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유모차 논쟁이 뜨겁군요.
물론, 자신의 의견을 표시할 능력이 없는, 자신의 몸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을 굳이 끌고나올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죽음과 세금을 제외하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100%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선택의 연속이고,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이러한 선택이 좀 더 100%에 근접 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 태어나면서 각종 불확실한 위험에 직면합니다. 시위현장이라고 위험한것도, 집 안이라고 해서 100% 안전한것은 아니지요. 때문에 100%에 가깝게 안전하게 하는 보충적 요소가 바로 부모의 관심과 보호인 것입니다.
따라서 시위의 현장은 불확실성이 강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런 위험한 곳에 안전을 담보로 아이를 데려갈 수 있느냐 라고 말한다면, 위험한 시위현장이라도, 부모가 아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사와 능력이 충분하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여기서부터는 개인의 가치관과 책임 문제이지, 타인이 정한 도덕의 잣대를 세상에 들이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젖먹이 간난아이의 의사역시 중요하지만 어차피 그 아이의 모든것은 성장하며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부모의 행동양식, 언변, 가치관, 사고방식이 바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부터 자신의 정체성이 형성되어 독자적인 가치관이 확립되기 전까지요.
아이를 대동한 시위자와 질서를 유지하는 공권력. 양측 모두 불상사를 막기위한 충분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를 대동하고 나온 시위자들이 폭력시위를 할리도 없거니와, 질서를 유지하는 공권력이 아이가 있어서 질서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자. 그럼 이제 답이 나오네요.
시위자와 공권력. 양측은 불확실한 시위현장에서 시위가 100% 안전한 쪽으로 이뤄지도록 노력하면 되는겁니다. 애초에 아이를 대동하느냐 대동하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시위가 폭력양상을 띄게되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위험합니다. 그때는 아이만의 인권이 아닌 모두의 인권이 위험한 상황이 오는거죠.
따라서 만에하나 평화시위가 예상치 못하게 폭력적인 양상을 띄어간다면 부모는 아이가 100% 안전한 방향으로 노력하면 되는 것이고, 공권력은 정당하게 그들을 보호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공권력의 존재 이유이니까요.
다수가 뭉쳐있는 시위현장에서 폭력적 양상을 띄게되면 진압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아이와 다른 무고한 시민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것이 공권력인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조차 분별있게 아이와 무고한 다른 시민의 안전을 지켜줘야 하는 것이 성숙한 시민의식인 것입니다.
또 그러라고 우리의 권한을 양도한 것 아닌가요?. 또한 시민들의 의식 또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성숙해져야겠지요.
결론적으로, 집회 및 시위의 현장에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과연 바람직 한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쟁점이 되었지만, 전 방향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과연 바람직 한 것인가? 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좀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시위문화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이를통해 우리에게 보장된 집회 및 결자의 자유를 어떻게 행사해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제가 사회적 합의에 도달한다면, 유모차 시위가 정당한가 그렇지 아니한가는 더이상 논란이 될 수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