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타령론의 이데올로기 구조. 보편성과 그걸 분열?시키는 사적 이익(즉 특수성)의 대립. 쉽게말해 미꾸라지가 물을 흐림이라고 할 수 있음. 개소리 허구. 애초부터 여기서 떠드는 보편성은 관념적인 허구. 전체 국익이란 것이 작동하고 있고,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라는 프레임(그래서 이데아적인 개념인데..)인데, 그 전체 국익이라는 것이 총량적 접근이라고 할 수 없고, 단지 질서나 규율 따위의 주장이며, 더 나아가 노동자의 이익은 배제된 상태의 이익이라는 것. 또한 그 이익은 자본가의 이익, 정책 수혜자들의 이익은 끼워넣지 않고 국익이라고 뭉뚱그려 포함하고 있음. 유물론자라면 국익이라는 말을 쓸 수 없고, 보편성이라는 것도 허구적인 선험성에 기댄 주장이라는 걸 인식해야함. 왜냐면 서로의 이익은 다르고, 추구하는 것이 다르니까.. 다르다보니 서로 대립 될 수밖에 없고, 그 대립 자체가 사실...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근거임. 여하간.. 적대(라클라우식 용어)를 인정하는 것, 그 사이에 보편적 타협은 있을 수 있어도 어떤 것을 억압하기 위한 국익 따위의 말들은 허구적 담론이며, 유물론자가 따를 수 없는 논리.
즉 보편성이니 국익이니 따위의 노조 비판론의 근간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관념적 허구라는 것. 하지만 이와같은 배제로 구성된 보편성은 이념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함. 나치나 미국의 캐딜락을 탄 흑인이나 기타등등의 사례들이 있음. 고로 노조 비판론의 이와같은 구조를 깨려면 반 민영화라는 당위성으로는 깰 수 없음. 근본적으로 노조를 보는 프레임을 민주주의적 사고, 사건을 보편성을 방해하는 사적이익 따위가 아니라, 다양한 이익 집단들의 정상적인 대립으로 놓아야 함. 그러나 박근혜부터 이걸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으로 놓고 사고함. 헌법을 수호하는 대통령으로서 상식이하.
사실 노조를 보는 프레임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 정상적이며 동시에 일상적으로 얼마나 파쇼이즘에 물들어 있는지 보여주는 바로미터죠. 뭐.. 사실 유럽의 몇 나라 빼고 이 수준의 민주주의에 도달한 나라는 몇 없지만서도....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