 희생되는 이들이 총칼에 의해서만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전란으로 인해 떨어진 식량생산력을 비롯한 제반 생산력 감소에서 기인한 기근과
기근으로 인해 체력과 체내저항력이 저하됨으로서 더욱 기승을 부리는 질병,전염병의
급속한 전파로 인하여 목숨을 잃는 경우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라.......
전략설계 16-05-11 01:14
   
1593년 선조실록은 "겨울에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이가 언덕을 이뤄 일반 빈집과 외진 곳에도 시체를 쌓아 놓았다"고 기록했다.

<-- 역사서는 이양이면 잘 한 거를 기록하고 싶지, 비참하지 않았는데 그걸 꼭 비참했다고 과장하지는 않죠.
      왜군이 전라도를 빼고, 함경도까지 전국의 주요 성을 장악했는데.
      겨울에 집 나가면 얼어 죽기 십상입니다. 어디서 자겠습니까?
      신립 군대나 진주성이야 수를 기록합니다만, 저렇게 죽은 사람들은 몇이 죽었는지 세보지도 않죠.
전략설계 16-05-11 01:18
   
토지결수가 준 것은 국가의 토지 장악력은 준 것도 이유지만,
어느 자료를 봐도,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서 경작을 하지 않아 버려진 땅이 많았다고 돼 있네요.
두 가지 다네요.
전략설계 16-05-11 02:41
   
국가 재정이 150만결에서 30만결로 1/5로 줄면,
국가 입장에서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죠.
그 이유가 토지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졌든 경작할 사람이 없어 황무지가 됐든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로서는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죠.

인구의 10여% 가까이 없어지고, 1% 이상은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갑자기 이산가족이 되고.
궁전도 불살라지고, 궁전만 그랬겠습니까..
국가도 백성도 엄청난 피해를 봤죠. 

나라 재정이 저렇게까지 된 걸 알면서,
얼마나 피해가 컸으면 토지 결수가 정상화 되기까지 100여년이 지난 숙종때 회복이 되는데,
굳이 엄청난 피해였냐 반문할 가치가 있는지.
rosma 17-01-19 10:35
   
검색하다가 늦게 댓글다는데

징비록 요약본 보면 얼마나 비참했는지 살짝 나옴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2175&cid=41708&categoryId=4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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