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를 찬양하며 연일 가생이에서 개나소나 보기만 하면 빨갱이 타령하는
광복군의 후손님의 그 철저한 빨갱이에 대한 기준으로
남로당 빨갱이 박정희 516 쿠테타에 대해 짚어 보겠습니다.
우선 요약하자면
자칭 주둥이만 빨갱이인 애국지사의 그 기준에 의해 역사적 사건의 팩트로 짚어봤을때
명백히 남로당 빨갱이 박정희는 김일성의 사주를 받고 쿠테타를 일으킨것이며
남한 접수후 적당한 절차를 거처(김일성 특사와 통일회담) 김일성에 헌납하는 명령을
쿠테타에 성공하여 권력과 명예를 획득한 권력욕에 눈이 먼 박정희는 이를 거부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김일성의 응징은 그후 이뤄진 암살 사건들로 반증이 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봤을때 박정희는 명백히 김일성의 사주를 받고 쿠테타를
일으킨것은 아닌지 매우 우려스러우며 이를 신처럼 떠받드는 친일파후손님이하 광신도들이야 말로
빨갱이중에 상 빨갱이가 아닌지 의심됩니다.
만사 빨갱이 형통! 전세가 불리해지거나 무슨 사건만 터지면 빨갱이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에서
상빨갱이 임이 확인되는 것이며
뭣 눈엔 뭐만 보이고 사기꾼이 뒤로는 사기치며 앞에선 사기꾼 욕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또한 일당독재 찬양 빨갱이 박정희와 그 신도들의 행태가 북한 김일성과 그 인민들과 매우 흡사합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요?
1. 김일성의 사주에 의한 5.16쿠테타 직후 남북통일 협상을 목적으로 한 북한 특사
익히 아시다시피 남로당 빨갱이로 잡혀서 사형을 선고받고
동료 모두를 발고하여 그 댓가로 혼자만 극적으로 살아남은 박정희가
1962년 5월 16일 쿠테타를 일으킴니다.
그후 대구 10월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수배되자 월북하여
북한 외부성 부상을 지낸 황태성이
박정희와 남북통일협상을 위해 1961년 8월 김일성 특사로 내려왔다가
간첩죄로 1963년 12월 사형되죠
여기서 주목할것은 김일성 특사의 목적은 남북통일이며
박정희가 쿠테타 일이킨지 불과 3개월 후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가 사형된게 남한에 특사로 내려와 그당시 최고급 호텔에서
수개월간 투숙하며 파견된지 1년 7개월 후 사형이 집행됐다는 점이죠
2. 북한특사에 대한 미군정보국에 꼬리잡힘
그럼 왜 2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사형되었을까?
우선 김일성의 밀사가 쿠테타 세력과 접촉하는 것이
미국의 정보기관에서 알아차리게 되고
황태성밀사 사건이 터지게 되어 그당시 대선을 앞둔 정국의 최대 이슈로 등장합니다.
미군에서 황태성의 인도를 강력하게 요구하지만 계속 거부하게 되자
(왜 거부했을까? 황태성이 박정희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기때문이죠, 미국은쿠테타박정희를 빨갱이로 의심중이고)
밖으로는 미국으로부터 더욱 사상의심을 받게되고
내부적으로는 선거에서도 불리해지자
결국은 63년 10월29일 황태성을 체포하고 한달만에 급하게 사형을 집행 하게되죠
3. 북한특사의 창당자금
또한 황태성이 빈손으로 왔냐 그게 아니죠
그때 까지 북한이 경제력으로 남한을 앞질렀던 때이고
거액의 자금을 가지고와서 전달하게 되며 그 자금의 사용처는
쿠테타성공 축하 및 박정희 공화당자금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고 어쨋든 전달이 됩니다.
황태성이 누구냐? 다들 잘 아시겠지만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의 친구이자 동지이며
박정희가 친형보다 더 따랐던 인물이죠 이들 셋은 남로당 빨갱이 동지이고
4. 남한의 헌납을 거부한 박정희에 대한 김일성의 응징
북한특사 사형후(헌납을 거부) 1968년 1월 21일 1.21 사태가 발생합니다.
김일성이 보낸 특수부대 31명이 박정희를 암살하려 침투한 사건이죠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1974년 광복절 행사장에 문세광을 침투시켜 박정희를 저격하지만 육영수 여사가
목숨을 잃게 되고
결국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저격으로 서거하게 됩니다.
광복군후손님의 빨갱이에 대한 기준으로 박정희 쿠테타를 봤을때
분명 박정희는 빨갱이중에도 상 빨갱이가 맞는데
빨갱이 박정희를 신처럼 찬양하며
헌법에도 명백한 불법으로 규정된 쿠테타에 대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반헌법적 516쿠테타의 정당성을 선동하는
광복군 후손님은
친일파의 후손인지
빨갱이의 후손인지 밝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