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낱 도적떼로. 보기어려운 4만의 군세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도하 와 동시에
의주를 함락하고 다음날 정주를. 공략하고 일주일후 선주를 치고. 12월이 가기전. 서경을 함락시킨 1차 홍건적의 난
만만하게 볼 세력이 아니였습니다
중국 산서성일대 공략을 목표로 진격하던 중로군(자칭 대송국 북벌군 타칭 홍건적)이 원나라의 반격에 퇴로가 차단
당하자 용의주도하게. 요동지역 유민과 고려백성이 홍건적이 만들어내는 전란피해
압록강을 넘는것을 쫓아. 먼저
3천의 홍건적으로 간보기를 한후 얼마지나지 않아서 모거경의 4만군세가 침략한것입니다
원나라와 전쟁을 통한 숙련병을 상대로 한겨울 혹한속. 치열하게 싸워
최선을 다해. 서경탈환과 추격전 끝에 압록강밖으로 퇴패시킨 전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수도가 털린. 2차 홍건적 난 역시
관선생. 사유. 등. 이끄는 10만명에. 수군으로 변한 홍건적이 수십척의 배를 타고
지금의 황해남북도에 위치한 서해방면을 어지럽게. 하는등. 무서운 군세인건틀림 없습니다만 어려운 전쟁속에서
최영 이성계등 당시 고려무장과 고려군은 개경탈환에 성공하고 적수뇌부와 주력군을 괴멸시켰습니다
만약 공민왕이 개경에서 수성전을 실행하였다면
기껏. 기왕후 일파를 숙청하고 쌍성총관부를 공략하여 이룬성과등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갈 확률도 존재 했을듯 하군요
1.질문의 추가내용으로
압록강을 국경기준으로.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서경. 현재의 평양에서와는 달리
현재의 개성에 위치한. 고려수도 개경에서는 어느정도 대비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난민을 수습할 거점과 동시에 군사거점을 세우고 방위선구축 하였지만
홍건적의 기동전. 기습에. 방위선이 무너지고 개경이 점령 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10월 하순에 압록강을 건너
11월 20일쯤 개경을 점령하고
12월 말쯤 강원도 원주근방까지 진출할 정도로 그 군세의 기세는. 도적떼라기 보다는 흡사 정규군같은 일면도
지니고 잇엇기에 가능한 진군으로 보여지네요
2.3번 질문은 상당히 복합적인 원인이 문제라 생각되네요
뭐 결과적으론. 홍건적으로 인해 북방의 방위와 경제력은 큰 타격을 입었고
(홍건적의 고려인 학살은 상당한 규모로 벌어졌다는군요)ㄱ
원나라의 숨통은. 명나라가. 마지막을..장식한것으로..
기초 체력 기본 국력이 소진된 고려
고려말기부터. 조직적인 군세로 노략질을 일삼은 왜구의 침입
1350~1390. 40년간 400건. 1년간 40회
지방의 세금. 쌀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터는일이 잦아지고
이는 왕실의 운영자금의 타격과 곡물가격 폭등으로 이어지고
관리들의 부정부패 등 국가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시작점이 이유중 하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