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백제를 해상왕국, 해상강국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왜 백제가 해상왕국인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몇 이나 될까? 혹자는 백제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고구려가 길을 막아 조공을 바치지 못했다는 기록을 들어 백제는 해상왕국이 아니라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가 지나치는 단편적인 기록들을 세밀히 살펴보면 백제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한 해상강국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조 기사를 보면
"2년, 승려 겸익이 구도에 뜻을 두고 해로로 인도로 가서 5년 동안 체류하여 범어를 익히고 불경을 구해 인도 승려와 함께 들어왔다"
라고 되어 있다.
나침반이 없던 시절, 한반도에서 인도에 이르는 항로는 위험한 항로였다. 특히 고대에는 안전을 위해 대중국 교통에 있어 직선항로인 사단항로 대신 안전을 위한 연안항로를 이용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위의 성왕 기사는 백제 승이 인도까지 해로로 갔다고 쓴 것인데, 만약 백제와 인도 간 교류가 없었다면, 승려 겸익이 해로를 이용하여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갔을까? 위의 기록은 적어도 백제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알고 있었음과 백제가 인도를 알고 있었고, 인도와 교류가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는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백제가 부남(캄보디아)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 - 『일본서기』흠명 4년 조 -
"백제 사인(使人)들이(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적인 무역을 시도한)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 『일본서기』 황극 원년 2년 조 -
먼저 첫번째 기사를 분석해보자. 백제가 일본에게 부남의 재물과 노비를 주었다는 문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백제가 지금의 캄보디아인 부남과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부남의 재물과 노비를 일본에게 줄 수 있었을까?
두 번째 기사는 해상강국으로서 백제의 위용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백제가 곤륜(지금의 남베트남, 캄보디아, 타미, 미얀마, 남부 말레이 반도 등을 일괄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다는 기록은 백제가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가 왜국과 단독으로 교역하려는 것을 막은 것으로, 백제가 동남아시아 항로를 움켜쥐고 활발한 해상활동 벌였음을 반증하는 기록으로 보인다.
554년 백제가 일본에 보낸 물품 중 탑등(tapen,tapeten)이 있는데, 이것은 양모를 주재료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지방에서 산출되는 물품이다. 북인도지방의 물품을 백제가 일본에 주었다는 것은 백제가 동남아를 넘어 인도에 연결되는 항로로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일본 나라시에 있는 백제계 후지노키 고분의 부장품 가운데는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가 있는데, 이 마안구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지역과 연결되는 6세기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주는 물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백제가 남긴 최고의 유물, 금동대향로에는 코끼리와 악어가 조각되어 있다. 코끼리와 악어는 동남아시아 또는 인도에 서식하는 동물로, 한반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동물들이 백제의 유물에 조각되었다는 것은 백제와 동남아시아 간의 교류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활발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옛날 영국은 일찍이 해양의 중요성에 눈을 떴고, 그것은 훗날 팍스 브리타니아를 이룰 수 있었다. 백제 역시 해상활동에 전념하여 동남아 항로를 장악하였듯이, 반도국가인 우리가 뻗어나갈 곳은 바다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해양을 활용한 백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지 않을까 싶다.